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혜의 안색이 확 변했다.“어르신, 우리 아저씨를 몇 년 더 살릴 방법은 정말 없나요?”김청산이 대답했다.“저와 우리 제자도 함께 힘을 모아 명약을 모두 써봤는데... 우리도 최선을 다했소. 맏형이 이렇게 오래 버틴 건 우리가 건강을 관리해준 덕도 있지만 마음속의 집념 때문이었소. 비록 이 가주님의 원수를 갚지는 못했지만 당신들이 잘살고 세력도 갖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 모양이오. 이제 원수를 갚는 일은 당신들에게 맡기고 가주 곁으로 갈 준비를 하는 것 같소. 집념이 사라지면 정신력도 떨어져 오래 버티지 못하오. 게다가 그는 이미 백 세 가까운 나이라 그런 날이 온다 해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오.”다들 장수 백 세라고 외치고 있지만 정말 백 세까지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이경혜가 걱정스럽게 방안을 바라보자 김청산은 그녀가 한성근이 잠든 채 깨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임을 눈치채고는 천천히 위로했다.“아직 증거를 당신에게 넘기지 않았으니 버틸 수 있을 거요. 증거는 모두 그가 직접 숨겨둔 것이라 우리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소.”결국 한성근은 동생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그들 역시 한성근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도 남의 일에 관여하기를 꺼리는 성향이었으니까.용정 역시 복수를 안고 있었지만 그들은 용정의 복수를 대신에 해주지 않았다.다만 용정에게 가르침을 주었을 뿐 복수할지는 용정 본인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했다.용정이 김청산의 제자였음에도 그의 복수에는 관여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한성근의 가주 복수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우리는 여기 오래 머물지 않을 거요. 우리 맏형을 모시고 가서 증거를 받아서 당신에게 보낸 뒤 맏형만 당신 집에 며칠 머물게 할 생각이오.”이경혜가 말을 이었다.“당연하죠. 아저씨는 우리 어머니 곁에서 지내셨기에 저희 식구나 다름없어요. 이제는 더는 왔다가 갔다 하실 필요 없이 여기서 편히 지내시게 할 계획이에요. 제가 아저씨를 모실 거예요.”“옛정을 잊지 않고 이렇게 마음 써
김청산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이 마치 예씨 가문의 형제들처럼 가정 분위기가 좋다고 여겼다. 왠지 두 가문 사이가 좋더라니, 이제 와서 보니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어르신.”전태윤 역시 공손하게 김청산에게 인사했다.김청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친구들을 전태윤 부부에게 소개했다.마지막으로 한성근을 가리키며 하예정에게 말했다.“사모님, 이분이 바로 사모님께서 계속 찾던 분이오. 사모님의 이모께서 ‘아저씨’라고 부르던 분이오.”“신의님, 그냥 예정이라고 불러주세요.”하예정은 한성근을 바라보며 인사했다.“할아버지.”하예정은 한참 후배라 한성근을 만난 적이 없었고 한성근 역시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하여 하예정과 한성근은 서로 만났지만 아까처럼 감정이 격해지지 않았다.한성근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정 아가씨군요.”이경혜의 말대로 하예정은 이경희와 많이 닮지 않았다.처음 보았을 때 조금은 닮은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또 달랐다. 아마 하예정은 해씨 집안의 유전자를 더 물려받은 모양이다.“네, 제가 하예정입니다. 우리 언니 하예진은 강성에 가서 설날쯤 관성으로 돌아올 예정이에요.”한성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예정의 근황을 물었고 그녀 또한 스스로 강인하게 성장한 사람이라는 걸 알자 더욱 흐뭇해했다.이은숙의 후손들은 어릴 적 고난을 겪었지만 자라서는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전씨 할머니의 안목이 무척 빼어나 하예정의 우수함을 알아보고 전태윤을 설득해 현재 정말 잘살고 있었다.이은숙의 후손들은 정말 뛰어났다.“아저씨, 어르신들. 아침 식사하러 이동하시죠.”이경혜가 모두를 식당으로 안내했다.그리고 그녀와 성문철이 앞장서 한성근을 부축해 주었다.김청산 일행은 신체가 튼튼했기에 부축이 필요 없었다.김청산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아직 소 한 마리를 때려잡을 힘이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고 했다.모두는 성씨 가문에서 아침을 먹은 후 이경혜는 한성근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한성근이 지쳐갈 때쯤 이경혜는 한성근
