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 야옹…”이민수의 품속에 안긴 배꽃이 가볍게 울었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다과 한 조각을 떼어 배꽃에게 내밀었다.그러나 배꽃은 냄새만 맡을 뿐, 입을 대지 않았다.이민수는 배꽃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게 중얼거렸다.“배꽃아, 힘을 내야지. 소우연이 가장 아꼈던 존재가 너였어.”그의 손길이 살며시 힘을 주었다.“그러니, 소우연이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지지만 않는다면, 너는 여전히 소우연의 것이 될 수도 있어.”그의 눈은 창가에 고정되어 있었다.그는 만안당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세자 저하.”상평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이민수는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여기에 왜 있는 것이냐? 내가 직접 가서 불러오라고 하지 않았느냐?”상평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세자 저하,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제가 직접 가면 회남왕비께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할 터. 그래서 작은 거지 아이를 보내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이민수는 손가락을 두드리며 생각했다.그럴듯한 방법이었다.“좋다. 그럼 결과를 보자.”상평은 만안당의 문을 가리켰다.“보십시오, 저하.”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거지 아이가 만안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다시 밖으로 나왔고, 그 뒤를 따라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소우연이었다.가벼운 백색의 옷을 입고, 그녀의 걸음은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했다.가녀린 옷자락이 바람에 살짝 휘날리며, 아침 햇살 아래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이민수는 무의식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예전에도 이렇게 아름다웠던가?’그의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장군부의 소씨 대가문의 첫째 영애, 늘 거칠고 소박한 옷차림으로 살던 그녀.그녀는 뒷마당에서 소우희를 위해 약재를 손질하곤 했었다.“아니지.”그는 자신에게 되뇌었다.그녀는 소우희를 위해 약재를 손질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있던 것이었다.그런데 왜 그때는 그녀
소우연은 여전히 청아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 속에서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에게 열렬히 빠져 있던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이전처럼 뜨겁거나, 애절하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민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연아, 네 마음속에 아직도 내가 있느냐?”그는 품에 안고 있던 배꽃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이민수는 언제나 그녀 앞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설령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그녀보다 한층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소우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세자 저하께서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제가 이곳에 왜 오겠습니까?”그러면서 일부러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세자 저하를 뵙고자, 일부러 정연과 진우까지 따돌리고 왔는데, 그런 저에게 세자 저하는 고작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까?”이민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자꾸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예전 같았으면, 그가 손을 뻗기만 해도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하지만 지금은?그녀는 차갑게 ‘남녀가 서로 가깝게 접촉해서는 안 된다’ 라며 거리를 두었다.이민수는 더욱 불안해졌다.그러나 소우연은 더욱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왜 피하냐고 물으십니까?”그녀는 한층 더 감정이 북받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사랑했던 세자 저하는 고결하고 품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어찌 저와 이리 함부로 몸을 닿게 하려 하십니까?”그러고는 슬픔에 젖은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세자 저하께서 제게 여전히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가 회남왕과의 혼인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아니라면, 제가 어찌 감히 세자 저하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그녀의 물기 어린 눈망울이 애절하게 흔들렸다.이민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아, 네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그의
“정연과 진우가 곧 돌아올 것입니다. 세자 저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소우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민수를 향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그녀의 동작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부드럽고 우아했다.그 모습이 이민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제는 더 이상 자신에게 헌신하지 않는 그녀가, 예전처럼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지 않는 그녀가, 오히려 더 눈부시게 보였다.“연아…”그는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혹여 이육진에게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반드시 내게 알려야 한다. 내가 널 지켜 줄 것이다.”소우연은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리고, 요즘 경성에서는 네 의술이 어의 못지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구나. 혹시… 이육진의 다리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보지 못했습니다.”그가 왜 갑자기 이육진의 다리를 언급하는 것일까.“그런데, 평안맥을 보러 온다는 이태의는 본디 덕빈의 사람이 아닌가? 그가 자주 회남왕부를 드나든다면, 혹 이육진의 다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닐까?”이태의는 애초에 황제와 덕빈이 보낸 사람이었다.그가 회남왕부를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소우연이 임신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이육진의 다리는 이미 회복되었다.