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일주일이 지났다.
세성그룹 CEO 아내 타이틀은 꽤나 지쳤다 그간 병원에는 여러사람들이 왔다갔고 그들을 상대하는 건 나 혼자 아니, 나를 생각해 쫓아내기도 하고 수습해주던 우리 병원 식구들 뿐이었다.일주일 만에 마주한 햇빛이 눈부셨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했고
그 눈부신 햇빛을 손으로 가려 그늘을 만드니, 그 그늘이 햇빛보다 지금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 생각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주홍민은 차 안에서 짧게 말했다.
“타.”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고가 났던 교차로를 지나면서 미세하게 떨리는 내몸과 질끈 감는 내 얼굴을 보고도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집 안은 그대로였다. 거실 한쪽에 쌓인 나의 아이에 흔적들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직도 남아있었다흘깃 시선을 두던 홍민은 심드렁한 말투로
“이따가 정리해. 원하면”
라고 가볍게 떨어졌다.
서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홍민은 서재로 들어갔다.
누구랑 통화를 하는 듯 문틈새로 말들이 새어 나왔다침실로 들어가려 지나가던 서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한마디가 스쳤다
“…애새끼만 죽었어 쯧..” 그녀는 본능처럼 그 자리에 멈췄고, 문틈바구니로 나오는 그의 말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원래는 같이 뒤졌어야 했는데...그 년이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어서 한꺼번에 처리할려고 했지 명줄도 긴지 피곤하게 됐어.”잠시 웃음.
“나도 이제 새 출발하고 제대로 회사 키워봐야지 할아버지도 요양병원으로 넣어버렸고 이제 쓸모 없는 년 언제까지 끼고 살아” 덜컹- “당신 지금...내.. 내가 제대로 들은게 맞아..?”홍민이 돌아봤다.
놀람은 짧았고, 곧 지워졌다.“뭐야? 미쳤어?”
“당신이야? 정말로? 다 당신이 한거야?”
그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끊고 내려놓았다.
“그래.”
너무도 담담했다.
“왜… 왜 그런 짓을 했어…?”
그의 입가가 비틀리면서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넌 진짜 생각이 없어.”
“그건 우리 아이였어!!!니가!!!니가!!! 어떻게!!!!!!”
뚝- 가슴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억눌렸던 울음과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앞이 흐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홍민에게 소리를 질렀다.아니, 정확히는 악을 썼다.
사랑한 사람에게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치고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의 향연에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않는 상황이너무 비현실적이라 꿈을 꾸고있는 것같았고,
다가오는 홍민의 멱살을 붙잡고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려치던 머리채를 붙잡던 어떻게든 이 감정을 추스르고싶었다. "왜 그랬는데!!!!! 도대체 왜!!!!!"홍민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악다구니를 쓰는 나를 쳐다보며 자신에게 내려치는 내 팔을 붙들었다“소리 지르지 마.”
“당신이 죽였잖아 내 아이를!!!! 나를!!!!!!!”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짧고 둔탁한 소리.
서나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뺨이 화끈하게 타올랐다.
귀 안에서 이명이 울렸다.“감히 누구한테 소리를 질러.”
비웃음 섞인 그의 말투나 행동은 이제 내가 알던 홍민이 아니였다.
“그 애 어차피 올라가려는 수단일 뿐이였어. 너도 어렴풋이 알고있지않았나?”
“뭐?” 그는 낮게 웃었다.“니가 아는 내 비밀, 이젠 거슬리는 애새끼, 한꺼번에 치워버리겠다고 내가
준비했는데 왜 니년은 살아서 사람 피곤하게 해” 홍민이 변한건 알고있었다. 세광그룹 주광렬 회장님, 그러니까 홍민의 할아버지는 내 담당 VIP환자셨고, 대 세광그룹 회장, 재벌 등의 타이틀로 사람들은 그를 보았지만 나에게는 불의의 사고로 모든 가족을 잃고 남은 가족이라곤 두 손자뿐인 쓸쓸한 노인이었다. 일찍이 조실부모했던 나는 그런 그에게 따뜻했고, 그도 그 따뜻함에 응해 나를 손녀처럼 대해주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나에게 '내 가족이 되었으면 한다'는 그의 뜻에 따라 만난 사람이 죽은 장남의 아들이였던첫째손자 홍민이었다.
