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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Author: 도수정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5 00:42:16

루시아는 벨루아 특유의 웅장한 저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제국에서도 손꼽힐만한 명작을 갖춘 저택의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 종일 식사를 않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최근, 자꾸 새벽에 깨어나 잠이 부족했던 건지 루시아는 도서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쪽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새소리와 창 밖으로 웅웅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 제 어깨 위에 겉옷을 얹어주는 게 느껴졌다. 셀레나인가. 무어라 말도 건넨 것같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대답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다정한 음성이라는 것만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마지막으로 저를 아주 못마땅해 했던 자안이었다.

"루시아."

그가 드물게 제 이름을 불렀다.

"손님이 왔소. 저녁 정찬을 함께 해야해."

또 코르셋을 입어야겠군. 저절로 싫다고 생각해서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루시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두고 나가버렸다. 루시아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어깨를 둘러싼 털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국의 양식은 아니었다. 금장이 박힌 것으로 보아 무척 신분이 높은 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걸 보고도 데미안은.

거기까지 미치려 드는 생각을 도중에 끊어 냈다. 루시아는 적어도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말자고 자주 되뇌었다. 양뺨을 힘껏 두드린 그녀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위태로운 듯 정확한 걸음으로.

저택의 대부분 사람들이 루시아의 편이 아니었으나 아르테미스 백작저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유모의 딸이자 유일한 친구, 셀레나는 변치 않는 루시아의 편이었다. 가을 호밀을 닮은 갈색 머리. 에메랄드를 닮은 초록눈. 이따금, 루시아는 셀레나가 남자였다면 단연코 데미안이 아닌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부인"

셀레나가 머리를 만져주며 물었다. 루시아는 역시 그녀를 못속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푸시시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셀레나 앞에서라면 그래도 된다. 오늘 중, 아니 어쩌면 며칠 만에 처음으로 지은 미소라는 걸 셀레나의 친구는 모를 것이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 남색에 가까운 검은 눈동자는 밤하늘을 연상케 했다. 새하얀 피부. 누가봐도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친구는 사실 코르셋도, 긴 머리도 싫어했다. 귀족적이지 않고 소탈했다. 그래서 평민인 자신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따금 셀레나는 루시아에게 혼자서라도 도망치라고 권했었다. 벨루아와의 결합도 반대했었다. 루시아는 모두에게 잘된 일이라고 했다. '그' 선대 백작조차 밉다고 표현한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었다. 평생 가족을 벗어나는 선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셀레나가 아는 한은 그랬다. 언제나 루시아의 삶에는 가족이 중심이었고, 어머니 레이루나를 향한 죄책감이 뼛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벨루아와의 결혼식 전날, 셀레나가 여태 모아온 비상금을 건넸다. 로브와 함께. 야심한 밤이었다.

"마차를 준비했어. 이대로 떠나자."

루시아는 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게 내 운명인가봐, 셀레나."

"그런 게 어딨어. 이럴 순 없어. 루시."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를 품에 안았다.

"오, 루시 이제라도 못하겠다고 해."

"나 그런 거 못해, 알잖아."

셀레나는 루시아보다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아이는 사내보다 남편될 이보다 뛰어나서는 안되어서 어떤 교육도 - 신부수업을 제하고-받지 못했다. 다만 오라비인 제레미의 숙제를 대신하면서 갈증을 풀 뿐이었다. 셀레나는 자주 생각했다. 이제라도 루시아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면, 친구는 쓸쓸한 미소만을 지을 것같았다. 체념어린 미소를 보고싶지 않았다. 그러니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찬에 오기로 한 손님은 더없이 늦게 왔다. 코르셋을 입고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운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루시아를 보고 데미안은 상복같다고 생각했다. 죽은 아이의 일을 아직도 떠올리게 했다. 벌써 한 계절이 지난 일이었다. 불쾌함이 저 밑을 들끓었다. 저 여자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 빌어먹을 드레스는 버릴 수 없었나."

코르셋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루시아가 겨우 그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데미안은 루시아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우젠 대공 드십니다."

