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요. 저는 아직 봐야 할 사건 자료가 있어서 수환 씨 먼저 들어가요.”시선을 피하며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는 서유정의 모습에 박수환의 입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 미소가 걸려있었다.‘부끄러워하는 것도 이렇게 귀엽다니.’그 모습에 박수환은 괜히 입 맞추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하지만 이제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순간의 감정에 서유정을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헛기침한 박수환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네. 집에서 기다릴게요.”“네.”서유정의 사무실에서 나와 로비로 내려온 박수환을 집사가 가로막았다.“도련님, 사모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해요.”고개를 끄덕인 박수환이 길가에 세워진 검은색 린컨으로 향했다.마침 그도 연정미에게 할 얘기가 있었다.박수환이 차 문을 열자 차가운 연정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하는 걸 절대 허락할 수 없어. 그러니까 한성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그 여자와의 관계를 잘 처리해야 할 거야. 아니면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어.”차 문 앞에 선 박수환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전 절대 회사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머니도 제 일에 끼어들 자격 없으세요.”연정미가 고개를 돌려 박수환을 쳐다보았다.“안 돌아올 거라고? 네가 정운 그룹 셋째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면 누가 널 알아줄 것 같아? 지금 내가 대외적으로 너와 인연을 끊을 거라고 공개해 버리면 너와 가까이 지내려던 모든 사람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뀔 거야.”‘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정운 그룹 덕분인데, 감히 회사로 안 돌아올 거라고?’“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도 더는 회사의 일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회사를 누구에게 물려주시든 알아서 하세요. 전 전혀 관심 없으니까.”연정미가 이를 악물었다.“그래. 박수환, 후회하지 마!”‘그동안 네가 너무 자유로웠지. 그래서 감히 이렇게 마음대로 구는 거야.’‘너도 반드시 정운 그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그래야 두
박수환은 연정미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유정 씨를 우리 집안에 안 들여도 돼요. 제가 유정 씨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되니까.”“너!”박수환의 말에 연정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내가 어쩌다 저런 못난 놈을 낳은 거야. 날 화나게 하려고 태어난 게 분명해.’문 앞에 쭈그려 몰래 엿듣고 있던 박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수환에게 대단하다며 엄지라도 날려주고 싶었다.그의 집안에서 감히 연정미의 말에 이렇게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박수환뿐이었다.‘이젠 나도 할머니가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될 정도라고.’만약 박수환이 서유정의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면 연정미는 하늘이라도 뒤엎을 듯 난리를 칠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연정미가 곧 이성을 되찾고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지금은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내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몇 년만 더 지나면 박수환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이든 여자든, 정운 그룹 후계자가 되는 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말을 마친 연정미는 곧바로 사무실 입구로 걸어갔다.문 앞에 다다른 연정미는 찔리는 게 있는 듯 잔뜩 몸을 움츠린 박현우를 볼 수 있었다. 박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연정미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연정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현우야, 이제 연화시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내 말도 거역하는 거야? 이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중요한 법이야.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지.”그 말에 박수환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그렇게 비꼬시면 속이 시원하세요? 어머니 말대로라면 현우가 이렇게 쉽게 나쁘게 변하는 것도 결국 어머니의 교육이 실패했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사리 분별도 못하고 나쁜 것만 배우는 걸 보면 말이에요.”연정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박수환, 기어코 그 여자 때문에 나와 해보자는 거니?”박수환이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정이 눈썹을 씰룩였다.“그럼 이건 무슨 뜻이죠?”“수환이가 서유정 씨를 싫어하기 전까진 계속 옆에 있어요. 그리고 수환이의 모든 걸 저에게 알려주면 돼요.”고고한 연정미의 태도는 마치 서유정이 반드시 동의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사무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꽤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서유정이 대답했다.“죄송해요. 전 그럴 수 없어요. 카드는 다시 넣어두세요. 오늘 절 찾아오신 건 없던 일로 할게요.”차분한 서유정의 모습에 연정미가 냉소를 흘렸다.“이거로는 부족해요? 그럼 200억 더 줄게요. 어때요?”“만약 수환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사람이 필요하신 거면 차라리 매일 사람을 붙여 미행하라고 하세요. 저는 그런 일 못 해요.”연정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제가 서유정 씨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네요.”‘400억을 준다고 하는 데도 동의하지 않는 걸 보니 욕심이 꽤 큰 모양이군.’서유정이 웃으며 대답했다.“사모님을 만나기 전에는 저도 사모님을 너무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그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연정미가 테이블에 놓인 카드를 집어 들었다.“수환이 신분을 알고 돈이나 뜯으려는 꽃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서유정 씨가 원하는 건 돈 뿐만이 아닌 것 같네요. 수환이와 결혼이라도 하고 싶은 거죠? 하지만 사람은 너무 욕심이 많으면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될 거예요.”‘너 같은 애는 우리 집안에서 입도 뻥긋할 자격이 없어. 그런 애가 우리 수환이와의 결혼을 꿈꿔?’‘어림도 없는 소리!’서유정이 연정미의 말에 대답하려는 데 사무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건장한 체격의 박수환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순간 놀란 서유정의 눈이 충격에 휩싸였다.“수환 씨가 어떻게...”서유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수환은 이미 서유정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미안해요. 