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연이 나직이 웃었다.“공주가 초운이를 안 괴롭힌다니, 나도 그건 좀 뜻밖이구나.”처음부터 걱정이 컸다.궁 안에서 제멋대로 자란 아이가 무슨 일 저지를지 몰라, 차라리 본인이 악역이 되겠다 각오까지 했건만. 정작 그럴 필요가 없었다.우옥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초운이 주변 사촌 형들은 다 나이가 많고, 막내 동생은 또 어려서… 공주마마처럼 또래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즐거워하는 것 같습니다.”“초운이가 그러더군요. 이 넓은 궁 안에 자기 또래는 공주마마 하나뿐이라 참 외로웠다고요.”우옥명은 소우연에게 하사받은 궁패 덕분에 언제든 궁에 드나들 수 있었고, 그런 자신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소우연이 부드럽게 말했다.“그래도 자네도 참 수고가 많았다.”“아닙니다, 마마.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궁을 드나들 수 있는 걸 부러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그때 정연이 미소를 띠며 말을 보탰다.“공주마마와 도련님이 서로 친구가 되어주는 게 참 보기 좋습니다.”그 말에 소우연은 자연스레 정연의 배로 시선을 돌렸다.“정연아, 요즘 넌 좀 괜찮느냐.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큰 탈은 없지만… 고기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힙니다.”소우연이 잔잔히 웃었다.“이제 석 달 가까이 되지 않았느냐. 삼 개월만 넘기면 한결 수월해질 게다.”정연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말했다.“날짜로 따지면 이번 주 중이면 딱 삼 개월이 됩니다.”“그런데도 아직은…”“몸이 여전히 힘든 것이냐?”“그래도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 이게 다 마마께서 살펴주신 덕분입니다.”우옥명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곧 입맛이 돌아오실 거예요. 밤이면 배고파서 뭐라도 찾게 되실 테니, 그때도 너무 급하게 드시진 마시고, 천천히, 적당히 드세요.”“산책도 자주 하시고요. 그래야 순산하시죠.”정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전… 마마께서 출산하셨던 그날이 자꾸 떠오릅니다.”“그날 폐
“오라버니, 들리시죠? 제발 깨어나서 저희한테 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소우연과 이육진이 번갈아가며 용강한에게 한마디씩 건넸다.방 안은 차분한 듯하면서도 소란스러웠다.그렇게 반 시진이 흘러간 뒤에야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곧이어 경문이 방에 들어왔다.움직임 없는 용강한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다가가 몸과 다리를 조심스럽게 주물렀다.이 모든 수기법은 황후 소우연의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경문은 마음속으로 믿고 있었다.분명 이 손길이 주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게으름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이 손을 놀렸다.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 어느덧 보름이 넘게 흘렀다.황후가 용강한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을 건네는 날이면, 이영도 빠짐없이 찾아와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그러던 어느 날.소우연은 이영의 손을 잡고 정곤전에서 나서며 나지막이 말했다.“얌전히 외삼촌께 인사드릴 순 없느냐? 어찌 맨날 울기만 하느냐.”이영은 고개를 들어 황후를 바라보며 말끝을 올렸다.“조용히 하면 외삼촌이 못 들으실까 봐요.”소우연은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이영은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였다.사실 그 말은 아버지인 황제께서 하신 말이었다.울고 떼쓰고, 심지어 말도 안 되는 억지까지 부려야 그 자가 귀찮아서라도 눈을 뜨지 않겠느냐고.조금 엉뚱한 말 같기도 했지만, 이영은 진심으로 외삼촌이 깨어나길 바랐기에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해왔다.이젠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울음이란 감정도 무뎌진 지 오래였다.“어마마마, 전 이제 초운이를 찾으러 갈게요.”정곤전을 나서자마자 이영이 말했다.“오늘은 금융궁에 있다 하더냐?”“네. 앞으로는 한 달에 나흘이나 닷새, 많아야 일주일만 집에 가고 나머지는 궁에서 저랑 학문 공부를 같이 하겠다고 했어요.”“그래, 참 고마운 일이구나.”이영이 떠난 뒤, 소우연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다시 정곤전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그때 저 멀리서 사람 그림자가