하우젠 대공이라면, 이국 나스의 자산가였다. 북부 영지, 넓은 대륙같은 영토를 관장'했던' 이였다. 그 안에 묻힌 자원을 생산해내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은, 그래서 그의 별명은 '겨울의 왕'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명성만을 들어봤지 실제로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나라는 공화정이어서 대륙 최초로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여성이 나라의 가신이 될 수 있었으며 투표로 국민들이 직접 총리를 뽑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혁명군을 대대적으로 지원한 전 국왕의 동생, 에이든 하우젠이었다. 대공이라는 과거의 이름은 국민들의 애칭같은 것이었고, 신분제가 아직 남아있는 제국에서나 편의를 위해 그렇게 불렀다. 귀족들에게 서열이란 목숨같았으므로. 흐릿해지던 의식 속에 익숙한 듯 낯선 음성이 들렸다.

"괜찮습니까, 공작 부인?"

아, 아까 도서관에서의 그.

고개를 들려고 했을 때 몸이 기우뚱했다. 루시아는 쓰러지지 않으려 얼른 의자에 앉으려고 했지만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루시아!"

데미안의 긴박한 목소리와 하인들의 움직임. 그 속에서 어쩐지 자신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대공의 눈빛이 보였다. 통증이 번져가는 와중에도 그 눈빛만은 선명하게 남았다. 바다같이, 깊고 푸른 눈이었다.

***

"왜 깨어나지 않는 것이냐!"

그가 소리쳤다. 루시아는 데미안의 저런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골이 울렸다. 그녀가 손짓으로 셀레나를 찾았다. 셀레나가 울먹이며 제 손에 물을 쥐어주었다.

"루시아!"

제발 소리치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벨루아의 주치의가 먼저 그를 말렸다.

"공작 부인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각하."

주치의를 보는 건 아이가 죽은 뒤 처음이었다. 더이상의 출산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그 말을 그녀에게 건네던 나이든 의사. 루시아는 그에게 내심 고마웠다. 데미안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하고 그에게 조금만 미루어달라고 한 것을 그대로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데미안. 정찬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건 물음이라기보다 손님에게로 돌아가라는 축객령이었다. 데미안이 황당한 낯을 했다. 이제껏 기다려주었더니 나가라니

"하우젠 대공이라면, 황제폐하께서 귀빈의 신분으로 공작저로 보내신 것이겠지요. 대우에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서 그에게로 가보세요."

데미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무생물 보듯이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인들이 어찌할바 모르는 표정을 지었고, 셀레나만이 루시아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꼴좋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셀레나. 들키면 어쩌려고."

그 표정이 우스워 루시아가 킥킥댔다. 편한 사람과 있을 때만 나오는 모습이었다.

"아무렴, 너한테 코르셋을 입힌 인간인데."

어릴 적부터 손님을 맞으라는 이유로 꾸미려고 코르셋을 입다가 종종 루시아가 졸도하는 모습을 봐왔기에 셀레나는 되도록이면 코르셋이 없는 나스의 드레스 유행이 취향이라는 핑계를 댔다. 어떻게든 루시아에게 코르셋을 입히지 않았다. 그랬는데 고작 공작의 한마디로 몇 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와중에 빌어먹을 드레스라니. 정말 마음에 안드는 인간이었다.

셀레나가 이를 가는 사이 루시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마 곧 제가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데미안의 귀에 들어가면, 원치 않아도 이 혼약은 파기될 것이었다. 그러면 저는 어디로 가게 될까. 제레미가 그녀를 백작저에 가만히 둘 것같지는 않았다. 수녀원?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아니면 늙은 귀족의 재취자리나 정부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루시!"

또 우울한 티를 낸 모양이었다. 셀레나의 얼굴이 슬퍼진 걸 보니.

"괜찮아. 셀리."

일부러 친구의 애칭을 부른 루시아가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이 따뜻함을 되도록 오래 느끼고 싶었다.

***

에이든은 데미안보다야 공작부인이 보고싶었다. 애초에 제국을 방문한 이유도 그때문이었으므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자마자 그녀를 보고 말을 걸었던 것인데, 아까 저녁 정찬에서의 모습을 보니 낮에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애초에 저를 기억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은 좀 어떻습니까?"

데미안이 입을 닦고 나서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며칠 안정을 취하면 된다고 합니다."

에이든은 벨루아 공작에게 사감은 없었다. 다만 루시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어설픈 사랑놀이때문에 손대기도 귀한 그녀가 내내 사교계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했다는 것도.