“아저씨, 경희의 큰 딸은 강성에 갔어요. 지금은 그곳에서 일하고 있어서 당장은 만날 수 없을 거예요.”이경혜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한성근이 성소현을 자꾸 쳐다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마 이은숙의 혈통에서 이씨 가문을 이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는 모양이다.한성근은 가장 충성스러운 비서였다. 그는 이씨 가문이 반드시 이은숙의 혈통에 의해 이어져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이은화가 가주의 자리에 40년 넘게 앉아 있었지만 한성근은 그녀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이은화가 한성근을 살려두지 않으려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성근이 살아있으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한성근과 이경혜 자매가 전부 죽어야만 그녀가 이씨 가문을 잇는 것이 당연해 보일 것이다.“예정이가 오고 있어요. 조금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예정이는 아버지를 더 닮았고 예진이가 경희를 더 닮았어요. 예진의 아들 우빈은 경희의 어릴 적과 아주 똑같아요. 치마를 입히고 양갈래 머리를 하면 더 닮았을걸요.”하예진은 한때 너무 뚱뚱해져 원래 모습을 잃었기에 이경혜가 오랫동안 하예진 자매를 찾지 못했다.한성근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다 알고 있어요. 친구들이 다 말해줬어요.”이경혜는 몇 분의 노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한성근의 목숨을 구해주고 수십 년 만에 재회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우리도 이 형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구해준 것뿐이오. 우리가 더 일찍 경혜 아가씨가 관성에 계신 걸 확인했더라면 많은 일의 결말이 달라졌을 텐데 너무 아쉽소.”이경혜가 말했다.“어떻게 어르신들을 탓할 수 있겠어요. 저 자신도 최근에서야 제 신분을 확실히 알게 되었는데...”이경혜의 기억 속에는 가족들이 전부 떠나고 여동생과 함께 계속 옮겨 다니다가 결국 그녀들의 보호자들까지 전부 죽어 나갔고 결국 관성의 고아원에 들어간 것밖에 없었다.당시 갑작스러운 사고로 어린 자매는 그 비극의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너
이경희의 무덤 앞에서 이경혜는 눈이 메일 정도로 울었지만 여동생을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오직 두 조카딸에게 더욱 각별한 사랑을 주는 방법밖에 없었다.비참한 유년 시절에서 이경희의 죽음까지, 그리고 그녀들의 부모님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된 이경혜는 이은화를 이가 갈릴 정도로 원망했다.한성근도 분노에 차서 말했다.“남모르게 한 일이라도 반드시 들통나기 마련이죠. 반드시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될 거예요.”“맞아요, 아저씨. 반드시 대가를 치를 거예요.”“하지만 제가 너무 무능해서... 제가 가진 증거는 많지 않아요. 게다가 과거의 증인들도 전부 살해당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어서 고소하기도 어려웠어요.”한성근은 말을 마치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이경혜는 냉철하게 말했다.“증거가 있든 없든 저는 반드시 이씨 가문의 권력을 되찾을 거예요. 제가 조카딸을 그 자리에 앉힐 거예요. 그 여자가 아무리 많은 일을 꾸며내고 많은 것을 빼앗아도 이씨 가문을 반드시 우리 어머니 혈통으로 돌아오게 할 거예요. 지금도 이미 벌을 받고 있는걸요. 그 여자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양녀가 매일 싸우고 있거든요. 아, 양녀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 그리고 친딸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지 않아 두 모녀가 진정으로 한마음이 되기도 어렵대요. 아저씨께서 가진 증거를 전부 저에게 주세요. 제가 그 증거를 사촌 동생 이윤미에게 전해줄게요. 보내주게 되면 두 모녀가 절대로 한마음이 될 수 없을걸요.”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만약 이은숙의 죽음이 이은화와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후계자 자리를 이경혜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이경혜가 하예진을 후계자로 키우려는 것도 이경혜의 자유이고 이윤미 또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윤미는 그저 이씨 가문을 떠나 진정한 그녀로 살고 싶을 뿐이다.이씨 가문에는 너무 많은 악습과 비인간적인 가족 규율이 있었는데 그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이윤미는 마음속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한성근 역시 이