그 사실이 조만간 알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소우연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단지 평안맥을 보기 위해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이민수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모든 일에는 신중해야 한다. 내가 더 강해져야만 너를 지킬 수 있어. 연아, 넌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이민수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황위였다.그가 황제가 된다면, 소우연을 다시 자신의 곁에 둘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소우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세자 저하께서 염려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기회가 되면 직접 확인해 보아라.”“알겠습니다.”소우연은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몸을 돌려 문을 향해
이 한마디에 이민수는 즉시 자신감을 되찾았다.“그래, 그래. 이육진은 그저 불구에 불과하지.”소우연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쪽에 서야 할지는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그가 황위를 차지해야만 그녀에게 미래와 행복을 줄 수 있다.상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습니다. 다만, 오늘 아씨께서 너무 쉽게 빠져나온 것이 수상하긴 합니다.”“이육진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그의 사람이 근처에 있었겠지.”“혹여 회남왕께서 아씨를 의심하시면 어찌하시겠습니까?”어찌하겠냐고?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이민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손에 힘을 주어 소매를 휙 털었다.“운명은 정해진 법이지. 그 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그 아이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가자.”“예, 세자 저하.”상평은 즉시 응하며 방으로 들어가, 배꽃을 품에 안았다.그는 오랜 세월 이민수를 모셔왔다.주군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해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처음엔 이민수가 두 달 동안 직접 배꽃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그가 소우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보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소우연이 어떤 위험에 처하든,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소우연이 만안당으로 돌아왔을 때, 정연과 진우 역시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진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왕비마마, 그 자가 혹시 무례를 범하진 않았습니까?”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결국 나를 이용하려는 속셈일 뿐이더구나.”그뿐만이 아니었다.그는 이육진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도록 약을 먹이려 했다.정연이 혀를 찼다.“왕비마마도 참, 그런 사람을 만나면서도 저를 데려가지 않으시다니요!”“네가 왕부의 사람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너를 데려가면 그가 의심하지 않겠느냐?”진우가 입을 열었다.“그래도 왕비마마께서 무슨 일이 생기시면 어찌합니까? 저는 바로 옆 건물에서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나를 가족이라 여긴 적이 없었어. 그러니, 그들이 내 오라버니일 리 없지...”소우연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연은 순간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왕비마마, 용서하십시오. 제가 경솔했습니다.”왕비는 워낙 부드럽고 자애로운 성품이다 보니, 자칫하다가는 자신이 노비라는 사실조차 잊곤 했다. 그렇게 정연은 오늘도 그녀 앞에서 말실수를 할 뻔했다.그러나, 소우연은 그런 정연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다. 왕부에서의 생활이 덜 지루했던 것은, 네가 나와 말동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야.”정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왕비마마, 과분한 말씀입니다.”그녀가 왕비를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육진의 뜻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육진은 이토록 소우연을 아끼고 사랑하는데도, 왜인지 소우연은 때때로 외로워 보였다.소우연은 마차의 창문을 닫으며 덧붙였다.“적어도 너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한 적 없었지.”그녀는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요즘 소가가 한동안 잠잠했지만, 오라버니들이 돌아오면, 다시 신경 쓸 일들이 많아질 거야.”정연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왕비마마, 정말로 소가와 화해할 생각이 없으십니까?”소우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왕부에서 나눈 대화는 이육진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더욱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럴 일은 없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정연은 다시 물었다.“노비가 감히 여쭙니다. 왕비마마께서 혹여나 친정의 힘을 등에 업으신다면, 더욱 든든하지 않으시겠습니까?”소우연은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네가 나라면 믿을 수 있겠느냐? 과거에 나를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 넣었던 사람들이, 앞으로는 나를 지켜 줄 거라고?”정연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비마마께서는 왕야의 총애를 받고 계시니, 언젠가는 소가도 왕비마마께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소우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그들이