"이제는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미안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예리한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황궁을 놔두고 굳이 벨루아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에이든은 개인적 이유와 하우젠 대공으로서의 대외적 이유 두 가지중 후자만 말하기로 했다. 애초에 전자를 공작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공작가의 도서관과 미술관이 아름답다고 황후폐하께 추천 받아서요."

마리아 델레포트. 그 여자의 이름을 대면 데미안 벨루아는 입을 다문다. 외국인인 그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습니까."

데미안이 허탈한 듯 더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끝내는 한마디를 물었다.

"그 이외의 말은 없었습니까?"

"예."

대공은 굳이 두 사람의 오작교가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데미안에게 괴로운 밤을 선사할 용의는 확실했다. 그의 계획대로 데미안은 그날 밤을 꼬박 술로 지새웠다.

***

에이든은 그리운 시절을 회상했다. 나스에서 목숨을 위협받아 제국으로 잠시 몸을 은신했을 당시 만난 어린 소녀에 대해. 밤같이 요요히 빛나던 아이의 총명한 눈동자와 다정한 미소, 따뜻한 체온.

"디디!"

아이는 자주 굶었다. 귀족가 영애의 마르고 작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곤 해도 7살이었지만 4살처럼 보일 정도로 작았다. 에이든이 형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부상을 입고 국경 근처 아르테미스 백작저의 영지까지 겨우 도망쳤을 때, 결국 이대로 죽는 걸까 생각했을 때

저를 도운 것은 조막만한 일곱살짜리의 손이었다. 제 유모와 셀레나를 불러다 치료를 도왔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자신을 성도 없이 '루시'라고 소개했다. 처음에는 짧은 머리카락과 바지 차림새 탓에 남자 아이인줄 알았다가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남자아이에게 여자 아이 이름을 짓나? 하지만 퍽 잘어울렸다. 아이는 무척이나 예쁘장해서 여자아이로 착각할 뻔했으므로.

"너는?"

그는 평소처럼 에이든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힌 채 아명을 내놓았다.

"디디"

"디디!"

돌아가신 어머니 이후로 아무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을, 루시는 아주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불렀다. 그 애는 안그래도 절식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려는 착한 소녀였다.

"더 안먹어?"

루시가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엄마가 먹으면 안된대."

디디는 루시의 몫으로 남은 쿠키를 툭 베어물었다가 루시의 입에다 물려주었다.

"디디! 이러면 어떡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운이 없던 루시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먹어. 먹어도 안죽어. 너는 안빼도 돼."

다들 못났다고만 하는데 디디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막 살찌고 그러면. 그래서 아무에게도 청혼을 못받으면. 엄마가 슬퍼하실 거야."

루시의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좁은 새장안에서 아이는 만족하는 걸까. 제 눈동자를 닮았다던 나스의 바다를 보여주면 너는 어떻게 웃을까. 루시의 디디는 종종 무해한 낯을 하고서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루시는 그저 그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기만 했다. 디디는 연갈색 고수머리를 벅벅 긁다가 말했다.

"네가 살쪄도, 못생겨져도, 나이들어도 나는 네 친구일거야. 계속 곁에 있고 싶을 거야."

있을 거야가 아닌 있고 싶을 거야.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어째선지 귓가가 타오를 듯 뜨거웠지만 루시를 위해서라면, 괜찮았다.

루시가 크게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이야? 디디?"

"응. 정말."

이리저리 피가 묻은 제 옷을 대신해 평민의 옷으로 위장을 도와준 루시. 매일 제 간식을, 식사를 몰래 가지고 나와 뒷뜰에서 그를 기다리는 루시. 해질녘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마법같은 시간에 더없이 예쁜 루시의 색깔들. 에이든은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고 외톨이에 목숨을 위협받던 황궁 생활을 벗어나 처음으로 느낀 안온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나스의 황자가 아닌, 에이든 디트리히 하우젠이 아닌. 평민 소년, 루시의 영원한 친구 디디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하루살이가 목숨을 연장하듯 그녀와의 시간을 이어나갔다.

"디디. 그치만 디디는 너무 예쁜 걸."

루시가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비비적대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 탓에 안그래도 두근거렸던 가슴이 에이든의 귓가에 쿵쾅거렸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디디는 가을의 호밀밭같은 머리카락이랑, 바다같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너무 예뻐."

