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제가 직원한테 전화해서 언제 도착하는지 한 번 물어볼게요.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지 나갈 수 있어요.”노씨 집안과 친분을 쌓으려면 직접 가서 인사드리는 게 더 성의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여운초는 점원한테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전화가 연결됐다.“사장님, 저 다 왔는데요.”점원이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스쿠터를 세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하예진 모자를 보자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고 우빈을 들어 품에 안았다.미녀의 품에 안긴 우빈은 자신의 인기에 감탄하며 우쭐했다.여운초는 점원한테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 건강식품을 들고 하예진 모자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도착하니 노동명은 여전히 하예진을 만나기를 거부했다.노동명이 만나기 싫다고 하는 말을 듣고 여운초는 의아하여 눈을 크게 떴다.하예진뿐만 아니라 그가 제일 예뻐하던 우빈이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병실 밖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은 하예진 모자를 들여보내지 않았다.우빈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문밖에서 큰 소리로 아저씨, 아저씨 하며, 노동명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노동명은 들어오라는 소리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여운초만 윤미라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여운초는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노동명과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니 병문안용 인사만 몇 마디 나누고 건강식품을 남겨놓고 병실에서 나왔다.윤미라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동명아, 아무리 예진이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왜 우빈이까지 들여보내지 않는 거니? 넌 우빈이 예뻐했잖아. 걔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야. 네가 이러면 저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 거야.”노동명은 눈을 꾹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록 전태윤의 할머니한테서 한바탕 꾸지람이 아닌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는 아직도 내심 갈등하고 있었다.어떤 선택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말이 없는 노동명을 보며 윤미라는 눈시울을 붉혔다.‘내 탓이야. 전부 내 탓이야!
정겨울은 남편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예쁜 눈매를 접혔다.그녀는 현재 배불뚝이 임산부라 결혼식을 미루고 혼인신고만 했다.모연정과 은서윤은 이미 출산했고, 그녀 배 속에 있는 이 꼬물이도 출산일이 멀지 않았다. 모연정의 아기는 그녀의 아기와 거의 비슷한 날짜에 출산해야 하는데 쌍둥이기 때문에 좀 더 일찍 세상에 나왔다. 모연정은 이제 가뿐하게 다닐 수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배 속에 큰 수박을 쑤셔 넣은 것처럼 거동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배 속의 어린놈은 활발한 녀석임이 틀림없었다. 태동이 어찌나 심한지 가끔 발이나 손이 뱃가죽 아래로부터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배 속의 아이와 노는 게 예준일의 낙이었다. 매일 밤 태동이 제일 심할 때면 부자가 그녀의 뱃가죽을 사이에 두고 놀곤 한다.정겨울은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남아인 걸 안다.그녀는 의사니까. 그것도 아주 출중한 의술을 가진.예준일이 정겨울이 그의 뺨을 꼬집는 것이 싫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애당초 정겨울이 그의 ‘해독약’이 되어준 것도 이 준수한 얼굴 덕분이다. 그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 받은 아이라면 분명 외모 금수저로 태어날 터이니.예준일은 정겨울과 같이 리조트에서 산책을 즐겼다.예전에 정겨울은 환자를 보느라 일 년의 반 이상을 하늘에서 떠다녔다.예진 리조트로 와 넷째 사모님이 된 이후로 모든 사람은 그녀를 깨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유리구슬처럼 다뤘다. 그리하여 하루하루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만삭이 된 배로 바깥출입을 하긴 너무나 불편했다. 어쩔 수 없이 맨날 예준일을 붙잡고 저랑 같이 리조트 안에서 산책을 하게 되었다.리조트가 다행히 크고 풍경도 아름다워 매일 반나절씩 거닐고 다녀도 경치가 질리지 않았다.이때 집사가 걸어왔다.“넷째 도련님, 넷째 사모님. 전씨 집안 둘째 도련님이 또 찾아왔습니다.”전이진은 요 며칠 쩍하면 이리로 왔다. 하루에 세 탕, 네 탕씩 올 때도 있었다.예준일은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모여왔다. “그 사
