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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이고 습한 아스팔트를 왜인지 수평선처럼 누워 바라보고 있다
그때 그 위로 흐르는 나의 붉은 선혈이 마치 저 너머의 바다처럼 일렁이는 듯했다사고...
윙윙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소리치는 고함이 뒤통수를 지나 아스라이
사라질 때 나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그날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저녁이었다.
비는 조용히 내렸고, 공기는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나와 집 가는 길에 습관처럼 배 위에 손을 얹고 걸었다. 걷는 게 힘들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를 위해서 라면 내가 힘든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초음파 화면 속에서 희미하게 보여줬던 미소, 의사에게 보셨냐며 방방거리던 내 모습을 떠올리니
살풋 웃음이 나다가도 "다음엔 보호자랑 꼭 같이 와. 아이 웃는 거 같이 보시면 좋잖아~" 라는 도윤의 말이 떠올라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쓴 내를 애써 삼켜낸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둘러댔지만 나는 한 번도 홍민 씨와 같이 병원에 온 적이 없었다. 근무하는 병원에 소문이 나는 게 썩 기분이 좋진 않지만 올라오는 감정을 추스르고 횡단보도 섰다.그래,횡단보도에 섰고⋮신호는 초록불이었고⋮차박차박 비 오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고,무언가 빠르게 다가왔고⋮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으며,몸이 중심을 잃었다.눈을 떴을 때,
천장은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희었다.기계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고 있었는데
역시 사고를 당한 사람의 몸을 대변하듯 몸은 무겁고 둔했으며 하복부에 묵직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움직이려 하자 누군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나를 눕혔다.
나는 말을 하려 했지만 찰나에 대신 손이 먼저 움직였다.
배를 더듬었다.
붕대가 감겨 있었고, 온기는 없었다.
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누구의 잘못인지도, 왜 그런 일인지도 모른 채.
설명도 없이, 예고도 없이. 입을 달싹이던 도윤은 끝내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나의 눈물이 조용히 흘러 베개를 적셨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눈물이 쉴 틈 없이 나오는 상황에 숨 쉬는 것도겨우 버티고 있을 지경이었다.
머리에 숨이 꽉차 어지러울 만큼 눈물이 나고
나의 심장은 애석하게도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내 안에서 함께 뛰던 또 하나의 박동은
완전히 사라져있었다.차라리 내 심장이 멈췄으면 ..간절히 되뇌이며 주먹으로 가슴을 계속 내려쳤다
쿵쿵
울음 소리와 함께 울리는 주먹소리만 울리는 이 새벽은
지나치게 고요했으며,
그 고요가무엇보다 잔인했다. ---------------------------------새벽 내내 울다 지쳐 겨우 잠에 들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천장이 아니라 눈물이 고여 흐릿한 시야뿐이었다.
"서나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잠을 설친 듯 낮게 잠긴 음성. 김도윤. 같은 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그리고—나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수술방에서 누구보다 냉정한 표정을 짓는 그가, 항상 나를 보면 장난치기 바빠 서로 투닥거리던 우리가 지금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고 나는 침대에 누워 황망히 그만 쳐다 볼 뿐이었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한 얼굴 그러나 밤새 잠을 못 잔건지 푸석한 피부에 갈라진 입술, 붉게 충혈 된 눈.
누가 환자인지 가운으로만 구분 할 수 있을 정도의 행색이었다.
나는 그를 멀뚱히 바라봤다. 입부터 목구멍까지 쩍쩍 갈라져 겨우 숨만 간신히 쉬고 있는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평소와 달랐다. 병원 복도에서 장난스럽게 “한 간호사”라고 부르던 톤이 아니었다. “사고로 복부에 직접 충격이 있었어. 출혈이 심했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태아 심음은 안 잡혔다.” 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분명 어제만 해도 초음파 보며 서로 웃었는데...
