로그인병원 복도는 점심 시간이 지나며 다시 분주해지고 있었다. 서나가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다. 처음엔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지만, 그녀를 오래 봐온 동료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한 간호사.”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결혼 축하해.”말은 가볍게 건넨 것 같았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아, 감사합니다.”짧게 대답했지만, 그 뒤로 몇 명이 더 다가왔다.“와, 언제 말하려고 했어요?”“진짜 티 하나도 안 냈다니까. 남자친구 있는 것도 몰랐어.”“요즘 자주 핸드폰으로 연락하던 사람이 남자친구였구나?!”조금은 소란스러운 스테이션에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한 간호사 진짜야? 결혼 때문에 나가는 거야?”“와… 축하해야 하는 거지 이거?”“근데 너무 아쉽다 진짜… 너 없으면 우리 어떡해.”“맞아요. 한 간호사 있으면 진짜 든든했는데.”“환자들도 엄청 찾을 텐데…”서나는 멋쩍게 웃었다. 축하와 아쉬움이 뒤섞인 말들이 연달아 쏟아졌고, 그녀는 그 사이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은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묘한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떠나는 기분. 하지만 퇴사를 되돌릴 수도 이 시간들을 멈출 수는 없었다.오후가 지나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서나는 퇴근 준비를 하며 개인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결국 간호 스테이션까지 밀려왔다.“누구야? 연예인이야?”“아니, 누굴 찾는 것 같은데…”그 순간,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 그 시선에 서나도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멈췄다.스테이션을 사이로 서현이 서 있었다.말끔한 수트 차림,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그리고 그 옆에는 능숙하게 움직이는 김실장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고급 베이커리 케이크 박스와 커피가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한서나 간호사 약혼자 주서현입니다.”김
주말의 공원은 느긋했다. 햇볕은 제법 따가웠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잔디 위를 걷고 있었다.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쫓아 뛰어다녔고, 부모들은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봤다. 어디선가 커피 향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고, 나무 그늘 아래에는 돗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서나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등을 곧게 세운 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시선은 사람들을 보며 쓸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눈앞으로 불쑥 무언가가 들어왔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안에는 얼음이 가득 들어간 아이스커피였다. “…!” 놀라서 고개를 뒤로 젖힌 서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도윤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커피 한 잔, 다른 손에는 이미 몇 모금 마신 같은 커피를 들고 있었다. 햇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가 있었다. “깜짝 놀랐지?” 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봤다. “…진짜 놀랐거든요?” “표정은 별로 안 놀랐는데.” “속으로 놀랐어요.” “그건 인정 못 하지.” 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건넸다. 서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받아들었다. 손에 닿는 차가운 온도가 현실감을 조금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 웃음소리,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겹쳐졌다. 햇빛은 여전히 강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산들바람에 온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을 바라봤다. 서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컵 안에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묘하게 크게 들렸다. 정적을 깬 건 서나였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왜 보자고 했어요?”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들린 컵을 내려다보며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걸 잠깐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아무렇
박이산은 한때 빛을 입고 사는 사람이었다.젊었을 때 그는 한국에서 모델로 활동했고 아주 유명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분명 업계 안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길게 뻗은 신체, 균형 잡힌 비율, 그리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받아내는 눈. 누군가는 말했었다. ‘조금만 장래가 유망한 모델’이라고.실제로도 그랬다. 기회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그 무렵, 일본 매거진에서 러브콜이 왔다. 단발성 촬영이었지만 조건은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해외 작업이라는 점이 그의 선택을 빠르게 만들었다. 이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낯선 언어, 낯선 거리, 낯선 공기.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늘 프레임 안의 자신뿐이었으니까.그리고 그곳에서, 미코를 만났다.사진작가였던 그녀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수가 많지 않았고, 대신 셔터를 누르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don’t move”짧은 한마디.찰칵.“いいな…”(좋네…)그녀의 시선은 정확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산은 그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단순히 촬영이라 생각해서 의식한건 아니였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그는 몇 번이나 돌아보게 됐다. 그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끌림이었다. 그런 끌림은 이산뿐만 아니라 미코에게도 왔는지 이산이 미코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시작했고 그 이후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연인이 되었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부부가 되어 있었다.미코가 찍은 사진 속의 이산은 더 빛났다. 사랑하는 이산을 담는 그녀의 렌즈 안에서 그는, 가장 잘 살아났고 아름다웠다. 그 결과 일본에서 그의 이름은 점점 더 알려지기 시작했다.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그때까지는.“…이산.”어느 날, 미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私ね。”(나 말이야)잠깐 숨을 고른 뒤,
