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14층의 마당발 총괄기획부 임 주임은 들고 있던 물병을 놓치고 말았다.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어제 잠시 보았던 현에단 본부장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와 잠깐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잠깐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높은 콧대와 잘생긴 턱 그리고 굵고 남자다운 목선을 보고 순간 숨을 삼켰다.
현역 모델처럼 보이는 저 남자가 본부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가 앞에서 물병을 떨어뜨린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나갔다.
‘현에단 본부장님이네. 보통 괜찮냐고 할 텐데.’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와이셔츠 양쪽을 허리에 맞게 접어 넣은 깔끔한 옷매무새와 붉은 갈색의 슬랙스를 멋있게 소화하고 있었다.
길고 건강해 보이는 다리를 보고 임 주임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와, 미쳤다.”
임 주임은 들리지 않게 입만 달싹였다.
임 주임답게 물을 들고 미소를 장착했다.
‘나보다 어린데 뭐. 쫄 것까지야.’
임 주임이 현에단 뒤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그를 따라가며 말을 걸어 볼 심산이었다.
복도의 직원들도 얼굴을 돌려 누구인지 살피고 있었다.
“신임 본부장님이시지요?”
“아. 네. 아직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고 사무실 좀 보러 왔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총괄 기획부. 임은영 주임입니다.”
“네, 전 현에단입니다.”
그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며 울렸다.
빈 사무실 문을 열고 임 주임을 보내려는 인사를 하려는지, 현에단은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한 그는 미소는 친절하게 지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짙은 눈썹 아래 검은 눈빛이 깊었지만 차가웠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그리고 오른쪽 눈썹과 이마 사이에 손가락 두마디 길이의 흉터가 보였다.
‘흉터마저도 일부러 그린 것 같네.’
오랜만에 보는 깊고 촉촉한 눈매가 연상인 임 주임의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임 주임은 마른침을 삼키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할 준비를 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돌아가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쥐고 서 있는 현에단의 눈에 익숙한 여자가 긴 복도 끝에서 보였다.
그 순간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나온 여자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임 주임님.”
“네.”
“지금 사무실로 들어간 머리 긴 저 사원 이름이 뭡니까?”
임 주임은 뒤로 돌아보았다.
이미 여자는 뒤쪽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갔으나, 창문에 얼핏 비치며 서서 대화하는 사람이 보였다.
“아, 패턴실 다녀오나 보네요. 신다니씨이고 디자이너예요.”
임 주임이 다시 얼굴을 살피려 고개를 돌렸을 때 현에단은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로 들어갔다.
….
다니는 태라디자이너 사무실에서도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기본 형태와 아이디어를 잡으면 강태라의 지시대로 수정을 했다.
강태라의 정신과 심미안이 기준이었다. 하이패션의 감각을 익히기에 더 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그것이 경력직 인턴으로 들어 올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강태라의 아들 강 전무만 아니었다면 오래 다닐 수도 있었는데, 대영어패럴에 다니게 되다니 오히려 잘 됐다.
다만 아주 조금 아쉬운 것은 대영의 업무는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원단에 대한 관리가 컸다.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관련이 없는 것이 어디 있겠나.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겠지.’
다니는 겨울 시즌 유행색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다. 패션 경향을 분석하기 위해 주요 패션쇼는 거의 다 보았다.
패션쇼와 트렌드 분석을 어느 정도 끝내고 유행하는 색, 원단 그리고 문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해외의 색상과 실제 판매되는 국내의 트렌드는 차이가 있다.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는 것은 재능과 감각이 모두 필요했다.
이태하 팀장이 다니를 불렀다.
“분석은 다 끝났나요?”
“네, 아직 보고서는 조금 더 정리를 해야 합니다.”
“팀장님. 제가 보고서에 올린 색들과 원단들을 비교해 보고 싶은데요. 샘플 북도 봐야 하고요.”
“인수 안 받았어요?”
“전임자가 없어요.”
“아, 따라와요.”
이 태하는 은테 안경을 쓰고 날카로워 보였지만 직원들은 그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다니는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는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말을 하면 차가운 외모와 달리 친절하고 상대에게 말을 편하게 해 주었다.
