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루시아가 그의 손을 잡아주며 천천히 말했다.“무슨 뜻이야?”루시아는 안다. 여자들의 미묘한 시선이 오가며 사교계에서 서로를 평가하는 순간을. 그렇게 짧은 순간에도 어떻게든 서로의 순위를 매겨야 생존한다는 걸 영특하게 알아듣는 이들이 에이든의 진심만으로는 이 귀신같은 악습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마 그가 피의 숙청을 해 혁명으로 공화정을 만든 것조차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모든 운때가 맞아떨어진 기적의 영역이라고 봐야 옳았다.“여자들은 예민해. 살려면 예민해야 하지. 귀족 여자들은, 적어도 제국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사랑받을지를 어릴 때부터 교육받으면서 자라.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속눈썹, 걸음걸이, 자세. 미소짓는 모습. 화장법. 손끝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올까지 살아 숨쉬는 것처럼.”에이든은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익숙하게 말하는 루시아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 순간 그의 앞에 있는 건 벨루아의 루시아였기 때문이다.“평민들이라고 덜할까? 귀족은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지. 하지만 평민은 아이를 직접 키워야 해. 셀레나의 어머니도 그랬어. 내 유모. 너도 알다시피. 집안일도 했고, 그 일로 품삭을 받고. 셀레나의 아버지가 노름을 하며 술에 절어 하루 종일 양육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손가락질 하지 않았지.”에이든은 가만히 점점 어두워지는 루시아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모든 여자들에게 있는 자기들만의 역사를 그가 목도하고 있는 것같았다.그는 절대 갈 수 없는 어떤 세계에, 루시아는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었다.“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들기까지 네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나는 몰라 디디.”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소 결연하게 말했다.“하지만 완벽할 필요는 없어. 그 누구도 흠이 없는 구슬일 수는 없어. 나아지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이라고 칭하지. 이전 상태보다 좋아지는 것.”그건 에이든이 내내 쫓아오던 어떤 강박에 대한 구원이기도 했다. 적어도 에드윈이 아니라면, 완벽하게 연기해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줘야
루시아가 깨어났을 때에도 에이든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줄곧 이곳에 와서도 그가 바빠 내내 함께 있지 못했다.“디디.”그녀가 그의 뺨에 손을 갖다댔다.서늘한 감촉에 몸을 웅크리며 그녀의 이마에 무의식중에 입을 맞추는 그가 빙그레 눈을 감고 웃었다.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답해왔다.“루시.”분명 이렇게나 완벽한 행복인데 무언가가 잘못된 것같은 느낌은 무엇일까. 직감적으로 예민한 루시아는 이 성의 무언가 원래대로 흐르던 기운같은 것이 자신으로 인해 바뀌어 잘못 흐르고 있거나 막혔다고 생각했다. 사용인들의 표정은 밝았으나 어쩐지 루시아의 눈을 전부 다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고, 윌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곤 했다.벨루아에서 그토록 남의 시선에 지리멸렬하게 시달렸다는 걸 모르는 그에게는 루시아가 일찌감치 그걸 눈치챘으리라는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물어볼게 있어. 에이든.”그녀가 이렇게 본명을 부를 때면 그게 더 좋다가도 사실은 그 질문이 진지하거나 진중한 주제일 때가 많아 그는 루시아의 철없는 가짜 소년이었다가 다시 하우젠의 옛 대공 에이든 하우젠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뭔데?”“저택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내게 숨기는 것같아.”에이든의 잘 꾸며진 미소에 일견 금이 갔다. 루시아가 벗어두었던 가운을 입느라 등을 져서 몰랐을 뿐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숨겨야 할 지 고민했다. 그때 티베리우스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네가 지키고 싶은 게 생기면 너도 가장 먼저 도려내고 싶어질 거다. 무언가를.’그건 내내 저를 괴롭혀온 문장이었다. 루시아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디디라고 말한 뒤로부터 계속.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자신은 그녀를 이곳에 데려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루시아는 레이루나의 착한 딸로 남아 벨루아에서 죽은 아이의 유골함을 닦으며 시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까.거짓말은 모여서 산이 된다. 산이 되면 그가 아무리 태산같은 존재가 되더라도 산그림자가 제 머리 위로 지면 가릴 수 없다.
