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어쩔 수 없이 노동명을 서늘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휄체어를 밀며 말했다.“너 여기 계속 혼자 있다가 이제 해가 점점 더 강렬해지거든 더위를 먹을 거야.”“아까 내가 왔을 때만 해도 그늘이 져 있었어.”다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떴다.“휠체어 뒤에 물과 휴지가 있어.”노동명의 말에 전태윤은 급히 휠체어 뒤에 달린 주머니에서 물 한 병을 꺼내어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또 휴지를 꺼내어 땀을 닦게 했다.“너 연습하는 건 좋은데 시간을 가려서 해. 아침과 저녁이 가장 적합한 것 같아. 그때는 해가 그렇게 맵지 않고 시원하잖아.”노씨 일가의 뒷마당에는 나무가 많아 녹음이 우거진 데가 많고 비교적 시원한 편이었다.“그리고 너 이렇게 혼자 있으면 안 돼. 만약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도 몰라.”노동명은 땀을 닦고 물을 반병쯤 마신 후 말했다.“휴대폰 가지고 있어 괜찮아. 버티기 힘들거든 전화하면 돼. 그럼 날 집에 데려다줄 거야. 나 빨리 회복해서 스스로 일어나서 걷고 싶어, 다시 예진이 가까이 가고 싶어.”하예진을 생각하자 노동명은 또다시 마음이 급해졌다.주형인은 현재 ICU에 누워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 하예진을 빼앗아 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하예진이 점점 더 우수해짐에 따라 그가 재활치료를 하는 동안 그녀에게 대시하는 다른 남자가 나타날까 봐 걱정됐다.하루라도 하예진을 데려오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다.“동명아, 나도 네가 빨리 회복하여 평소와 같이 일어서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조급해해서는 안 되는 거야. 의사 말 못 들었어?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잖아. 이렇게 조급해하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그리고 처형 쪽도 걱정할 필요 없어, 당분간 옆에 새로운 남자가 나타날 리 없으니까. 처형은 지금 돈벌이하느라 바빠서 전혀 감정에 관한 일을 생각할 시간이 없거든. 게다가 처형은 자기가 재혼할 마음이 없다고 계속 강조하거든.”전태윤은 열심히 친구를 달랬다.하지만 노동
노동명은 짐작이 갔는지 물었다.“혹시 할머니셔?”전태윤의 성격상 만약 다른 누군가가 아내를 데려갔다면 진작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유유하게 친구를 보러 올 일은 더더욱 없었다.“할머니 말고 누가 더 있겠어?”부모님은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노동명은 껄껄 웃었다.“너 분명 할머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했길래 할머니께 미움을 산 걸 거야. 할머니는 우리의 약점을 가장 잘 짚으시잖아.”노동명에게 있어 하예진이 약점인 것처럼.할머니는 예전에 노동명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그가 정말 하예진을 포기한다면 바로 하예진에게 다른 좋은 남자를 소개해 줘 후회와 마음 아픈 맛을 보게 할 거라고 했다.그때부터 노동명은 감히 하예진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했다.하예진을 더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리의 상처 때문에 그녀에게 행복을 주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일부러 거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니까.사실 하예진을 내쫓을 때마다 마음속으론 자책하고 후회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됐다.전태윤은 입을 오므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친구의 태도를 보자 노동명은 바로 자신이 알아맞혔다는 것을 알아챘다.“너 앞으로 할머니 앞에서 행동 좀 잘해.”“나 할머니에게 미움 살 행동을 한 게 아니라 손자며느리를 아끼는 할머니한테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거야. 난 밭에서 주워 왔나 봐.”“그야 더 말할 게 있겠어? 손자가 하나인 것도 아니고... 손자도 많으면 값이 가지 않는 거야. 그리고 손자며느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얼마나 소중하겠어? 그리고 지금 너희 부부 딸이 없으니까 이 정도지, 후에 딸애라도 하나 낳아봐봐, 넌 더욱 안중에도 없을 거야.”노동명의 어머니도 아들만 네 명을 낳았다. 후에 노동명의 조카이자 첫 손녀가 태어났을 때, 윤미라는 기뻐하며 매일 큰 손녀를 안고 다녔다. 귀염둥이니, 보배단지라는 말이 입에서 끊길 줄 몰랐다.그 후, 손녀가 줄줄이 생기자 윤미라도 처음처럼 기뻐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손