성마른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이대로,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 해도 좋았다. 디디는 그대로 루시를 끌어안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그가 어떻게 저항해볼 새도 없이 젖어들었다.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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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교환   37화 희뿌연 추억만으로도

    루시아가 그의 손을 잡아주며 천천히 말했다.“무슨 뜻이야?”루시아는 안다. 여자들의 미묘한 시선이 오가며 사교계에서 서로를 평가하는 순간을. 그렇게 짧은 순간에도 어떻게든 서로의 순위를 매겨야 생존한다는 걸 영특하게 알아듣는 이들이 에이든의 진심만으로는 이 귀신같은 악습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마 그가 피의 숙청을 해 혁명으로 공화정을 만든 것조차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모든 운때가 맞아떨어진 기적의 영역이라고 봐야 옳았다.“여자들은 예민해. 살려면 예민해야 하지. 귀족 여자들은, 적어도 제국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사랑받을지를 어릴 때부터 교육받으면서 자라.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속눈썹, 걸음걸이, 자세. 미소짓는 모습. 화장법. 손끝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올까지 살아 숨쉬는 것처럼.”에이든은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익숙하게 말하는 루시아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 순간 그의 앞에 있는 건 벨루아의 루시아였기 때문이다.“평민들이라고 덜할까? 귀족은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지. 하지만 평민은 아이를 직접 키워야 해. 셀레나의 어머니도 그랬어. 내 유모. 너도 알다시피. 집안일도 했고, 그 일로 품삭을 받고. 셀레나의 아버지가 노름을 하며 술에 절어 하루 종일 양육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손가락질 하지 않았지.”에이든은 가만히 점점 어두워지는 루시아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모든 여자들에게 있는 자기들만의 역사를 그가 목도하고 있는 것같았다.그는 절대 갈 수 없는 어떤 세계에, 루시아는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었다.“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들기까지 네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나는 몰라 디디.”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소 결연하게 말했다.“하지만 완벽할 필요는 없어. 그 누구도 흠이 없는 구슬일 수는 없어. 나아지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이라고 칭하지. 이전 상태보다 좋아지는 것.”그건 에이든이 내내 쫓아오던 어떤 강박에 대한 구원이기도 했다. 적어도 에드윈이 아니라면, 완벽하게 연기해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줘야

  • 남편교환   36화 네가 황제라고 해도

    루시아가 깨어났을 때에도 에이든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줄곧 이곳에 와서도 그가 바빠 내내 함께 있지 못했다.“디디.”그녀가 그의 뺨에 손을 갖다댔다.서늘한 감촉에 몸을 웅크리며 그녀의 이마에 무의식중에 입을 맞추는 그가 빙그레 눈을 감고 웃었다.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답해왔다.“루시.”분명 이렇게나 완벽한 행복인데 무언가가 잘못된 것같은 느낌은 무엇일까. 직감적으로 예민한 루시아는 이 성의 무언가 원래대로 흐르던 기운같은 것이 자신으로 인해 바뀌어 잘못 흐르고 있거나 막혔다고 생각했다. 사용인들의 표정은 밝았으나 어쩐지 루시아의 눈을 전부 다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고, 윌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곤 했다.벨루아에서 그토록 남의 시선에 지리멸렬하게 시달렸다는 걸 모르는 그에게는 루시아가 일찌감치 그걸 눈치챘으리라는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물어볼게 있어. 에이든.”그녀가 이렇게 본명을 부를 때면 그게 더 좋다가도 사실은 그 질문이 진지하거나 진중한 주제일 때가 많아 그는 루시아의 철없는 가짜 소년이었다가 다시 하우젠의 옛 대공 에이든 하우젠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뭔데?”“저택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내게 숨기는 것같아.”에이든의 잘 꾸며진 미소에 일견 금이 갔다. 루시아가 벗어두었던 가운을 입느라 등을 져서 몰랐을 뿐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어떻게 숨겨야 할 지 고민했다. 그때 티베리우스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네가 지키고 싶은 게 생기면 너도 가장 먼저 도려내고 싶어질 거다. 무언가를.’그건 내내 저를 괴롭혀온 문장이었다. 루시아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디디라고 말한 뒤로부터 계속.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자신은 그녀를 이곳에 데려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루시아는 레이루나의 착한 딸로 남아 벨루아에서 죽은 아이의 유골함을 닦으며 시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까.거짓말은 모여서 산이 된다. 산이 되면 그가 아무리 태산같은 존재가 되더라도 산그림자가 제 머리 위로 지면 가릴 수 없다.

