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루시아는 벨루아 특유의 웅장한 저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제국에서도 손꼽힐만한 명작을 갖춘 저택의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 종일 식사를 않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최근, 자꾸 새벽에 깨어나 잠이 부족했던 건지 루시아는 도서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쪽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새소리와 창 밖으로 웅웅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 제 어깨 위에 겉옷을 얹어주는 게 느껴졌다. 셀레나인가. 무어라 말도 건넨 것같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대답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다정한 음성이라는 것만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마지막으로 저를 아주 못마땅해 했던 자안이었다.
"루시아."
그가 드물게 제 이름을 불렀다.
"손님이 왔소. 저녁 정찬을 함께 해야해."
또 코르셋을 입어야겠군. 저절로 싫다고 생각해서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루시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두고 나가버렸다. 루시아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어깨를 둘러싼 털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국의 양식은 아니었다. 금장이 박힌 것으로 보아 무척 신분이 높은 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2화
이걸 보고도 데미안은.
거기까지 미치려 드는 생각을 도중에 끊어 냈다. 루시아는 적어도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말자고 자주 되뇌었다. 양뺨을 힘껏 두드린 그녀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위태로운 듯 정확한 걸음으로.
저택의 대부분 사람들이 루시아의 편이 아니었으나 아르테미스 백작저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유모의 딸이자 유일한 친구, 셀레나는 변치 않는 루시아의 편이었다. 가을 호밀을 닮은 갈색 머리. 에메랄드를 닮은 초록눈. 이따금, 루시아는 셀레나가 남자였다면 단연코 데미안이 아닌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부인"
셀레나가 머리를 만져주며 물었다. 루시아는 역시 그녀를 못속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푸시시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셀레나 앞에서라면 그래도 된다. 오늘 중, 아니 어쩌면 며칠 만에 처음으로 지은 미소라는 걸 셀레나의 친구는 모를 것이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 남색에 가까운 검은 눈동자는 밤하늘을 연상케 했다. 새하얀 피부. 누가봐도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친구는 사실 코르셋도, 긴 머리도 싫어했다. 귀족적이지 않고 소탈했다. 그래서 평민인 자신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따금 셀레나는 루시아에게 혼자서라도 도망치라고 권했었다. 벨루아와의 결합도 반대했었다. 루시아는 모두에게 잘된 일이라고 했다. '그' 선대 백작조차 밉다고 표현한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었다. 평생 가족을 벗어나는 선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셀레나가 아는 한은 그랬다. 언제나 루시아의 삶에는 가족이 중심이었고, 어머니 레이루나를 향한 죄책감이 뼛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벨루아와의 결혼식 전날, 셀레나가 여태 모아온 비상금을 건넸다. 로브와 함께. 야심한 밤이었다.
"마차를 준비했어. 이대로 떠나자."
루시아는 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게 내 운명인가봐, 셀레나."
"그런 게 어딨어. 이럴 순 없어. 루시."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를 품에 안았다.
"오, 루시 이제라도 못하겠다고 해."
"나 그런 거 못해, 알잖아."
셀레나는 루시아보다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아이는 사내보다 남편될 이보다 뛰어나서는 안되어서 어떤 교육도 - 신부수업을 제하고-받지 못했다. 다만 오라비인 제레미의 숙제를 대신하면서 갈증을 풀 뿐이었다. 셀레나는 자주 생각했다. 이제라도 루시아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면, 친구는 쓸쓸한 미소만을 지을 것같았다. 체념어린 미소를 보고싶지 않았다. 그러니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찬에 오기로 한 손님은 더없이 늦게 왔다. 코르셋을 입고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운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루시아를 보고 데미안은 상복같다고 생각했다. 죽은 아이의 일을 아직도 떠올리게 했다. 벌써 한 계절이 지난 일이었다. 불쾌함이 저 밑을 들끓었다. 저 여자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 빌어먹을 드레스는 버릴 수 없었나."
코르셋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루시아가 겨우 그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데미안은 루시아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우젠 대공 드십니다."