홍민은 회사 사장 자리때문에 의도적으로 나에게 잘 해줬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정을 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따뜻한 배려와 애정을 무시하지 못하고 끝내 그에게 마음을 줘버렸다.그때부터 잘못된 걸까?
회장님과 홍민을 잃고 싶지않아 홍민에게 휘둘리던 내 감정과 행동들이 이렇게 파국으로 만들걸까? 적어도 회장님을 치매로 몰아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요양병원으로 보내버렸을 때그때 내가 회장님만이라도 지켰다면 그러면 달라졌을까?
“날 사랑하긴 했니...?”악을 쓰던 그녀는 갑자기 우두커니 멈춰 많을 생각 끝에 고개를 숙이고 대뜸 차분한 어투로 물었다
“참 이와중에...넌 진짜 주제 파악을 못 해. 널 내가 왜 사랑해 노인네 눈에 들려고 적당히 맞춰준거지 뭐 이렇게 알았으니 끝이네? 다른사람들 눈때문에 이미지 챙긴다고 연기하는것도”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비아냥과 살기가 서려 있었다.
서나는 비틀거리며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쥐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지만, 시선만큼은 그를 향했다.“쓰레기 새끼”
“쓰레기?”
그는 코웃음을 쳤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돌아가. 네가 몰랐을 뿐이야.”
“아, 따지고 보면 니 애 니가 죽인거지 멍청해서
그러니까 애도 못 지킨 주제에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 마. 그리고 니 병원에 김도윤 의사인가? 친한가보더라? 내말 무슨 뜻인지 알지?뭐라도 조금 받고 나가고 싶으면 처신 잘하고 입다물어”
내 머리를 툭툭치며 한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서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도저히 저 구역질 나는 인간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뛰쳐나온 도심의 밤 공기는 서늘했다.
눈물과 함께 뺨이 얼어붙듯 식어갔다.
손끝이 떨렸다.강다리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물 위에 도시의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잔잔한 수면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했다.'내가 널 왜 사랑해'
'애도 못 지킨 주제에.'
그의 말이 계속 귓가를 파고들었다.
심장이 비어져 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도 듣고싶지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유를 찾고 싶지도 어떠한 희망도 살아갈 용기 내고 싶지않았다.그냥 홀로 남아 찢기고 짓이겨져 너덜거리는 마음을 들고
침묵하고싶었다. 다리로 지나가는 차들을 한번,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았다 시커먼 하늘에 별은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 자신을 붙잡지 않는 모든 것에 왜 다행인 마음이 드는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덜컹- 아이의 심장 소리가 떠올랐다. 물결에 내 마음을 담가 조용해진 내 주변에 아이의 심장소리만 온전히 떠올리고 싶었다그리고—
물 위로 한 번 파문이 크게 번졌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고요해졌다
드디어 그녀가 원했던 침묵이 왔다.서나와 서현이 있는 일본의 시골 마을과 확연히 다른 서울의 도심은 아주 늦은 시간까지도 그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도심의 중심에 한 아파트 안.주홍민은 소파에 기대 앉아 한 손엔 핸드폰, 다른 한손엔 위스키가 담긴 언더 락 잔을 들고 있었다.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 화면을 보고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는 주홍민.화면에는 서나의 메시지가 띄워져 있었다.[접촉했는데 완강합니다. 제가 안 나서도 설득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일도 가자고 하는데 이미 설득할 건덕지가 없어요. 