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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Author: 도수정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5 00:42:16

루시아는 벨루아 특유의 웅장한 저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제국에서도 손꼽힐만한 명작을 갖춘 저택의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 종일 식사를 않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최근, 자꾸 새벽에 깨어나 잠이 부족했던 건지 루시아는 도서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쪽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새소리와 창 밖으로 웅웅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 제 어깨 위에 겉옷을 얹어주는 게 느껴졌다. 셀레나인가. 무어라 말도 건넨 것같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대답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다정한 음성이라는 것만 기억했다.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마지막으로 저를 아주 못마땅해 했던 자안이었다.

"루시아."

그가 드물게 제 이름을 불렀다.

"손님이 왔소. 저녁 정찬을 함께 해야해."

또 코르셋을 입어야겠군. 저절로 싫다고 생각해서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루시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두고 나가버렸다. 루시아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어깨를 둘러싼 털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국의 양식은 아니었다. 금장이 박힌 것으로 보아 무척 신분이 높은 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걸 보고도 데미안은.

거기까지 미치려 드는 생각을 도중에 끊어 냈다. 루시아는 적어도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말자고 자주 되뇌었다. 양뺨을 힘껏 두드린 그녀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위태로운 듯 정확한 걸음으로.

저택의 대부분 사람들이 루시아의 편이 아니었으나 아르테미스 백작저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유모의 딸이자 유일한 친구, 셀레나는 변치 않는 루시아의 편이었다. 가을 호밀을 닮은 갈색 머리. 에메랄드를 닮은 초록눈. 이따금, 루시아는 셀레나가 남자였다면 단연코 데미안이 아닌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부인"

셀레나가 머리를 만져주며 물었다. 루시아는 역시 그녀를 못속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푸시시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셀레나 앞에서라면 그래도 된다. 오늘 중, 아니 어쩌면 며칠 만에 처음으로 지은 미소라는 걸 셀레나의 친구는 모를 것이다. 탐스러운 검은 머리, 남색에 가까운 검은 눈동자는 밤하늘을 연상케 했다. 새하얀 피부. 누가봐도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친구는 사실 코르셋도, 긴 머리도 싫어했다. 귀족적이지 않고 소탈했다. 그래서 평민인 자신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따금 셀레나는 루시아에게 혼자서라도 도망치라고 권했었다. 벨루아와의 결합도 반대했었다. 루시아는 모두에게 잘된 일이라고 했다. '그' 선대 백작조차 밉다고 표현한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었다. 평생 가족을 벗어나는 선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셀레나가 아는 한은 그랬다. 언제나 루시아의 삶에는 가족이 중심이었고, 어머니 레이루나를 향한 죄책감이 뼛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벨루아와의 결혼식 전날, 셀레나가 여태 모아온 비상금을 건넸다. 로브와 함께. 야심한 밤이었다.

"마차를 준비했어. 이대로 떠나자."

루시아는 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게 내 운명인가봐, 셀레나."

"그런 게 어딨어. 이럴 순 없어. 루시."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를 품에 안았다.

"오, 루시 이제라도 못하겠다고 해."

"나 그런 거 못해, 알잖아."

셀레나는 루시아보다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아이는 사내보다 남편될 이보다 뛰어나서는 안되어서 어떤 교육도 - 신부수업을 제하고-받지 못했다. 다만 오라비인 제레미의 숙제를 대신하면서 갈증을 풀 뿐이었다. 셀레나는 자주 생각했다. 이제라도 루시아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면, 친구는 쓸쓸한 미소만을 지을 것같았다. 체념어린 미소를 보고싶지 않았다. 그러니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찬에 오기로 한 손님은 더없이 늦게 왔다. 코르셋을 입고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운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루시아를 보고 데미안은 상복같다고 생각했다. 죽은 아이의 일을 아직도 떠올리게 했다. 벌써 한 계절이 지난 일이었다. 불쾌함이 저 밑을 들끓었다. 저 여자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 빌어먹을 드레스는 버릴 수 없었나."

코르셋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루시아가 겨우 그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데미안은 루시아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우젠 대공 드십니다."

