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안에는 남편이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만년필이 들어 있었고, 하윤은 그 펜을 사기 위해 자신의 그림 작업에 사용할 재료비 일부를 미뤄 두었다.
시혁은 이미 비슷한 만년필을 여러 개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하윤은 그가 매장에서 그 제품을 오래 바라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바람을 기억하는 일이 그녀에게는 기쁨이었다.
하윤은 만년필 상자에 얇은 리본을 묶은 뒤 식탁 한쪽에 내려놓았다. 포장지 안에는 직접 쓴 카드도 넣어 두었다.
*삼 년 동안 고마웠어요. 앞으로는 우리도 다른 부부들처럼 함께 사진을 찍고, 함께 웃고, 서로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카드를 쓰면서 하윤은 잠시 망설였다.
시혁은 결혼 이야기를 밖에서 꺼내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집 안에서는 자신을 아내라고 부르면서도 회사 행사나 공식 모임에는 단 한 번도 동반하지 않았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동안에는 하윤이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남편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조금 욕심을 내고 싶었다.
결혼한 지 삼 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자신을 아내라고 소개해 달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의 곁에 설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윤은 카드를 상자 안에 넣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건네려던 선물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
오후 여섯 시가 지나자 하윤은 요리를 한 번 더 데웠다.
일곱 시가 되자 촛불을 켤까 망설이다가 남편이 도착한 뒤 켜기로 했고, 여덟 시가 넘어서는 음식이 마르지 않도록 뚜껑을 덮었다.
휴대전화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없었다.
하윤은 시혁의 회사 일정이 늦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남편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계약이나 이사회가 있는 날에는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날에는 지친 얼굴로 넥타이부터 풀어 던지곤 했다.
하윤은 그때마다 따뜻한 물을 준비하고 식사를 다시 차려 주었다.
오늘도 그러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결혼기념일이라는 말을 한 번쯤 더 듣고 싶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잠시 후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통화 못 해.*
하윤은 답장을 입력하다가 지웠다.
*알겠어요. 조심히 들어와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그녀는 소파 옆에 놓인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최근 작업 중인 그림의 구도를 조금 더 다듬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필을 잡은 손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빈 종이를 바라보는 동안 자꾸만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혁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작은 화실에 들어온 그는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다가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고, 하윤이 자신이라고 대답하자 뜻밖이라는 듯 웃었다.
그날 시혁은 그녀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이후에도 화실을 찾아왔고,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리는 하윤의 뒤에 서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머리 길러 봐.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그 말이 좋아 하윤은 오랫동안 유지하던 짧은 머리를 길렀다.
시혁이 밝은 색 옷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에는 검은 옷을 조금씩 정리했고, 그가 선물한 향수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향이라고 믿으며 매일 사용했다.
그에게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윤은 스케치북을 덮었다.
그때 휴대전화 화면에 뉴스 알림이 떴다.
**[속보] 세강그룹 강시혁 전무, 백림그룹 백유리와 공식 약혼 발표**
하윤은 처음에 이름을 잘못 본 줄 알았다.
남편과 동명이인일 수도 있었다. 혹은 기자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기사로 쓴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알림을 눌렀다.
기사 첫머리에 남편의 사진이 있었다.
시혁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긴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하윤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했다.
사진 속 남자는 틀림없이 자신의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손은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하윤은 곧바로 기사 아래쪽을 확인했다. 발표 장소와 시간, 참석자 명단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고, 세강그룹 홍보실에서 공식 입장을 냈다는 문장까지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남편이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했던 일정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오늘 그는 회의를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하윤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나는 어제부터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어요. 결혼기념일에 당신이 다른 여자랑 약혼하는 걸 봤고, 밤새 기다렸는데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 여자를 집에 데려와서 나를 직원이라고 소개했잖아요."시혁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하윤아,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뭐야?"하윤은 그 질문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삼 년 동안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남자가, 이제는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적어도 당신이 나를 아내라고 인정해 주길 원해요."시혁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지금 할 수 없어."하윤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 말은 짧았지만, 삼 년 동안 붙잡고 있던 약속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들렸다.복도 저편에서 백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시혁 오빠, 나 물 좀 마셔도 돼?"