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희가 옥패 그림으로 널 운불사에 유인해서 무슨 짓을 한 것이냐?”소우연의 안위 문제가 제일 중요했기에 이육진은 일단 용강한에 관한 일을 내려놓았다.한편,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일부러 잔뜩 화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제가 그때 당시 살린 소년이 부군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소우희가 그때 당시 제가 매일 밤낮으로 외출하여 낯선 남자를 치료해 준 일로 부군 앞에서 제 명예를 더럽히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운불사까지 찾아가게 된 것이지요. 그때 당시 살린 소년이 부군이라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은 부군 때문에! 제가 소우희에게 납치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미리 도망칠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전 진작 소우희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망가졌을 겁니다!”소우연의 말에 이육진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그 일은 확실히 내 잘못이 맞다. 내가 너에게 진작 얘기했어야 하는데. 앞으로 절대 너에게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이육진이 소우연을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말하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에잇, 됐습니다. 마음이 넓은 제가 부군을 용서해 드리겠습니다.”그 말에 미소를 짓던 이육진이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으며 물었다.“그럼 이제 얘기해 줄 수 있겠느냐? 넌 용강한 그자를 만나러 다녀오자마자 그자를 용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자가 네 친정 식구가 되었다는 건 또 무슨 말이냐? 거짓말은 절대 안 된다. 우리는 조금 전에 서로 숨김없이 다 얘기하기로 했어.”서로 숨김없이 다 얘기하기로 한 건가? 분명 본인이 앞으로 소우연에게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해놓고?하지만 어차피 이제 두 사람은 한배를 탄 전우이자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기에 당연히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잠시 고민하던 소우연은 예전에 자신과 용강한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얘기해 주었다.“네가 그자도 살려준 것이냐?”이육진이 살짝 질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소우연이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전 다른 사람을 살리면 안 됩
이종대가 쓴 마지막 유언 속 대부분 내용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소우희가 평춘왕 이종대를 어떻게 모함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는 확실하게 적혀 있었다.때문에 소우희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반면, 평춘왕세자 이지윤은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이지윤이 자신의 계모를 이용하여 자신의 친부를 살해했다고 생각이나 할까?이육진이 보낸 호위무사가 암암리에서 평춘왕 관저의 동향을 자주 살피지 않았다면 이육진마저도 믿지 못했을 것이며 이지윤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육진은 평춘왕 관저의 시비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유일하게 신경이 쓰이는 건 소우연이 이를 갈 정도로 증오하는 소우희이다.소우희를 성공적으로 체포하고 소우희가 확실하게 숨을 거둬야 소우연이 마침내 안심할 수 있다.“평춘왕은 이틀 뒤에 장례를 치르는데 혜주가 평춘왕 관저를 지키지 않고 있단 말입니까?”소우연의 물음에 이육진이 설명했다.“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혜주를 사간 사람은 기루의 아령이라는 기생이고 혜주를 소우희 곁으로 보낸 건 이지윤 그자였다.”그렇게 보면 소우희와 이지윤 그리고 아령까지 전부 같은 꿍꿍이를 품은 자들이다.이제 평춘왕이 사망했으니 혜주는 이지윤의 사람으로서 그녀가 평춘왕 관저에 남아있든 아니면 아령 곁에 있든 모두 합리적이다.그들이 이렇게까지 대담한 움직임을 보이는 건 이지윤과 아령 사이에 그 어떤 연관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기생집을 방문하는 손님과 기생의 관계이니까.“아령이라는 자는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래도 수상한 것 같습니다.”소우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이육진을 쳐다보았고 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그자가 어떤 사람이든 절대 널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그 말에 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소우연은 아령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진우와 진규 등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소우연과 꽤 많이 닮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민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가에 눈물이 잔뜩 맺힌 ‘혜주’에게 다가가 물었다.