하우젠 대공이라면, 이국 나스의 자산가였다. 북부 영지, 넓은 대륙같은 영토를 관장'했던' 이였다. 그 안에 묻힌 자원을 생산해내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은, 그래서 그의 별명은 '겨울의 왕'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명성만을 들어봤지 실제로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나라는 공화정이어서 대륙 최초로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여성이 나라의 가신이 될 수 있었으며 투표로 국민들이 직접 총리를 뽑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혁명군을 대대적으로 지원한 전 국왕의 동생, 에이든 하우젠이었다. 대공이라는 과거의 이름은 국민들의 애칭같은 것이었고, 신분제가 아직 남아있는 제국에서나 편의를 위해 그렇게 불렀다. 귀족들에게 서열이란 목숨같았으므로. 흐릿해지던 의식 속에 익숙한 듯 낯선 음성이 들렸다.

"괜찮습니까, 공작 부인?"

아, 아까 도서관에서의 그.

고개를 들려고 했을 때 몸이 기우뚱했다. 루시아는 쓰러지지 않으려 얼른 의자에 앉으려고 했지만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루시아!"

데미안의 긴박한 목소리와 하인들의 움직임. 그 속에서 어쩐지 자신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대공의 눈빛이 보였다. 통증이 번져가는 와중에도 그 눈빛만은 선명하게 남았다. 바다같이, 깊고 푸른 눈이었다.

***

"왜 깨어나지 않는 것이냐!"

그가 소리쳤다. 루시아는 데미안의 저런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골이 울렸다. 그녀가 손짓으로 셀레나를 찾았다. 셀레나가 울먹이며 제 손에 물을 쥐어주었다.

"루시아!"

제발 소리치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벨루아의 주치의가 먼저 그를 말렸다.

"공작 부인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각하."

주치의를 보는 건 아이가 죽은 뒤 처음이었다. 더이상의 출산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그 말을 그녀에게 건네던 나이든 의사. 루시아는 그에게 내심 고마웠다. 데미안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하고 그에게 조금만 미루어달라고 한 것을 그대로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데미안. 정찬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건 물음이라기보다 손님에게로 돌아가라는 축객령이었다. 데미안이 황당한 낯을 했다. 이제껏 기다려주었더니 나가라니

"하우젠 대공이라면, 황제폐하께서 귀빈의 신분으로 공작저로 보내신 것이겠지요. 대우에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서 그에게로 가보세요."

데미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무생물 보듯이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인들이 어찌할바 모르는 표정을 지었고, 셀레나만이 루시아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꼴좋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셀레나. 들키면 어쩌려고."

그 표정이 우스워 루시아가 킥킥댔다. 편한 사람과 있을 때만 나오는 모습이었다.

"아무렴, 너한테 코르셋을 입힌 인간인데."

어릴 적부터 손님을 맞으라는 이유로 꾸미려고 코르셋을 입다가 종종 루시아가 졸도하는 모습을 봐왔기에 셀레나는 되도록이면 코르셋이 없는 나스의 드레스 유행이 취향이라는 핑계를 댔다. 어떻게든 루시아에게 코르셋을 입히지 않았다. 그랬는데 고작 공작의 한마디로 몇 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와중에 빌어먹을 드레스라니. 정말 마음에 안드는 인간이었다.

셀레나가 이를 가는 사이 루시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마 곧 제가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데미안의 귀에 들어가면, 원치 않아도 이 혼약은 파기될 것이었다. 그러면 저는 어디로 가게 될까. 제레미가 그녀를 백작저에 가만히 둘 것같지는 않았다. 수녀원?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아니면 늙은 귀족의 재취자리나 정부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루시!"

또 우울한 티를 낸 모양이었다. 셀레나의 얼굴이 슬퍼진 걸 보니.

"괜찮아. 셀리."

일부러 친구의 애칭을 부른 루시아가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이 따뜻함을 되도록 오래 느끼고 싶었다.

***

에이든은 데미안보다야 공작부인이 보고싶었다. 애초에 제국을 방문한 이유도 그때문이었으므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자마자 그녀를 보고 말을 걸었던 것인데, 아까 저녁 정찬에서의 모습을 보니 낮에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싶었다. 애초에 저를 기억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은 좀 어떻습니까?"

데미안이 입을 닦고 나서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며칠 안정을 취하면 된다고 합니다."

에이든은 벨루아 공작에게 사감은 없었다. 다만 루시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어설픈 사랑놀이때문에 손대기도 귀한 그녀가 내내 사교계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했다는 것도.

"이제는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미안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예리한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황궁을 놔두고 굳이 벨루아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에이든은 개인적 이유와 하우젠 대공으로서의 대외적 이유 두 가지중 후자만 말하기로 했다. 애초에 전자를 공작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공작가의 도서관과 미술관이 아름답다고 황후폐하께 추천 받아서요."

마리아 델레포트. 그 여자의 이름을 대면 데미안 벨루아는 입을 다문다. 외국인인 그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습니까."