의미없습니다.]짧은 메시지와 함께 온 이산과의 실랑이가 담긴 녹취 록이 함께 왔다.어제 서나가 서현에 지시에 따라 찍은 영상에서 음성만 따서 그에게 함께 보냈던 것이다.서현은 통화 전 영상을 몰래 하나 찍어 달라고 했고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서나는 그것을 따랐다. 서현의 영상촬영은 주홍민을 위한 건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유용하게 쓰였다.아니나 다를까 홍민을 설득하기 충분했다.홍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그래.”낮게 중얼거렸다.“그럴 줄 알았지.”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그리고 언더 락 잔에 담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도련님.”수화기 너머.조심스러운 목소리.홍민이 가볍게 말했다.“할아버지 쪽은?”“아직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다. 도련님에 관한 화도 누그러지고 계세요. 아무래도 도련님이 조용히 잘 근신하고 계신 것도, 회장님을 자주 찾아 뵈면서 설득하신 게 조금씩 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하청 쪽은요?”“정리 진행 중입니다만…”홍민이 말을 끊었다.“됐고.”짧게 말했다.“지금 중요한 건 그거 아니야.”잠깐 정적.그리고ㅡ“서현이 쪽이 많이 애먹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 프로젝트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으니 우리도 대비를 좀 해보자고.”“네?”느긋한 말 속에 비아냥이 그득 담겨있다.“메인 모델 섭외도 못해서 절절 긴다는데.”“…아, 그렇습니까?”“응.”“첫 스타트부터
종종걸음에 맞춰 여관에 낡은 나무 바닥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고 있다드르륵-말릴 새도 없이 서나는 노크도 잊은 채 서현의 방에 들어갔다.다행히 다른 일행들은 없었고, 서현 또한 온천을 마친 뒤라 머리 끝이 살짝 젖어 있는 채로 서류를 보고 서 있었다. 서나의 방문에 잠시 눈이 커진 서현은 다급해 보이는 서나의 표정에 물었다“…무슨 일 있습니까.”서나는 다급하게 서현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화면을 그대로 내밀었다.서현의 시선이 화면에 닿았고 내용을 본 서현은 표정이 확 굳어 정색하다 이내 올게 왔다라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왔군요.”담담한 말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 서나는 서현의 행동에 그녀 또한 담담히 받아들였다.서나는 그를 봤다.“…어떻게 할까요.”서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잠깐 생각했다.그리고—“…일단.”시선을 들었다.“그 사람부터 만나야 합니다.”“그리고”아주 미세하게 눈썹이 꿈틀거리며 표정을 찡그렸다.“이건 그 이후에 따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짧지만—의미 있는 말.서나는 그의 말에 동조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새벽부터 일찍 서나와 서현은 김을 동행하여 부두로 나갔다.어제 홍민의 연락을 받고 난 후 서울에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실장은 먼저 한국으로 떠났다.부두.바다는 여전히 잔잔했다 마치 고요한 시계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바람만 닿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잔잔한 바다도 바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오늘은—그가 돌아오는 날이었기에.이윽고 멀리서 작은 배 하나가 들어왔다. 수평선 너머로 작게 보이던 잔잔한 바다 때문인지 속력을 내며 부두로 달려오고 있었다 작은 점처럼 보이던 배는 어느새 사람을 육안으로 구분할 정도로 가까이 와있었다.“…저 사람입니다.”서나의 시선이 고정됐다.햇빛에 그을린 피부, 짙게 그을린 색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근육.불필요한 힘으로 만들어진 몸이 아닌 일로 만들어진 몸