'야, 벌써 자식 손주까지 생각하는 얼굴이야.' 그때 나는 어떻게 알았냐며 웃었고, 그는 괜히 더 머쓱해하면서 맥박 수치를 설명했었다. 지금은 아무 수치도 없다. “거짓말.” 갈라진 입에서 낮게 새어 나왔다.김도윤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거짓말을 못 한다. “미안해.” 그 한마디가 모든 걸 확정 지었다.뭐가 미안하다는 건지...감정이 뒤섞여 앞뒤를 구분할 수 없어 눈물이 터지지 않았다.
대신 숨이 가빠졌다.
“나… 신호 지켰어.” “알아.” “차 멀리 있었어.” “알아, 서나야.” 괴로운 듯 인상을 쓰며 대답하던 그는 침대 곁에 앉았다. 지금은 의사라기보다 친구의 얼굴이었다. “비 때문에 제동이 밀렸어. 운전자도 제정신이었고. 그냥… 사고래...”떨리는 그의 음성에서 나오는
그냥 사고. 그 단어가 이상하게 공허했다. 나는 배를 세게 움켜쥐었다. 통증이 올라왔지만 놓지 않았다. “나 때문 아니지.” 그가 즉각 대답했다. “절대 아니야.” 단호했다. 그의 성격을 아는 나는 그 어조가 진심이라는 걸 안다. “너 아무 잘못 없어.” 그는 수술방에서 수많은 산모를 봤다. 살리고, 잃고, 울고, 위로했다.그런 그가 지금은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아마도 그는, 수술대 위에서 내 배를 열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수술 등 아래에서 멈춰 있던 그 작은 생명을. “선생님” 의미심장한 어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 잘 갔어...?아프지 않게 잘... 보내줬어...?”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응...잘 보내줬어...내가...걱정마 너가 더 걱정이야...자궁에 손상은 있었지만, 회복 경과 봐야 해. 내가 지켜볼게.”내가 지켜볼게. 무엇보다 내 안위를 먼저 우선하는 그 대답이 퍽 위로 되는 말인데...나는 왜 잘 보내줬다라는 말이 손으로 심장을짓누르듯 날아와 박히는 걸까
누군가의 위로를 받기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병실과 내가 처한 이 상황에 몸서리가 쳐져 허탈할 뿐 있었다.
김도윤은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차라리 그 침묵이 오히려 고마웠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복도에서 신생아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짧고 힘찬 소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야.” 그가 낮게 불렀다.“울어도 돼.” 그한 마디에, 견디고 있던 것이 무너졌다.숨이 뒤틀렸다가 가슴이 수축했다 하지만 느낄 새는 없이 울음을 뱉어 낼 뿐이였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내 뱉는 이 소리는 울음이 아닌 포효에 가까웠다
“나… 걔한테 말했는데… 지켜준다고…” 문장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해괴한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누가 들어도 간신히 알아 들을 그말 끝에, 도윤이 떨어지는 내 눈물을 지나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네 잘못 아니야.”고개를 푹 숙인 그의 입에선
중얼거리 듯 그 말이 반복되었다.그러나 아무리 도윤이 말을 반복해도,
배 위에 올린 손에 온기가 남아 있어도 사라진 심장 박동은 돌아오지 않았다. 또, 조용했다.끔찍하게 조용했다.