예준일은 마뜩잖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정겨울은 정자에 들어와 앉았고 예준일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간식이랑 마실 것 좀 가져다주세요. 이따 전이진 씨가 오면 대접할 수 있게요.”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리조트 내선 전화에 전화를 걸어 간식과 과일, 음료를 내오게 했다. 물론 정겨울이 즐겨 먹는 간식도 같이 가져오라 했다.정겨울은 임신 후부터 깨어나기만 하면 간식을 찾았다. 하루 삼시세끼도 빼먹지 않고 꼭꼭 챙겨 먹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본인은 살이 찌지 않고 모두 배 속 아이한테 영양분이 흡수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아무리 먹어도 배만 커지고 다른 곳은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다.대략 십 분 뒤.전이진은 집사를 따라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예준일 씨, 정겨울 선생님.”환하게 웃는 얼굴로 전이진은 인사를 했지만 예준일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겨울이 눈길을 한 번 주어서야 그는 대뜸 온화한 낯빛으로 바꾸며 인사치레를 건넸다.“전이진 씨, 어서 앉으세요.”전이진은 그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루가 멀다 하고 서너 번씩 찾아오니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났을 터. 웬만한 수양과 인품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그를 문밖으로 내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운초를 위해 예준일의 차갑고 굳은 표정을 마주하는 것 정도야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그는 뻔뻔하고 개의치 않은 척 의자에 앉았다.정겨울이 차도 마시고 간식도 드시라고 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마시고 먹으며 아주 편한 듯 행동했다.“정 선생님 댁, 이 간식들이 아주 맛있네요.”전이진은 속에도 없는 칭찬을 꺼내놓았다. 그는 사실 그의 형님과 똑같이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하지만 저번에 예진 리조트에 오게 된 후, 정겨울이 각종 간식 디저트를 즐겨 먹는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녀와 같은 과인척하느라 좋아하는 표정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그의 말을 듣고 정겨울은 의심 없이 웃으며 말했다.“네, 맛있어요. 전 아무리
하지만 지금 정겨울은 배가 남산만 하게 나와서 산전 검사를 받으러 나갈 때도 그가 경호원을 몇 명 대동시켜 곁에 딱 붙어서 보살펴야 한다.전이진은 그의 말을 듣고 서둘러 말했다.“네, 저도 알아요. 정 선생님이 제 약혼녀의 눈을 치료해 주신다고 하셔도 전 사절할 겁니다.”전이진은 눈길을 정겨울한테 돌리며 사정했다.“그렇지만 정 선생님께서 스승님한테 진찰을 요청드릴 순 없나요? 돈이 얼마 들던 제가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어떠한 조건이라도 만족시켜 드릴게요.”정겨울의 의술도 상당하지만 신의는 더 말도 못 하게 입신의 경지에 이른 의술을 갖고 있다. 그녀의 스승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신의라는 그 명칭은 몇십 년이나 전해져올 만큼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세간에 ‘신’자를 붙일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만약 신의님을 모셔 여운초의 눈을 치료한다면 치유될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신의와 정겨울, 두 사람은 여운초한테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전이진은 전에 여운초한테 꼭 신의를 모셔 와 그녀의 눈을 치료해 주어 앞을 다시 보게 만들어 줄 것이라 약속했다.비록 실명한 상태라 하여도 그는 상관없었지만 그녀는 열등감으로 인해 그가 아무리 잘 해줘도 시종 자신이 그에 비해 부족하고 뒤떨어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의 마음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할머니가 준 1년의 기한이 절반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전이진은 속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그렇다고 날짜가 되어 그녀를 억지로 구청으로 끌고 가서 혼인 신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건 날강도나 할 법한 강제 혼인이다. 그의 집안에서 지금까지 그런 선례는 없었다. 그도 그 선례를 깨뜨릴 첫 번째 후손이 될 수는 없다.하지만 셋째가 아직도 아무런 기미가 없다는 걸 생각하며 전이진은 조금 안심하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최소한 여운초와 어느 정도 진전이 있다.신의 얘기가 나오니 예준일은 입을 다물었다.신의의 제자 남편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대신 환자를 받을 처지까지는 아니었다
정겨울의 약속을 받으니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그리고 더 이상 예진 리조트에 머무르면 안 될 것 같았다. 예준일이 아직도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째려보고 있는 것 같았으니.예준일과 정겨울의 이야기는 전태윤한테서 들어 그도 모든 과정을 알고 있다.정겨울은 아이만 원할 뿐 남자는 곁에 두고 싶지 않아 했고, 예준일이 애타게 그녀를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그가 찾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았을뿐더러 도망치기까지 했다.그리하여 모연정과 예준성의 결혼식에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예준일은 그녀가 바로 그가 찾던 약 향기를 풍기는 여자라는 걸 알고 나서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녀를 찾아갔고, 그렇게 반년이 지나서 그녀가 자신한테 정이 들게 해서야 정겨울은 그와 함께 A시로 돌아오는 것에 동의했다.