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엘리베이터 앞, 디자이너들이 떠들고 있었다.
“14층 사무실 수리하는데 가구도 다 바꾸더라고.”
김 주임의 말에 함께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게, 이사들 사무실은 15층인데.”
소곤소곤 떠들며 모여 있던 직원들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 여름에도 슈트를 입었고, 신발은 편해 보이는 로퍼를 신었다. 더워 보이지 않게 입게 밝은 회색의 정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자신있는 걸음걸이가 짐짓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다니는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발레 턴을 칭찬하고 주문을 받아주던 남자였다.
“아, 신다니엘씨. 지금 회사에 컴플레인하려는데 여기서 뵙네요. 오늘은 복장도 다르네요.”
다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 큰 눈인데 동그랗게 뜨면 겁먹은 듯 보이는 것을 다니는 몰랐다.
“누가 잡아먹습니까?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키도 크고 옷도 잘 입는 멋쟁이 남자에게 김 주임과 직원들이 무슨 일인가 시선을 보냈다.
“김 주임님, 노 대리님 먼저 가세요.”
“그래 이상한 사람이면 소리 질러. 우리 직원들 많아.”
입을 가리고 김 주임이 소곤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을 굴리며 시선은 남자에게 고정했다.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한눈에도 괜찮아 보였다.
다니는 디자인 부서에서는 나이가 제일 어리긴 했다.
다들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것이 재밌고 좋았다. 수없이 플러팅을 받아 봤고, 아이까지 있는 아줌마한테 걱정을 해주다니.
“고객님, 제가 지금은 부서를 옮겼습니다. 직접 응대는 못 하지만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남자는 밝은 갈색 긴 머리를 풀고 진주 핀을 꼽은 다니가 소녀같아 보였다. 화사하게 웃는 다니가 싱그럽고 예뻐보였다.
누가 잡아먹냐고 농담을 했는데, 오히려 자신이 말간 눈빛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다니엘씨가 준 음료를 마시고 설사를 계속했어요. 지금도 안 좋구요.”
“아, 그날 얼음물 석 잔을 다 드실 때부터 걱정되긴 했어요. 게다가 콜라까지.”
남자는 얼굴을 장난기 있게 약간 찡그렸다.
'당황 않네.'
“기억하시네요.”
“주문을 대신 받아 주셔서 기억하고 있어요. 옆에 약국 같이 가실래요. 짜 먹는 약 잘 듣는 거 있어요. 우리 아들 상비약이거든요.”
남편이 없고 아들이 있다는 것은 데스크에 물어 이미 알고 있었다.
11시 미팅 전 데스크 박 주임에게 전달을 부탁한다고 명함을 맡겼다.
미팅이 끝난 후 다시 한번 부탁하기 위해 박 주임에게 걸어갔다.
충격적이게도 데스크의 쓰레기통에 명함이 걸려있었다.
남자는 겨우 참고 내려왔지만 다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그러니 망하지,’
둘은 나란히 약국에 들어갔다. 다니가 약을 계산할 때까지 남자는 뒤에 서 있었다.
다니는 약 입구를 찢어 내밀었다. 어서 드세요.
남자는 주먹을 쥐듯 짜서 입으로 넣었다.
“아,손님, 그러면 반도 못 드시잖아요.”
다니는 아래부터 짜서 입 쪽으로 올려준 뒤 손을 뗐다.
“다시 잘 짜서 드세요.”
입으로 약을 문 채 다시 짜서 입에 물고 있던 남자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이거 하나 주기 어렵네요.”
명함을 받고 다니도 약 봉투를 내밀었다.
"약 다섯 개예요. 필요하시면 드세요."
“저 갈게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고마워요. 저 기억하죠. 같은 회사 다닐거라고 .”
“CK 홀딩스 최강현 전무예요.”
“네, 전 인턴이라 빨리 갑니다.”
다니가 하던 피루엣을 생각하면서 최강현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CK 홀딩스? 현성은 아닌가 보네.’
