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것마저 귀여워 디디가 푸흐흐 웃자 루시도 같이 웃었다. 셀레나는 곁에서 미소지으며 둘을 지켜봤다. 루시가 저렇게 마음 편하게 웃는 걸 언제 보았나. 친구로서 디디라는 소년이 너무 고마웠다.
그는, 점점 돌아가지 않을 생각도 했다. 제국으로의 망명을 생각했다. 루시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를 따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두고온 이들은 살아있을까? 고작 열 살짜리 소년을 믿고 목숨을, 충성을 바치던 어리석은 그의 사람들은.
루시는 종종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걸 알았다. 배우지 않아도 보았다. 원체 영특한 아이였다. 디디는 루시를 오래 속일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꼭 오늘같은 가을이었다.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여름날 소년이 흘린 구슬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던 루시가 이제는 그의 곁에서 숄을 걸치고 앉아있었다.
"디디, 가야 해?"
망설이다가 물은 물음이었다. 반년 가량 숨어지냈다. 그를 찾는 이들도 그의 생사를 더이상 확신하지 못할 시간. 추적자들이 방심한 시간. 이때에 돌아가야 했다.
"......"
하지만, 루시가 남아달라고만 한다면. 그는 남을 작정이었다. 그의 의미는 모두 그녀의 옆에서 생겨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얻은 두번째 생은 모조리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루시가 쓸쓸하게 웃었고, 마침내 그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디디는, 아니 에이든은 둘 사이의 추억을 가슴속에 품고 조국으로 떠났다.
그 뒤로는 모두가 살아돌아온 소년이 어딘가 미쳤다고 부르는 나날이었다. 혁명군을 지원하고, 반란을 도모했다. 그러나 그는 황좌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공화정이었다. 그의 사람들조차 반대했던 것. 이 사회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 하지만 루시가 그랬다.
"옛날 고대사회에는 공화정이라는 게 있어서 광장에서 사람들이 토론하면서 나라의 문제를 결정했대."
"그렇구나."
아고라의 이야기구나. 황제학 수업 때 지겹게 들었던 디디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는데 어쩐지 시무룩한 루시가 덧붙였다.
"근데 외국인이나 노예나 여자는 시민이 될 수 없었대."
디디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오래된 시절에조차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던 루시의 성별은, 지금도 그녀를 새장에 가둬두었다.
"디디, 세상에 여자가 사람인 나라도 있을까?"
루시가 물었다. 디디는 그의 편견이 깨지는 걸 느꼈다.
"왜, 그런 나라면 루시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디디가 선뜻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물었다. 설마 그럴리가 없겠지.
"그런 나라라면, 살고 싶지 않을까?"
"어?"
"코르셋도 안입어도 되고, 밥도 많이 먹어도 되고, 구두도 안신고 드레스도 안신어도 되면, 시민이 될 수 있으면, 그거 다 안해도 된다며."
디디는 루시에게 그렇게 말했다. 인간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아직 작고 어린 루시가 이해하기 어려울 그것들을 그녀의 세상과 생활에 빗대어 알기 쉽게 말해주었다. 그저 어린 아이의 변덕일 수 있으나 루시가 남긴 바람같은 이야기는 에이든에게 목표를 주었다. 루시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루시가 살고 싶은 나라. 여성도 시민인 아고라를 재현하자. 그러려면 가장 먼저 없애야 할 것은 왕정이었다. 타락한 부황과 친동생의 목숨도 노리는 황태자. 그가 만들어갈 세계에는 필요 없는 이들이었다. 애초에 황실이 필요없었으므로.
나스에 돌아갔다. 내쫓기듯 북부로 갔지만 그곳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부와 명예와 권력을 쌓아, 겨울의 왕이 되었다. 혁명을 일으켰고 성공했다. 이제 그에게는 국민들에게 구왕정시대의 '대공'이라는 애칭만이 남았다. 모든 게 끝나면 루시를 데리러 가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벨루아와 아르테미스의 결합에 대한 소식은 나스에도 전해졌고, 에이든이 급하게 제국으로 향했지만 결혼을 막을 순 없었다. 백작부인인 레이루나의 방해가 있었다. 이미 디디와 루시의 만남을 알고도 방관했던 그녀였다.