반면 에이든은 한켠으로 불안을 겪고 있었다. 나다니엘로부터 주기적으로 벨루아의 반발 소식을 접하고 있었고, 저택 곳곳에 가려놓은 에드윈의 초상화를 어디로 숨겨야 할지 고민했다.그로서는 확신이 없었다. 루시아가 저를 사랑해줄 확신, 그리고 제가 에드윈이 그러니까 디디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사랑해줄 확신같은 것이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자신은 더러 사랑할만한 존재는 아니기는 했다.그릴 듯한 성군이 되어야만 백성들의 사랑을 받지만 그조차 그를 대체할 다른 이가 생기면 언제든 빼앗길 권력이고 자리였다.에이든은 애초에 그렇게 생각했다. 누워서 가만히 곤히 잠든 루시아의 숨소리를 들으면 온 세상이 평화로운 듯 고요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자주 생전에 티베리우스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와는 체스를 두고 있었다. 사실 그건 말이 체스지, 협상 자리였다. 걸린 판돈은 그의 몸뚱이. 목적은 오로지 에드윈의 안위였다.“체크메이트.”티베리우스가 이기게끔 에이든이 또 봐주자 붉은 머리카락의 그의 형이 질린다는 듯 피식 웃는다.“네 놈은 항상 그런 식이지.”“예?”“고작 잔병치레 많은 불량품같은 놈을 살리겠다고 제 신변을 판돈으로 거는 미친 놈이 많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이 나스에도, 제국조차도.”에이든은 이번 내기에서도 진 결과로 하우젠 령에 가게 될 것이었다. 대신 황궁에 남은 에드윈의 안전은 황제의 보증으로 지켜질 것이다. 더는 전처럼 독을 먹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면 되었다.황제는 아마도 제 후계가 된다면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 나스를 다스릴, 그리고 그의 저열한 열등감을 내내 자극하는 아름다운 자신의 동생을 바라봤다.“네가 황제가 되었더라면 어땠을 것 같으냐.”이 질문을 티베리우스 이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받게 된다는 걸 당시의 에이든은 몰랐다.선황이 양위를 할 때에 에이든은 일찌감치 타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린 상태였다. 티베리우스에게 모든 자리가 돌아가고 나서야 그것을 취소하고, 나스에 남았다. 다만 내내 밖으로만 돌았다.
루시아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날따라 에이든에게 일이 많아 그녀의 곁에서 침상을 지켜주지 못하고 그저 혼자 잠들어야 했는데 나스에 정확히는 하우젠 령에 와서는 처음인 일이었다. 그래서 였을까.아주 예전에, 이제는 잊어버린 오래된 일이 생각났다.오두막 문을 열었을 때 그 애가 없었다. 분명 몰래 준 외투도, 놓아둔 식사도 있었지만 내 소년만 없었다.밤이 지나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이 터올 때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그 애가 없으면 해가 뜨지 않는 것 아니었나, 그 애가 없는데 왜 세상이 돌아가지.뭔가 이상하다고 루시는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가서 제 소년을 내놓으라고 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저 막막한 공백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공허 속에 루시아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눈물을 흘렸다.그 자리에는 어느새 작은 관이 들어앉아 그녀의 품안에 있었다. 이게 누구의 관이지? 디디? 아니면 내 아이?루시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에이든이 벌떡 집무실에서 나와 그녀에게로 왔다.“루시!”루시아의 온몸이 식은땀이었다. 그리고 바라본 사내는 어쩐지 낯설었다. 꿈속에 바라본 어딘가 미려했던 디디와 달리 유달리 체격이 크고 골격이 남다른 에이든.분명 무언가 들여다보면 알 수 있었지만 루시아는 이 순간에는 그의 손이 필요했으므로 다만 그것을 외면했다.루시아는 어째서 그가 ‘겨울의 왕’인지 궁금했다. 물론 하우젠 령은 혹독한 기후를 갖추고 있으나 오히려 그런 기후 속에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했던 것이 옛 황자였던 에이든의 업적인데도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볼 때 매서운 정복군주같은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 신기했다.“내가 모르는 어떤 모습이라도 있는거야 디디?”새하얀 침대 위에서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후희를 즐기며 도리어 루시에게 되물었다.“예를 들면 어떤?”“사람들을 괴롭힌다거나.”그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기는 했다. 집요하게 제 귓가를 핥고 있었으니까.“그리고?”정작 에이든은 그런 질문들조차 귀엽다는 듯 가르릉대