서나와 서현이 있는 일본의 시골 마을과 확연히 다른 서울의 도심은 아주 늦은 시간까지도 그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도심의 중심에 한 아파트 안.주홍민은 소파에 기대 앉아 한 손엔 핸드폰, 다른 한손엔 위스키가 담긴 언더 락 잔을 들고 있었다.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 화면을 보고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는 주홍민.화면에는 서나의 메시지가 띄워져 있었다.[접촉했는데 완강합니다. 제가 안 나서도 설득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일도 가자고 하는데 이미 설득할 건덕지가 없어요. 의미없습니다.]짧은 메시지와 함께 온 이산과의 실랑이가 담긴 녹취 록이 함께 왔다.어제 서나가 서현에 지시에 따라 찍은 영상에서 음성만 따서 그에게 함께 보냈던 것이다.서현은 통화 전 영상을 몰래 하나 찍어 달라고 했고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서나는 그것을 따랐다. 서현의 영상촬영은 주홍민을 위한 건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유용하게 쓰였다.아니나 다를까 홍민을 설득하기 충분했다.홍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그래.”낮게 중얼거렸다.“그럴 줄 알았지.”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그리고 언더 락 잔에 담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도련님.”수화기 너머.조심스러운 목소리.홍민이 가볍게 말했다.“할아버지 쪽은?”“아직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다. 도련님에 관한 화도 누그러지고 계세요. 아무래도 도련님이 조용히 잘 근신하고 계신 것도, 회장님을 자주 찾아 뵈면서 설득하신 게 조금씩 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하청 쪽은요?”“정리 진행 중입니다만…”홍민이 말을 끊었다.“됐고.”짧게 말했다.“지금 중요한 건 그거 아니야.”잠깐 정적.그리고ㅡ“서현이 쪽이 많이 애먹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 프로젝트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으니 우리도 대비를 좀 해보자고.”“네?”느긋한 말 속에 비아냥이 그득 담겨있다.“메인 모델 섭외도 못해서 절절 긴다는데.”“…아, 그렇습니까?”“응.”“첫 스타트부터
종종걸음에 맞춰 여관에 낡은 나무 바닥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고 있다드르륵-말릴 새도 없이 서나는 노크도 잊은 채 서현의 방에 들어갔다.다행히 다른 일행들은 없었고, 서현 또한 온천을 마친 뒤라 머리 끝이 살짝 젖어 있는 채로 서류를 보고 서 있었다. 서나의 방문에 잠시 눈이 커진 서현은 다급해 보이는 서나의 표정에 물었다“…무슨 일 있습니까.”서나는 다급하게 서현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화면을 그대로 내밀었다.서현의 시선이 화면에 닿았고 내용을 본 서현은 표정이 확 굳어 정색하다 이내 올게 왔다라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왔군요.”담담한 말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 서나는 서현의 행동에 그녀 또한 담담히 받아들였다.서나는 그를 봤다.“…어떻게 할까요.”서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잠깐 생각했다.그리고—“…일단.”시선을 들었다.“그 사람부터 만나야 합니다.”“그리고”아주 미세하게 눈썹이 꿈틀거리며 표정을 찡그렸다.“이건 그 이후에 따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짧지만—의미 있는 말.서나는 그의 말에 동조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새벽부터 일찍 서나와 서현은 김을 동행하여 부두로 나갔다.어제 홍민의 연락을 받고 난 후 서울에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실장은 먼저 한국으로 떠났다.부두.바다는 여전히 잔잔했다 마치 고요한 시계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바람만 닿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잔잔한 바다도 바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오늘은—그가 돌아오는 날이었기에.이윽고 멀리서 작은 배 하나가 들어왔다. 수평선 너머로 작게 보이던 잔잔한 바다 때문인지 속력을 내며 부두로 달려오고 있었다 작은 점처럼 보이던 배는 어느새 사람을 육안으로 구분할 정도로 가까이 와있었다.“…저 사람입니다.”서나의 시선이 고정됐다.햇빛에 그을린 피부, 짙게 그을린 색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근육.불필요한 힘으로 만들어진 몸이 아닌 일로 만들어진 몸
아침.항구는 이미 깨어 있었다.짧은 엔진 소리.밧줄이 당겨지는 마찰음.물 위를 가르는 잔잔한 파동과 어제처럼 사람들의 분주한 말소리를 들으며서나는 부두 끝에 서 있었다.바람이 머리칼을 살짝 흔들었다.뒤에는 서현과 통역사 김 그리고 실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그 사람.”서나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볼 수 있나요?”김이 아무도 보지 않는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제가 눈뜨자마자 확인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뜻밖에 대답에 서현과 실장이 김을 쳐다보았다.“…왜죠?”“어제 새벽에 조업 때문에 좀 멀리 나갔다고 합니다.”김이 항구 쪽을 가리켰다.“작은 배지만 어업을 하는 배라—”“하루 정도는 돌고 내일 오전에나 온다고 하네요.”잠깐의 정적이 일어나고 김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안절부절 하며 서현과 서나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서현은 생각에 잠긴 듯 대답 없이 서 있었고 서나는 바다를 바라봤다.잔잔한 바다였지만 이따금씩 파도가 일어 서나가 서있는 부두 끝에 바다가 부숴지고 있었다. 서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부숴지는 바다를 잡는 시늉을 하였다. 역시 잡히지 않는 거리였다.“…어쩔 수 없네요 주팀장님 저희 내일까지 기다려도 괜찮으신 가요?”서나는 뒤를 돌며 살풋 웃으며 물어봤는데 그 모습이 산뜻하고 청량해 순간 세사람은 바다에 서있는 서나가 너무 잘 어울린다 생각이 들었다.서현이 짧게 답했다.“네, 하루 이틀 정도는 괜찮습니다.”계획이 틀어진 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생겼을 뿐.“그럼”김이 차분하지만 밝은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오늘은 마을 좀 보시죠.”“…관광이요?”서나가 웃듯 물었다.김이 어깨를 으쓱했다.“여기까지 오셨는데요.”마을 안.느린 시간.낡은 상점.작은 간판.문 앞에 놓인 의자.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노인과 그 옆을 지나가는 고양이, 양산을 쓰고 햇빛을 가리는 기모노 차림의 중년여성을 거쳐 마을의 작은 시장에 들어섰다.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