다니가 탕비실로 커피를 따르러 들어가자 임주임이 불렀다.
“손님 컴플레인 받았다며. 별일 없지?”
“네.”
“다들 잘 생겼다길래.”
“네에? 저 걱정하신 거 아니었나요?”
이런 아이 취급이 아니었다. 그냥 자기들 관심이었다.
“CK 홀딩스 분인데 같이 일할 거라던데요. 현성 아닌가 봐요.”
“현성이네.”
“네?”
“CK 홀딩스가 현성 자회사잖아.”
커피를 따라 자리로 돌아왔다. 현성에서 현민호만 보내 준다면 민호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커피를 쥔 손이 작게 떨리며 명함을 검색했다.
[CK홀딩스 최강현]
전무
일리노이 주립대.
나이 38세.
‘혹시 민호의 외사촌 형인가. 민호를 알까.’
다니는 명함을 서랍에 넣었다. 혹시 민호와 연결이 될 것인지 실 낱같은 기대가 심장을 조였다.
‘닮은 얼굴은 아니었어.’
…
“일어나.”
동하는 엄마의 얼굴을 살짝 때렸다. 엄마가 반응이 없자 한 번 더 힘을 주어 때렸다.
“일어나라고.”
“아가야, 좀 자자.”
버텨봐야 소용없다. 다니는 눈을 비비며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6시, 힘 조절 안 될 때에 비하면 지금은 엄마를 많이 봐주는 것이었다.
다니는 동하를 먼저 안았다. 귀여운 뺨에 입을 대고 흔들었다.
‘음마, 사랑해 내 새끼.”
당연히 받을 사랑이라는 듯 의기양양해진 동하는 삐긋이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 아들 아니랄까 봐 입꼬리를 휘며 생기는 보조개가 누구 판박이였다.
다니는 아들을 보며 살짝 소리 내어 웃었다.
집게 핀으로 머리를 올리고 늘어진 추리닝 차림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얼핏 거울을 보았다.
‘이런 엄마라도 예쁘다고 해주니 그것도 아빠 닮았네.’ 세수도 않고 눈을 반쯤 뜨고 소고기 주먹밥을 뭉쳤다.
“자, 밥 친구 가자. 오늘은 사자 친구인가요? 친구 조금, 동하는?”
“마아니.”
“친구 많이. 동하는?”
“쪼끔”
동하가 까르르 웃었다. 엄마도 웃었다. 동하가 귀여워서.
‘동하야, 아빠 만날 수 있을까?’
‘아빠는 우리 동하를 얼마나 예뻐할까?’
“요즘은 동안이 여자들 목표라더니. 하하.”이동민이 한마디를 하며 신다니를 보면서 웃었다. ‘그동안 치워왔던 치한이 다시 등장한 건가.’‘이동민, 너 두고 본다.’다시 무표정하게 굳어버린 인상으로 현에단 본부장은 이동민을 쳐다보았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이동민은 자리에 앉았다. ‘본부장, 너도 신다니한테 관심있구나. 가리는 거 없는 새끼.’현 본부장은 다니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었다. 그녀가 용기 내도록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직접 옷을 다리며 그녀가 봐 주길 바랐다.‘네가 알던 네 남자를 가지라고.’다니는 자주 가슴이나 배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었다. 이미 마무리로 들어간 시즌 디자인들이었다. 방향을 틀기에는 늦은 시기였다. 회의는 현 본부장이 직원들 업무를 보고받는 수준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디테일한 부분을 많이 확인했다. 그는 정확한 답이 나올 때까지 질문했다. 상사를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보았던 직원들은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여러 디자인을 하나씩 살피며 패턴사의 의견까지 확인하던 현에단은 디자인 중 하나를 골랐다. “패턴사와 상의해서 디자인 라펠 폭을 줄이고 허리선 변형을 주어 보면 어떨까요? 이 디자인을 기본으로 두 종류의 젊은 감각의 슈트를 만들어 주면 될 것 같아요. 정장이지만, 격식 있는 장소에서도 가벼운 모임에서도 입을 수 있게 좀 바꿔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네, 할 수 있습니다.”김 주임이 소매와 색상의 전반적인 변화를 이야기하며 현에단에게 설명했다.“좋습니다.”상사로서의 현에단 본부장은 현민호와 다른 사람 같았다. 일단 무표정하게 업무에 대해 듣고 정확하게 질문했다.‘늘 운동해서일까.‘ 그는 상대가 몇 살이든 기 죽지 않았다.‘음, 그래. 넌 지시하는 쪽이 맞아. 나한테 그렇게 져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구나.’다니는 열심히 일하는 민호를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셔츠 주문 건으로 총괄기획부로 와 주세요]회의 중이지만 다니는 문자를 이태하에게 보여주고 조용히 총괄기획부로 갔다.현에