소우연은 태극구를 말끔히 닦아 이육진의 손바닥에 다시 쥐여주었다. 극한의 한기와 열기로부터라도 그의 몸을 보호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도술의 영역은 이제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그녀는 문득 생각이 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문이 꿇어앉아 기도를 드리고 자책하던 일들을 말이다. 그녀는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오라버니, 제발 어서 깨어나세요. 깨어나 저를 꾸짖든, 경문을 꾸짖든 해주세요.”그리고 그 고충도 말이다.예전에 용강한이 그랬다. 이 고충은 본인의 피로만 길러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고충이 죽는다고…꼭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면, 왜 자신의 손을 베고, 자신의 피를 먹이면 안 되는 걸까?소우연은 말없이 잠든 용강한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구었다. 대체 왜, 왜 이렇게도 깨어나 주지 않는 걸까.그녀는 의원으로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럴 땐 함께 있었던 일들, 사소한 기억이라도 들려주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그때였다. 이육진이 조정 업무를 마치고 돌아왔다.그가 곧장 향한 곳은 정곤전, 용강한의 침전이었다. 그 안에는 소우연이 침상 곁에 앉아, 다정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이육진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가슴 한켠에선 여전히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일렁였지만, 입가엔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 역시 용강한처럼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용강한이 눈을 뜬다면, 그와 소우연 사이에 어떤 형제의 정이 있든, 그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그는 소우연을 믿고, 용강한 또한 믿었다.그 순간, 은은하고 맑은 향이 코끝을 스쳤다.소우연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이육진이 서 있었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였다.소우연은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이육진은 서둘러 다가와 곁에 의자를 끌어 앉고, 용강한의 손에 쥐어진 태극구를 살며시 감싸쥐었다.“용 대인은 좀 괜찮느냐.”그가 조심스레 물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번 일에서 가장 아찔했던 건 이육진과 용강한이었다. 정태부는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방금 소우연이 한 말만 들어도 이육진을 구한 사람이 용 강한이라는 건 분명했다. 이건 너무나도 크나큰 은혜였다!“어마마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이영은 이제 소우연의 정신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소우연은 말을 이었다. “이 상운국 말이다. 네 외삼촌이 없으면 대체 어찌 되겠느냐?”그녀는 이영을 향해 눈짓을 하며, 일부러 우는 목소리를 냈다.이영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소우연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냥 헛소리를 하는 걸까? 아니면, 외삼촌을 정말 아끼시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자, 어마마마, 이젠 외삼촌을 좀 쉬게 해드려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던 이영은, 이제 놀고 싶어진 듯한 얼굴이었다.소우연은 말했다. “그래, 먼저 가 있거라. 어미도 곧 따라가마.”이영은 소우연을 한 번 더 바라보다가, 슬픔도 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그녀는 당안과 송이와 함께 처소로 돌아갔다.소우연은 침상 끝자락에 앉았다. 용강한의 손을 살며시 잡고, 그 손에서 태극구를 조심스레 꺼내 그의 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의 맥을 짚었다.그런데, 정말로… 그의 맥에 희미하게 기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소우연은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격한 기색이 어렸다.그리고는 용강한에게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다. 대부분은 걱정스러운 말뿐이었다. 그가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이영이 난리를 피운 덕에 소우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날마다 시도때도 없이 수다를 떨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혹시 모른다. 더 빨리 깨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황후마마.”경문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의 손엔 약 그릇이 들려 있었다.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받아 들었다. 경문은 능숙하게 용강한의 상반신을 받쳐 일으켰다. 둘이서 무척 익숙한