데미안이 허탈한 듯 더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끝내는 한마디를 물었다.

"그 이외의 말은 없었습니까?"

"예."

대공은 굳이 두 사람의 오작교가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데미안에게 괴로운 밤을 선사할 용의는 확실했다. 그의 계획대로 데미안은 그날 밤을 꼬박 술로 지새웠다.

***

에이든은 그리운 시절을 회상했다. 나스에서 목숨을 위협받아 제국으로 잠시 몸을 은신했을 당시 만난 어린 소녀에 대해. 밤같이 요요히 빛나던 아이의 총명한 눈동자와 다정한 미소, 따뜻한 체온.

"디디!"

아이는 자주 굶었다. 귀족가 영애의 마르고 작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곤 해도 7살이었지만 4살처럼 보일 정도로 작았다. 에이든이 형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부상을 입고 국경 근처 아르테미스 백작저의 영지까지 겨우 도망쳤을 때, 결국 이대로 죽는 걸까 생각했을 때

저를 도운 것은 조막만한 일곱살짜리의 손이었다. 제 유모와 셀레나를 불러다 치료를 도왔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자신을 성도 없이 '루시'라고 소개했다. 처음에는 짧은 머리카락과 바지 차림새 탓에 남자 아이인줄 알았다가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남자아이에게 여자 아이 이름을 짓나? 하지만 퍽 잘어울렸다. 아이는 무척이나 예쁘장해서 여자아이로 착각할 뻔했으므로.

"너는?"

그는 평소처럼 에이든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힌 채 아명을 내놓았다.

"디디"

"디디!"

돌아가신 어머니 이후로 아무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을, 루시는 아주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불렀다. 그 애는 안그래도 절식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려는 착한 소녀였다.

"더 안먹어?"

루시가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엄마가 먹으면 안된대."

디디는 루시의 몫으로 남은 쿠키를 툭 베어물었다가 루시의 입에다 물려주었다.

"디디! 이러면 어떡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운이 없던 루시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먹어. 먹어도 안죽어. 너는 안빼도 돼."

다들 못났다고만 하는데 디디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막 살찌고 그러면. 그래서 아무에게도 청혼을 못받으면. 엄마가 슬퍼하실 거야."

루시의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좁은 새장안에서 아이는 만족하는 걸까. 제 눈동자를 닮았다던 나스의 바다를 보여주면 너는 어떻게 웃을까. 루시의 디디는 종종 무해한 낯을 하고서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루시는 그저 그의 속도 모르고 해맑게 웃기만 했다. 디디는 연갈색 고수머리를 벅벅 긁다가 말했다.

"네가 살쪄도, 못생겨져도, 나이들어도 나는 네 친구일거야. 계속 곁에 있고 싶을 거야."

있을 거야가 아닌 있고 싶을 거야.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어째선지 귓가가 타오를 듯 뜨거웠지만 루시를 위해서라면, 괜찮았다.

루시가 크게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이야? 디디?"

"응. 정말."

이리저리 피가 묻은 제 옷을 대신해 평민의 옷으로 위장을 도와준 루시. 매일 제 간식을, 식사를 몰래 가지고 나와 뒷뜰에서 그를 기다리는 루시. 해질녘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마법같은 시간에 더없이 예쁜 루시의 색깔들. 에이든은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고 외톨이에 목숨을 위협받던 황궁 생활을 벗어나 처음으로 느낀 안온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나스의 황자가 아닌, 에이든 디트리히 하우젠이 아닌. 평민 소년, 루시의 영원한 친구 디디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하루살이가 목숨을 연장하듯 그녀와의 시간을 이어나갔다.

"디디. 그치만 디디는 너무 예쁜 걸."

루시가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비비적대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 탓에 안그래도 두근거렸던 가슴이 에이든의 귓가에 쿵쾅거렸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디디는 가을의 호밀밭같은 머리카락이랑, 바다같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너무 예뻐."