내가 지르는 비명에 속에 묻힌 쓸쓸한 침묵이었다.세성그룹 본사.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통유리 빌딩은 반사된 태양광마저 서슬 퍼렇게 튕겨내고 있었다. 서나가 평생을 몸담았던, 비명과 신음 속에서도 기어코 사람 체온이 묻어나던 병원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소독약 냄새 대신 정제된 방향제 향이, 환자들의 눈물 대신 숫자가 적힌 서류 뭉치가 공기를 채운 곳. 자로 잰 듯 반듯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자로 잰 듯한 보폭으로 서나를 스쳐 지나갔다. 서나는 목에 걸린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사원증에 박힌 ‘인턴 한서나’라는 글자가 유독 낯설고 무거웠다. 사실 서나는 남들에게 뒤처지는 스펙이 아니었다. 전공은 아니였지만 국내 유수의 명문대를 졸업했고, 까다로운 서류전형, 서슬퍼런 면접까지 제 실력으로 당당히 통과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영리해 어딜 가든 탐낼 인재였지만, 대기업의 ‘핵심 패션 프로젝트’에 고작 계약직 인턴이 첫날부터 합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 배경에는 팀장인 서현의 입김이 있었다. 가까이에서 복수를 진행하고 서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그녀의 똑똑함을 발휘할 자리를 위해 서현이 전례 없는 권한을 행사했고,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약혼자에 빠져 권한 행세를 한 것이라며 소문은 이미 사내 게시판과 메신저를 통해 찌라시처럼 퍼진 상태였다. ‘낙하산 인턴’, ‘팀장의 특혜’. 출근도 하기 전에 서나에게 붙은 꼬리표들이었다. 역시 서현은 이번 생에서 서나가 설계한 복수를 완성할 수 있도록 묵묵히 돕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지만, 사정 모르는 사내 직원들에게 두 사람의 관계는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긴장되십니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서나의 굳은 얼굴을 보며, 옆에 선 김실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요.” “다들 잡아먹진 않으니 어깨 피십시오.” “그 말이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요, 김실장님.” 서나의 뼈 있는 대답에 김실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회의실 문이 열리는 순간, 서나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병원 복도는 점심 시간이 지나며 다시 분주해지고 있었다. 서나가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다. 처음엔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지만, 그녀를 오래 봐온 동료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한 간호사.”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결혼 축하해.”말은 가볍게 건넨 것 같았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아, 감사합니다.”짧게 대답했지만, 그 뒤로 몇 명이 더 다가왔다.“와, 언제 말하려고 했어요?”“진짜 티 하나도 안 냈다니까. 남자친구 있는 것도 몰랐어.”“요즘 자주 핸드폰으로 연락하던 사람이 남자친구였구나?!”조금은 소란스러운 스테이션에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한 간호사 진짜야? 결혼 때문에 나가는 거야?”“와… 축하해야 하는 거지 이거?”“근데 너무 아쉽다 진짜… 너 없으면 우리 어떡해.”“맞아요. 한 간호사 있으면 진짜 든든했는데.”“환자들도 엄청 찾을 텐데…”서나는 멋쩍게 웃었다. 축하와 아쉬움이 뒤섞인 말들이 연달아 쏟아졌고, 그녀는 그 사이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은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묘한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떠나는 기분. 하지만 퇴사를 되돌릴 수도 이 시간들을 멈출 수는 없었다.오후가 지나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서나는 퇴근 준비를 하며 개인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결국 간호 스테이션까지 밀려왔다.“누구야? 연예인이야?”“아니, 누굴 찾는 것 같은데…”그 순간, 모든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 그 시선에 서나도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멈췄다.스테이션을 사이로 서현이 서 있었다.말끔한 수트 차림,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그리고 그 옆에는 능숙하게 움직이는 김실장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고급 베이커리 케이크 박스와 커피가 들려 있었다.“안녕하세요. 한서나 간호사 약혼자 주서현입니다.”김
주말의 공원은 느긋했다. 햇볕은 제법 따가웠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잔디 위를 걷고 있었다.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쫓아 뛰어다녔고, 부모들은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봤다. 어디선가 커피 향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고, 나무 그늘 아래에는 돗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서나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등을 곧게 세운 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시선은 사람들을 보며 쓸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눈앞으로 불쑥 무언가가 들어왔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안에는 얼음이 가득 들어간 아이스커피였다. “…!” 