이영은 또르르 눈물을 흘리며 소우연을 올려다보았다.“외삼촌은… 영영 깨어나지 않으시는 거예요?”소우연은 입술을 달싹였다가, 말없이 이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깨어나실 거다. 분명히 깨어나실 것이야.”그녀는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그런데 외삼촌은 자고 계신데, 밥은 어떻게 드셔요? 안 드시면, 배 안 고프셔요?”배가 고프지 않을까? 고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요즘엔 매일같이 고깃국이나 쌀죽을 조금씩 넘기는 게 전부였다. 고깃국 속의 다진 고기나 쌀알도 삼키지 못하고, 그저 국물 몇 숟가락만 입에 댈 수 있을 뿐이었다.이렇게 계속되다간,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배고프실 거야.”소우연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다, 다시금 소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에도 외삼촌은 아바마마를 구하셨단다. 그러니 앞으로 외삼촌께 잘 해드려야 한다, 알겠지?”“그럼요.”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 위에 누운 용강한을 돌아보았다.하얀 얼굴, 머리칼보다도 창백한 피부. 하지만 붉은 입술과 선이 고운 눈썹, 길게 뻗은 속눈썹은… 마치 책 속에서 그려지는 신선 같았다.“근데… 어마마마, 외삼촌한테 더 많이 말 걸어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을 많이 하면… 혹시 듣고 일어나실 수도 있잖아요?”이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소우연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스쳤다.그렇다. 그녀도 매일같이 병실에 찾아와 말을 걸긴 했지만, 어쩐지 조용히 속삭이듯, 마치 깨울까 조심하는 마음으로 대하곤 했었다.이영은 어머니의 손을 툭툭 치더니, 가볍게 바닥에 내려서더니 이내 침상 가장자리에 몸을 기댔다.“외삼촌, 제가 말하는 게 들리나요?”“외삼촌, 저한테 큰 목마를 만들어주신다 했잖아요. 근데 계속 자고 계시면 어떡해요? 대체 언제 만들어주실 거예요?”“외삼촌, 진짜 제 말이 들리긴 하는 거예요? 엉엉… 흐앙…”말하다 말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옆에서 지켜보던 함향은 손등으
이육진은 위문현과 위금성 등의 죄목을 2~30 가지나 줄줄이 나열하게 했다. 나중에 이 죄목들을 그대로 죄책문에 새겨 염부 문 앞에 내걸겠다고 했다.“그자들의 동상에 썩은 달걀이나 몇 개 던져지겠구나.”마침내 죄목이 모두 정리되자, 어사대부는 손을 떨며 문서를 올렸다. 이육진은 그 내용을 훑어본 뒤 말했다.“이대로 새겨라. 다만 옆에 한 줄 덧붙여라.”“폐하, 어떤 문구를 추가하시겠습니까?”“그자들을 때리고 욕한 자는 모두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릴것이라고 적거라!”이육진은 꽤나 분노에 차 있었다. 자신도 이 행동이 조금은 유치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금성이 아니었더라면, 그 수많은 아이들과 소녀들,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용강한도, 그를 구하려다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는 진심으로 원망했다. “용강한이 깨어 있었다면 아마 그자의 혼을 날려버리지 않았겠느냐. 아니, 혼을 날려버리는 것조차 아깝다. 혼백이 매일같이 고통받게 해야 한다!”금융궁.혈충인의 문제가 마무리된 후, 심초운은 다시 심부로 돌아갔다. 그로 인해 이영은 한동안 말수마저 줄어들 정도로 근심에 잠겼다. 다행히도 심초운은 매일같이 궁에 들렀고, 서당에서 그녀와 함께 글공부를 했다.가끔은 금융궁에 머무르기도 했다.그렇게 나날이 흘러갔다.그러던 어느 날, 이영은 용강한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계속 정곤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영은 다급히 영화궁으로 달려갔다.이때 이육진은 아직 조정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영은 곧장 소우연을 찾아갔다.“어머니, 어머니…!”소우연은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잠시 멈칫했다가, 창밖의 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서당엔 안 가고 무슨 일이냐?”함향이 말했다. “아마 무슨 급한 사정이 있나 봅니다. 혹시 정태부께서 휴가를 내셨을지도요.”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이 모습을 드러냈다.“어마마마, 외삼촌이 아프시다면서요?”소우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