  • 남편교환   35화 얼음장 위 천국

    반면 에이든은 한켠으로 불안을 겪고 있었다. 나다니엘로부터 주기적으로 벨루아의 반발 소식을 접하고 있었고, 저택 곳곳에 가려놓은 에드윈의 초상화를 어디로 숨겨야 할지 고민했다.그로서는 확신이 없었다. 루시아가 저를 사랑해줄 확신, 그리고 제가 에드윈이 그러니까 디디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사랑해줄 확신같은 것이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자신은 더러 사랑할만한 존재는 아니기는 했다.그릴 듯한 성군이 되어야만 백성들의 사랑을 받지만 그조차 그를 대체할 다른 이가 생기면 언제든 빼앗길 권력이고 자리였다.에이든은 애초에 그렇게 생각했다. 누워서 가만히 곤히 잠든 루시아의 숨소리를 들으면 온 세상이 평화로운 듯 고요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자주 생전에 티베리우스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와는 체스를 두고 있었다. 사실 그건 말이 체스지, 협상 자리였다. 걸린 판돈은 그의 몸뚱이. 목적은 오로지 에드윈의 안위였다.“체크메이트.”티베리우스가 이기게끔 에이든이 또 봐주자 붉은 머리카락의 그의 형이 질린다는 듯 피식 웃는다.“네 놈은 항상 그런 식이지.”“예?”“고작 잔병치레 많은 불량품같은 놈을 살리겠다고 제 신변을 판돈으로 거는 미친 놈이 많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이 나스에도, 제국조차도.”에이든은 이번 내기에서도 진 결과로 하우젠 령에 가게 될 것이었다. 대신 황궁에 남은 에드윈의 안전은 황제의 보증으로 지켜질 것이다. 더는 전처럼 독을 먹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면 되었다.황제는 아마도 제 후계가 된다면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 나스를 다스릴, 그리고 그의 저열한 열등감을 내내 자극하는 아름다운 자신의 동생을 바라봤다.“네가 황제가 되었더라면 어땠을 것 같으냐.”이 질문을 티베리우스 이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받게 된다는 걸 당시의 에이든은 몰랐다.선황이 양위를 할 때에 에이든은 일찌감치 타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린 상태였다. 티베리우스에게 모든 자리가 돌아가고 나서야 그것을 취소하고, 나스에 남았다. 다만 내내 밖으로만 돌았다.

  • 남편교환   34화 머지않은 날에

    루시아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날따라 에이든에게 일이 많아 그녀의 곁에서 침상을 지켜주지 못하고 그저 혼자 잠들어야 했는데 나스에 정확히는 하우젠 령에 와서는 처음인 일이었다. 그래서 였을까.아주 예전에, 이제는 잊어버린 오래된 일이 생각났다.오두막 문을 열었을 때 그 애가 없었다. 분명 몰래 준 외투도, 놓아둔 식사도 있었지만 내 소년만 없었다.밤이 지나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이 터올 때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그 애가 없으면 해가 뜨지 않는 것 아니었나, 그 애가 없는데 왜 세상이 돌아가지.뭔가 이상하다고 루시는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가서 제 소년을 내놓으라고 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저 막막한 공백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공허 속에 루시아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눈물을 흘렸다.그 자리에는 어느새 작은 관이 들어앉아 그녀의 품안에 있었다. 이게 누구의 관이지? 디디? 아니면 내 아이?루시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에이든이 벌떡 집무실에서 나와 그녀에게로 왔다.“루시!”루시아의 온몸이 식은땀이었다. 그리고 바라본 사내는 어쩐지 낯설었다. 꿈속에 바라본 어딘가 미려했던 디디와 달리 유달리 체격이 크고 골격이 남다른 에이든.분명 무언가 들여다보면 알 수 있었지만 루시아는 이 순간에는 그의 손이 필요했으므로 다만 그것을 외면했다.루시아는 어째서 그가 ‘겨울의 왕’인지 궁금했다. 물론 하우젠 령은 혹독한 기후를 갖추고 있으나 오히려 그런 기후 속에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했던 것이 옛 황자였던 에이든의 업적인데도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볼 때 매서운 정복군주같은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 신기했다.“내가 모르는 어떤 모습이라도 있는거야 디디?”새하얀 침대 위에서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후희를 즐기며 도리어 루시에게 되물었다.“예를 들면 어떤?”“사람들을 괴롭힌다거나.”그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기는 했다. 집요하게 제 귓가를 핥고 있었으니까.“그리고?”정작 에이든은 그런 질문들조차 귀엽다는 듯 가르릉대