어머니가 오실 줄은 몰랐어요. 어머니가 유정 씨한테 말씀을 심하게 한 건 아니죠?”잔뜩 긴장한 박수환의 표정을 본 서유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박수환을 데려가지 못한다면 어떤 후폭풍을 맞이하게 될지 박현우는 굳이 겪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마음대로 해. 밥 먹던 중이라 끊을게.”말을 마친 박수환이 뚝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내려놓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서유정을 마주한 박수환이 설명했다.“현우 전화예요. 저랑 같이 한성에 다녀오자고 하더라고요.”서유정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방금 조금 들어버렸어요... 어머니께서 아프셔서 입원하셨다면서요. 안 가도 정말 괜찮겠어요?”박수환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요. 저와 싸울 때면 늘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신경 안 써도 돼요.”박수환이 한성 병원에서 일할 때 연정미는 조금만 화가 나면 일부러 두통이나 어지러움을 핑계로 병원에 찾아가 박수환을 괴롭혔었다. 물론 매번 검사를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그런 일들이 많아지자 박수환도 습관이 되어버렸다.박수환의 말에 서유정은 더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하지만 그때의 서유정은 알지 못했다. 병원에 입원했다던 연정미가 그다음 날 바로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올 것이라는 걸 말이다.박현우가 문을 두드렸을 때, 서유정은 의뢰인과 통화 중이었다.“들어와요.”사무실 문이 열리고 박현우가 난처한 표정으로 들어왔다.“누나... 저...”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박현우의 모습에 서유정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에요? 얘기해요.”“그게... 할머니께서 오셨어요. 누나를 만나고 싶으시다고...”“...”지난번 찾아온 공현주와의 만남은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다. 그저 직원일 뿐인 박현우의 어머니를 만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연정미는 남자친구의 어머니였다. 친히 찾아온 사람을 만나주지 않는 건 실례였다.잠깐의 당황스러움을 뒤로 하고 서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들어오시라고 해요.”곧 박현우가 흰머리가 지긋하고 우아한 기품을 뽐내는 사모님을 모시고 들어왔다.서유정을 본 연정미가 흥, 냉소 흘렸다.“듣던 대로 예쁘긴 하네.”‘그러니 수환이 마음을 잡을 수 있
배웅을 마치고 사무실 책상 앞으로 돌아온 서유정이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저녁이 되자 나머지 서류를 가방에 넣은 서유정이 퇴근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막 로비에 도착한 서유정이 박수환의 전화를 받았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요?”“조금 이따 마트에서 장 봐서 밥해 먹으려고요. 손이 다 나을 때까지는 우리 집에서 먹어요.”“그래요.”마트에 도착한 서유정이 쇼핑 카트를 밀며 생선을 사기 위해 수산물 코너로 향했다.서유정이 생선 한 마리를 고른 그때, 옆에서 신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주원 씨, 아기가 오늘 저녁엔 생선을 먹고 싶대. 우리 가물치 조림 먹을래?”서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나란히 쇼핑 카트를 밀고 걸어오는 양주원과 신나경이 보였다. 그 모습에 서유정이 미간을 찌푸렸다.서유정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닿은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 역시 서유정을 향했다.얼굴을 일그러뜨린 신나경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유정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어떻게 마트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거야. 끈질기기도 하지.’양주원은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서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눈빛에는 씻어내리지 못한 슬픔이 남아 있는 듯했다.두 사람과 달리 서유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며 마트 직원에게 마음에 든 생선을 골라 손질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곤 손질을 마친 생선을 쇼핑 카트에 담고는 신속하게 수산물 코너를 빠져나왔다.서유정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양주원은 그제야 시선을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물치 먹고 싶다며. 골라.”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쇼핑 카트를 잡은 손에 불끈 올라온 힘줄이 신나경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 뭔가를 꾹 참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고개를 숙인 신나경이 나지막이 말했다.“갑자기 먹기 싫어졌어. 다른 코너로 가.”“확실해?”“응.”신나경이 고개를 숙인 채 양주원의 앞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마음이 쓸쓸했다.바랐던 것처럼 양주원의 옆자리를 차지했고 곧 그의 아내가 될 수 있
서유정은 진승현이 전가인에게서 받은 6000만 원이 바로 그 캐리어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전가인이 신고하기 전까지 진승현은 그 돈을 자신의 월세방에 숨겨두었다.하지만 전가인이 6000만 원을 도둑 맞혔다고 신고하고 경찰 조사를 받게 된 진승현은 언젠가 경찰이 자신의 월세방을 수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돈을 다른 곳에 숨기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알겠어요. 진승현이 다른 곳으로 못 가게 시간 좀 끌어줘요. 지금 전가인 씨에게 연락할게요.”전화를 끊은 서유정이 곧바로 전가인에게 전화했다.“너 지금 당장 경찰서에 연락해. 진승현은 6000만 원을 고향에 가져갈 생각이야. 지금 터미널에 있어.”“응, 알겠어.”통화를 마친 서유정은 서류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서유정이 네 번째 서류를 확인하던 그때, 전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유정아, 진승현이 잡혔어. 6000만 원도 찾았다고 경찰서에 진술하러 오라고 하는데 내가 가면 뭐라고 해야 해?”전가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서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경찰서에 도착하면 진승현은 책임을 피하고자 그 6000만 원은 본인이 너에게 집을 사주기 위해 준 돈이고 네가 현금으로 돌려준 거라고 할 거야. 그러면 넌 무조건 그 돈을 잃어버렸다고 해.”“그럼 진승현은 변호사를 선임해 너와 담판을 지으려고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어.”진승현이 감옥살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든 그 6000만 원의 현금이 전가인이 준 것임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그 돈은 자신이 집을 사라고 전가인에게 준 돈이라는 것을 밝혀야 했다.“그래. 알겠어. 나중에 또 전화할게.”전가인은 점심을 먹은 후 부모님과 함께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왔다.서유정을 본 전가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경찰서에 있는 진승현의 모습을 봐야 했는데.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전부 털어놨어. 그 6000만 원이 바로 전에 자기가 나에게 줬었던 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