하우젠 대공이라면, 이국 나스의 자산가였다. 북부 영지, 넓은 대륙같은 영토를 관장'했던' 이였다. 그 안에 묻힌 자원을 생산해내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은, 그래서 그의 별명은 '겨울의 왕'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명성만을 들어봤지 실제로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나라는 공화정이어서 대륙 최초로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여성이 나라의 가신이 될 수 있었으며 투표로 국민들이 직접 총리를 뽑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혁명군을 대대적으로 지원한 전 국왕의 동생, 에이든 하우젠이었다. 대공이라는 과거의 이름은 국민들의 애칭같은 것이었고, 신분제가 아직 남아있는 제국에서나 편의를 위해 그렇게 불렀다. 귀족들에게 서열이란 목숨같았으므로. 흐릿해지던 의식 속에 익숙한 듯 낯선 음성이 들렸다.
"괜찮습니까, 공작 부인?"
아, 아까 도서관에서의 그.
고개를 들려고 했을 때 몸이 기우뚱했다. 루시아는 쓰러지지 않으려 얼른 의자에 앉으려고 했지만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루시아!"
데미안의 긴박한 목소리와 하인들의 움직임. 그 속에서 어쩐지 자신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대공의 눈빛이 보였다. 통증이 번져가는 와중에도 그 눈빛만은 선명하게 남았다. 바다같이, 깊고 푸른 눈이었다.
***
"왜 깨어나지 않는 것이냐!"
그가 소리쳤다. 루시아는 데미안의 저런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골이 울렸다. 그녀가 손짓으로 셀레나를 찾았다. 셀레나가 울먹이며 제 손에 물을 쥐어주었다.
"루시아!"
제발 소리치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벨루아의 주치의가 먼저 그를 말렸다.
"공작 부인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각하."
주치의를 보는 건 아이가 죽은 뒤 처음이었다. 더이상의 출산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그 말을 그녀에게 건네던 나이든 의사. 루시아는 그에게 내심 고마웠다. 데미안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하고 그에게 조금만 미루어달라고 한 것을 그대로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데미안. 정찬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건 물음이라기보다 손님에게로 돌아가라는 축객령이었다. 데미안이 황당한 낯을 했다. 이제껏 기다려주었더니 나가라니
"하우젠 대공이라면, 황제폐하께서 귀빈의 신분으로 공작저로 보내신 것이겠지요. 대우에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서 그에게로 가보세요."
데미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무생물 보듯이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인들이 어찌할바 모르는 표정을 지었고, 셀레나만이 루시아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꼴좋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셀레나. 들키면 어쩌려고."
그 표정이 우스워 루시아가 킥킥댔다. 편한 사람과 있을 때만 나오는 모습이었다.
"아무렴, 너한테 코르셋을 입힌 인간인데."
어릴 적부터 손님을 맞으라는 이유로 꾸미려고 코르셋을 입다가 종종 루시아가 졸도하는 모습을 봐왔기에 셀레나는 되도록이면 코르셋이 없는 나스의 드레스 유행이 취향이라는 핑계를 댔다. 어떻게든 루시아에게 코르셋을 입히지 않았다. 그랬는데 고작 공작의 한마디로 몇 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와중에 빌어먹을 드레스라니. 정말 마음에 안드는 인간이었다.
셀레나가 이를 가는 사이 루시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마 곧 제가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데미안의 귀에 들어가면, 원치 않아도 이 혼약은 파기될 것이었다. 그러면 저는 어디로 가게 될까. 제레미가 그녀를 백작저에 가만히 둘 것같지는 않았다. 수녀원?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아니면 늙은 귀족의 재취자리나 정부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루시!"
또 우울한 티를 낸 모양이었다. 셀레나의 얼굴이 슬퍼진 걸 보니.
"괜찮아. 셀리."
일부러 친구의 애칭을 부른 루시아가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이 따뜻함을 되도록 오래 느끼고 싶었다.
***
에이든은 데미안보다야 공작부인이 보고싶었다. 애초에 제국을 방문한 이유도 그때문이었으므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자마자 그녀를 보고 말을 걸었던 것인데, 아까 저녁 정찬에서의 모습을 보니 낮에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애초에 저를 기억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은 좀 어떻습니까?"
데미안이 입을 닦고 나서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며칠 안정을 취하면 된다고 합니다."