반년 동안 예준일이 뭘 했고 어떤 헌신과 고생을 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아는 바가 없으나, 정겨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아마 안간힘을 썼을 것이 예상되었다. 그렇게 겨우 부부가 되고 결혼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그들도 신혼부부인 셈이다. 예준일은 종일 신혼 아내의 곁에 딱 들러붙어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러니 전이진이 매일 찾아오는 게 얼마나 꼴 보기가 싫었겠는가. 내쫓지 않은 것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전이진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진 리조트를 떠났다.예준일은 집사한테 전이진을 배웅하라 하고 그가 떠난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 사람 겨우 돌려보냈네. 한 두석 달은 조용히 지낼 수 있겠지?”정겨울은 그의 반응을 보고 픽 웃으면서 말했다.“스승님한테 치료를 부탁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뻔뻔하게 매일 서너 번씩 찾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난 또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뻔뻔하게 굴면서까지 뭔가를 해내려는 게 맘에 들어요. 아주 성의 있어 보이잖아요, 전이진 씨.”그녀의 말에 예준일은 서슴없이 얘기했다.“나도 할 수 있어.”정겨울은 깔깔 웃었다.“알아요. 뻔뻔함으로 치면 당신이 최고
전씨 일가의 형제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노씨 일가의 경호원들은 골머리를 앓았다.“안녕하세요.”노씨 일가의 경호원 중 한 명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 전태윤 세 사람의 길을 막았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하지만 저희 넷째 도련님께서 아직 누구도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시니 일단은 돌아가시길 바랍니다.”경호원들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이때 전태윤이 온화하게 물었다.“동명이는 깨어났어요?”“네, 이미 깨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입맛이 없다며 아침 식사를 거절하고 계십니다. 집에서 보내온 도시락이든 하예진 씨가 보내온 것이든 모두 잡숫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예진 씨가 보내온 도시락은 아예 엎어버리고 마셨습니다. 지금 도련님의 부모님께서 오셔서 조금이라도 드시라고 설득하고 계십니다. 넷째 도련님은 지금 아마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으실 겁니다.”경호원이 이렇게 상세하게 말한 것은 전태윤 등이 스스로 알아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사실, 경호원들도 넷째 도련님이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서 안 좋은 생각만 하지 말고 친한 친구들도 만나보며 이야기라도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안타깝게도, 부모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 넷째 도련님이 친구들의 설득을 들을 리가 없다.십여 일 동안 침대에 누워 있은 노동명은 이미 멘탈이 무너진 지 오래고, 시도 때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보통 사람들처럼 걸을 수 있기를 바랐다. 더 이상 침대에 누워 타인의 보살핌을 받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방문 온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자신을 향한 눈빛에 동정을 띠고 있는 것만 같았다.그는 이제 불구가 되었고 자유롭게 걸을 수 없게 되었다.비록 휠체어에 앉아 이동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괴로운 건 여전했다.의사는 좀 더 누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리 부상이 좀 나아져야 휠체어를 탈 수 있고, 완전히 회복하려면 오랜 기간의 몸조리를 거쳐야 할 뿐만 아니라 재활치료도 꾸준히 해야 한다고 했다.“안 먹어요, 입맛 없으니 그만 가져가요! 가져가라고요!”병
노진규는 아들의 고함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괴로워했고, 더 이상의 비난도 할 수 없었다.노동명은 원래 덩치가 크고 거칠어 보이는 남자였다.병실에 열흘 정도 누워있었더니, 완전히 살이 빠졌다.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지금의 그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괴로울 것이다. 다리에 상처를 입은 후로부터 그는 예전의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눈빛조차 더는 반짝이지 않고 안에 절망만이 가득 담겨있다.처음에 의사도 그가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는 주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아무런 진전이 없을 수도 있고, 이로써 붕괴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여보, 동명이를 비난하지 말아요.”윤미라가 남편을 향해 말했다.“이게 다 내 잘못이에요. 애가 배고프지 않다는데 굳이 먹이려 한 내 잘못이에요.”윤미라는 잘못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렸다.어머니를 쳐다보고 있던 노동명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더 이상 어머니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비록 어머니는 그가 하예진을 만나러 가는 줄 알고 막으려고 했지만, 사실 더 큰 잘못은 그에게 있었다. 그의 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돌발상황이 닥쳤을 때 비록 급정거했지만 여전히 앞 차를 추돌하게 되었다.