노동명이 말했다.“새 가게가 오픈하면 꼭 응원하러 갈 거야.”비록 직접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꽃바구니라도 보낼 생각이었다.“가게가 오픈하거든 처형도 꼭 널 가게로 초대할 거야.”노동명은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예진이는 날 전혀 사랑하지 않아. 여전히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 병원에서 나를 돌봐준 것도 나의 신세를 졌다고 생각해서일 거야. 그래서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신세를 갚을 겸 와서 돌봐준 거고. 어머니도 매일 일당을 주셨거든.”“일당을 주신 건 맞는데, 처형은 한 푼도 받지 않았어. 그냥 네 앞에서 돌봐줄 이유를 찾느라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노동명은 이 일을 처음 알았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이번 기회에 나에게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을 텐데 당연히 받지 않았겠지. 만약 돈을 받았다면, 계속 신세를 진 셈이잖아. 나도 예진이가 돈을 받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어. 하필이면 자기 자신을 돈을 보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 또 뭐야. 음... 태윤아, 너 지금 나랑 예진이의 새 가게로 가보지 않을래?”전태윤은 자신이 지금 심심하다는 생각에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전태윤과 함께 나간다고 하자 노진규 부부는 막내아들이 외출하는 것을 허락했다. 다만 아들이 하예진의 새 가게로 찾아갈 줄을 몰랐다.노동명은 조수석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나 언제쯤이면 혼자 운전할 수 있을까? 질주하는 쾌감이 그리워.”그는 힘없는 자기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쓸데없는 것들. 폐물이야, 폐물.”“노동명.”전태윤은 운전하며 말했다. “네다리는 곧 회복할 거니 폐물이라고 하지 마. 조금이라도 통증을 느낄 수 없다면 오히려 걱정해야 할 거야.”노동명은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그는 친구 앞에서 일부러 강인한 척 행동했다.사실 그의 마음속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혹시라도 회복하지 못할까 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까 봐,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까 봐 두려웠다.“꽃가게를 지나가거든 잠깐 멈춰줘. 예진에게 줄 꽃다발
전이진이 물었다.“형, 형수님은? 어디 가셨어?”여운초가 답했다.“출장 갔을걸. 예정 씨로부터 요 이틀 출장 간다고 들었거든.”여운초도 장님만 아니었다면 자주 출장을 가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한동호가 여운초 대신 여기저기 다니고 있다.여운초는 마음속으로 직접 회사에 가고 싶었다. 다만 앞을 볼 수 없는 그녀에게 있어 먼 길을 떠나는 건 아주 귀찮은 일이다. 개인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면 모를까... 하지만 여운초에게는 개인 비행기가 없었다. 비록 미래의 시댁은 소지하고 있지만, 이런 일로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출장 갔다는 말에 전태윤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와이프가 출장 간 걸로 생각할 예정이었다.와이프가 옆에 없어서인지 전태윤은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날은 전혀 어두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해는 여전히 높이 떠 있었다. 매분 매초가 아주 힘들게 느껴졌다.하루를 못 본 것이 3년을 못 본 것만 같았다.전태윤은 처음으로 이런 고통을 맛봤다.아내가 강성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따라가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또 아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날 줄이야...“동명아, 너 직접 가서 고를 생각 있어?”전태윤이 물었다.노동명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너와 이진이가 나 좀 부축해 줘.”전태윤은 휠체어를 먼저 내리고 동생과 함께 노동명을 부축해 내려 휠체어에 태웠다.“노동명 씨.”노동명의 목소리를 알아챈 여운초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운초 씨, 오랜만이에요, 장미 한 다발을 준비해 줄래요?”“그럼요, 지금 바로 포장해 드릴게요.”여운초는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능숙하게 꽃다발을 쌌다.전이진은 옆에 서서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의 도움 없이도 잘 쌀 수 있으니까.전이진은 여운초가 익숙한 곳에서는 보통 사람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안 후부터 그녀에게 꽃 배달을 몇 번이나 시켰다. 그녀가 가게로부터 전씨 그룹으로 가는 길을 익히게 할 생각이