서쪽 디자인부 사무실에서 나와 동쪽 총괄 기획부 옆의 공간까지 이 태하 팀장은 앞서서 걸었다.
다니는 그 뒤를 총총걸음으로 따라갔다.
총괄 기획부 옆의 빈 사무실은 새단장을 마친 상태였다. 그 옆의 창고였다.
“누가 새로 부임할 것 같아서. 기존 이사 세명 사임했어요.”
“팀장님, 제 계약은 어떻게 돼요?”
“내 생각인데 사실 올해 디자이너는 빈자리에 경력직만 하나 뽑은 거예요. 안 뽑으려다 꼭 필요한 인력이라 뽑은거니 미리 걱정하지 말아요.”
“네.”
“다니 씨. 여기예요.”
자재 창고는 동쪽 총괄기획부 가까운 동쪽에 있었다. 복도 왼편으로 총괄 기획부,임원의 사무실이 있고 정면으로 창고가 보이는 구조였다.
중요한 물건은 아니더라도 열쇠나 출입을 확인할 출입 카드 리더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디자인 부서와 거리가 있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탕비실하고 위치가 바뀌었어야 맞는 것 같은데.’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샘플과 원단이 얼마 없었다. 이미 절판된, 오래된 원단들도 많았다.
먼지도 쌓여서 활용도가 점점 더 없어지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태라보다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지.’
청소 용역 직원들은 바닥 청소를 하고, 쓰레기 통만 비운다고 했다.
‘정리와 청소라면 뭐 식은 죽 먹기지.’
‘보고서는 내일까지 달라고 하셨으니’
다니는 물품 파악을 시작했다.
아이 장난감으로 가득 찬 11평 오피스텔만 제외하고 어디든 자신이 있었다.
전임에게 인계받지 못하고 일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도 실무를 많이 배운 느낌이었다.
이태하 팀장님이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일을 지시해 주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샘플을 받으러 안산 공장에 직접 한 번 더 가야 하는데 멀어서 엄두가 안 나기는 했다. 집 앞에는 오히려 안산행 버스가 있는데 회사 앞에서는 없었다.
장롱면허는 있지만 운전은 기회가 없었다. 차도 없었고 운전이 서툰 것이 처음으로 아쉬웠다.
며칠 뒤 1박2일 체육대회가 열린다. 새로운 본부장님들과 인사하는 날이라고 했다.
다니는 어떻게든 잘 보여서 정규직도 되고 현민호의 소식을 알기 위해 친해지기라도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참, 다니 씨가 노래하기로 했다면서요?”
창고 상태가 답답한지 보고 있던 이태하 팀장이 화제를 돌렸다.
“우리 팀 디자이너들이 운동으로 이기긴 어렵고 다니씨가 힘 좀 내봐요. 우리 팀 체면 좀 부탁해요.”