“네, 네가 소우희냐?”소우희?자신의 이름 석자를 부르는 이민수를 보며 소우희는 기분이 너무 불쾌했다. 예전에는 분명 우희라고 다정하게 불렀는데 말이다.소우희가 지금 이 꼴이 되었는데 이민수는 조금 놀란 것 외에 전혀 미안해하지도, 그렇다고 가여워하지도 않았다.‘이지윤 그놈은 착한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다른 놈들과 똑같은 개놈이었어! 허허, 결국 모든 죄를 나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간 거야!’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소우희는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며 악몽이라면 이 꿈이 한 시라도 빨리 깨기를 바랐다.“세자 저하…”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소우희는 이내 얼굴의 화장도 대부분 지워버렸다.그렇게 서서히 혜주의 모습이 없어지고 소우희의 얼굴이 나타났다.그 모습에 이민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언성을 높였다.“넌 평춘왕을 살해했어! 그런데 지금 어떻게 내 저택에 나타날 생각을 하는 것이냐? 소우희, 너 도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것이야?”“뭘 어쩌려고 그러냐고요?”이민수의 말에 소우희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동정하지도 않는다고 해도 이민수가 옛정을 생각해서 몇 마디 겉치레라도 할 줄 알았는데 몇 달 전까지 그녀에게 애정을 쏟던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자 소우희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반대로 소우연 그 계집애에게 지극정성을 보이는 이육진을 보며 소우희는 깨달은 게 있었다. 이지윤이나 이민수처럼 여자를 이용하고 버리는 남자들은 이육진과 태자 자리를 쟁탈할 자격도 없다.사실 소우희는 이민수에게 이지윤을 조심하라고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이민수와 이지윤 둘 다 좋은 사람은 아니기에 나쁜 놈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리던 소우희는 이민수를 보며 말했다.“세자 저하께서도 참 매정하십니
사실 소우희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완전히 패배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도 절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쉽게 받아들이지도 못할 것이다.이민수는 이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혜주에게 말했다.“네 옛 주인을 모시고 나가거라. 난 네 새 주인과 따로 할 말이 있다.”큰절을 올린 혜주는 바로 벌떡 일어나 소우희를 잡아당겼다.바로 이때, 소우희가 손을 홱 들더니 혜주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천박한 년! 평춘왕이 죽기 전에 그자 곁에 있었던 사람은 춘화와 너밖에 없었어! 춘화 그 계집애는 겁이 많아서 절대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어. 너지? 네가 평춘왕에게 붓과 종이를 주어 마지막 글을 남기게 한 거지?”혜주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두 사람 사이의 시비도 몇 마디 말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하지만 혜주는 지금 명확히 알고 있다. 그녀의 주인은 아령 단 한 명뿐이다.아령이 뭔가 혜주에게 거리를 조금 두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혜주에게 다정하게 말을 하고 단 한 번도 벌을 주지 않은 사람이다.이런 생각에 혜주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소우희를 발로 뻥 차서 별채 바깥으로 밀어냈다.이내 별채 문이 닫혔고 조금 전에 일어난 아령은 또다시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세자 저하,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죽을죄를 지었다고? 그걸 아는 사람이 저자를 저택으로 데리고 온 것이냐?”아령은 순식간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민수는 그 눈물을 보며 자꾸 소우연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했다.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민수는 곁에 놓여 있는 물이 잔뜩 담긴 바가지를 가져오더니 아령 앞에 툭 놓았다.“지금 당장 화장을 지우거라. 난 오늘 네 본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아야겠다.”이민수는 아령을 꽤 오래전부터 보았다. 화장하고 나서 소우연과 많이 닮은 얼굴도 보았고 화장을 지우고 나서 어마마마와 매우 흡사한 얼굴도 보았지만 왠지…어쩌면 이 또한 다 아령