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한참 전에 들어와서 조용히 서있던 경호원이 드디어 용기를 내어 말했다.“넷째 도련님, 전이진 도련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그는 감히 전태윤이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또한 전이진은 최근 관성에 없었다. 방금 관성에 돌아온 그가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왔다고 해도 합당한 일이었다.“보고 싶지 않다고 전해.”노동명은 단번에 거절했다.경호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전 대표님과 사모님도 함께 오셨습니다.”“만나고 싶지 않다는데 못 들었어?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고! 날 동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너무 싫단 말이야! 날 동정할 필요가 없어!”경호원이 한마디만 더 하자 노동명은 폭발
하예정은 윤미라를 부축하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윤미라는 말을 이었다.“다른 사람을 만나 교류도 하지 않고 이렇게 혼자 고민하고 있으면 어떻게 잘 나을 수 있겠어요?”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전태윤 형제에게 사과했다.“태윤아, 이진아, 우리 동명이를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동명이는 지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두려워해. 때로는 친형들이 보러와도 병실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세 형수가 보양식을 챙겨와도 병실에 발 못 들여놓게 하는데 그냥 보양식만 병실에 들어갈 수 있어. 동명이는 지금 누구를 봐도, 어떤 관심의 말을 해도 모두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윤미라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막내아들이 그녀에게 준 인상은 줄곧 매우 강인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자 윤미라는 속수무책이었다.노씨 일가의 연장자들도 모두 찾아왔지만, 노동명은 지금 귀에 누구의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절친과의 만남도 거절하고 있다. 전태윤과 소정남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도 걸어봤지만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노동명은 완전히 자신을 비관적인 세계에 가두었다.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제 상처가 회복할 수 있을까?전태윤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아줌마, 동명이 지금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시간이 있을 때 데리고 산책하러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열흘 정도 침대에 누워있었으니 답답해 죽을 것 같을 거예요. 데리고 나가 산책하며 기분 전환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예요. 우리 모두 동명이가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가만두고 볼 수가 없어요. 이러다 남은 인생까지 망치면 어떡해요? 잘 회복할 수 있게 마음을 가다듬고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죠.”윤미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록 움직일 때 다리 통증이 심하지만 휄체어를 탈 수는 있어. 하지만 부축받으며 휄체어에 타자니 또 자신이 쓸모없다는 둥 생각이 드나 봐. 휠체어를 타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면서 말이야. 그래서인지 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
그러나 전창빈은 사업을 확장하거나 삶을 즐길 생각은 하지 않고 먼 길을 떠나 여기까지 와서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로 지원했다.선우민아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전창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도전하려고 왔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요리를 좋아했고 스승을 모셔 요리 실력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여러 구역의 다양한 요리를 연구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창업으로 작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산 밖에 산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법이라고 여기기에 계속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손님들의 입맛이 바로 저를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니까요.”전창빈은 자신의 요리가 손님들이 맛있다고 생각해야만 요리 실력이 검증된 것으로 생각했다.손님들이 그 요리에 대해 조언을 해주면 그것을 개선해 더 높은 수준의 요리 실력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우민아처럼 까다로운 손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평가는 전창빈을 더욱 발전하게 할 것이다.선우민아는 그가 선우씨 가문의 요리사 자리에 도전하고 싶어서 온 것임을 직감하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자신이 갑이 되는 것과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에요. 전이혁 씨는 제대로 고려해보셨나요? 