“요즘은 동안이 여자들 목표라더니. 하하.”이동민이 한마디를 하며 신다니를 보면서 웃었다. ‘그동안 치워왔던 치한이 다시 등장한 건가.’‘이동민, 너 두고 본다.’다시 무표정하게 굳어버린 인상으로 현에단 본부장은 이동민을 쳐다보았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이동민은 자리에 앉았다. ‘본부장, 너도 신다니한테 관심있구나. 가리는 거 없는 새끼.’현 본부장은 다니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었다. 그녀가 용기 내도록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직접 옷을 다리며 그녀가 봐 주길 바랐다.‘네가 알던 네 남자를 가지라고.’다니는 자주 가슴이나 배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었다. 이미 마무리로 들어간 시즌 디자인들이었다. 방향을 틀기에는 늦은 시기였다. 회의는 현 본부장이 직원들 업무를 보고받는 수준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디테일한 부분을 많이 확인했다. 그는 정확한 답이 나올 때까지 질문했다. 상사를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보았던 직원들은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여러 디자인을 하나씩 살피며 패턴사의 의견까지 확인하던 현에단은 디자인 중 하나를 골랐다. “패턴사와 상의해서 디자인 라펠 폭을 줄이고 허리선 변형을 주어 보면 어떨까요? 이 디자인을 기본으로 두 종류의 젊은 감각의 슈트를 만들어 주면 될 것 같아요. 정장이지만, 격식 있는 장소에서도 가벼운 모임에서도 입을 수 있게 좀 바꿔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네, 할 수 있습니다.”김 주임이 소매와 색상의 전반적인 변화를 이야기하며 현에단에게 설명했다.“좋습니다.”상사로서의 현에단 본부장은 현민호와 다른 사람 같았다. 일단 무표정하게 업무에 대해 듣고 정확하게 질문했다.‘늘 운동해서일까.‘ 그는 상대가 몇 살이든 기 죽지 않았다.‘음, 그래. 넌 지시하는 쪽이 맞아. 나한테 그렇게 져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구나.’다니는 열심히 일하는 민호를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셔츠 주문 건으로 총괄기획부로 와 주세요]회의 중이지만 다니는 문자를 이태하에게 보여주고 조용히 총괄기획부로 갔다.현에
다니는 단골인 세라 헤어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장님.”다니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익숙하게 빈 의자를 찾아 앉으며 다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커트해 주세요. 짧게.”“어깨 닿게?”“아뇨 커트해 주세요. 진짜로.”“말해봐. 왜 울어.”다니에게 휴지를 뽑아 주며 초로의 원장은 걱정스럽게 물었다.“제가 이건 친구들한테도 창피해서 말 못 해요.”휴지를 받아 든 다니가 고개를 숙였다.“그런 건 나한테 해야지. 미용실 삼십 년 상담력이 그냥 쌓인 게 아니지. 근데 커트 말고 짧은 단발하지.그 길이도 나중에 많이 아쉬울 수도 있어.”“저 머리 금방 자라요. 6년을 수절해서 야한 생각도 안 하는데…엉엉.”‘꺽꺽’옆자리 손님도 남자 미용사도 이야기를 들으러 숨을 죽였다. “우리가 들어줄게. 자 말해 봐.”세 사람의 시선이 눈물을 닦는 다니에게 쏠렸다.“남자 친구가 군대 갈 때 임신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23살이었어요.사정상 2년은 연락도 끊고 다시 만나기로 했고 전 이사도 안 했고 현관 비밀번호도 안 바꾸고…”꺼이꺼이 우는 모습에 다들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아 근데 뭐.”다음을 궁금해하며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아이는 다섯 살이고 혼자 키우느라… 흐으흑”“그런데 아이 아빠가 나타났어요.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고 내가 있는 곳에 일하러 왔어요. 수고했다 사랑했다 그럴 줄 알았는데 회사일 힘들면 말하라고…”“뭐 그런 나쁜 놈이 다 있어..”“아가씨는 아이 아빠니까 미련이 남는 거고, 그 남자는 아이가 중한지 뭔지 모르니까 관심없는 거고. 근데 아가씨처럼 예쁜데 마다해?”“혹시 재벌 뭐 이런거야?”원장의 말에 다니는 깜짝 놀랐다.“아뇨, 그냥 좀 부자예요.”“아직 총각인 거지?”“네.”“혹시 애인있으면 잘 벼르고 있다가 결혼 할 때 즈음 터트려.”“그때 친자소송하고 양육비 받고.”“군대가서 헤어지는 거 많아. 양육비 받을 수 있어 못 받은 거 까지 .”“그럼 한 분씩 다시 말