성마른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이대로,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 해도 좋았다. 디디는 그대로 루시를 끌어안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그가 어떻게 저항해볼 새도 없이 젖어들었다.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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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흗날 아침이 밝았다. 브리짓은 지난 이틀 내내 그랬던 것처럼 아주 편안하고 말간 낯으로 루시아의 앞에 섰다.“루시.”그 사이 두 사람은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응, 언니.”“잘 지내.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카의 출생 과정을 볼 수는 없을 것을 알았기에 브리짓은 다만 그저 건강하라고 했다.루시도 그걸 알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슬퍼서 눈물이 쏟아질 것같았지만 티내지 않기로 했다. 아주 편안하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헤어지고, 언젠가 된다면 그녀의 장례식에 참여해 그렇게 그녀를 보내줘야지.루시는 문득 생각난 것을 말하듯 브리짓에게 덧붙였다.“언니, 그때 나더러 왜 아버지 앞을 막아섰냐고 했잖아.”브리짓이 첫날의 기억이 생각이 난 듯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우울한 기억이었다. 그녀가 저를 동정했다고 하는 것은. 그런데 루시아가 덧붙인 말은 놀라웠다.“나같아서 그랬어. 고작 이 좁은 새장에 갇혀 내내 남자들 때문에 삶이 휘둘리는 게 나 같아서. 그렇게 예쁘고 똑똑한 사람인데, 브리짓 언니는. ”브리짓이 또 울기 시작했다. 또르륵 흐르던 눈물이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루시아는 당황하여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정작 건넨 것이 아이를 위해 만들어둔 가제 수건이라 그녀가 수를 놓은 것이었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아, 그건 아이 때문에 만든 건데.”루시아가 부연설명을 하려고 하자 브리짓이 아주 환하게 웃으며 루시아에게 말했다.“내가 가져도 되겠니, 이것?”수많은 구혼자에게 어떤 금은 보화를 받았을 때에도 저런 표정은 아니었다. 루시아는 문득 브리짓의 저런 환한 미소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고작 그걸로 되겠어?”못생긴 꽃 한 송이를 수놓은 손수건이었다. 그런데도 브리짓이 그걸 양손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꼭 껴안고 있어서 루시아는 어쩐지 부끄러웠다.“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고.”브리짓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너무 기뻐.”순수하게 그렇게 기

  • 남편교환   78화 대학에 가기로 했어.

    “생활은 어떠니? 사람들은 잘해주고?”“아, 언니. 음......”브리짓이 어떻게 생각할까, 순간적으로 루시아는 망설였다. 귀족으로 평생을 살아온 브리짓이 야간대학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래도 좋은 소식이니까 브리짓에게도 전하고 싶었다.“나, 야간 대학에 다니기로 했어. 오는 봄에.”야간 대학? 브리짓이 귀를 의심했다. 그렇다면 공부를 이어서 하겠다는 뜻인가? 아니 애초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이어서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은.“그렇구나. 드디어, 할 수 있게 됐구나.”브리짓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평생 자신으로 인해 스스로를 하자품처럼 여기기만 했을 아이가 우뚝선 나무처럼 듬직하게 자라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곁에는 이제 그녀만의 사람들이 있었다. 더는 벨루아에서처럼 그녀가 자신같아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무슨 공부가 하고 싶니?”고작 야간 대학에 다니겠다는 말 한다미에 이렇게 오열을 할줄은 몰랐던 루시아가 브리짓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사회사업. 여성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공부해보려 해.”훗날 사회복지가 되는 분야의 그 이전 이름이었다. 루시아의 말에 브리짓이 그것 또한 그녀 답다며 방긋 웃었다. 하우젠 령에 온 뒤로 아니 어쩌면 그녀가 올해에 가장 환하게 웃는 걸지도 몰랐다. 진심으로.루시아는 고작 자신이 대학에 간다는 이야기에 그토록 우는 브리짓을 보며 복잡다단한 심정으로 침실에 왔다. 이미 다 씻고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에이든이 어느새 지나간 사흘 동안의 이야기를 물었다.일부러 언니와 시간을 보내라며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있던 그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가 밤에도 조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족하다고 하는 만큼 루시아가 채워줘야 했다.“어땠어, 루시?”그가 새하얀 베개를 베고 루시아에게 팔을 내어준 채로 물었다.“음, 어떤 게 궁금한데?”루시아가 물으니 그가 조심스레 덧붙였다.“......싸우거나 괴롭히지는 않아?”브리짓이 아직도 그런 인상으로 남았나. 처형이라고 부를 땐 언제