결국 그는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그가 너무도 보고싶었던 성인이 된 루시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는 걸 목도하고야 말았다. 그가 스물, 루시아가 열 일곱이던 해의 일이었다.
그것마저 귀여워 디디가 푸흐흐 웃자 루시도 같이 웃었다. 셀레나는 곁에서 미소지으며 둘을 지켜봤다. 루시가 저렇게 마음 편하게 웃는 걸 언제 보았나. 친구로서 디디라는 소년이 너무 고마웠다.그는, 점점 돌아가지 않을 생각도 했다. 제국으로의 망명을 생각했다. 루시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를 따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두고온 이들은 살아있을까? 고작 열 살짜리 소년을 믿고 목숨을, 충성을 바치던 어리석은 그의 사람들은.루시는 종종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걸 알았다. 배우지 않아도 보았다. 원체 영특한 아이였다. 디디는 루시를 오래 속일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꼭 오늘같은 가을이었다.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여름날 소년이 흘린 구슬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던 루시가 이제는 그의 곁에서 숄을 걸치고 앉아있었다."디디, 가야 해?"망설이다가 물은 물음이었다. 반년 가량 숨어지냈다. 그를 찾는 이들도 그의 생사를 더이상 확신하지 못할 시간. 추적자들이 방심한 시간. 이때에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루시가 남아달라고만 한다면. 그는 남을 작정이었다. 그의 의미는 모두 그녀의 옆에서 생겨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얻은 두번째 생은 모조리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루시가 쓸쓸하게 웃었고, 마침내 그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디디는, 아니 에이든은 둘 사이의 추억을 가슴속에 품고 조국으로 떠났다.그 뒤로는 모두가 살아돌아온 소년이 어딘가 미쳤다고 부르는 나날이었다. 혁명군을 지원하고, 반란을 도모했다. 그러나 그는 황좌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공화정이었다. 그의 사람들조차 반대했던 것. 이 사회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 하지만 루시가 그랬다."옛날 고대사회에는 공화정이라는 게 있어서 광장에서 사람들이 토론하면서 나라의 문제를 결정했대.""그렇구나."아고라의 이야기구나. 황제학 수업 때 지겹게 들었던 디디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는데 어쩐지 시무룩한 루시가 덧붙였
루시아는 벨루아 특유의 웅장한 저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제국에서도 손꼽힐만한 명작을 갖춘 저택의 미술관이나 도서관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 종일 식사를 않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최근, 자꾸 새벽에 깨어나 잠이 부족했던 건지 루시아는 도서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쪽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새소리와 창 밖으로 웅웅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누군가 제 어깨 위에 겉옷을 얹어주는 게 느껴졌다. 셀레나인가. 무어라 말도 건넨 것같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대답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다정한 음성이라는 것만 기억했다.눈을 떴을 때 마주한 건 마지막으로 저를 아주 못마땅해 했던 자안이었다."루시아."그가 드물게 제 이름을 불렀다."손님이 왔소. 저녁 정찬을 함께 해야해."또 코르셋을 입어야겠군. 저절로 싫다고 생각해서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루시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두고 나가버렸다. 루시아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어깨를 둘러싼 털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국의 양식은 아니었다. 금장이 박힌 것으로 보아 무척 신분이 높은 자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2화이걸 보고도 데미안은.거기까지 미치려 드는 생각을 도중에 끊어 냈다. 루시아는 적어도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말자고 자주 되뇌었다. 양뺨을 힘껏 두드린 그녀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위태로운 듯 정확한 걸음으로.저택의 대부분 사람들이 루시아의 편이 아니었으나 아르테미스 백작저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유모의 딸이자 유일한 친구, 셀레나는 변치 않는 루시아의 편이었다. 가을 호밀을 닮은 갈색 머리. 에메랄드를 닮은 초록눈. 이따금, 루시아는 셀레나가 남자였다면 단연코 데미안이 아닌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죠, 부인"셀레나가 머리를 만져주며 물었다. 루시아는 역시 그녀를 못속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푸시시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셀레나 앞에서라면 그래도 된다