다니는 마른 침을 삼켰다.변함없이 민호는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문 앞에 서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심호흡했다.현에단 본부장 사무실 앞에서 다니가 떨며 서 있었다. 지나가는 임 주임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다가왔다.“떨리지? 나도 그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떨려. 하하. 긴장하지 마. 그래봐야 연하지. 안 그래?”“네, 그 건 그런데 동갑이에요.”다니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더 나이 들어 보이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쾅쾅’임 주임이 장난으로 사무실 문을 세게 두드렸다.긴장했던 다니는 당황해 임 주임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들어와요.”그의 그리운 저음의 목소리가 문 저편에서 들려왔다.다니가 들어서자, 문 가까이 서 있는 민호가 보였다.그는 사무실 중앙에 보이는 흰 테이블 앞에 그녀를 세워 두었다.그러고는 손에 힘을 주어 문을 조심스레 소리 나지 않게 잠갔다.창의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었다.다니는 침을 삼키며 자신이 알던 민호라면, 사람들이 있어도 하고 싶은 것은 할 것 같아 뒷수습을 고민하고 있었다.‘어떻게 진정시키지…’현민호가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손이 닿자 자기 품으로 잡아당겨 부드럽게 안았다.그는 다니의 어깨에 고개를 숙여 기대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기 시작했다.“잠시만… 움직이지 마.”다니는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만졌다.민호가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다니는 그의 반응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이제 그가 돌아왔다고 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호는 여전히 어깨에 기댄 채 다니를 놓아 주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둘의 숨소리만 작은 공간에 퍼졌다.다니는 어느새 기쁜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다. 그의 거친 숨과 몸에서 나는 좋은 냄새가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민호는 천천히 다니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팔길이만큼 밀어냈다. 그러고는 블라인드를 걷고 다시 심호흡했다. 다니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엷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6년은 긴 세월이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테이블에는 갈비찜, 문어숙회 그리고 여러 종류의 나물들이 골고루 차려져 있었다.정성스러운 반찬들을 무시하고 현민호는 밥에 찬물을 부었다. 입속에 모래알같이 굴러다니는 밥알을 넘기려 한 것도 있었고, 유독 최민주가 싫어하는 행동이기도 했다.늘 쳐져서는 밥 몇 술 뜨지 않던 현민호가 일부러 자기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저렇게라도 하는 것은 기뻐할 일이기도 한데, 저 녀석이 갑자기 저러는 이유를 생각했다. 짙은색으로 코팅이 된 안경를 쓰고 있는 최민주는 아들의 시선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들놈 하는 짓은 너무 뻔했다.‘대체 왜 또 심통이 난 건지.’현민호가 화를 내는 것은 하나뿐이다.“너 걔 찾지 마라.”“무슨 말이야. 걔가 누군데.”민호는 능청스럽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엄마의 추리력에 흠칫 놀랐다. ‘다니를 들키면 안 돼.’유부녀 다니라도 보기라도 하려면, 어머니에게서 다니를 감춰야 한다.“내가 일흔다섯이다. 주변에 손주 없는 사람 나밖에 없어 골프 가서도 할 말도 없고.”“강현아. 이제 재혼해라.”엄마의 먼 친척의 아들이라는 최강현은 입양을 고려해 데려온 아이였다. 천덕꾸러기로 지내던 가난한 집 혼외자를 외할머니의 권유로 데려왔다. 그러나 생모가 입양에 동의를 하지 않았다. 입양이 미루어지다 기적같이 민호가 태어났다.차별을 안 하겠다며 유학을 보냈고, 엄마라 부르던 고모라 부르던 선택을 하라고 했는데 유학 후 강현은 고모라 부르기 시작했다.현성이 성장하고 외가도 회사 일에 관여하며 강현은 CK 홀딩스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직급은 전무지만 실제 오너인 그가 회사를 비우고 대영으로 왔다.민호는 형이 대영의 인수에 나서고, 자신의 후계수업을 진행하기로 한 것으로 무엇을 받았을지 궁금했다.“고모부님, 고모가 이번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하시면 재혼하겠습니다.”“내가 뭐?”최민주가 인상을 쓰며 최강현을 보았다. ‘아들놈들은 키워 봐야 소용이 없어.’“고모가 결혼하래서 했는데 이혼했어요. 고모가 소개하는 여자하고 다시는 결