다니는 단골인 세라 헤어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장님.”다니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익숙하게 빈 의자를 찾아 앉으며 다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커트해 주세요. 짧게.”“어깨 닿게?”“아뇨 커트해 주세요. 진짜로.”“말해봐. 왜 울어.”다니에게 휴지를 뽑아 주며 초로의 원장은 걱정스럽게 물었다.“제가 이건 친구들한테도 창피해서 말 못 해요.”휴지를 받아 든 다니가 고개를 숙였다.“그런 건 나한테 해야지. 미용실 삼십 년 상담력이 그냥 쌓인 게 아니지. 근데 커트 말고 짧은 단발하지.그 길이도 나중에 많이 아쉬울 수도 있어.”“저 머리 금방 자라요. 6년을 수절해서 야한 생각도 안 하는데…엉엉.”‘꺽꺽’옆자리 손님도 남자 미용사도 이야기를 들으러 숨을 죽였다. “우리가 들어줄게. 자 말해 봐.”세 사람의 시선이 눈물을 닦는 다니에게 쏠렸다.“남자 친구가 군대 갈 때 임신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23살이었어요.사정상 2년은 연락도 끊고 다시 만나기로 했고 전 이사도 안 했고 현관 비밀번호도 안 바꾸고…”꺼이꺼이 우는 모습에 다들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아 근데 뭐.”다음을 궁금해하며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아이는 다섯 살이고 혼자 키우느라… 흐으흑”“그런데 아이 아빠가 나타났어요.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고 내가 있는 곳에 일하러 왔어요. 수고했다 사랑했다 그럴 줄 알았는데 회사일 힘들면 말하라고…”“뭐 그런 나쁜 놈이 다 있어..”“아가씨는 아이 아빠니까 미련이 남는 거고, 그 남자는 아이가 중한지 뭔지 모르니까 관심없는 거고. 근데 아가씨처럼 예쁜데 마다해?”“혹시 재벌 뭐 이런거야?”원장의 말에 다니는 깜짝 놀랐다.“아뇨, 그냥 좀 부자예요.”“아직 총각인 거지?”“네.”“혹시 애인있으면 잘 벼르고 있다가 결혼 할 때 즈음 터트려.”“그때 친자소송하고 양육비 받고.”“군대가서 헤어지는 거 많아. 양육비 받을 수 있어 못 받은 거 까지 .”“그럼 한 분씩 다시 말
다니는 마른 침을 삼켰다.변함없이 민호는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문 앞에 서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심호흡했다.현에단 본부장 사무실 앞에서 다니가 떨며 서 있었다. 지나가는 임 주임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다가왔다.“떨리지? 나도 그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떨려. 하하. 긴장하지 마. 그래봐야 연하지. 안 그래?”“네, 그 건 그런데 동갑이에요.”다니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더 나이 들어 보이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쾅쾅’임 주임이 장난으로 사무실 문을 세게 두드렸다.긴장했던 다니는 당황해 임 주임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들어와요.”그의 그리운 저음의 목소리가 문 저편에서 들려왔다.다니가 들어서자, 문 가까이 서 있는 민호가 보였다.그는 사무실 중앙에 보이는 흰 테이블 앞에 그녀를 세워 두었다.그러고는 손에 힘을 주어 문을 조심스레 소리 나지 않게 잠갔다.창의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었다.다니는 침을 삼키며 자신이 알던 민호라면, 사람들이 있어도 하고 싶은 것은 할 것 같아 뒷수습을 고민하고 있었다.‘어떻게 진정시키지…’현민호가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손이 닿자 자기 품으로 잡아당겨 부드럽게 안았다.그는 다니의 어깨에 고개를 숙여 기대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기 시작했다.