이종대가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소우희는 단단히 찡그린 눈썹을 풀지 못했다.“춘화야, 세자 저하께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두고 계신 걸까?”춘화는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답했다.“왕비마마, 소녀는… 잘 모르겠습니다.”“모른다? 모른다? 너는 벙어리가 아니지 않느냐? 어떻게 매번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하느냐!”소우희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춘화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왕비마마, 소녀가 경솔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그녀가 바닥에 엎드려 빌었지만, 소우희의 속은 더욱 뒤틀렸다.소우연이 대신 시집을 간 그날 이후,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모든 것이 꼬였다…아무리 노력해도 잘 풀리는 일이 없었다.지금처럼…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지는 날이 올거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소우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춘화를 스쳐 지나갔다.“뭘 멍하니 있느냐! 어서 짐을 싸라!”“예, 왕비마마.”본채.이종대는 축 처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흐릿한 목소리로 외쳤다.“물… 물 좀…”소우희는 문을 벌컥 열며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다.“물은 무슨 놈의 물? 네가 빨리 죽어야 내가 속이 시원하지!”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병약한 남자의 퀭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한때 살집이 있었던 그의 몸은 이제 뼈만 남아 있었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보기에도 비참했다.“악독한 여자… 차라리… 나를 죽여라.”이종대는 눈빛 속에 증오와 절망을 담은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죽이라고? 웃기지 마라. 네 목숨은 네가 알아서 끊어야지!”“물 좀… 제발…”그는 희미한 기대를 품고, 뒤에 따라온 춘화를 바라보았다.춘화는 소우희의 눈치를 살피며 물을 건네려 했다.그러나 소우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조금만 줘라. 방 안에 온통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데, 이놈이 너무 많이 마시면 더 지독해지지 않겠느냐?”그녀는 혐오스러운 듯 코를 막으며 손을 털었다.‘이 자식이 빨리 죽어야 내가 다른 처소로 옮기지…’소우희는 질린 표정으로 방을 나섰
멍하니 서있던 소우연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반응한 채 이육진에게 물었다.“용 감정께서 또 왕야께 점괘를 봐 드린 겁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진규의 손에서 휠체어를 넘겨받고는 이육진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자가 올해 점괘를 가장 많이 보았다고 하더구나. 이제 5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자는 벌써 날 위해 점괘를 세 번이나 보았다.”흠천감은 이 소설 속에서 신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들이 본 점괘는 거의 착오가 없었다.소우연은 마음이 불안해서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다.그러다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과 이육진 단둘이 남게 되자 소우연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용 감정께서 왕야를 위해 다른 점괘를 봐 드린 적이 있거나 혹은 소우희나 이민수 두 사람을 위해 점괘를 본 적도 있습니까?”침대 위에 앉은 이육진은 호기심 가득한 소우연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의 점괘도 본 적이 있다. 용 감정은 두 사람의 운명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더구나.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고 말을 했어.”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는 건 언제든 정상적인 궤도로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더 얘기하신 건 없으십니까?”“있지.”이육진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연이 네가 내 운명을 바꿔 놓았다고 하더구나.”“네? 제가 왕야의 운명을 바꿨다고요?”“그래. 그리고 네 스스로의 운명도 바꿨다고 했어.”용강한이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이육진은 용강한의 말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래의 운명대로라면 소우연은 혼인을 하자마자 큰 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화가 스스로 풀렸다고 한다.화가 풀렸으니 망정이지, 용강한이 암암리에 제시한 말에 따르면 소우연은 혼인을 함과 동시에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용강한 그 영악한 자가 점괘를 잘못 본 게 확
”지금 막 진규를 보내 자네를 모셔오라고 하던 참이었소.”이육진의 말에 용강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조금 전에 취선루에서 밥을 먹고 낮잠을 청하려고 하다가 왕비님이 날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소.”이육진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저자가 용하긴 용하네.’한편, 소우연은 말없이 백의를 입은 용강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마침 상대방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두 사람은 그렇게 눈이 딱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강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대감님 참 용하시네요.”소우연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말하자 용강한은 여유롭게 대답했다.“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트렸는데 그 김에 점괘를 대충 봤습니다.”소우연은 용강한의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대충 본 점괘로 이렇게 정확하게 맞춘다고?’“그럼 대청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소.”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대청으로 가려던 그때, 용강한이 말했다.“왕야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오.”“그게 무슨 말이오?”이육진이 한층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용강한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용강한은 전혀 겁을 먹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다.그 모습에 소우연은 이내 이육진을 쳐다보며 물었다.“왕야, 제가 따로 얘기를 나눠봐도 되겠습니까?”소우연은 용강한에게 물어보고 싶은 의혹들이 많았다. 소설 원작에 의하면 남녀 주인공과 겨뤄볼 만한 사람은 이육진뿐이지만 하늘의 뜻을 읽을 수 있는 건 흠천감이다!“그리 하여라.”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의 부탁이라면 그는 뭐든 들어줄 수 있었다.이육진은 그렇게 휠체어를 끌고 떠났고 진규와 간석도 이내 이육진의 뒤를 따랐다.홀로 남은 정연은 소우연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왕비님, 그럼 소인은…?”“너도 이만 물러가거라.”“네, 알겠습니다.”그렇게 용강한과 소우연만 남게 되었다. 용강한은 소우연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그제야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왕비님, 가시죠.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