아침.항구는 이미 깨어 있었다.짧은 엔진 소리.밧줄이 당겨지는 마찰음.물 위를 가르는 잔잔한 파동과 어제처럼 사람들의 분주한 말소리를 들으며서나는 부두 끝에 서 있었다.바람이 머리칼을 살짝 흔들었다.뒤에는 서현과 통역사 김 그리고 실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그 사람.”서나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볼 수 있나요?”김이 아무도 보지 않는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제가 눈뜨자마자 확인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뜻밖에 대답에 서현과 실장이 김을 쳐다보았다.“…왜죠?”“어제 새벽에 조업 때문에 좀 멀리 나갔다고 합니다.”김이 항구 쪽을 가리켰다.“작은 배지만 어업을 하는 배라—”“하루 정도는 돌고 내일 오전에나 온다고 하네요.”잠깐의 정적이 일어나고 김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안절부절 하며 서현과 서나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서현은 생각에 잠긴 듯 대답 없이 서 있었고 서나는 바다를 바라봤다.잔잔한 바다였지만 이따금씩 파도가 일어 서나가 서있는 부두 끝에 바다가 부숴지고 있었다. 서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부숴지는 바다를 잡는 시늉을 하였다. 역시 잡히지 않는 거리였다.“…어쩔 수 없네요 주팀장님 저희 내일까지 기다려도 괜찮으신 가요?”서나는 뒤를 돌며 살풋 웃으며 물어봤는데 그 모습이 산뜻하고 청량해 순간 세사람은 바다에 서있는 서나가 너무 잘 어울린다 생각이 들었다.서현이 짧게 답했다.“네, 하루 이틀 정도는 괜찮습니다.”계획이 틀어진 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생겼을 뿐.“그럼”김이 차분하지만 밝은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오늘은 마을 좀 보시죠.”“…관광이요?”서나가 웃듯 물었다.김이 어깨를 으쓱했다.“여기까지 오셨는데요.”마을 안.느린 시간.낡은 상점.작은 간판.문 앞에 놓인 의자.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노인과 그 옆을 지나가는 고양이, 양산을 쓰고 햇빛을 가리는 기모노 차림의 중년여성을 거쳐 마을의 작은 시장에 들어섰다. 별
16화해연시 국제공항.이른 아침이여도 공항은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정장차림에 바쁘게 캐리어를 끌고 수속을 밟으려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친구들끼리 여행이라도 간다는 듯 웃으면서 저마다 사진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이 보였다.그런 사람들을 서나는 2층 창가에 앉아 사람들 한 번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vip라운지는 어색하다는 듯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서나는 괜스리 옷 매무새를 고치고 캐리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거의 도착했습니다’짧은 문자를 보고 있던 서나의 앞에 남자의 세련된 구두가 멈춰선다.이윽고 구두를 올려다본 서나는 서현과 눈이 마주쳤고, 서현과 그의 실장을 번갈아 보다 짧게 목례를 했다.“안녕하세요 딱 맞춰 오셨네요.”“네 서둘러왔습니다, 급하게 가느라 처리할 일들이 좀 있어서”“그러니까 저랑 실장님만 가도 된다니까 바쁘실텐데 굳이 왜…”서나는 실장과 눈이 마주치고 곁눈질로 둘 다 서현의 얼굴을 살폈지만 개의치 않다는 듯한 표정에 말 끝을 흐렸다.“이번 쇼의 메인 모델로 세울 예정입니다. 당연히 제가 실물로 보고 정리해야 빠르니까요.”그럴듯한 이유에 더 할말이 없어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만 홀짝였다.말은 거기서 끝났다.실장도 서나도 더 말하지 못했다.-------------------------------------비행기 안.처음타는 일등석에 서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 눈을 굴리며 이곳 저곳을 살폈다. 몇