이민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걸 보며 아령은 그가 이번에 확실하게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이는 이민수가 처음 아령에게 진지하게 화를 내가 있는 것이다.만약 아령이 대답을 확실하게 하지 못하면 이민수는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이민수를 상대로 겪은 첫 시련에 아령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더니 이민수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소인 같은 천한 여인이 어찌 왕비님이 어떻게 생기셨는데 알겠습니까? 세자 저하께서는 소인을 몰라도 너무 모르십니다. 소인은 단지 어렸을 때부터 화장에 관심이 많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한 화장이 왕비님 얼굴과 흡사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세자 저하, 소인의 말은 다 사실입니다. 명문 가문 규수도, 기생집 여인들도 화장은 누구나 다 할 줄 아는 것입니다. 단지 소인은 그들보다 화장 실력이 조금 뛰어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화장에 흥취를 느꼈을 뿐입니다.”하는 말이 다 사실이라고?이민수는 아령 앞에 서서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아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 전체가 소우연과 많이 닮은 건 아니지만 표정이나 눈매는 거의 소우연과 똑같다고 볼 수가 있었다.이민수는 심지어 예전에 소씨 가문에서 강제로 소우연을 회남왕에게 시집보낼 때 소우연이 이런 모습으로 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는 미간을 확 찌푸린 채 아령을 쳐다보았다.“세자 저하, 소인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전부 사실이라고 하였느냐?”이민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어마마마처럼 화장한 것도 우연이고 소우희의 시녀였던 혜주를 사들인 것도 우연이고 소우희를 만나 이 저택에 데리고 온 것도 우연인 것이냐? 아령, 넌 아직도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다!”이민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단호한 눈빛으로 아령을 쳐다보며 말했다.“그만 이 저택을 떠나거라. 그리고 앞으로 평서왕 저택에 얼씬도 하지 말거라!”아령은 이민수가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나올 줄
이민수는 아령의 얼굴을 한참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소인 맹세합니다.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세자 저하께 먼저 허락을 맡겠습니다.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하늘에 대고 맹세합니다.”아령은 그렇게 한번 또 한번 이민수의 마음을 공략했다.“소우희 그자도 바로 쫓아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소우희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민수는 짜증이 확 치밀었다.예전에 소우희가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라는 말만 믿지 않았어도 그는 절대 소우연을 회남왕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소인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제발 소인을 가엽게 여겨 주시어 내쫓지 말아주십시오. 소인은 더 이상 사람을 잡아먹는 백화루로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소인은 세자 저하 곁에 있은 덕분에 백화루 사람들이 소인을 감히 잡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인이 이 저택을 떠나는 순간, 바로 잡혀가서 그 사람들 손에 죽게 될 겁니다.”말을 하던 아령이 서럽게 훌쩍이기 시작했고 이민수는 그런 아령을 쳐다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정말 앞으로 내 말이면 뭐든 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내 허락을 먼저 맡겠다고 맹세할 수 있느냐?”“네, 맹세합니다. 소인, 세자 저하의 말이면 뭐든 하겠습니다.”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령은 은근슬쩍 아양스러운 눈빛으로 이민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상대방이 원하기만 하면 그녀는 평생 그의 곁에서 자세를 바짝 낮추고 살 것만 같았다.이민수는 손을 뻗어 아령을 바닥에서 일으킨 뒤,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잡더니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럼 평생 내 곁에서 그 여자 대체품으로 살아가거라. 그리고 명심하여라. 감히 내 말을 한 마디라도 거역해서는 안 될 것이다!”“명심하겠습니다.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평생 그렇게 살겠습니다.”“그래. 그럼 오늘밤 제대로 준비해 보거라. 이따가 다시 이리로 오겠다.”오늘밤?아령은 고분고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이민수 팔에 기대어 다정한 목
두 눈을 질끈 감은 소우희는 한참동안 눈물을 닦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문 좀 닫지 그래?”아령이 고개를 돌려 혜주를 힐끗 쳐다보자 혜주는 바로 돌아서서 문을 굳게 닫았다.그제야 고개를 든 소우희는 혜주와 아령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제야 혜주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시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혜주의 배신으로 소우희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고 있다.“왜! 네가 대체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한 것이냐!”소우희는 결국 또 한번 혜주에게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혜주는 평생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소우희는 이내 고개를 돌려 아령을 쳐다보았다.