  • 남편교환   33화 잠깐의 시한부

    그 애가 좋아하는 음식, 자주 입는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의 색, 걸음 걸이, 머리카락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열에 들떠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작은 제 동생의 발그스레한 얼굴은 분명 첫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그래서 에이든도 언젠가 루시아 아르테미스를 에드윈의 짝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애가 제 지병에 티베리우스의 연속된 독살 시도가 겹쳐 결국 세상을 뜰 때까지 몇 년 안되는 짧은 생애를 끝까지 다 살지도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나기 전까지.티베리우스가 집권 초기부터 폭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잘못은 없었지만 무능했던 게 문제였다.황제란 그런 자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으므로. 그럼에도 형제라는 이유로 에이든은 좀처럼 그를 놓지 못했다. 결심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윈이 파리한 안색으로 제 앞에 쓰러진 순간, 세상에 납득할 수 있는 죽음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제 오만을 깨달았을 때 그가 사람의 목숨을 숫자 놀음으로 취급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티베리우스가 망가뜨린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오히려 자신밖에 없음을 알고 움직였다. 이미 그가 가진 하나뿐인 가족을 잃고 난 후에야 그럴 수 있었다.그렇게 다 잃고 나서 황제의 좌에 앉을 일만 남았을 때에 그 무렵부터 에이든은 루시아의 환상을 봤다. 마치 에드윈이 주고간 것처럼 그가 그 시절의 ‘디디’였다는 듯이.소녀가 떠올렸다던 고대 도시 아고라. 그래, 그걸 만들어 주면 될까, 루시.그러니까 처음 그가 대륙 최초의 공화정을 만든 이유가 고작 한 여자 아이의 환영을 보고, 그녀에게 미쳐서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알려져서는 안되었으므로. 윌은 다만 에이든을 우려스럽게 바라볼 밖이었다.“부인께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는법입니다.”에이든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언제까지 비밀로 하겠나. 이미 눈물점이며, 어릴 때의 인상의 차이같은 것이며로 그가 때때로 어릴 적과 다르다는 말을 하곤 하는 루시아였다.총명한 사람이니 금세 그걸 알아낼 것이다. 하지만, 벨루아에서 죽어가는 여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

  • 남편교환   32화 에드윈 하우젠

    31화루시아는 오래 전 그에게 무엇을주었는지 알지 못함이 분명했다. 만약 안다면, 그의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순 없을 테니.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 황위 계승을 위한 종마 취급을 받던 날들이. 널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던 시절이.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먼 후일에 해도 괜찮을 것이었다. 적어도 에이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그녀에게 이렇게 갈무리했다.“내게 만약에 너같은 가족이 있었더라면 분명 나는 지금같이 말했을 거야.”가족.그러면 에이든은 어느 소년을 떠올리게 됐다. 그가 기어이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를 지우고 만 어느 아이의 얼굴이, 환한 웃음이 생각났다.그렇게 해서라도 옆자리를 차지한 자신을 보고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원망을 할까.반면 그 말에 루시아는 어딘가 맥이 빠지는 듯 하면서도 무언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압박감에서 한꺼풀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각자 생각하는 지점이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지만 상념에 빠지느라 그 차이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아까 설레이던 기분을 느꼈던 게 꿈 속 이야이인 것처럼 금세 서먹서먹해진 분위기로.***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뜨며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에이든의 잘짜인 근육과 그 위에 잔무늬처럼 자리한 자잘한 흉터들이 그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자신과 보냈던 그 나날 뒤에 그의 삶이 궁금했다.“디디, 국경을 넘어서 돌아간 뒤로 어떻게 했어?”에이든은 마치 이 상황을 오랫동안 준비한 그러니까 예전부터 대사를 준비해 외운 배우처럼 이야기를 읊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늘 도자기 인형을 연기했던 루시아가 아니고서야 절대로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나를 기다리던 가족들을 만나서 세력을 키우고, 다시 황좌를 뒤집고 네가 살아갈만한 땅을 만들었어.”그 고백은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해서 더 이상 나무랄 데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루시아는 무언가 계속해서 찝찝했다.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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