에이든은 벨루아 공작에게 사감은 없었다. 다만 루시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어설픈 사랑놀이때문에 손대기도 귀한 그녀가 내내 사교계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했다는 것도.
"이제는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미안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예리한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황궁을 놔두고 굳이 벨루아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에이든은 개인적 이유와 하우젠 대공으로서의 대외적 이유 두 가지중 후자만 말하기로 했다. 애초에 전자를 공작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공작가의 도서관과 미술관이 아름답다고 황후폐하께 추천 받아서요."
마리아 델레포트. 그 여자의 이름을 대면 데미안 벨루아는 입을 다문다. 외국인인 그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습니까."
데미안이 허탈한 듯 더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끝내는 한마디를 물었다.
"그 이외의 말은 없었습니까?"
"예."
대공은 굳이 두 사람의 오작교가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데미안에게 괴로운 밤을 선사할 용의는 확실했다. 그의 계획대로 데미안은 그날 밤을 꼬박 술로 지새웠다.
***
에이든은 그리운 시절을 회상했다. 나스에서 목숨을 위협받아 제국으로 잠시 몸을 은신했을 당시 만난 어린 소녀에 대해. 밤같이 요요히 빛나던 아이의 총명한 눈동자와 다정한 미소, 따뜻한 체온.
"디디!"
아이는 자주 굶었다. 귀족가 영애의 마르고 작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곤 해도 7살이었지만 4살처럼 보일 정도로 작았다. 에이든이 형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부상을 입고 국경 근처 아르테미스 백작저의 영지까지 겨우 도망쳤을 때, 결국 이대로 죽는 걸까 생각했을 때
저를 도운 것은 조막만한 일곱살짜리의 손이었다. 제 유모와 셀레나를 불러다 치료를 도왔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자신을 성도 없이 '루시'라고 소개했다. 처음에는 짧은 머리카락과 바지 차림새 탓에 남자 아이인줄 알았다가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남자아이에게 여자 아이 이름을 짓나? 하지만 퍽 잘어울렸다. 아이는 무척이나 예쁘장해서 여자아이로 착각할 뻔했으므로.
"너는?"
그는 평소처럼 에이든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힌 채 아명을 내놓았다.
"디디"
"디디!"
돌아가신 어머니 이후로 아무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을, 루시는 아주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불렀다. 그 애는 안그래도 절식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려는 착한 소녀였다.
"더 안먹어?"
루시가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엄마가 먹으면 안된대."
디디는 루시의 몫으로 남은 쿠키를 툭 베어물었다가 루시의 입에다 물려주었다.
"디디! 이러면 어떡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운이 없던 루시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먹어. 먹어도 안죽어. 너는 안빼도 돼."
다들 못났다고만 하는데 디디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막 살찌고 그러면. 그래서 아무에게도 청혼을 못받으면. 엄마가 슬퍼하실 거야."
루시의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좁은 새장안에서 아이는 만족하는 걸까. 제 눈동자를 닮았다던 나스의 바다를 보여주면 너는 어떻게 웃을까. 루시의 디디는 종종 무해한 낯을 하고서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루시는 그저 그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기만 했다. 디디는 연갈색 고수머리를 벅벅 긁다가 말했다.
"네가 살쪄도, 못생겨져도, 나이들어도 나는 네 친구일거야. 계속 곁에 있고 싶을 거야."
있을 거야가 아닌 있고 싶을 거야.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어째선지 귓가가 타오를 듯 뜨거웠지만 루시를 위해서라면, 괜찮았다.
루시가 크게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이야? 디디?"
"응. 정말."
이리저리 피가 묻은 제 옷을 대신해 평민의 옷으로 위장을 도와준 루시. 매일 제 간식을, 식사를 몰래 가지고 나와 뒷뜰에서 그를 기다리는 루시. 해질녘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마법같은 시간에 더없이 예쁜 루시의 색깔들. 에이든은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고 외톨이에 목숨을 위협받던 황궁 생활을 벗어나 처음으로 느낀 안온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나스의 황자가 아닌, 에이든 디트리히 하우젠이 아닌. 평민 소년, 루시의 영원한 친구 디디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하루살이가 목숨을 연장하듯 그녀와의 시간을 이어나갔다.
"디디. 그치만 디디는 너무 예쁜 걸."