“당신은 이지윤 사람 아니야? 날 진심으로 도와준 게 아니었어?”그 말에 아령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널 도와줘? 난 단지 이지윤 그자를 한번 도왔을 뿐이야. 하지만 넌 너무 멍청해서 도울 가치가 없지.”소우희는 이를 악문 채 소우연과 꽤 많이 닮은 아령의 얼굴을 노려보았다.“너 도대체 누구야? 너 이지윤의 사람이야 아니면 이민수의 사람이야?”“난 나 자신이지.”아령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자신이라고? 허허,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 세상에서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다들 결국 남자의 노리개가 되고 말지.”“네 자신이 노리개라고 나도 똑같이 보지 마. 난 너와 달라.”아령은 여유롭게 손을 살짝 들어 자신의 백옥 같은 피부를 감상하며 말했다.“일단 자신부터 확실하게 알아야 해. 그래야 다른 사람을 네 손에 넣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거든.”“손에 넣고 마음대로 다룬다고? 하하하하!”소우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민수처럼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매정하기까지 한 남자를 어떻게 손에 넣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한편, 그런 소우희를 보며 아령이 담담하게 물었다.“그럼 어디 한번 얘기해 보시든가. 이민수 그자는 왜 조금 전에 나를 바로 죽이지 않았을까?”“왜, 왜 죽이지 않은 건데?”“네 말이 맞아. 이민수
아령의 웃음은 절대 우호적인 웃음이 아니다.하지만 소우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아령 같은 사람을 건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았다.“소우희 아씨, 한 가지 더 알려줄까? 난 뭐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그러다가 잠시 고민하던 아령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소씨 가문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지!”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소우희는 아령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귀에 확실하게 꽂혔다.“너…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너무 놀란 소우희는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뭐라고 했냐고? 소씨 가문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고!”아령이 언성을 높여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하자 소우희뿐만 아니라 곁에 서있던 혜주도 어안이 벙벙했다.그녀는 아령 아씨가 소씨 가문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왜? 대체 왜?”소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아령이 갑자기 실실 웃으며 말을 바꿨다.“장난일 뿐이야.”장난? 어떤 사람이 이런 말로 장난을 친단 말인가!탁자 앞에 앉은 아령은 소우희를 보며 물었다.“봐 봐. 이제 더 이상 가렵지가 않지?”소우희는 그제야 자신의 몸이 더 이상 가렵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소우희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리고 가려움 증상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하루 종일 몸을 긁은 탓에 피부가 벗겨져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소우희는 그제야 해방 받은 표정으로 바닥에 축 늘어져 누웠다. 그녀는 며칠 동안 한숨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일단 잠 좀 자자. 잠을 자야겠어.”소우연이 소우희에게 감염시킨 독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소우희는 수많은 명의를 찾아가기도 하고 심지어 이지윤이 그녀를 위해 어의까지 불렀는데도 전혀 방법이 없었다.그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는 같은 말만 반복했지만 피부가 뜯기고 피가 흐르는데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소우희 아씨, 벌써 자려고? 아직 얘기가 안 끝났는데?”말을 하던 아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 속에서 이육진은 여린 소녀를 안고 생각에 잠겼다. 조금 질투가 났다. 소우연이 이러는 게 마치 이민세에게 배신당하고 억울해서 자신에게 온 것 같기도 했다.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는 법, 가끔은 소우연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가끔은 그녀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다.감정기복이 너무 심해서 순간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기도 했다.품 안의 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가끔 정말 궁금할 때가 많았다.“아닙니다. 어찌 감히 그런 놈을 전하와 비교하겠어요.”그녀가 걱정하는 건 이민수가 가진 남자주인공의 운명이었다.천명이 정한 주인공의 운명을 가진 자!이육진은 그녀가 또 소설 얘기를 꺼내는 줄 알고 골치가 아팠다. 