작년에도 한성근은 저승 문턱을 한번 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한성근은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고 동생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경혜에게 말했다.“아가씨, 저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예요. 아가씨가 우리 가주님의 원수를 갚고 지금 가주가 처벌할 때까지... 안 그러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어요. 제가 너무 무능한 탓이에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가주의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아가씨 자매의 소식도 찾지 못했으니...”만약 한성근이 이경혜 자매의 소식을 더 일찍 알았다면 이경희도 그렇게 일찍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는 이은숙을 보호하지 못했고 그녀의 두 딸도 지켜내지 못했다.한성근은 늘 이은숙에게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특별 훈련을 받고 이은숙의 곁에서 많은 일을 해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은 실패했기에 구천에 있는 이은숙을 볼 면목이 없다고 여겼다.그를 훈련한 기지에서는 이은숙이 세상을 뜨고 이은화가 이씨 가문의 권력을 잡자마자 즉시 새로운 특별 비서를 파견했다.과거 한성근이 사용할 수 있었던 인맥은 전부 이은화의 특별 비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가 직접 쌓아온 인맥만은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다만 이은화의 추격을 받을 때 그들은 한성근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둘 죽어갔을 뿐이다.이은화는 인정사정없이 전부 사살하려 들었다.이은숙과 이은경에게도 가차 없이 손을 댔고 두 조카딸에게도 무자비했으니 어떻게 그들을 살려둘 수 있었겠는가?한성근이 끊임없이 도망쳐도 계속 추격당했지만 그래도 생존 가능성은 남아있었다.도망가지 않으면 죽는 길뿐이었으니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이은화가 한성근을 미워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과거 그녀가 그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이다.그는 이은숙의 특별 비서로서 평생 결혼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만약 결혼하더라도 오직 가주와의 결혼뿐이었다.하지만 이은숙은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에게 두 딸까지 낳아 주었다.이은숙이 결혼하는 순간, 한성근은 평생 가주의 특별 비서로만 남을 운명임을 깨달았다
이경혜가 ‘아저씨'라고 부르자 막내 여동생 이경희도 따라서 ‘아저씨'라 불렀다.오직 그녀와 여동생만이 한성근을 ‘아저씨'라고 불렀고 매번 그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이경혜의 흐릿한 기억 속에서 부모님과 한성근은 모두 매우 바쁜 삶을 살았다.이은숙의 건강은 좋지 않아 사업을 종종 여동생 이은화에게 일을 맡기곤 했다.이은숙은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은화에게 회사와 가족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게 했지만 이은화는 되려 권력을 빼앗으려는 마음을 품었다.이은화는 분명 자신이 많은 일을 했음에도 모두가 여전히 이은숙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오직 이씨 가문의 주인이 되어야만 모두가 완전히 자신을 따르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네...”이경혜가 ‘아저씨'라고 부르자 한성근은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했다.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지만 이경혜의 잘 관리된 외모로 인해 이은숙 부부를 닮은 모습을 한눈에 알아 볼수 있었다.한성근은 마치 이은숙 부부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공은호의 반복적인 확인과 정겨울 일행의 확인을 통해 한성근은 이경혜가 가주의 장녀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경희는... 10여 년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다행히 그녀는 두 아이를 남겼고 이경혜도 자식과 손주가 있었다.이은숙의 혈통이 드디어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한성근은 감정이 북받쳐 이경혜의 손을 꼭 잡으면서 몇 번이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목이 메기만 했고 오직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그의 감정을 표현해 주었다.감정이 과도해지고 나이도 많고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인지 한성근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기절하고 말았다.“아저씨!”이경혜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한성근을 부축하며 성기현에게 소리쳤다.“얼른! 빨리 구급차를 불러!”“병원으로 보낼 필요 없소. 우리 맏형이 지나치게 흥분한 탓이오. 우리 중에서도 가장 연세가 많아 지나친 기쁨이나 슬픔은 금물이라오.”늙은 신의 김청산은 침착하게 한성근의 맥을 짚어본 뒤 이경혜에게 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