  • 남편교환   77화 진통제

    브리짓은 셀레나가 돌아가고 나면 루시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다 늘어놓을 것을 알았다. 애초에 그렇게 앵무새처럼 떠들어대기만 하는 아이였으니,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그게 제 동생에게는 좋은 시녀를 둔 셈이니 더 낫긴 했다. 정작 바보같은 자신의 동생은 셀레나를 두고 친구라고 말하겠지만. 그 점이 자신과 루시아가 다른 점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자신이 어둠 속에 있어도 저를 구하러 와줄 하우젠 대공 같은 백마탄 왕자나 셀레나 같은 사람이 없는 거겠지. 하물며 레이루나같은 어머니조차도.문득 그 사실이 서러워 눈물이 흘렀다. 루시아가 자신을 동정했다는 사실보다 그저, 스스로가 비참해 무너지기도 했다.그러던 그녀에게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하우젠 대공이었다. 그는 지독한 수면초 향에 눈살을 찌푸리며 들어왔다.“이정도일 거라고는 몰랐습니다만. 황후도 참 지독한 여자군요.”이미 공공연하게 귀족 사회에 아서 남작부인의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있을 텐데도 일부러 그녀를 보낸 마리아 지젤이라는 여자는 그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악질인 것이 분명했다.“그런 걸 말하려고 온 건 아닐텐데요. 대공.”“의사를 불렀습니다.”저택의 주치의를 동반하고 나타난 그가 그녀가 진찰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의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이미 손 쓸 단계를 지났다고 했잖아요.”브리짓이 이것 보라는 듯 팔을 들어 짓무른 피부를 보여주었다.면보를 쓴 에이든이 브리짓에게 물었다.“그렇다면 적어도 마지막으로 멀쩡하게 동생과 추억을 쌓고 싶지는 않으십니까?”그가 듣기로는 내내 서로 반목하느라 제대로된 추억 하나 쌓지 못한 자매 사이라고 들었다. 루시아는 그걸 내내 아쉬워했고, 브리짓도 아마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라도 루시아를 보려고 그래야 안심이 되어서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있다면 나름 있었다.“젠슨, 그녀가 하우젠 령에 머물 동안 통증을 줄일 방법이 있나.”주치의에게 물으니 그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레 말했다.“아

  • 남편교환   10화 당신이 주지 못한 전부

    데미안은 여자의 텅 빈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저택에는 껍데기만 남은 듯 했다.“외국인을 고를 줄은 몰랐는데.”대공을 두고 한 말이었다. 루시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 변화가 데미안의 분노를 부채질 했다.“그 남자가 대공비의 자리라도 준다던가?”나스가 비록 신분제를 폐지했을지 언정 사람들에게 관습적으로는 계급의식이 남아있었다.“당신이 주지 못한 전부를 주기로 했죠.”루시아가 비릿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인형 같기만 하던 여자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나. 그건 데미안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하우젠 대공때문이었다

  • 남편교환   9화 모든 걸 제자리로

    데미안은 루시아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려 했으나 번번히 셀레나에게 막혔다. 일개 시녀가 제 앞을 막다니, 말도 안됐다. 그러자 더 험악한 표정의 하우젠 대공이 벨루아 공작부인의 방에서 나왔다.데미안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혼하자던 이유가 눈앞의 남자 때문이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탓이었다.“환자의 방에 들이닥치려거든 나부터 꺾어야 할 겁니다. 공작.”분명, 경어였는데도 욕지거리를 들은 것처럼 불쾌함이 치솟았다. 에이든은 신분으로 상대를 누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아를 위해서 그가 못할 일은 없

  • 남편교환   8화 오지 않는 왕자

    루시아가 통보하듯이 그에게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뒤로 감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에게 훤히 속을 들킬까봐 두려웠다.언제나 꿰뚫어보는 듯한 보라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저를 끝까지 따라붙는 것같았다. 방으로 뛰어오다시피 한 루시아가 문을 닫자마자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앉았다.놀란 셀레나가 루시아에게 달려왔다."루시!"품안에 손수건으로 루시아의 땀을 닦아 주었다."괜찮아. 셀리, 나 데미안한테 말했어."식은땀을 흘리던 루시아가 그렇게 말하곤 다시 쓰러졌다. 몸살이었다.더러 악몽을 꿨다. 이미 지나간 시절, 오래된

  • 남편교환   11화 단발머리 루시아

    덜덜 떨리는 어깨와 루시아의 것처럼 하얗게 질린 낯빛은 마치 루시아가 비참한 일이라도 겪은 것처럼 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래, 레이루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백금발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제레미가 물려받은 레이루나의 백금발과 달리 까마귀처럼 검기만한 부친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싫었다. 제레미가 자꾸만 루시아가 백작을 닮았다고 할 때마다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을까봐 스스로를 내리누르고 깎았다. 그럼에도 진한 혐오감은 어쩔 수 없었다. 정작 아르테미스 백작을 갈수록 닮아가는 건 제레미 였는데도.“루시. 황제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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