시혁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금방 갈게."그는 하윤과의 대화를 끝내지도 않은 채 거실로 돌아갔다.하윤은 복도에 홀로 남았다.눈물이 계속 흘렀지만, 남편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백유리는 하윤이 거실로 돌아오자 반갑게 웃었다."하윤 씨, 혹시 제가 무례하게 굴었나요?"그녀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다며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하윤이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유리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손수건을 내밀었다."어머, 울었어요?"하윤은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백유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괜히 오빠한테 부탁을 많이 했나 봐요. 하윤 씨가 이렇게 힘들어하실 줄 몰랐어요."시혁은 유리의 말을 듣고 하윤을 바라보았다.그의 표정에는 걱정보다 불편함이 먼저 드러났다."하윤아, 괜찮아?"하윤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어젯밤부터 처음 듣는 걱정이었다.그러나 그 질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유리가 보고 있기 때문에 나온 말처럼 느껴졌다.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백유리는 손수건
"웨딩드레스네요? 하윤 씨, 결혼하셨어요?"하윤은 숨을 멈췄다.시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윤아, 그건 안쪽에 둬."그 말에 하윤은 남편을 바라보았다."왜요?""손님이 왔잖아."시혁은 마치 테이블 위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치우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하윤은 액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내 결혼사진이에요."백유리는 액자를 놓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그렇구나. 남편분이랑 찍으셨나 봐요."그녀는 사진을 조금 더 기울였다."남편분은 어떤 분이세요?"하윤은 시혁을 바라보았다.남편은 입술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다.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하윤은 액자를 받아 들었다."제게 소중한 사람이에요."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시혁의 턱이 굳었다.백유리는 두 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더니 부드럽게 웃었다."그렇구나. 소중한 사진이면 잘 간직해야죠."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진 속 남자가 누구인지 더 확인하지 않았다.하윤은 그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결혼사진을 본 사람이 남편의 얼굴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 유리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거의 없었다.마치 사진 속 남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차 좀 부탁할게요."백유리는 소파에 앉으며 정중하게 말했다.하윤은 액자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유리는 따뜻한 차가 있으면 좋겠다며 미소를 지었고, 시혁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하윤에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준비해 줘."하윤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가 왜요?"시혁은 미간을 찌푸렸다."손님한테 차 한 잔 내오는 게 그렇게 어려워?"백유리는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아니야, 오빠. 내가 직접 가져올게."그러나 시혁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아 다시 앉혔다."앉아 있어."하윤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자신이 아플 때조차 바쁘다며 병원에 함께
***오후가 되자 하윤은 현관에 놓인 꽃바구니를 거실 한쪽으로 옮겼다.다과를 준비하라는 지시는 따르지 않았다. 손님에게 차 한 잔을 내줄 수는 있었지만, 남편의 약혼녀를 위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탁을 차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침실에 놓여 있던 작은 결혼사진을 거실 테이블 위에 가져다 놓았다.삼 년 전 시혁은 결혼식 사진을 많이 남기지 말자고 했다. 하윤은 남편의 사정을 이해하려 애쓰며 가장 행복했던 날의 사진조차 집 안 깊숙한 곳에 두었다.그때는 언젠가 이 사진을 당당하게 꺼내 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러나 이제는 그날이 오기는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윤은 액자를 손끝으로 쓸었다.사진 속 시혁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날 그는 누구보다 다정하게 웃었고, 하윤의 귓가에 앞으로 잘 살자고 속삭였다.그 약속이 떠오르자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당신은 다 잊었어도 나는 아직 기억하는데……."하윤은 액자를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갔다.오후 다섯 시가 조금 지나 검은 차량 한 대가 집 앞에 멈췄다.백유리가 먼저 내렸고, 시혁은 그녀의 걸음에 속도를 맞추며 계단 앞에서 팔을 받쳐 주었다.하윤은 두 사람이 현관으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남편은 어젯밤 자신을 버려두고 다른 여자와 약혼한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태연했다.그가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 하윤은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울지 말자고 생각했다.그러나 문이 열리고 시혁이 백유리의 코트를 받아 드는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그녀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겨우 버텼다.***거실에 들어선 백유리는 꽃바구니를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이거 오빠가 보낸 거야?"시혁은 그녀가 좋아하는 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백유리는 꽃잎을 손끝으로 만지다가 하윤을 돌아보았다."하윤 씨, 꽃이 정말 예쁘죠?"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백유리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더니 금세 미안한 얼굴을 했다."아, 혹시 꽃 알레르기 있으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싶어 기꺼이 변했다.그런데 지금 백유리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누구를 닮아 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하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거울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얼굴인데도 낯설었다.남편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얼굴이 정말 자신의 것이었을까.