언제나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머니, 레이루나가 부채로 제 표정을 능숙하게 가리며 물었다."루시, 아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니?"그녀가 아주 걱정스럽단 듯이, 루시아의 손을 애절하게 잡으며 말했다. 어릴 적 그녀가 꾸미지 않을 거라고 했을 때, 코르셋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다고 했을 때. 레이루나는 젊었을 적 꾸미지 않으면 언젠가 루시아가 후회할 거라고 했다. 아마도 백작부인으로서의 경험에 비롯하여 조언을 해준 것같았으나 루시아를 위한 말은 아니었다.루시아 아르테미스, 언젠가 팔아치울 백작가의 귀한 상품을 위한 말이었다.인형같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가 말했다. 어머니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그이가 워낙 바빠서요. 어머니. 둘 사이의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어요."루시아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했다. 아버지인 아르테미스 백작은 주사가 있었다. 여자도 밝혔다. 정부를 들이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레이루나는 아이들, 루시아와 아들 제레미를 위해 참고 버텼다. 불면증도 그때 생겼다.어딘가 의문스러운 마차사고로 아버지가 죽고, 제레미가 백작위를 이었다. 그 뒤로 레이루나의 삶은 전보다 자유로웠다. 백작인 아들. 공작부인인 딸. 선대백작부인인 저의 신분, 넘지는 재산. 남편에게 얽메이지 않는 삶. 그건 사실 이 제국의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결말이었다.때때로 루시아는 어렴풋이 레이루나의 삶이 부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루시아가 데미안의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그가 행복했으면 했다. 매일 황궁으로 출근하는 그가 황후의 정원이 있는 방향으로 몇 분간 시선을 준다는 것은 이미 사교생활이 전무한 그녀의 귀에도 들어올법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예전이라면 질투라도 났겠으나 오르지 못할 나무인걸 너무도 잘 알게된 지금은, 오히려 그가 그걸로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름도 없는 아이는 언젠가부터 제 속에 생긴 자그마한 폐허에 묻어두고 늘 그래왔듯 루시아 혼자 기도를 올리고 애
그녀는 자주 지쳤다는 말로 모든 걸 대신했다. 원망스럽거나 상대가 실망스러울 때, 그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나도 커져서 가끔 그녀의 사랑을 역전해버릴 때. 그러니까 그녀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 당했던 것들을 모두 감당할 수가 없을 때. 마치 노인 같은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도망가고 싶다느니, 지쳤다느니 하는 말로 제 속을 표현하곤 했다.지쳤다는 말은 쉬고 나면, 잠시 어딘가로 도망가고 나면, 그러다 그 자리로 돌아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어찌되었거나 제 자리는 그의 곁이었으므로. 루시아 아르테미스 벨루아는 데미안 벨루아의 아내요, 제국의 단 둘뿐인 공작가의 공작 부인이었다. 비록 결혼 전에 데미안이 얼마나 지금의 황후인 마리아를 사랑했는지 전제국민이 다 알고 있고 모든 신문에 그 모습이 영원히 박제되었다고 해도, 가문에서 루시아를 팔아치우듯 공작가에 넘겼다는 것도 공작저의 사용인 중 누구도 그녀를 진정한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나가던 개가 알았다고 해도.***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의 문턱에 닿을 무렵이었다. 나무는 여전히 녹음으로 푸르렀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진 바람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루시아는 사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했다. 데미안이 태어났고, 그들이 결혼한 시기였다. 그래서 풀벌레가 우는 저녁이면, 고요하게 앉아 테라스에서 밖을 바라보며 행복하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녀의 곁에 그의 마음은 없었으나 그의 곁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어서 그 답답한 집을 떠나 공작부인이라는 조금 더 넓고 반짝이는 새장에 올 수 있어서. 아마 그녀에게 이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었으리라.짧은 머리를 동경했고, 꾸미는 것보단 자연스러운 게 좋았다. 이를테면 나무 그늘 아래 흙바닥에 주저앉아 드레스가 엉망이 되어도, 머리가 바람결에 망가져도 신경쓰지 않는 쪽이 루시아다웠다.유별난 아이라고들 했다. 어머니인 레이루나와도 다르고, 여느 귀족가의 영애들하고도 달라서. 그건 어떨 땐 저가 가장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