소설 속 세상은 환상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이육진은 자신의 허리를 꽉 껴안는 소녀를 바라보며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강한의 병세와 아바마마께서 보내온 미인들 때문에 아마 많이 속이 상했을 것이다.이육진이 말했다.“이틀 후에 황가 수렵대회가 열릴 텐데 나와 같이 갑시다.”“수렵대회요?”소우연이 놀라며 되물었다.“제가 그런데 가도 되나요?”“물론이오. 아바마마께선 매년 어마마마와 같이 가신다오.”황제는 어딜 가든 덕빈을 데리고 다녔다. 사람들은 덕빈이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고 부러워하지만, 현실은….이육진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한숨이 나왔다.그는 품 안의 소녀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중대사를 해결한 후에 시간이 나면 부인과 함께 어디든 가겠소.”“어디든지요?”“그럼, 어디든지.”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달콤해졌다.다음 날은 보슬비가 내렸다. 그리고 어느덧 수렵대회 날이 되었다.황가 수렵장은 일찍부터 황실 수비군이 겹겹이 호위했고 황실 귀족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입장할 수 없게 했다.최근 들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황제는 이육진과 다른 귀족 자제들을 시켜 시합에 참가하게 했다.말을 탄 이육진은 소우연의 앞으로 다가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소우연은 죄책감이 들었다.이육진이 화를 낸 게 이해가 됐다.‘내가 과연 그렇게 이해심 넓은 사람일까?’갓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상연, 상란이 언젠가 이육진의 마음을 앗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갑갑하고 아파왔다.“네 말대로 하자꾸나.”결국 소우연은 정연을 봐서 명심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보내면 다시 안 볼 사람이었다.“명심을 대신해서 마마께 감사드립니다.”정연은 소우연에게 큰절을 올렸다.그날 밤.소우연은 정연에게서 태자가 배나무 별채로 가서 용 대인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했다.소우연은 못내 서운했지만 자신이 자처한 일이니 차마 찾아갈 수가 없었다. 입맛이 사라진 그녀는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방으로 들었다.날이 어두워진 후, 처소로 돌아온 사내는 그녀가 저녁식사도 걸렀다는 얘기를 듣고 표정이 더 매섭게 굳었다.“저녁식사를 내오라 하거라.”이육진이 정연에게 분부했다.잠시 후, 반찬들이 식탁에 올라오자 이육진은 소우연을 끌고 식탁으로 가서 마주앉았다.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그녀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었다.“전하….”소우연은 식사가 끝나자 일어서는 이육진을 다급히 붙잡았다.“저는 전하께서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몰랐다고?”이육진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는데 여전히 부족했나 보군.”그는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을 갈라서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는 자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물며….”소우연은 최근 들어 귀가가 늦어지는 사내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도 많이 재촉하시죠?”가끔 궁에 한번 갈 때마다 잔소리를 듣는 그녀였다.이육진은 거의 매일 궁에 가니 얼마나 재촉을 많이 들었을까?“부인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오.”그는 살짝 누그러진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다른 여인과 이부자리에 들면 정말 속이 안 쓰릴 자신이 있는 거요?”“저는….”
소우연이 잠깐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명심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계속해서 말했다.“금일 폐하와 덕빈 마마께서 상연과 상란을 태자 관저로 보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여인들을 보내겠지요. 저들은 남이지만 소인은 태자빈 마마의 사람이니 태자빈 마마의 말씀만 따를 것입니다.”정연은 다급히 명심의 어깨를 밀쳐 바닥에 쓰러뜨리며 호통쳤다.“너 미쳤니? 태자빈 마마께서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뭐가 있겠어?”명심이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정연은 고개를 들고 표정이 굳은 소우연의 눈치를 살피며 다급히 명심을 타일렀다.“빨리 태자빈 마마께 사죄드리지 못할까? 너 정말 욕심에 눈이 멀어서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구나.”하지만 명심은 뜻을 굽히지 않고 간곡히 청했다.“마마, 상연과 상란을 태자 전하께 보내실 바에는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소우연은 이육진이 나가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난 한 번도 부인 이외의 여인을 고려해 본 적이 없소.”정연은 한심한 얼굴로 명심을 밀쳤다.명심은 모든 걸 다 내걸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태자빈이 마음이 약해져 허락할 수도 있지 않은가?