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머니 이거 영양제인데 모두 비싼 거예요. 근데 어르신들에게 효과가 좋다네요. 두 분이 천천히 드세요. 다른 사람 나눠주지 마시고요.”그녀도 이렇게 많을 먹을 수 없었다. 두 분에게 돈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이런 물건은 드릴 수 있었다.그 당시에 두 분이 자매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었다. 지금 이렇게 두 분이 그녀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해도 하예진은 한순간에 바로 두 분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여동생이 두 분을 설득해서 그녀를 돕게 했다는 것은 분명 두 분에게 그만한 이익을 주었다는 것이다.“예진아. 네가 지금 입원했는데 영양제는 네게 담겨두고 먹으렴. 몸 잘 챙기거라.”할머니는 입으로는 거절했지만 작은 손주를 앞세워 물건이 담긴 큰 비닐봉지를 가져오게 했다.하예진은 세 사람을 배웅하며 하지철에게 두 분을 잘 모시라고 당부한 뒤 병실로 돌아와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노씨 그룹.노동명은 방금 한 고객과 계약을 협상한 뒤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하려고 할 때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노 대표님, 어머님께서 오셨습니다.”“알겠어.”노동명은 이미 어머니가 올 것이라는 걸 예상했다.점심에 그는 병원으로 하예진을 만나러 갔다고 어머니를 마주쳤고 그는 어머니가 또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러 올 것이라고 짐작했다.아니, 단 3시간 만에 그의 어머니는 그의 회사로 들이닥쳤다.노동명은 고개를 직접 아래층으로 배웅한 뒤 1층에서 바로 어머니를 만났다.윤미라는 아들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10분 뒤 노동명이 어머니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엄마 오후에 스케줄 없으세요?”“너희 젊은이들이 다들 바쁘겠지만 나와 네 아빠는 집에만 있는데 무슨 스케줄이 있겠어? 너희 아빠는 일찍이 골프 치러 가셨고 나도 심심해서 너한테로 온 거야.”“은경 씨는 오늘 바빠요?”“너는 은경이가 한가한 줄 아니? 은경이도 일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은경이가 무슨 신분으로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겠어?
대표 이사 전용 엘리베이터에 모자가 단둘이 타게 되자 윤미라는 더 거침없이 말했고 그녀는 화를 냈다.“너 은경이랑 결혼 안 해도 돼. 엄마가 다시 너와 어울리는 집안 딸로 찾아줄게. 어찌 됐든 넌 반드시 재벌가 딸을 만나야 해. 하예진은 절대로 안 돼! 노동명, 엄마 지금 너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농담이 아니라고. 엄마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하예진과 네가 만나는 걸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어머니의 강경함에 노동명은 화를 내지 않았다.“엄마 지금 저한테 이 문제를 얘기하려고 오신 거예요? 더 이상 우리 모자 사이에 이 문제를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 일이고 제 결혼이에요. 엄마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요. 제가 하예진을 포기하길 원하시면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를 살려내요. 할머니께서 저와 예진이가 만나는 걸 반대하시면 그땐 저도 예진이를 포기할게요.”윤미라는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네 할머니 돌아가신 지가 몇 년인데.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 돌아오신다고 해도 틀림없이 널 혼내실 거야. 너와 하예진이 만나는 걸 할머니가 아셨다면 너무 화가 나셔서 저승에서 벌떡 일어나 돌아오셨을 거야.”“그럼 전 예진이와 더 함께 있어야겠네요. 할머니가 보고 싶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절 가장 사랑해 주셨어요. 제가 뭘 하든지 제가 기쁘기만 하다면 할머니는 모두 절 응원해 주셨죠. 할머니는 인생을 살면서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야 후회가 없다고 하셨어요.”노씨 가문의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막냇손자 노동명을 가장 사랑했다.윤미라는 연달아 아들 네 명을 낳았기 때문에 아들이 너무 많아 막내아들을 딱히 소중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노동명에 관한 관심이 조금 부족했다.“다 네 할머니가 널 버릇없이 만든 거야.”윤미라는 욕을 뱉어냈다.“점심에 너 병원으로 가서 하예진을 보러 간 걸 왜 하예진은 모르게 하는 거야? 노동명, 너도 마음속으로 하예진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잖아. 그 여자는 널 단지 건물주이자 친구