그 애가 좋아하는 음식, 자주 입는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의 색, 걸음 걸이, 머리카락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열에 들떠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작은 제 동생의 발그스레한 얼굴은 분명 첫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그래서 에이든도 언젠가 루시아 아르테미스를 에드윈의 짝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애가 제 지병에 티베리우스의 연속된 독살 시도가 겹쳐 결국 세상을 뜰 때까지 몇 년 안되는 짧은 생애를 끝까지 다 살지도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나기 전까지.티베리우스가 집권 초기부터 폭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잘못은 없었지만 무능했던 게 문제였다.황제란 그런 자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으므로. 그럼에도 형제라는 이유로 에이든은 좀처럼 그를 놓지 못했다. 결심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윈이 파리한 안색으로 제 앞에 쓰러진 순간, 세상에 납득할 수 있는 죽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제 오만을 깨달았을 때 그가 사람의 목숨을 숫자 놀음으로 취급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티베리우스가 망가뜨린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오히려 자신밖에 없음을 알고 움직였다. 이미 그가 가진 하나뿐인 가족을 잃고 난 후에야 그럴 수 있었다.그렇게 다 잃고 나서 황제의 좌에 앉을 일만 남았을 때에 그 무렵부터 에이든은 루시아의 환상을 봤다. 마치 에드윈이 주고간 것처럼 그가 그 시절의 ‘디디’였다는 듯이.소녀가 떠올렸다던 고대 도시 아고라. 그래, 그걸 만들어 주면 될까, 루시.그러니까 처음 그가 대륙 최초의 공화정을 만든 이유가 고작 한 여자 아이의 환영을 보고, 그녀에게 미쳐서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알려져서는 안되었으므로. 윌은 다만 에이든을 우려스럽게 바라볼 밖이었다.“부인께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는법입니다.”에이든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언제까지 비밀로 하겠나. 이미 눈물점이며, 어릴 때의 인상의 차이같은 것이며로 그가 때때로 어릴 적과 다르다는 말을 하곤 하는 루시아였다.총명한 사람이니 금세 그걸 알아낼 것이다. 하지만, 벨루아에서 죽어가는 여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
31화루시아는 오래 전 그에게 무엇을주었는지 알지 못함이 분명했다. 만약 안다면, 그의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순 없을 테니.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 황위 계승을 위한 종마 취급을 받던 날들이. 널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던 시절이.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먼 후일에 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적어도 에이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녀에게 이렇게 갈무리했다.“내게 만약에 너같은 가족이 있었더라면 분명 나는 지금같이 말했을 거야.”가족.그러면 에이든은 어느 소년을 떠올리게 됐다. 그가 기어이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를 지우고 만 어느 아이의 얼굴이, 환한 웃음이 생각났다.그렇게 해서라도 옆자리를 차지한 자신을 보고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원망을 할까.반면 그 말에 루시아는 어딘가 맥이 빠지는 듯 하면서도 무언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압박감에서 한꺼풀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각자 생각하는 지점이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지만 상념에 빠지느라 그 차이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아까 설레이던 기분을 느꼈던 게 꿈 속 이야이인 것처럼 금세 서먹서먹해진 분위기로.***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뜨며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에이든의 잘짜인 근육과 그 위에 잔무늬처럼 자리한 자잘한 흉터들이 그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자신과 보냈던 그 나날 뒤에 그의 삶이 궁금했다.“디디, 국경을 넘어서 돌아간 뒤로 어떻게 했어?”에이든은 마치 이 상황을 오랫동안 준비한 그러니까 예전부터 대사를 준비해 외운 배우처럼 이야기를 읊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늘 도자기 인형을 연기했던 루시아가 아니고서야 절대로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나를 기다리던 가족들을 만나서 세력을 키우고, 다시 황좌를 뒤집고 네가 살아갈만한 땅을 만들었어.”그 고백은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해서 더 이상 나무랄 데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루시아는 무언가 계속해서 찝찝했다.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