태자빈도 아예 모르는 여인을 태자의 신변에 두기를 꺼릴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태자빈의 시종이니 앞으로 다루기도 쉬울 테고 오늘 들어온 여인들에 비해서는 쓸모가 많았다.소우연은 길게 심호흡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누굴 선택해서 태자의 옆으로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다.”“마마….”“이만 물러가거라!”소우연의 호통을 들은 정연이 명심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소우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앉았다.‘방금 그 사람 화난 거 맞지?’타 여인과 부군을 공유하고 싶은 여인이 어디 있을까?이 일은 그녀의 오랜 고민이었다. 그녀는 이육진이 안전하게 즉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육진이 첩실을 전혀 원하지 않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참 좋은 분이야.’소우연은 그런
“전생에 전하께 저한테 잘해주라고 귀띔하신 것도, 저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말을 전해준 것도 오라버니셨지요.”이번 생의 그녀는 가마에 오를 때 전갈을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회귀한 시점이 도주 이후가 아니라 신혼 밤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지금 시급한 건 태자의 후대를 낳는 일입니다.”소우연은 초조하고 가슴이 쓰렸다.만약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 다른 여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용강한은 소우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다른 여인을 시켜 태자의 자식을 갖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약간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이지만 이육진이 다른 여인을 품고 자식을 보게 된다면 태자의 자리는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연이는….’과연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나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평범한 삶은 그가 원하는 삶이지 소우연이 그걸 원한다고 한 적은 없었다.이 시대의 여인들은 이해심 많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다른 여인과 달갑게 부군을 공유할 여인이 어디 있을까?두 번의 생을 연모한 여인이 그런 서러움을 감내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말했다.“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갖고 지켜보세요.”아직 이 주제를 다루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하지만 모든 일이 그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이육진이 관저로 돌아온 후, 소우연은 온종일 고민 끝에 시간을 더 갖기로 했다.그런데 그날 저녁, 수현이 예쁘장한 용모를 가진 두 여인을 태자 관저로 들였다.“소인 상연, 상란 태자 전하와 태자빈 마마를 뵈옵니다.”두 여인은 소우연보다도 한두 살 많아 보였지만 몸매가 요염하고 용모가 빼어난 것이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들게 했다.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정연을 시켜 그들의 처소를 안배하게 했다.“부인, 아바마마의 뜻이고 난 전혀 생각이 없소. 걱정 마시오, 나에겐 부인뿐이오. 절대 저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용강한은 웃으며 말했다.“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생활이 좀 궁핍해지겠지만요.”소우연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용강한은 계속해서 말했다.“어젯밤 달 밝고 별이 빛나고 있어 왕세자의 별자리가 매우 안정적이더군요. 그래서 점을 좀 봤습니다.”그 말을 듣자 소우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점을 친 것이 이육진을 위한 일일까? 아니면 그들 모두를 위한 일일까 궁금해졌다.“마마, 천명으로 따지면 태자전하는 왕세자보다 뒤처지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태자전하야말로 정통이니 서두르셔야 합니다.”“뭐… 뭘 서두르란 말인가요.”소우연은 갑자기 막막해졌다. 소설 속 그녀의 역할은 불행한 들러리 역에 지나지 않았다.회귀한 이후로 그녀는 운명을 바꾸기로 다짐했다.여주인공인 소우희가 죽었는데도 운명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단 말인가.용강한이 괜한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그녀는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대체 무슨 자격으로 태자와 경쟁하려 하는지 모르겠네요.”이육진이 황제의 유일한 아들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어쨌거나 빠른 시일 내에 태자전하와 아이를 가지는 게 좋겠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말했다.