놀라서 고개를 뒤로 젖힌 서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도윤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커피 한 잔, 다른 손에는 이미 몇 모금 마신 같은 커피를 들고 있었다. 햇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가 있었다. “깜짝 놀랐지?” 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봤다. “…진짜 놀랐거든요?” “표정은 별로 안 놀랐는데.” “속으로 놀랐어요.” “그건 인정 못 하지.” 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건넸다. 서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받아들었다. 손에 닿는 차가운 온도가 현실감을 조금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 웃음소리,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겹쳐졌다. 햇빛은 여전히 강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산들바람에 온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을 바라봤다. 서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컵 안에서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묘하게 크게 들렸다. 정적을 깬 건 서나였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왜 보자고 했어요?”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들린 컵을 내려다보며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걸 잠깐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아무렇
박이산은 한때 빛을 입고 사는 사람이었다.젊었을 때 그는 한국에서 모델로 활동했고 아주 유명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분명 업계 안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길게 뻗은 신체, 균형 잡힌 비율, 그리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받아내는 눈. 누군가는 말했었다. ‘조금만 장래가 유망한 모델’이라고.실제로도 그랬다. 기회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그 무렵, 일본 매거진에서 러브콜이 왔다. 단발성 촬영이었지만 조건은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해외 작업이라는 점이 그의 선택을 빠르게 만들었다. 이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낯선 언어, 낯선 거리, 낯선 공기.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늘 프레임 안의 자신뿐이었으니까.그리고 그곳에서, 미코를 만났다.사진작가였던 그녀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수가 많지 않았고, 대신 셔터를 누르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don’t move”짧은 한마디.찰칵.“いいな…”(좋네…)그녀의 시선은 정확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산은 그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단순히 촬영이라 생각해서 의식한건 아니였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그는 몇 번이나 돌아보게 됐다. 그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끌림이었다. 그런 끌림은 이산뿐만 아니라 미코에게도 왔는지 이산이 미코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시작했고 그 이후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연인이 되었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부부가 되어 있었다.미코가 찍은 사진 속의 이산은 더 빛났다. 사랑하는 이산을 담는 그녀의 렌즈 안에서 그는, 가장 잘 살아났고 아름다웠다. 그 결과 일본에서 그의 이름은 점점 더 알려지기 시작했다.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그때까지는.“…이산.”어느 날, 미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私ね。”(나 말이야)잠깐 숨을 고른 뒤,
서나와 서현이 있는 일본의 시골 마을과 확연히 다른 서울의 도심은 아주 늦은 시간까지도 그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도심의 중심에 한 아파트 안.주홍민은 소파에 기대 앉아 한 손엔 핸드폰, 다른 한손엔 위스키가 담긴 언더 락 잔을 들고 있었다.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 화면을 보고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는 주홍민.화면에는 서나의 메시지가 띄워져 있었다.[접촉했는데 완강합니다. 제가 안 나서도 설득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일도 가자고 하는데 이미 설득할 건덕지가 없어요. 의미없습니다.]짧은 메시지와 함께 온 이산과의 실랑이가 담긴 녹취 록이 함께 왔다.어제 서나가 서현에 지시에 따라 찍은 영상에서 음성만 따서 그에게 함께 보냈던 것이다.서현은 통화 전 영상을 몰래 하나 찍어 달라고 했고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서나는 그것을 따랐다. 서현의 영상촬영은 주홍민을 위한 건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유용하게 쓰였다.아니나 다를까 홍민을 설득하기 충분했다.홍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그래.”낮게 중얼거렸다.“그럴 줄 알았지.”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그리고 언더 락 잔에 담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도련님.”수화기 너머.조심스러운 목소리.홍민이 가볍게 말했다.“할아버지 쪽은?”“아직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다. 도련님에 관한 화도 누그러지고 계세요. 아무래도 도련님이 조용히 잘 근신하고 계신 것도, 회장님을 자주 찾아 뵈면서 설득하신 게 조금씩 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하청 쪽은요?”“정리 진행 중입니다만…”홍민이 말을 끊었다.“됐고.”짧게 말했다.“지금 중요한 건 그거 아니야.”잠깐 정적.그리고ㅡ“서현이 쪽이 많이 애먹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 프로젝트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으니 우리도 대비를 좀 해보자고.”“네?”느긋한 말 속에 비아냥이 그득 담겨있다.“메인 모델 섭외도 못해서 절절 긴다는데.”“…아, 그렇습니까?”“응.”“첫 스타트부터