[솔로인 것도 좋지. 너무 서두르지 마라.]소정남은 친구를 위로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없을 때는 노동명도 솔로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니 그도 소정남처럼 빨리 솔로 탈출을 해야겠다고 느꼈다.퇴근 후 집에 돌아 가면 서로 관심해 주고 따뜻한 안부를 전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하예진은 분명 좋은 아내가 될 것이다.주형인이 소중함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노동명은 하예진과 함께한다면 그녀를 반드시 소중하게 대할 것이다.“동명아 누구한테서 온 문자야? 태윤이니? 동명아 태윤이하고 하예정은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았으니 사이가 좋을 거야. 당연히 두 자매를 위해 더 생각할 테고. 너 은경이랑 결혼하기 전까지 태윤이와 거리를 좀 둬.”윤미라는 전태윤이 처형인 하예진의 편에 설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소정남의 약혼녀도 하예정의 친한 친구라도 했다. 심씨 가문은 꽤 괜찮은 집안이었다. 관성의 부동산 재벌이니 빌딩도 몇 채와 핫한 거리의 상가들을 임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소정남과도 어울렸다. 그리고 소정남과 심효진은 전태윤 부부가 이어준 것이었다. 윤미라는 전태윤이 자기 막내아들인 노동명과 그의 처형인 하예진을 결혼하게 만들어 세 사람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엄마 뭐라고 하셨어요? 태윤이랑 예정 씨가 아직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아서 사이가 좋은 거라뇨? 태윤이 바람피울 남자 아니에요. 예정 씨를 평생 사랑할 남자예요. 태윤이 집안에서도 예정 씨를 다 받아줬고요. 어머니도 뒤에서 이런 얘기 그만하세요. 전씨 가문이나 태윤이 귀에 들어가면 저희 두 집안 사이의 우정에 영향만 미칠 뿐이니.”“그리고 저 은경 씨하고 결혼 안 해요. 전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요. 그러니 더 이상 은경 씨 오해하게 만들지 마세요. 저도 은경 씨한테 분명하게 말할 거예요.”손은경은 그와 비즈니스 외에는 사적인 대화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똑똑한 여자였다. 고집스럽게 매달리지 않으니 하예진에게 졌다고
띠리리링...노동명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전태윤에게서 온 전화였고 그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저녁에 정남이가 밥 먹자고 하더라.”전태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노동명이 먼저 말했다. 노동명은 전태윤이 그에게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한 줄 알았다.세 사람의 우정은 아주 깊었다. 소정남이 솔로 탈출을 축하하는 의미로 두 사람에게 밥을 사는 것이니 아무리 바빠도 참석할 것이다.“나도 알아, 정남이한테서 이미 문자 왔어.”전태윤은 핸드폰을 한 손에 들고서 다른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는 틈에 노동명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내 와이프가 이미 네 속셈을 꿰뚫어 보던데.”“꿰뚫어 보다니?”노동명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지만 이내 알아차렸다.“눈치챘어? 그럼 잘됐네. 나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사실 노동명은 자기의 감정을 정확하게 확인한 뒤에 행동하려고 했다. 전태윤이 그에게 하예진이 상처를 입어 몸과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하예진에게 그의 마음을 전하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니 기다리라고 했었다.그는 묵묵하게 하예진의 옆에서 그녀가 유명해질 때까지 지켜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다시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두 사람이 함께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질 것이다.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의 마음은 더 잘 드러나게 된다. 그가 묵묵히 옆에서 지켜주고 함께 해주면 하예진도 분명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옆에서 함께 하는 것이 가장 긴 사랑의 고백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예정이 그의 마음을 눈치챌 줄은 몰랐다.노동명은 자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분명 하예진을 또 찾아갔을 것이다. 하예진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분명 이상한 말들을 했을 것이다.하예진은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기 여동생에게 말했고 아마도 이때 하예정이 그의 마음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었다.“그래, 알겠어.”