루시가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비비적대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 탓에 안그래도 두근거렸던 가슴이 에이든의 귓가에 쿵쾅거렸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디디는 가을의 호밀밭같은 머리카락이랑, 바다같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너무 예뻐."
성마른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이대로,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 해도 좋았다. 디디는 그대로 루시를 끌어안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그가 어떻게 저항해볼 새도 없이 젖어들었다.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마저 귀여워 디디가 푸흐흐 웃자 루시도 같이 웃었다. 셀레나는 곁에서 미소지으며 둘을 지켜봤다. 루시가 저렇게 마음 편하게 웃는 걸 언제 보았나. 친구로서 디디라는 소년이 너무 고마웠다.그는, 점점 돌아가지 않을 생각도 했다. 제국으로의 망명을 생각했다. 루시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를 따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두고온 이들은 살아있을까? 고작 열 살짜리 소년을 믿고 목숨을, 충성을 바치던 어리석은 그의 사람들은.루시는 종종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걸 알았다. 배우지 않아도 보았다. 원체 영특한 아이였다. 디디는 루시를 오래 속일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꼭 오늘같은 가을이었다.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여름날 소년이 흘린 구슬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던 루시가 이제는 그의 곁에서 숄을 걸치고 앉아있었다."디디, 가야 해?"망설이다가 물은 물음이었다. 반년 가량 숨어지냈다. 그를 찾는 이들도 그의 생사를 더이상 확신하지 못할 시간. 추적자들이 방심한 시간. 이때에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루시가 남아달라고만 한다면. 그는 남을 작정이었다. 그의 의미는 모두 그녀의 옆에서 생겨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얻은 두번째 생은 모조리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루시가 쓸쓸하게 웃었고, 마침내 그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디디는, 아니 에이든은 둘 사이의 추억을 가슴속에 품고 조국으로 떠났다.그 뒤로는 모두가 살아돌아온 소년이 어딘가 미쳤다고 부르는 나날이었다. 혁명군을 지원하고, 반란을 도모했다. 그러나 그는 황좌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공화정이었다. 그의 사람들조차 반대했던 것. 이 사회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 하지만 루시가 그랬다."옛날 고대사회에는 공화정이라는 게 있어서 광장에서 사람들이 토론하면서 나라의 문제를 결정했대.""그렇구나."아고라의 이야기구나. 황제학 수업 때 지겹게 들었던 디디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는데 어쩐지 시무룩한 루시가 덧붙였
루시아는 벨루아 특유의 웅장한 저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제국에서도 손꼽힐만한 명작을 갖춘 저택의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 종일 식사를 않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최근, 자꾸 새벽에 깨어나 잠이 부족했던 건지 루시아는 도서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쪽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새소리와 창 밖으로 웅웅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누군가 제 어깨 위에 겉옷을 얹어주는 게 느껴졌다. 셀레나인가. 무어라 말도 건넨 것같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대답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다정한 음성이라는 것만 기억했다.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마지막으로 저를 아주 못마땅해 했던 자안이었다."루시아."그가 드물게 제 이름을 불렀다."손님이 왔소. 저녁 정찬을 함께 해야해."또 코르셋을 입어야겠군. 저절로 싫다고 생각해서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루시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두고 나가버렸다. 루시아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어깨를 둘러싼 털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국의 양식은 아니었다. 금장이 박힌 것으로 보아 무척 신분이 높은 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2화이걸 보고도 데미안은.거기까지 미치려 드는 생각을 도중에 끊어 냈다. 루시아는 적어도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말자고 자주 되뇌었다. 양뺨을 힘껏 두드린 그녀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위태로운 듯 정확한 걸음으로.저택의 대부분 사람들이 루시아의 편이 아니었으나 아르테미스 백작저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유모의 딸이자 유일한 친구, 셀레나는 변치 않는 루시아의 편이었다. 가을 호밀을 닮은 갈색 머리. 에메랄드를 닮은 초록눈. 이따금, 루시아는 셀레나가 남자였다면 단연코 데미안이 아닌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부인"셀레나가 머리를 만져주며 물었다. 루시아는 역시 그녀를 못속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푸시시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셀레나 앞에서라면 그래도 된다