종종걸음에 맞춰 여관에 낡은 나무 바닥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고 있다드르륵-말릴 새도 없이 서나는 노크도 잊은 채 서현의 방에 들어갔다.다행히 다른 일행들은 없었고, 서현 또한 온천을 마친 뒤라 머리 끝이 살짝 젖어 있는 채로 서류를 보고 서 있었다. 서나의 방문에 잠시 눈이 커진 서현은 다급해 보이는 서나의 표정에 물었다“…무슨 일 있습니까.”서나는 다급하게 서현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화면을 그대로 내밀었다.서현의 시선이 화면에 닿았고 내용을 본 서현은 표정이 확 굳어 정색하다 이내 올게 왔다라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왔군요.”담담한 말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 서나는 서현의 행동에 그녀 또한 담담히 받아들였다.서나는 그를 봤다.“…어떻게 할까요.”서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잠깐 생각했다.그리고—“…일단.”시선을 들었다.“그 사람부터 만나야 합니다.”“그리고”아주 미세하게 눈썹이 꿈틀거리며 표정을 찡그렸다.“이건 그 이후에 따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짧지만—의미 있는 말.서나는 그의 말에 동조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새벽부터 일찍 서나와 서현은 김을 동행하여 부두로 나갔다.어제 홍민의 연락을 받고 난 후 서울에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실장은 먼저 한국으로 떠났다.부두.바다는 여전히 잔잔했다 마치 고요한 시계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바람만 닿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잔잔한 바다도 바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오늘은—그가 돌아오는 날이었기에.이윽고 멀리서 작은 배 하나가 들어왔다. 수평선 너머로 작게 보이던 잔잔한 바다 때문인지 속력을 내며 부두로 달려오고 있었다 작은 점처럼 보이던 배는 어느새 사람을 육안으로 구분할 정도로 가까이 와있었다.“…저 사람입니다.”서나의 시선이 고정됐다.햇빛에 그을린 피부, 짙게 그을린 색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근육.불필요한 힘으로 만들어진 몸이 아닌 일로 만들어진 몸
들어간 병실은 고요했다.심전도 모니터가 일정한 간격으로 짧은 신호음을 흘려보내고 있었다.창밖으로 늦은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흰 이불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침대에 기대 앉아 있는 사람은주광렬 회장이었다.한때 재계 1위를 쥐락펴락하던 사내의 기세는 병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조금 누그러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나이와 병색이 깎아내리지 못한 권위.그 모습을 오랜만에 본 서나는 당장이라도 안고 울고싶었다따뜻하셨던 내회장님단단하게 뿌리내린 고목같던 회장님속으로 뱉어내는 말에 울컥하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숨이 막히던 감각이 아직도 폐 안에 남아 있었다.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파고들던 그 순간,심장이 터질 듯 수축하던 고통,그리고 완전한 정적.분명히, 끝이었다.—“한간호사 주회장님쪽 콜이야. 한간호사!”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서나는 눈을 떴다.천장이 보였다.물빛이 아니라, 익숙한 병원 천장.숨을 들이켰다.공기가 들어왔다.젖은 느낌이 없었다.몸은 마른 상태였고, 심장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여기…?”그녀는 벌떡 일어났다.서광병원 데스크였다. 벌벌 손이 떨려왔다.홍민의 손, 뺨을 때리던 감각,'네가
아침.항구는 이미 깨어 있었다.짧은 엔진 소리.밧줄이 당겨지는 마찰음.물 위를 가르는 잔잔한 파동과 어제처럼 사람들의 분주한 말소리를 들으며서나는 부두 끝에 서 있었다.바람이 머리칼을 살짝 흔들었다.뒤에는 서현과 통역사 김 그리고 실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그 사람.”서나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볼 수 있나요?”김이 아무도 보지 않는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제가 눈뜨자마자 확인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뜻밖에 대답에 서현과 실장이 김을 쳐다보았다.“…왜죠?
16화해연시 국제공항.이른 아침이여도 공항은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정장차림에 바쁘게 캐리어를 끌고 수속을 밟으려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친구들끼리 여행이라도 간다는 듯 웃으면서 저마다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 보였다.그런 사람들을 서나는 2층 창가에 앉아 사람들 한 번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vip라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