“잠시만… 움직이지 마.”다니는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만졌다.민호가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다니는 그의 반응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이제 그가 돌아왔다고 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호는 여전히 어깨에 기댄 채 다니를 놓아 주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둘의 숨소리만 작은 공간에 퍼졌다.다니는 어느새 기쁜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다. 그의 거친 숨과 몸에서 나는 좋은 냄새가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민호는 천천히 다니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팔길이만큼 밀어냈다. 그러고는 블라인드를 걷고 다시 심호흡했다. 다니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엷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6년은 긴 세월이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테이블에는 갈비찜, 문어숙회 그리고 여러 종류의 나물들이 골고루 차려져 있었다.정성스러운 반찬들을 무시하고 현민호는 밥에 찬물을 부었다. 입속에 모래알같이 굴러다니는 밥알을 넘기려 한 것도 있었고, 유독 최민주가 싫어하는 행동이기도 했다.늘 쳐져서는 밥 몇 술 뜨지 않던 현민호가 일부러 자기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저렇게라도 하는 것은 기뻐할 일이기도 한데, 저 녀석이 갑자기 저러는 이유를 생각했다. 짙은색으로 코팅이 된 안경를 쓰고 있는 최민주는 아들의 시선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들놈 하는 짓은 너무 뻔했다.‘대체 왜 또 심통이 난 건지.’현민호가 화를 내는 것은 하나뿐이다.“너 걔 찾지 마라.”“무슨 말이야. 걔가 누군데.”민호는 능청스럽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엄마의 추리력에 흠칫 놀랐다. ‘다니를 들키면 안 돼.’유부녀 다니라도 보기라도 하려면, 어머니에게서 다니를 감춰야 한다.“내가 일흔다섯이다. 주변에 손주 없는 사람 나밖에 없어 골프 가서도 할 말도 없고.”“강현아. 이제 재혼해라.”엄마의 먼 친척의 아들이라는 최강현은 입양을 고려해 데려온 아이였다. 천덕꾸러기로 지내던 가난한 집 혼외자를 외할머니의 권유로 데려왔다. 그러나 생모가 입양에 동의를 하지 않았다. 입양이 미루어지다 기적같이 민호가 태어났다.차별을 안 하겠다며 유학을 보냈고, 엄마라 부르던 고모라 부르던 선택을 하라고 했는데 유학 후 강현은 고모라 부르기 시작했다.현성이 성장하고 외가도 회사 일에 관여하며 강현은 CK 홀딩스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직급은 전무지만 실제 오너인 그가 회사를 비우고 대영으로 왔다.민호는 형이 대영의 인수에 나서고, 자신의 후계수업을 진행하기로 한 것으로 무엇을 받았을지 궁금했다.“고모부님, 고모가 이번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하시면 재혼하겠습니다.”“내가 뭐?”최민주가 인상을 쓰며 최강현을 보았다. ‘아들놈들은 키워 봐야 소용이 없어.’“고모가 결혼하래서 했는데 이혼했어요. 고모가 소개하는 여자하고 다시는 결
운전석에 앉은 민호는 다니를 보지 않았다.운전대에 팔을 접어 올린 채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다 입을 뗐다.“너 나한테 왜 이러냐?"다니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차에서 내리려 문을 열려고 했다. 차 문은 잠겨 있었다.“열어줘.”민호는 말없이 거칠게 안전벨트를 당겨서 채워 주었다.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지 정확히 몰랐다.“문 열 거 아니면 집에만 데려다줘.”마음 가라앉히며 운전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자신의 화가 어디서 올라오는지 답답해지기만 했다.