홍민과의 사건 이후, 쉴 틈 없이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늦은 시간 본사에는 불이 꺼질 생각을 안하고 있다.“이거 라인 다시 잡아야 합니다.”“소재 바꾸면 실루엣 무너져요.”“팀장님 이 컨셉보드 좀 확인해주세요 그리고—”말이 끊기지 않았다.서류가 쌓이고,샘플이 바뀌고,결정은 뒤집혔다가—다시 세워졌다.주서현은 거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셔츠 소매를 걷은 채,펜을 쥐고,수정안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이건 버립니다.”“이 부분 리뉴얼 의상 컨셉에 약해요, 과거 디자인들 한 번 더 검수하고 진행하세요.”짧고 단정한 말.“다시.”팀원들은 그 말에 울상을 짓고 있지만 서류를 보고 있던 서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병원.서나는 전혀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한 간호사! 여기 좀—!”“네, 지금 갑니다!”호출음.발걸음.짧은 숨.쉬는 시간은 있었지만—쉬는 느낌은 아니었다.의자에 앉으면,바로 다시 일어나야 했다.정신 없는 와중에 그들은 간간히 문자정도 주고 받고 있었다.[오늘 늦어져서 못 만날 것 같습니다.][저도 굉장히 바쁘네요.][식사는 하셨습니까.][컵라면으로 때웠어요][그건 식사가 아닙니다.][그럼 사주세요][시간 나면.]짧고 건조한 대답이었지만 서나는 이 문자를 치는 서현의 얼굴과 그날 뛰쳐나올 때 보았던 서현의 미소가 떠오르니 괜시리 웃음이 났다.“간호사 선생님 좋은 일 있어요?”“아 아니야~ 수액 갈아줄게!”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환자 아이가 묻자, 아차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이.본사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적막감이 감도는 회의실, 서현의 팀원들은 너무 몰아붙인 탓에 다들 지친 행색과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젝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이다.“과거 라인 소유자—”“생각보다 찾기 어렵습니다.”“데이터도 오래돼서… 연락처 대부분 변경됐습니다
이른 오전 시간.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고급 아파트에 서나는 택시를 타고 들어간다.잠시 후 어느 집 호수 앞에서 멈춰 섰고, 벨을 울렸다.찰나의 시간 후 남자가 문을 열어준다.“…오셨습니까.”늘 그랬듯 같은 표정과 같은 톤이었지만 사무적인 슈트의 모습이 아닌 베이지색 얇은 니트와 깔끔하지만 편해 보이는 추리닝, 방금 씻어 내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평소 모습도 그렇지만 보통의 여자들이 봤으면 숨을 삼키고 넋을 놓고 볼 모습이었다.서나는 잠깐 그를 바라봤지만 주홍민을 만나고 온 서나는 지금 서현의 미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들어가도 돼요?”짧게 물었다.“네.”----------------------------------------------거실.조용한 공간.조명은 은은했고,딱 봐도 고급스러운 소파와 테이블, tv는 없고 독특하게 신문 보관하는 보관함과 그 위에는 턴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 작은 책꽂이가 다였다.고급스럽고 단정하지만 단출한 거실 분위기가 조명과 다르게 왜 인지 썰렁해 보였다.“집으로 초대해 주실 줄은 몰랐네요. 이렇게 회장님과 따로 사시는 지도 몰랐고요.”“실제로 할아버지 댁에서 사는 건 맞습니다. 여긴 제 개인 쉬거나 업무보는 공간이고 제 일 도움주시는 실장님 외에는 다 모르는 공간입니다. 급히 연락 와 긴밀하게 말할 내용이 있다해서 다른 공간 보다는 여기가 나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실장님 다음으로 서나씨가 처음이네요.”서있던 서나에게 손짓으로 소파에 앉으라고 제스처를 취한 서현은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서나에게 이야기했다.“차와 물을 좀 가져오겠습니다.”“네 감사합니다.”서현은 따뜻한 물과 차, 다기를 내왔다.그때 서나는 소파에 앉아 입을 닫고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만났어요 주홍민.”차를 우리던 서현의 손이 멈추고 시선이 바로 향했다.짧은 침묵.“…그래서요.”서나는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오늘 있었던 대화를 하나씩 꺼냈다.홍민의 태도와 생각보다 날카로웠던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