만약 우리 가문에서 요리사로 일한다면 우리 가문만의 가정 요리사가 되어 전국의 다양한 손님을 상대할 기회가 없어요. 아마 전이혁 씨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죠.”전창빈은 빙그레 웃으며 선우정아와 시선을 마주치며 대답했다.“아마 큰아가씨님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몇 명 없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일하면 전국의 손님을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큰아가씨께서 싫증 내지 않을 정도로 1년 정도 일할 수 있다면 제 요리 실력도 크게 향상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력을 키워 앞으로 관성으로 돌아가면 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도 손님이 떼구름처럼 몰려들겠죠.”전창빈은 자신의 요리사들을 이끌어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전국의 손님들이 고향의 전통 요리와 관성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노
강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경험상으로 보면 전창빈 씨는 합격일 겁니다. 어서 큰아가씨를 뵈러 가세요. 긴장할 필요 없어요. 큰아가씨는 표정이 좀 진지하지만 사실은 매우 좋은 분이십니다.”“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전창빈은 엄격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선우민아가 아무리 엄격해도 그의 큰형 전태윤보다는 못할 것이다.엄격한 전태윤의 얼굴에 익숙해진 전이혁은 이미 엄격한 사람들에게 면역력이 생겼다.전창빈은 강진을 따라 주방을 나섰다.강진은 전창빈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주방을 나선 후에도 전창빈은 여기저기 둘러보지 않았고 또 선우씨 가문 저택의 호화로움에 놀라지도 않았다.다른 지원자들은 늘 선우씨 저택의 사치스러움에 압도되어 주변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과는 달랐다.강진은 전창빈이 분명 세상 물정을 다 겪어본 사람이거나 굉장한 침착성을 가진 사람일 거로 생각했다.어쨌든 강진은 눈앞의 이 젊은 요리사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아마 내일이면 동료가 될 것 같았다.강진은 전창빈을 데리고 선우민아가 앉은 자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그는 전창빈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낸 후 먼저 나아가 공손히 말했다.“큰아가씨, 전창빈 씨께서 오셨습니다.”선우씨 가족 중 전창빈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오직 선우정아뿐이었다.다른 사람들은 그때 집에 없어 전창빈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다들 그를 보더니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한경주가 남편 선우진혁에게 소곤거렸다.“정말 젊어 보이네요. 우리 민아랑 비슷한 나이 같아요.”선우진혁도 고개를 끄덕였다.“젊네. 보아하니 매우 침착해 보이고. 조금도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구먼.”“이 요리사분이 매우 잘생겼다는 생각 안 들어요?”선우씨 가문의 둘째 부인, 즉 선우정아의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시누이에게 말했다.한경주가 웃으며 대답했다.“정말 잘생겼네요.”선우정아도 말을 이었다.“제 말 이제 믿으시죠? 제가 오늘의 최종 면접자가 매우 젊고 잘
선우민기는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민기야, 오늘 저녁 요리 맛있었어?”선우민아가 동생에게 물었다.“맛있어요. 엄청 맛있었어요.”사촌 동생도 따라 말했다.“정말 정말 맛있었어요. 누나, 저 앞으로 매일 누나 집에 와서 밥 먹어도 돼요?”선우민아가 웃으며 대답했다.“오고 싶으면 오렴. 하지만 너랑 민기는 밥 잘 먹어야 해. 놀기만 하면 안 된다?”두 꼬마가 함께 모이면 말 그대로 손오공이 천궁을 뒤집어 놓는 수준이었다.가문의 후손에 남자아이가 둘뿐이라 모두가 그들을 귀여워했다. 선우씨 가문의 누나들이 집에 없을 때면 두 꼬마는 진짜로 지붕조차 뒤집을 기세였다.어르신들이 말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만약 두 꼬마가 지붕을 뜯으려 하면 오히려 사다리를 대줄 정도니까.“알았어요. 저희 꼭 말을 잘 들을게요.”“그래, 너희 둘 밖에 나갈 땐 외투 꼭 입고 나가야 해. 밖이 너무 추워.”두 꼬마는 기쁜 마음으로 손을 잡고 집에서 뛰쳐나갔다.동생들이 모두 놀러 나가자 선우민아가 집사에게 지시했다.“아저씨, 전창빈 씨를 만나게 해줘요.”강진이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바로 전창빈 씨를 불러오겠습니다.”선우민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이동하자 가족들도 모두 따라 일어나 거실 소파에 앉았다.선우민아가 오늘의 최종 면접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선우씨 가족들은 바로 그 지원자가 채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직감했다.확실히 오늘의 저녁 식사는 온 가족을 만족시켰다.선우민아의 입맛이 까다로워 선우씨 가문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다. 그들은 선우민아 덕분에 항상 최고의 요리사가 준비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비록 그녀만큼 입맛이 까다롭지는 않았지만 요리의 품질을 가리는 안목은 그래도 꽤 좋은 편이다.강진이 미소를 머금으며 주방으로 들어갔고 전창빈이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쪽으로 다가갔다.발소리를 들은 전창빈은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었고 고개를 들어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