“아까 그 인간하고 무슨 일이야? 둘이 사겨?”“둘 아니고 여섯 명이 같이 있었어. 모임에 잘 안 나오던 선배라는데 오늘 처음 봤어. 귀찮게 해서 피한 거잖아…아, 넌 알 거 없어.”“유정우하고 사귀냐?”“알 거 없다니까.”“말해. 아까 그 여자는 아무 사이 아니야.”“사귀었으면 하고 묻는 거지? 네 마음 편하게. 편하게 생각해.”“대답해.”“...”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졌다.민호는 운전했고 다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얼굴을 돌려 창밖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니를 보니 마음이 괴로웠다.어두운 지하 주차장에서 민호의 차가 멈춰 섰다. 다니는 한마디 말도 없이 높은 시트에서 조심히 내렸다. 다니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걸어갔다.짙은 눈썹을 구긴 채 민호는 차에서 내려서서 다니에게 지하 주차장이 울리도록 소리 질렀다.“야, 신다니. 너 어떻게 하고 싶어? 불구덩이라도 같이 갈까? 너 우리 엄마, 너희 새엄마 몰라?”“...”“나 잡은 건 너야.”다니가 뒤돌아 서서 민호를 보았다.‘타악.’차 문을 부서져라 닫은 민호는 성큼성큼 걸어서 다니에게로 갔다.달려들듯 다니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몸을 숙였다.민호는 거칠게 다니의 입술을 물었다. 숨을 쉬지 못해 다니가 밀어낼 때까지 입속의 모든 것을 삼키며 혀를 물고 볼을 빨아 당겼다. 목울대가 움직이고 그의 뺨에 보조개가 선명해졌다. 오아시스에서 물을 마시듯 그의
긴장을 한 다니는 테이블에 앉아 손발을 떨고 있었다. 붉은 립스틱을 살짝 바른 얼굴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무대에서 서는 것은 가끔 해왔기 때문에 떨지 않았었다. 어차피 같은 노래를 불렀고, 같은 의상을 입었다.준비할 것도 뭐도 없는 무대에 긴장하는 것은 민호를 만나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무대를 살펴보니 조명도 있고, 마이크도 괜찮은 제품이었다.다니의 눈에 테이블 위의 맥주가 보였다. 긴장한 다니가 연거푸 맥주를 마셨다.“괜찮아. 잘할 거야. 같이 가 줄까?”“네. 무대 아래까지 같이 가주시겠어요.”김 주임과 함께 걸어가며 다니는 긴장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다니의 차례가 가까이 왔다. 긴 은색 가디건을 김 주임에게 맡기고, 다니는 용기를 내어 무대로 올라섰다.옥색 블라우스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하얀 반바지를 입은 다니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풍만한 몸매와 하얗고 긴 다리가 돋보이는 옷이었다.외모도 눈에 띄었지만, 노래하는 실력은 더 놀랄 만했다. SES의 ‘너를 사랑해’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몇 번을 반복해 온 무대였다. 오늘도 역시 반응이 오고 있었다.테이블 마다 입을 딱 벌린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다.“두 번째 바로 가시죠.” 사회자가 말했다.임 주임과 주변 직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한 곡 더!” “한 곡 더!”“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를 부를게요.”“배구도 안 나오고 준비했으니… 잘 하긴 하네.”“신다니 가수였나?”“같은 대학 나온 직원이 학교에서 여신이었대. 자기도 본 적은 없는데 CC인 남친이 잘나서 남자들이 접근을 못 했다잖아.”다니의 노래가 끝나자, 직원들이 이름을 연호했다.“다니엘!”“다니엘!”다니엘이 노래를 두 곡을 부르고 내려왔다. 긴 가디건으로 몸을 감싸며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노래가 끝나고 조금 취했던 술도 완전히 깨자 창피함이 밀려왔다. …수진이가 아니었다면, 다니는 자신이 왜 외톨이가 되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수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