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연예인들 뒷일 봐주면 꽤 짭짤해. 내 사무실 넘겨받아봐.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법복을 벗고 빵모자를 썼다.
그렇게 사설 탐정이 됐다.
남장을 한 건 그다음이었다.
채사장이 빚을 유예해주는 조건이었기도 했고, 여자 탐정이라고 하면 선뜻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금방 알게 됐으니까.
지금도 남동생은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는 사무실 옆 옥탑방에서 지낸다.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보다 이번 달 이자가 얼마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삶.
이런 내가 대스타가 된 차우석에게 뭘 바랄 수 있겠어.
6년 전, 그 학교에서의 만남을 그가 기억해주리라 은근히 기대했던 내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며 차가운 밤 공기를 들이마셨다.
잊어야 했다.
그의 온도도, 그 목소리도, 그 애절한 키스도.
전부 다.
그런데 왜, 자꾸 심장이 이러는 거야.
덜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비몽사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소파 위였다.
조명은 꺼져 있고, 거실엔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새벽빛만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채령이 보이지 않았다.
'아. 꿈이었구나.'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나는 채령을 잊을 수 있을까.
꿈에서조차 그녀는 늘 내 앞에서 사라졌다.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끝내 잡히지 않는 사람.
눈이 다시 감겼다.
의식이 흐릿하게 가라앉으며, 나는 그 날로 흘러 들어갔다.
2년 전, 봄날이었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는 오후.
야외 촬영지는 시끌벅적했다.
나는 촬영진들 사이에 파묻혀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음 씬, 그다음 씬. 대사를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시선이 멈췄다.
촬영진들 뒤편으로 누군가 지나쳤다.
찰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덜컥했다.
뭔가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니저에게 화장실 다녀오겠다 하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저만치 앞을 보는 순간, 발이 그대로 굳었다.
한복 차림의 여자였다.
단역 배우인지 사극 분장을 하고 있었다.
쪽머리에 은비녀, 옥색 치마폭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런데.
옆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갸름한 턱선, 살짝 처진 눈매, 옅게 웃을 때 오른쪽으로만 들어가는 보조개.
채령이었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이채령.
내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이름.
늦은 밤, 면회를 오겠다며 혼자 차를 몰다가—사고가 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꿈에서 만날 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팠다.
그런 채령이 살아서, 내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뒤를 밟았다.
여자는 촬영지를 벗어나 사람이 없는 시냇가로 향했다.
주위를 살피더니 고무신을 벗었다.
이윽고 버선마저 벗어던지더니
맨발로 시냇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닿았는지 잠깐 움찔하더니—그다음 순간,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참았다.
마치 채령이 살아 돌아와 내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 이렇게 잘 살아 있어. 봐, 이렇게.
봄볕이 여자의 얼굴 위에 쏟아지고, 물소리가 잔잔하게 흘렀다.
세상에 저 여자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시냇물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구두가 젖는 것도 몰랐다.
그때 여자가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채ー"
채령이라고 부르려던 순간, 여자의 발이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고 기우는 몸.
나는 반사적으로 달려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죽은 채령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채령을 닮았는데, 채령보다 더 또렷하고 맑은
눈인데 어딘지 오래된 것 같은 느낌.
나는 그 눈동자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 내려 주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그녀를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넘어지시는 줄 알고…"
서둘러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여자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잠깐 나를 올려다보더니,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그리고 서둘러 시냇가를 나갔다.
치마폭이 바람에 흔들리며 멀어졌다.
정훈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온 건, 봄이 완연해질 무렵이었다."희우 씨,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사무실로 찾아온 정훈의 얼굴엔, 오랫동안 묵혀둔 결심이 서려 있었다."제 여동생 사건, 기억하시죠. 4년 전 뺑소니.""네, 기억해요. 그때, 우석 씨랑 관련이 있다고 하셨었죠."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낡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그때는 정확히 말씀 못 드렸는데— 사실, 그 사고 현장 근처에서, 우석 형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정비소 트럭이 목격됐다는 기록이 있었어요."나는 순간 놀랐다."우석 씨 아버님이요?""네. 그런데 조사해보니— 아버님이 직접 사고를 낸 건 아니었어요. 그 트럭을, 사고 당일 다른 사람이 몰래 빌려서 썼던 거더라고요. 정비소 직원 중 하나가.""그럼, 그 직원이—""네. 범인이었어요. 그 사람, 지금은 이름을 바꾸고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더라고요. 제가 최근에 겨우 찾아냈어요."정훈의 목소리가 떨렸다."4년 만이에요. 드디어— 찾았어요."나는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며,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고소하려고요. 이번엔, 제대로. 그런데— 희우 씨가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채사장에게서 연락이 온 건, 재판이 끝난 지 일주일쯤 지나서였다.시간 되면 사무실로 와. 정리할 게 있어.짧은 문자였지만, 어쩐지 무게가 느껴졌다.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채사장이 낡은 서류철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앉지."나는 익숙한 낡은 소파에 앉았다.채사장이 담배를 물려다, 문득 나를 보고는 도로 갑에 집어넣었다."요즘은 좀 참으려고. 몸도 예전 같지 않고.""잘하셨어요."그가 서류철을 내 쪽으로 밀었다."열어봐."조심스레 펼치자, 낯익은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변사장, 그 외 몇몇 채권자 명단.그리고 마지막 장엔, 붉은 도장이 찍힌 문서 한 장.채무 완제 확인서.숨이 멎었다."이게— 다 정리된 거예요?""그래. 자네 아버지가 남긴 빚, 그리고 그동안 붙은 이자까지— 전부 끝났어."나는 그 문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50억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한 장의 종이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채사장님, 이거—""알아. 자네가 뭘 물으려는지."