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우연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황실 핏줄은 줄곧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소우연은 물론이고 덕빈, 심지어 황제까지 회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회진 때 왕세자의 아이를 회임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얼굴도 예쁜데다가 성격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그녀를 제외하면 딱히 적당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그녀는 소우연에게 이상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민수 때문에 그녀에게 적개심을 품은 거라고 하기엔 또 아닌 것 같았다.“생년월일만 알 수 있다면….”하지만 그게 있다고 해도 옅은 운명만 점칠 수 있지 깊게는 엿볼 수 없을 것이다.소우연은 용강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다른 건
용강한이 고개를 들었다.“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게 궁금하신 겁니까?”소우연은 눈을 피했다.그의 시선은 그녀를 지나 멀리 담장 너머, 새하얀 구름 위에 가닿았다.“태자빈 마마를 믿는 이유는 저 역시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살아가는 사람 말이에요.”그건 더 이상 숨기지 않는 고백이었다.“저는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스승님이 남긴 수첩을 파고들었고, 마침내 그 안의 내용을 해독해 마마와 제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소우연을 바라보았다.입가에 맑은 미소가 스며들었다.“하지만 그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외로움만 짙어졌어요. 흠천감은 신성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고립된 곳이기도 했으니까요.”그의 눈빛엔 따뜻한 온기와, 지우기 힘든 쓸쓸함이 서려 있었다.“이젠 조금 덜 외로운 것 같습니다. 마마가 계시고 또 제가 설 수 있는 자리가 있으니 말이에요.”그가 웃어 보였지만, 입꼬리 끝엔 씁쓸함이 맴돌았다.“다만 미련을 다 놓지 못한 채 살고 있어서일까요. 요즘 들어 자꾸… 주공께서 꿈에 찾아오십니다.”소우연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그 역시 자신처럼 오랜 시간과 기억을 품은 채 이곳에 선 사람이었다.“그 꿈 속은 괜찮으셨어요?”그녀는 천천히 물었다.단순한 말이 아니었다.그가 겪은 전생 역시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었을까. 혹시 자신처럼 매 순간이 지옥 같았던 건 아닐까.용강한은 눈을 감은 듯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는 담담히 말했다.“확실한 건 하나뿐입니다. 제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잃었다는 사실 말이죠. 평생 지켜내고 싶었던 그것을 놓치고 나니, 그 뒤의 삶은 더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소우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말한 '소중한 것'은, 혹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번 생에서는 되찾으셨어요?”잠시 침묵하던 용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은요.”“조금…이요?”“그 정도입니다.”소우연의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정연은 속으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인이 주인의 허락을 받아 손님에게 상으로 내어지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궁중이나 세도가의 집안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처음 자신과 명심이 이육진 곁에 배정됐을 때, 은근한 기대와 설렘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이육진은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차가운 기운이 흐르는 듯한 사람이라 속내조차 짐작하기 어려웠다.시간이 지나면서, 정연도 명심도 그 마음을 자연스레 거두게 됐다.그 뒤로 몇몇 왕비가 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두 사람은 아예 사사로운 욕심조차 품지 않게 됐다.이제 태자와 태자빈은 궁중에서도 소문날 만큼 금슬이 좋았다. 이를 본 명심과 정연은 그가 하인을 눈여겨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되었다.정연은 조용히 세월을 보내다 은혜를 입고 평온히 늙어가길 바랐다.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배나무 별채 앞에 도착했다.명심이 어깨를 움츠리며 나오다 소우연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와 인사했다.“태자빈 마마, 어젯밤은 평안하셨습니까?”소우연은 명심의 겉옷 깃이 잔뜩 여며진 걸 보고 물었다.“춥니?”“경문 대감께서 급히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약을 제가 대신 들였습니다. 용 대감께서 약을 천천히 드셔서 꽤 오래 서 있었는데… 그 근처가 너무 차가웠습니다.”“그 정도로?”“네. 정말 한겨울처럼 느껴질 만큼이었습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을 바라보았다.정연도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을 가까이 가게 하신 이유를 말이다.함께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안쪽에서 용강한의 목소리가 들렸다.“경문아, 내가 말한 안정환은 챙겨왔느냐?”