하예진이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그도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전태윤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오후에는 그의 아내가 회사로 그를 찾아왔다. 그런 다음 함께 소정남과 심효진의 솔로 탈출을 축하 파티에 참석하려고 했다.전태윤은 다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노동명은 그럴 수가 없었다.그의 어머니는 전태윤과의 통화가 끝나자 그에게 물었다.“동명아, 태윤이가 무슨 얘기 했어?”“엄마, 통화 내용까지 말씀드려야 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챙겨주신 적 없었는데 이제 서른이 넘으니까 엄마가 절 챙겨 주시네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윤미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엄마 하실 말씀 끝났죠. 저 일해야 해요.”그의 말은 어머니에게 이만 떠나달라는 뜻이었다.윤미라는 침묵을 지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정남이가 저녁에 밥 산다며 넌 은경이 데려가. 은경이도 이제 천천히 너희 친구들하고 어울려야지.”“아니요!”노동명은 바로 거절했고 이에 윤미라는 흠칫했다.“... 너 그렇게 은경이가 싫으니? 은경이가 하예진보다 못한 게 뭐야? 출신이며 외모며, 심지어 나이도 하예진보다 어리고,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어. 그리고 능력도 하예진보다 훨씬 좋아.”“은경 씨가 예진보다 잘난 게 아니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뿐이에요. 예진이는 은경 씨하고 시작점부터가 다르다고요. 예진이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이미 독립해서 회사를 차렸을 수도 있어요. 엄마, 저한테 이유를 묻지 마세요. 저도 이유를 모르니까. 그저 좋아할 뿐인데 이유 따윈 필요 없어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생각하실 필요도 없어요. 앞으로 계속 나아갈 테니 지켜보세요.”윤미라는 분노했다.“엄마, 혼자 돌아가실 거예요? 아니면 비서 시켜서 모셔다드리라고 할까요?”윤미라는 일어서며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혼자 갈 거야.”“그러세요. 조심히 가시고요.”노동명은 분노하는 어머니를 배시시 웃으며 바라보았다.윤미라는 노씨 그룹을 나오며 손은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은경아, 정남이가 오늘 혼인신고를 했대. 정남이가 오늘 저녁에 동명이한테 밥을
노씨 가문의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노동명을 막지 않으셨을 것이다.노동명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셨다. 그가 만약 진심으로 하예진을 사랑한다면 할머니는 반드시 그가 하예진에게 구애하는 것을 응원해 주셨을 것이다.“은경 씨 설마 아직도 나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죠?”손은경이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오빠가 저한테 감정이 없는데 제가 환상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 세상에 오빠만큼 잘난 남자가 오빠 한 사람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도 오빠한테만 매달릴 수 없는 거 아니에요? 난 잠재력이 있는 다른 나무를 찾을래요. 아니면 더 향긋한 숲을 찾을 수도 있고요. 이렇게 해요, 그럼. 나도 더 이상 연기하지 않을게요. 돌아가서 아주머니와 저녁을 먹은 뒤에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오빠 집에서 나갈게요. 관성 호텔에서 지내도 되고요. 저희 앞으로 부부는 안 돼도 친구는 할 수 있는 거죠?”손은경은 좋은 뜻이었지만 노동명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가능한 한 빨리 윤미라에게 사실을 분명히 말한 뒤 노씨 저택에서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래야 윤미라가 더는 그녀에게 희망을 걸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노동명을 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명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관성에는 훌륭한 젊은 남자들이 가득했다. 그녀의 운명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만약 관성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만나보면 된다.만약 운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혼자서 사는 것도 멋지다고 생각했다.“오빠 일 보세요. 저 운전해야 해요.”손은경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 일들을 하예정은 모르고 있었다.오후에 그녀는 공예품을 도와주는 학생들에게 재료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저녁이 되자 학교는 끝나고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학교의 대문을 걸어 나왔다. 