우철호 재판 선고 날짜가 잡혔다는 연락을 받은 건, 강원도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법원에서 온 통지문을 손에 쥔 채, 나는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납치미수, 특수폭행, 그리고 9년 전 성추행 사건까지— 병합된 모든 혐의에 대한 최종 선고였다.노래방 부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사장님, 다음 주 화요일이 선고일이에요."전화기 너머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정말요? 드디어."여주인의 목소리가 떨렸다."9년이었어요. 9년 만에.""네. 오래 기다리셨어요. 그날, 함께 가주실 수 있으시죠?""당연하죠. 꼭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는 사무실 창밖을 바라봤다.이 사건을 맡은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그 사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우철호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우석과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모든 게 이 사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선고 당일, 법정 안은 무거운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방청석엔 노래방 부부, 김하영, 그리고— 우석도 앉아 있었다.증인석에 앉은 우석과 눈이 마주쳤다.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괜찮
강원도로 가는 차 안, 창밖 풍경이 점점 낯익어졌다.산길을 따라 올라갈수록, 6년 전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우석 씨, 저기 저 갈림길— 저기서 매점 갔었어요. 아이스크림 사러.""기억나. 아니, 기억나는 것 같아. 이상하게 낯이 익어."우석이 핸들을 잡은 채 웃었다.옛 시설 건물은 이제 폐교가 되어 있었다.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서자,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이 펼쳐졌다."여기가— 그 운동장이에요. 제가 유기견들 밥 주던 곳."우석이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봤다."진도리, 망치."그가 중얼거리듯 이름을 불렀다."그 이름들, 다이어리에서 보고 나서 계속 머릿속에 맴돌더라. 진짜 있었던 개들 이름이었구나.""네. 우석 씨가 처음엔 엄청 무서워했어요. 다 큰 남자가 강아지 앞에서 벌벌 떠는 거, 그거 되게 웃겼는데.""…설마 그것도 다 봤던 거야?""그럼요. 얼마나 귀여웠는데요."우석이 헛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붉혔다.우리는 낡은 건물 복도를 따라 걸었다."여기서, 제가 넘어졌었어요. 이서영이 밀치듯 넘어져서 저를 밀었다고 몰아갔던 그 자리.""…""그때 우석 씨는, 저를 되
우석의 눈이 흔들렸다."처음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이제는, 다 말해야 할 때였다."6년 전 여름, 저 강원도에 있었어요. 아버지가 보청기 회사를 하셨는데, 신제품 개발 때문에 저한테 청각장애인 체험을 시키셨거든요. 한 달 동안, 그 산속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어요. 말은 한마디도 안 하고, 수화만 쓰면서."우석의 얼굴에 서서히 놀라움이 번져갔다."그때 우석씨가, 대학생 봉사단으로 왔었어요. 3학년이었죠. 저는 그때, 우석씨를 처음 봤어요.""…그럼 그때 그 애가, 정말 너였다고?""네. 저는 아무도 몰랐어요. 청각장애인인 척, 조용히 지냈으니까. 그런데 딱 한 사람—"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이서영이, 저를 눈여겨봤어요. 우석씨가 저한테 관심 가지는 걸 보고, 질투했던 것 같아요.""그래서— 널 모함했다는 거야?""네. 복도에서 일부러 넘어져서, 제가 밀었다고 몰아갔어요. 그때부터 다들 저를 이상하게 봤죠."기억을 더듬을수록, 그때의 서러움이 다시 차올랐다."그러다—우석씨가 뱀에 물렸어요."우석의 눈이 커졌다."뱀에?""기억 안 나요?"
나문희에게서 문자가 온 건, 뜻밖의 일이었다.할 얘기가 있어. 잠깐 볼 수 있을까.며칠을 고민하다, 나는 결국 답장을 보냈다.어디로 가면 됩니까.약속 장소는 나문희의 작은 아파트였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전과는 달리 차분해진 얼굴의 나문희가 나를 맞았다."와줘서 고마워."거실 테이블엔 낡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희우 씨한테 그날— 부끄러운 짓을 했지. 그 뒤로 계속 생각했어. 내가 대체 뭘 붙잡고 있었던 건지."나문희가 상자를 내 쪽으로 밀었다."채령이 물건이야. 그동안 못 버리고 갖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 너한테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나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오래된 사진 몇 장, 손때 묻은 다이어리, 그리고 낡은 손목시계 하나가 들어 있었다.사진 속엔 대학 시절의 채령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리운 얼굴이었다.그런데 다이어리를 펼치는 순간, 나는 손이 멈췄다.2020년 8월 14일.오늘도 그 애 생각이 났다. 우석 오빠가 나 대신 챙겨주던 그 강아지들. 진도리, 망치. 나도 그때 그 애처럼 될 수 있을까.이상했다.날짜를 다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