“난 동명 씨의 심정 이해할 것 같아.”여운초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쳐 일어설 수 없게 됐어. 한동안은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불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소란을 피우는데... 나 그때 거의 죽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일어나보니 눈앞이 캄캄하더라. 작은고모의 말소리를 듣고 왜 불을 켜지 않느냐고 물었었어.”지금의 여운초는 막 시력을 잃었을 때를 떠올려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했다.“그러자 고모는 대낮에 불을 켤 필요가 있냐고 하더라. 한참 지나서 아주 놀란 목소리로 앞이 안 보이냐고 몇 번이나 묻길래 안 보인다고, 눈앞이 캄캄하다고 했어. 의사가 와서 보더니 내가 시력을 잃은 것 같다는 거야. 그때 작은 고모는 나를 껴안고 한바탕 울었는데... 솔직히 그때 난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았어. 눈앞이 캄캄하고 보이지 않으니까 얼마나 당황하고 무섭든지... 마치 허공에 떠 있는듯한 느낌이었어.”여기까지 얘기한 여운초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꿨다.“자,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다 지난 일이니까. 곧 개학이지?”여운초가 갑자기 전이진에게 물었다.“응, 곧 개학이야. 너 천우 안 봐?”여천우는 명문대학에 다닌다. 그 대학은 관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운초는 동생이 혼자 그 먼 곳에 가서 대학에 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동생은 독립성이 강한 사람이라 스스로 자기를 잘 돌볼 수 있을 거니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두 남매 사이에는 결국 간격이 생겼다.여천우는 비록 여운초의 친정 식구 신분으로 전씨 일가와 혼사를 의논하였지만 두 사람이 약혼식을 치르자 더는 여씨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아마도 날 미워하고 있을 거야,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여운초는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비록 동생의 소외를 개의치 않지만 그래도 동생이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둘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안타깝게도, 동생은 그녀
여운초는 전이진의 입을 막았던 손을 내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 카운터를 돌아 나왔다. 그때 마침 점원이 가게로 들어왔다.전이진은 굳은 얼굴로 가버리더니 계속하여 꽃에 물을 주었다.점원은 받은 돈을 여운초에게 건네주며 그녀와 스쳐 지나가는 전이진을 슬쩍 쳐다보았다. 전이진이 가게를 나가 밖에서 꽃에 물을 주는 것을 보고서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사장님, 저 잘못한 거 없죠?”여운초는 점원이 건네준 돈을 받아 수가 틀림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점원의 질문을 듣고는 말했다.“없는데요. 다 잘하고 있어요. 잘못한 것도 없고요.”“그럼 다행이에요. 방금 이진 씨가 지나갈 때 저를 째려보셔서 제가 실수라도 한 줄 알았어요.”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점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여운초는 속으로 전이진에 대해 투덜대면서도 겉으로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잘못 본 거겠죠. 왜 아무 이유 없이 노려보겠어요. 이진이는 웃지 않을 때면 보통 엄숙한 표정을 짓곤해요. 그래서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 거예요.”전이진은 그녀 앞에서는 부드러운 태도지만 남들 앞에서는 완전히 바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단지 여운초는 그런 표정의 전이진을 본 적이 없을 뿐이다. 그녀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그럼 제가 잘못 본 건가 봐요. 사장님 말이 맞아요, 이진 도련님은 사장님 앞에서는 온화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엄숙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차가워 보여서 가까이 하기 어려워 보여요.”점원은 이 말을 할 때 전이진의 귀에 들릴까 봐 감히 큰 소리로 말하지 못했다.전이진은 청력이 좋아서 점원의 말을 엿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점원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건 그가 여운초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으니까.전이진은 잘 아는 사람 앞에서는 보통 온화한 성격을 보이곤 한다.여운초는 미소를 지었다.“내 앞에서는 온화하다기보다는... 꼭 양아치 같은걸요.”“...”전이진이 양아치처럼 여운