그녀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아직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심만으로도 삼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던 기억들이 하나씩 상처로 변하는 것 같았다.***오전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하윤은 남편이 돌아온 줄 알고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어젯밤부터 기다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문밖에서 시혁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문을 열자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그들은 커다란 꽃바구니와 고급 과일 상자, 얇은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서하윤 씨 맞으십니까? 강 전무님 지시로 물품을 전달하러 왔습니다."하윤은 꽃바구니를 바라보았다.혹시 남편이 뒤늦게 결혼기념일을 기억한 것일까.그런 기대가 스치는 순간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꽃 사이에 꽂힌 카드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백유리 님의 귀국을 환영합니다.*하윤의 손끝에서 카드가 미끄러졌다.어젯밤 자신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던 남자가, 오늘은 백유리에게 꽃을 보내고 있었다.직원은 하윤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 채 과일 상자와 서류 봉투를 건넸다."전무님께서 오늘 방문하실 손님을 위해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봉투 안에는 방문 준비 사항이 적힌 문서가 들어 있었다.거실 정리, 다과 준비, 개인 물품의 외부 노출 주의, 방문객 응대 시 불필요한 설명 금지.하윤은 마지막 문장에서 시선을 멈췄다.자신이 삼 년 동안 살아온 집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라는 지시였다."이걸 누가 작성했나요?""전무님 비서실에서 전달받았습니다."하윤은 문서를 접지 않은 채 직원들을 바라보았다."강 전무님께 직접 확인할게요."직원들이
시혁이 누워야 할 자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하윤은 습관처럼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다가 텅 빈 이불을 움켜쥐었다. 남편이 새벽에라도 돌아왔다면 자신을 깨우지 않고 잠들었을지 모른다는 어리석은 기대가 남아 있었지만, 베개에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어젯밤 남편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결혼기념일을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고, 회사 일에 지쳐 있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했던 말이었다.하윤은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남편을 미워하지 못했다.그가 정말 힘든가 보다 생각했고, 자신이 조금 더 이해하면 된다고 믿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정리되면 둘이 함께 여행도 가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그런데 남편은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하윤은 이불을 밀어 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낯설 만큼 초췌했다. 밤새 울어 눈꺼풀이 부어 있었고, 입술은 말라 갈라져 있었지만, 그런 모습으로 남편 앞에 서고 싶지 않아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시혁이 돌아오면 먼저 물어볼 생각이었다.어젯밤 발표는 무엇이었는지, 왜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백유리와는 어떤 관계인지.그리고 가장 두려운 질문도 해야 했다.아직 나를 사랑하느냐고.그 질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다.사랑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을까 봐 무서웠다.하윤은 세면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한참 동안 고개를 숙였다가 부엌으로 향했다.냉장고 안에는 전날 준비한 케이크가 그대로 있었다.*우리의 세 번째 봄.*하윤은 그 문구를 바라보다가 상자를 꺼냈다.삼 년 전 결혼식에서 시혁은 앞으로 맞이할 모든 봄을 함께 보내자고 약속했다. 그 말을 잊지 못해 하윤은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봄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올해는 직접 주문한 케이크와 만년필이었다.시혁이 오래 사용하던 만년필이 고장 났다는 말을 듣고 몇 주 동안 같은 모델을 찾아다녔다. 손잡이에 남편의 이름을 새길까 고민하다가, 혹
"이분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야."서하윤은 남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강시혁은 현관에 들어선 백유리의 코트를 받아 들고 있었고, 그녀의 어깨에 걸린 머리카락이 옷깃에 끼자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빼 주면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윤을 가리켰다.그 다정한 손길이 낯설지 않아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삼 년 전, 자신에게도 저렇게 해 주던 남자였다. 바람이 심한 날이면 목도리를 여며 주었고, 손이 차갑다며 투덜거리면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넣어 주던 사람이었다.그때 하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했다.그 남자가 어젯밤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그것도 자신들의 세 번째 결혼기념일에.하윤이 남편을 기다리며 식어 버린 음식을 몇 번이나 데우는 동안, 시혁은 수많은 기자 앞에서 백유리의 손을 잡고 웃었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나자 그 여자를 자신과 삼 년 동안 살아온 집으로 데려와 아내를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하윤 씨라고 부르면 돼."시혁이 덧붙이자 백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하윤 씨.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하윤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보석이 박힌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는데, 어젯밤 약혼 발표장에서 시혁이 잡고 있던 바로 그 손이었다.자신은 삼 년 동안 결혼반지를 밖에서 마음대로 드러내지도 못했다. 남편이 아직 공개할 때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그런데 백유리는 단 하루 만에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강시혁의 약혼녀로 인정받았다."시혁 씨……."남편을 부르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시혁은 하윤의 얼굴을 한번 살피더니 유리의 여행 가방을 현관 안쪽으로 옮겼다. 밤새 울어 부은 눈과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 않았다."왜?"그 짧은 물음에 하윤은 가슴이 내려앉았다.정말 모르는 걸까.자신이 왜 이런 얼굴로 서 있는지, 무엇 때문에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지."나를 왜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