소우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말씀하신 안정환은 만안당에서 쓰는 것과 다른가요?”“태자빈 마마, 오셨군요.”용강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했으나 이내 앉은 채 인사했다.“편히 계세요. 굳이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소우연은 손짓으로 그를 말렸다.오늘은 햇살도 흐렸고, 늦가을 바람도 매서웠기에 용강한은 실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소우연의 손끝은 여전히 따뜻했다.“조금은 나아졌지만…”소우연은 조심스레 대답했다.“더 지켜보며 조절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래.”이육진은 팔짱을 낀 채, 용강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나는 의술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저 사람 곁은 한기가 밀려온다. 차갑단 말이야.”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그렇게까지요? 전 잘 모르겠던데요.”사실, 손을 댔을 때 손목이 꽤 차갑긴 했지만. 그 외엔 오히려 덥고 습한 날씨에 시원함을 주는 약초처럼 그의 곁에선 묘하게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을 뿐이다.그 말에 용강한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정말 못 느끼셨습니까?”소우연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체온이 낮은 건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차가운 기운이 넘쳐흐를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서요.”소우연이 손을 거두자, 용강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태자빈 마마 말씀대로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치료하는 게 좋겠습니다.”소우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곁에 서 있던 경문에게 시선을 돌렸다.“앞으로 약은 명심이 가져올 거야. 꼭 챙겨 드시게 해야한다. 알겠느냐?”경문은 바로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예, 태자빈 마마. 깊이 감사드립니다.”사실 경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군이 이 병을 앓기 시작한 이후, 수많은 의원이 불려왔지만 그는 늘 고개를 저으며 단 한 마디만을 반복했다.‘이 병은 인연이 있는 자만이 고칠 수 있다.’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도 진맥을 거절했고, 아무런 치료도 받지 않으려 했다.그런데 지금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이 여인 앞에서는 아무런 거부도 없이 맥을 맡기고, 침까지 받아들이고 있었다..경문은 그저 조용히 속으로 중얼쳤다.‘아, 과연 이 분이 주군께서 말한 ‘인연 있는 사람’이었구나.’운명이란, 참으로 야속하고도 묘했다.“내가 연탄을 좀 보내볼까?”이육진이 문득 제안했다.하지만 용강한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이 가을 끝물에 연탄
희미한 꿈결 속.창밖에선 빗방울이 파초 잎을 두드리며 떨어지고, 거센 바람이 창틀을 덜컹이며 흔들고 있었다.소우연은 비몽사몽인 채로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빗물이 방 안까지 들이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정연아.”하지만 곧 귀에 들려온 대답은 익숙한 정연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조금 더 낮고, 어딘가 남성적인 음성이었다.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창이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방 안이 조용해졌다.몸을 감싸던 싸늘한 기운도 어느새 사라지고, 등 뒤로 훈훈한 온기가 밀려왔다.마치 따뜻한 화로가 등을 데우는 듯한 느낌이었다.그 온기가 서서히 온몸을 감싸기 시작하자, 어딘지 모르게 숨결은 흐려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건?’소우연은 문득 자신이 무언가에 휘감겨 있다는 걸 느꼈다.몸을 비틀며 벗어나 보려 했지만, 뒤에서 감싼 팔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집요했다.그러다 등 뒤에서 느닷없이 입술이 목덜미를 훑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밖에선 정말로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우레처럼 굵은 빗줄기가 창살을 두드리며 방 안 가득 메아리쳤다.“누가 창 닫아달랬다더냐?”낮고 짙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이육진이었다.“꿈이었어요. 비가 오는 꿈을 꿨어요.”소우연이 나지막이 대답하자, 이육진은 묵묵히 웃음을 삼켰다.“그 비가… 혹시 ‘운우지정’의 그 비는 아니었느냐?”그 말에 소우연은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뺨이 후끈 달아오르며, 말도 잇지 못한 채 몸을 작게 웅크렸다.이 사람은… 진짜…그녀가 앞일만 생각하고, 뒷일을 대비하지 못한 걸 그는 귀신같이 알아챘다.이육진이 원한 건 단지 대화도, 단잠도 아니었다.창밖에선 여전히 바람이 울고, 비는 퍼붓고 있었다.그 거센 폭우가 한동안 이어지다, 이내 부슬부슬한 가랑비로 바뀌었다.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밖에서 대기 중이던 정연과 간석은, 서로 눈빛을 맞춘 채 깊은 탄식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