꽃필무렵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 관성 호텔까지 멀지 않아 두 사람은 금방 도착했다.여천우는 어디로 가려는 건지 가방을 메고 마침 호텔에서 나오고 있었다.전이진은 급히 차에서 내리면서 여운초에게 말했다.“천우 어디로 외출하려고 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가서 불러세울 테니까 천천히 내려. 조심해.”“그래, 빨리 가. 나 혼자 내릴 수 있으니까.”그녀는 전이진의 차를 자주 타고 외출하여 차 구조에 이미 익숙해졌다. 그래서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게 되었다.전이진은 빠른 걸음으로 여천우에게로 향했다. 여천우는 미리 차를 예약한 건지 호텔 입구에 있는 차량으로 향했다. 그는 차 문을 열고 차에 오르려고 했다.“천우야.”여천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곧 시선을 전이진의 뒤쪽으로 옮겼다. 여운초가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이때 어떤 사람이 급히 호텔에서 달려 나오다가 여운초와 부딪쳤다.여천우는 본능적으로 달려가려고 발을 내디뎠지만, 이내 동작을 멈췄다.다행히 여운초도 아무 일 없었다. 그 사람은 여운초가 장님인 것을 발견하고는 연신 사과했다.“눈이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저렇게 오는 걸 그저 보고만 있는 거예요?”여천우는 참지 못하고 전이진에게 한마디 했다.전이진은 고개를 돌려 여운초를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그 장면을 보지 못했기에 여운초가 하마터면 다른 사람에게 부딪힐 뻔했다는 것을 몰랐다.“운초는 여기를 자주 다녀서 혼자 천천히 걸어오는 것 정도는 괜찮아. 운초도 네가 떠날까 봐 나더러 먼저 널 잡으라고 했어. 어디 가는 길이야?”전이진은 여천우에게 물어보면서 시선은 약혼녀를 향하고 있었다.여천우는 조금 화가 났다. 방금 그 장면은 못 봤으니까 그렇다 쳐도 아직도 누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까딱하지도 않는다니... ‘가서 누나를 좀 부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평소에도 누나에게 이렇게 대해요? 누나 혼자 더듬으며 걸어오게 내버려둘 생각이에요?”여천우의 말투에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여천우는 최씨 일가와 김씨 일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렇게 계획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큰누나가 여씨 기업을 인수하자 최씨와 김씨는 아무런 이득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여씨 일가의 저택도 지금은 여운초가 장악하고 있기에 큰고모들은 친정에 가서 이익을 얻으려고 해도 어렵게 되었다.다른 방법이 없어서인지 고모들은 여천우의 앞에서 여운초의 나쁜 말을 억수로 해댔다.“네 누나는 독립적인 성격이라 모든 것을 나에게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운초도 자기가 장님인 게 나한테 영향 줄까 봐 항상 걱정하고 있어. 난 내가 볼 수 있는 범위내에서는 운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게 운초에게도 좋을 거로 생각해.”전이진은 부드럽게 말했다.“신의의 제자인 정겨울 의사에게도 이제 와서 눈을 봐달라고 부탁했지만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하잖아. 만약 겨울 의사도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말한다면 네 누나는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해. 그럴 경우 난 네 누나가 크게 영향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삶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해야 나와 남은 인생을 함께할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거야”여천우는 전이진을 바라보며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정겨울 의사가 신의의 유일한 제자라고 하지 않았어요? 정겨울 의사조차도 우리 큰누나의 눈을 치료할 수 없대요?”큰누나의 실명은 부모님에 의한 것이다. 만약 큰누나의 눈이 치료된다면 여천우의 죄책감도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다.“정겨울 의사가 실력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운초의 눈을 치료해 줄 상황이 아니라서. 그리고 반드시 눈을 치료할 수 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잖아.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어야 해. 천우 넌 걱정하지 마. 너와 작은고모가 날 믿고 운초를 맡겼으니 난 반드시 운초를 행복하게 해줄 거야. 평생 잘 보호해 줄 거라고 약속할게.”여천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나를 찾아온 거예요?”전이진은 그의 물음에 응했다.“어디 가려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