하예정은 그들의 활기찬 얼굴을 보며 그들의 청춘을 부러워했다.한동안 바쁘게 보낸 하예정은 가게 앞에 놓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 저희 언니 많이 좋아졌어요. 회복도 꽤 잘 됐고요.”“정말 다행이야.”정씨 아저씨는 반찬을 집어 먹으며 밥을 한입 먹었다.“예정아, 아저씨가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네 의견을 말해 줄 수 있겠니? 아줌마한테 말했더니 혼나기만 했어.”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말씀하세요. 무슨 일인데요? 제가 들어보고 의견을 말씀드릴게요.”“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알잖아. 하지만 진정한 사부님 밑에서 배우지 못하고 혼자서 여기저기서 조금 배웠을 뿐이야. 그런 다음에 혼자서 책을 보며 공부했지.”정씨 아저씨는 식사를 멈추고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근데 지금은 내가 육교나 공원 같은 곳에 가서 관상을 봐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심심할 때 가서 돈을 벌면 집안 살림에 도움도 될 것 같아서. 비록 우리 잡화점으로도 돈을 벌긴 하지만.”“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어르신은 점점 더 늙어가고 우리 중년층의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어. 온 식구가 이 가게 수입에 기대 살기는 힘들어. 그래서 밖에서 좀 빨리 돈을 벌고 싶은데 집사람은 날 혼내기만 하니. 우리 집사람은 오늘 저녁, 아니구나 내일인가? 오늘이 수요일이니 목요일에 로또 번호를 공개하겠네. 나한테 내일 저녁 로또 번호를 알려달래. 전 재산을 털어서 로또를 사겠다면서. 많이 사야 상금이 더 높대. 5천 원이 당첨되면 5만 원을 받을 수 있다네.”정씨 아저씨는 불만을 말했다.“내가 로또 번호를 알았다면 이미 부자가 되었을 거야. 육교에 가서 관상이라도 봐 줄 생각을 하겠니? 집사람은 내가 게을러서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는 줄 알 거야.”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내일 저녁 로또 번호 아시면 저한테도 전화해서 알려 주세요. 저도 전 재산을 털어서 살게요.”“예정아, 아저씨 놀리지 마라. 난 내 실력으로 관상을 봐주고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싶을 뿐이야.”“정씨 아저씨, 꼭 공원에 가서 관상을 봐주는 걸로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은 그걸 사기라
하예정은 언니를 보러 병원으로 향했다.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은 아들과 함께 이미 저녁 식사를 마친 뒤였다.“이모.”우빈이는 하예정을 발견하고 기쁘게 달려와 하예정의 품에 안겼다.하예정은 우빈이를 안으며 언니가 도시락을 씻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했다.“언니, 내가 가서 씻어 올게.”“됐어. 나 지금 너무 심심해.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그렇지 않으면 이미 간병인에게 도시락을 씻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이렇게 일찍 문 닫은 거야?”하예정은 조카를 안고서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언니가 뜨거운 물로 도시락을 씻는 걸 바라보며 대답했다.“효진이가 오늘 밥을 산다고 해서. 우빈이가 밥 먹지 않았으면 내가 데려가서 밥 먹였을 텐데.”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나 지금 돼지가 되어가는 것 같아. 밥 먹고 바로 자니까. 아저씨가 가져다주는 반찬들이 너무 맛있어서 매일 이렇게 잘 먹어. 퇴원할 때가 되면 몸무게가 또 70킬로를 넘길 것 같아.”그녀는 쉽게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조금만 많이 먹어도 허리가 바로 통통해졌다.“괜찮아, 언니 지금 너무 말랐어.”어차피 이제 저승 문 앞에서 유턴까지 했다.“조금 있다가 네가 우빈이 좀 데려가. 하루 종일 나하고만 있어서 우빈이도 답답할 거야. 계속 내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만 보고 싶어 해. 눈 나빠질까 봐 걱정돼서 안 보여줬지만.”하예진은 도시락을 씻으며 말했다.“예정아, 내일 너 올 때 우빈이 로고 좀 가져다줄래? 우빈이 유치원 끝나면 여기서 로고 하면서 놀게.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 보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한글 공부하는 책도 가져다줘.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이럴 때 우빈이 한글 좀 가르쳐 줘야지. 9월에 유치원 중급반으로 올라가야 배운다고 하네. 지금은 초급반은 그저 애를 봐주는 거하고 같아.”지금 유치원 등록금도 싸지 않았다. 한 학기에 수백만 원이 들었다. 더 비싼 곳은 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중급반부터 아직도 3년을 더 유치원을 다녀야 초등학교에 입학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