운전석에 앉은 민호는 다니를 보지 않았다.운전대에 팔을 접어 올린 채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다 입을 뗐다.“너 나한테 왜 이러냐?"다니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차에서 내리려 문을 열려고 했다. 차 문은 잠겨 있었다.“열어줘.”민호는 말없이 거칠게 안전벨트를 당겨서 채워 주었다.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지 정확히 몰랐다.“문 열 거 아니면 집에만 데려다줘.”마음 가라앉히며 운전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자신의 화가 어디서 올라오는지 답답해지기만 했다.“아까 그 인간하고 무슨 일이야? 둘이 사겨?”“둘 아니고 여섯 명이 같이 있었어. 모임에 잘 안 나오던 선배라는데 오늘 처음 봤어. 귀찮게 해서 피한 거잖아…아, 넌 알 거 없어.”“유정우하고 사귀냐?”“알 거 없다니까.”“말해. 아까 그 여자는 아무 사이 아니야.”“사귀었으면 하고 묻는 거지? 네 마음 편하게. 편하게 생각해.”“대답해.”“...”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졌다.민호는 운전했고 다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얼굴을 돌려 창밖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니를 보니 마음이 괴로웠다.어두운 지하 주차장에서 민호의 차가 멈춰 섰다. 다니는 한마디 말도 없이 높은 시트에서 조심히 내렸다. 다니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걸어갔다.짙은 눈썹을 구긴 채 민호는 차에서 내려서서 다니에게 지하 주차장이 울리도록 소리 질렀다.“야, 신다니. 너 어떻게 하고 싶어? 불구덩이라도 같이 갈까? 너 우리 엄마, 너희 새엄마 몰라?”“...”“나 잡은 건 너야.”다니가 뒤돌아 서서 민호를 보았다.‘타악.’차 문을 부서져라 닫은 민호는 성큼성큼 걸어서 다니에게로 갔다.달려들듯 다니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몸을 숙였다.민호는 거칠게 다니의 입술을 물었다. 숨을 쉬지 못해 다니가 밀어낼 때까지 입속의 모든 것을 삼키며 혀를 물고 볼을 빨아 당겼다. 목울대가 움직이고 그의 뺨에 보조개가 선명해졌다. 오아시스에서 물을 마시듯 그의
긴장을 한 다니는 테이블에 앉아 손발을 떨고 있었다. 붉은 립스틱을 살짝 바른 얼굴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무대에서 서는 것은 가끔 해왔기 때문에 떨지 않았었다. 어차피 같은 노래를 불렀고, 같은 의상을 입었다.준비할 것도 뭐도 없는 무대에 긴장하는 것은 민호를 만나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무대를 살펴보니 조명도 있고, 마이크도 괜찮은 제품이었다.다니의 눈에 테이블 위의 맥주가 보였다. 긴장한 다니가 연거푸 맥주를 마셨다.“괜찮아. 잘할 거야. 같이 가 줄까?”“네. 무대 아래까지 같이 가주시겠어요.”김 주임과 함께 걸어가며 다니는 긴장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다니의 차례가 가까이 왔다. 긴 은색 가디건을 김 주임에게 맡기고, 다니는 용기를 내어 무대로 올라섰다.옥색 블라우스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하얀 반바지를 입은 다니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풍만한 몸매와 하얗고 긴 다리가 돋보이는 옷이었다.외모도 눈에 띄었지만, 노래하는 실력은 더 놀랄 만했다. SES의 ‘너를 사랑해’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몇 번을 반복해 온 무대였다. 오늘도 역시 반응이 오고 있었다.테이블 마다 입을 딱 벌린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다.“두 번째 바로 가시죠.” 사회자가 말했다.임 주임과 주변 직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한 곡 더!” “한 곡 더!”“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를 부를게요.”“배구도 안 나오고 준비했으니… 잘 하긴 하네.”“신다니 가수였나?”“같은 대학 나온 직원이 학교에서 여신이었대. 자기도 본 적은 없는데 CC인 남친이 잘나서 남자들이 접근을 못 했다잖아.”다니의 노래가 끝나자, 직원들이 이름을 연호했다.“다니엘!”“다니엘!”다니엘이 노래를 두 곡을 부르고 내려왔다. 긴 가디건으로 몸을 감싸며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노래가 끝나고 조금 취했던 술도 완전히 깨자 창피함이 밀려왔다. …수진이가 아니었다면, 다니는 자신이 왜 외톨이가 되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수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