언제나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머니, 레이루나가 부채로 제 표정을 능숙하게 가리며 물었다."루시, 아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니?"그녀가 아주 걱정스럽단 듯이, 루시아의 손을 애절하게 잡으며 말했다. 어릴 적 그녀가 꾸미지 않을 거라고 했을 때, 코르셋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다고 했을 때. 레이루나는 젊었을 적 꾸미지 않으면 언젠가 루시아가 후회할 거라고 했다. 아마도 백작부인으로서의 경험에 비롯하여 조언을 해준 것같았으나 루시아를 위한 말은 아니었다.루시아 아르테미스, 언젠가 팔아치울 백작가의 귀한 상품을 위한 말이었다.인형같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가 말했다. 어머니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그이가 워낙 바빠서요. 어머니. 둘 사이의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어요."루시아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했다. 아버지인 아르테미스 백작은 주사가 있었다. 여자도 밝혔다. 정부를 들이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레이루나는 아이들, 루시아와 아들 제레미를 위해 참고 버텼다. 불면증도 그때 생겼다.어딘가 의문스러운 마차사고로 아버지가 죽고, 제레미가 백작위를 이었다. 그 뒤로 레이루나의 삶은 전보다 자유로웠다. 백작인 아들. 공작부인인 딸. 선대백작부인인 저의 신분, 넘지는 재산. 남편에게 얽메이지 않는 삶. 그건 사실 이 제국의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결말이었다.때때로 루시아는 어렴풋이 레이루나의 삶이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루시아가 데미안의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그가 행복했으면 했다. 매일 황궁으로 출근하는 그가 황후의 정원이 있는 방향으로 몇 분간 시선을 준다는 것은 이미 사교생활이 전무한 그녀의 귀에도 들어올법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예전이라면 질투라도 났겠으나 오르지 못할 나무인걸 너무도 잘 알게된 지금은, 오히려 그가 그걸로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름도 없는 아이는 언젠가부터 제 속에 생긴 자그마한 폐허에 묻어두고 늘 그래왔듯 루시아 혼자 기도를 올리고 애
그녀는 자주 지쳤다는 말로 모든 걸 대신했다. 원망스럽거나 상대가 실망스러울 때, 그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나도 커져서 가끔 그녀의 사랑을 역전해버릴 때. 그러니까 그녀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 당했던 것들을 모두 감당할 수가 없을 때. 마치 노인 같은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도망가고 싶다느니, 지쳤다느니 하는 말로 제 속을 표현하곤 했다.지쳤다는 말은 쉬고 나면, 잠시 어딘가로 도망가고 나면, 그러다 그 자리로 돌아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어찌되었거나 제 자리는 그의 곁이었으므로. 루시아 아르테미스 벨루아는 데미안 벨루아의 아내요, 제국의 단 둘뿐인 공작가의 공작 부인이었다. 비록 결혼 전에 데미안이 얼마나 지금의 황후인 마리아를 사랑했는지 전제국민이 다 알고 있고 모든 신문에 그 모습이 영원히 박제되었다고 해도, 가문에서 루시아를 팔아치우듯 공작가에 넘겼다는 것도 공작저의 사용인 중 누구도 그녀를 진정한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나가던 개가 알았다고 해도.***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의 문턱에 닿을 무렵이었다. 나무는 여전히 녹음으로 푸르렀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진 바람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루시아는 사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했다. 데미안이 태어났고, 그들이 결혼한 시기였다. 그래서 풀벌레가 우는 저녁이면, 고요하게 앉아 테라스에서 밖을 바라보며 행복하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녀의 곁에 그의 마음은 없었으나 그의 곁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어서 그 답답한 집을 떠나 공작부인이라는 조금 더 넓고 반짝이는 새장에 올 수 있어서. 아마 그녀에게 이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었으리라.짧은 머리를 동경했고, 꾸미는 것보단 자연스러운 게 좋았다. 이를테면 나무 그늘 아래 흙바닥에 주저앉아 드레스가 엉망이 되어도, 머리가 바람결에 망가져도 신경쓰지 않는 쪽이 루시아다웠다.유별난 아이라고들 했다. 어머니인 레이루나와도 다르고, 여느 귀족가의 영애들하고도 달라서. 그건 어떨 땐 저가 가장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