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큰 집 앞에 서 있었다. 거의 과호흡을 할 것 같았다. 손에는 땀이 배어 있었고, 긴장하고 있었다. 아니, 무서워하고 있었다.
나는 복숭아색 레이스 장식의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무릎에서 몇 인치 위까지 내려오는 길이였고, 몸에 꽤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귀여운 작은 V넥은 가슴골을 살짝 드러냈다. 왜 이 옷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매춘부 역할을 맡기로 했다면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약 30초 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시간을 세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또 30초를 세었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다시 1부터 10까지 세면서, 숫자를 다 셀 때까지 아무도 문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한심하게 숫자를 세고 난 뒤 몸을 돌려 떠나려 했지만, 첫걸음을 내디딘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뒤에서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키가 큰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입이 떡 벌어지지 않도록 애써 참았다.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내가 실제로 본 사람 중 가장 매력적인 남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늘 TV에서 그런 남자들을 보며 실제로 만나보는 것을 꿈꿔왔다. 그 꿈이 방금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는 짙푸른 눈 위에 작고 둥근 안경을 쓰고 있었다. 웨이브 진 머리는 뒤쪽에서 작은 번으로 묶여 있었다. 머리카락 일부가 얼굴 옆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농구선수 버전의 해리 포터처럼 보였다. 그러다 내 시선이 그의 몸을 훑었다. 그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다듬어진 복근과 근육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외모에 넋을 잃고 있을 때 그가 헛기침하는 소리를 들었다. “길을 잃었어요?”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저…… 테트라 부인을 만나러 왔어요. 제 이름은 레이야예요.” 내 말은 속삭임처럼 흘러나왔다. 얼굴이 너무 달아오르고 부끄러웠다. “엄마가 말했던 사람이군요. 들어와요.” 엄마? 나는 큰 소리로 소리치고 싶었지만, 대신 조용히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 냉정한 여자가 이 남자의 엄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집 안으로 안내하는 동안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에서 봐도 그는 정말 잘생겼다. “엄마는 지금 아빠랑 나가셨어요, 그러니까…….” “기다릴게요.”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중얼거렸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고 내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뱃속에서 나비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나는 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크고 밝은 집이었다. 거실 벽은 길고 커다란 유리로 되어 있어 정원이 훤히 보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벽 곳곳에 걸린 더욱 아름다운 그림들을 발견했다. 그림들이 정말 비싸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 이름은 레인이에요. 필요한 게 있으면 하녀가 가져다줄 거예요.” 중년의 여성이 내게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앞치마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가 말한 하녀인 것 같았다. “고마워요, 레인.” 내 시선은 다시 그의 짙푸른 눈으로 향했다. 왜 저 안경 뒤에 눈을 숨기고 있는 걸까? 아마 사람들이 그 눈에 빠져버리지 않게 하려고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이죠, 레이야. 전 위층에 있을게요.” 그는 내게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근처 계단을 통해 사라졌다. 웃을 때는 훨씬 더 멋있었다. “뭐라도 가져다줄까, 아가?” 앞치마를 입은 여자가 말을 걸어오면서 내 생각은 레인에게서 끊겼다. “마실 것 하나면 돼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떠나자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부드러웠다. 이렇게 부드러운 소파에는 앉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내 눈은 다시 방 안을 훑기 시작했다. 방 한구석에는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정말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고 그 지식을 내게 물려주었다. 아빠는 피아노 앞에 앉아 나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히곤 했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손가락이 건반을 따라 움직이도록 이끌어주었다. 각각의 음을 아주 완벽하게 연주하면서. “피아노 칠 줄 아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내 몸이 움찔했다. 뒤를 돌아보니 중년의 남자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레인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고, 그렇다면 그는 레인의 아버지라는 뜻이었다. 테트라 부인의 남편.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의 남자였다.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느냐고 물었네.” 그는 내 뒤에 있는 웅장한 피아노 쪽으로 고개를 살짝 움직였고,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아빠가 가르쳐주셨어요.” “가르쳐주셨다고? 왜 그만두셨나?” 그에게는 아버지 같은 말투가 있었다. 사랑받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그런 말투였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로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아빠가 그리웠다. 아빠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아가, 정말 안됐구나. 미안하구나.” 그의 목소리에 담긴 공감은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언제든 치고 싶을 때 와서 연주하렴. 네가 연주하는 걸 듣고 싶구나.” 그는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를 보자 내가 왜 이 일을 하기로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선량한 사람이었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테트라 부인이 들어왔다.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보, 레이야를 만났군요. 레이야, 이쪽은 제 남편 데이비드예요.”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역겨움을 느꼈지만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보. 이 아이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걸 알고 있었나?” 그는 감탄한 듯 말했다. 마치 자랑스러운 자녀를 바라보는 아버지 같았다. “피아노를 친다고?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니, 레이야?” ‘당신이 묻지 않았잖아, 이년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대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레이야, 우리와 함께 점심 먹으렴.”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거절하려던 순간 그녀가 말했다. “그래. 우리와 함께 먹어. 내가 권하는 거야.” 그녀는 아주 다정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협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감사해요. 두 분 정말 친절하시네요.”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정원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유리 벽 너머로 계속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 정원이었다. 밖의 공기는 따뜻하고 상쾌했다. “레이야, 정원에서는 신발을 신지 않는단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는 데 너무 정신이 팔려 모두가 신발을 벗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죄송해요.” 나는 속삭이며 입구로 서둘러 돌아가 플랫슈즈를 벗었다. 그때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레인이었다. 그 역시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의 향수 냄새가 살짝 코끝에 스쳤다. 소나무와 코코넛 향이 났다. 그 향을 전부 들이마시고 싶었다. “내 고통을 이해해요. 나도 억지로 신발을 벗어야 하거든요.” 그는 내게 윙크한 뒤 정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즉시 몇 초 동안 숨이 막히는 듯했다가 다시 한 번 그의 향수 냄새를 맡았다.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잘생기고 좋은 향까지 날 수 있을까? 나는 온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섰다. 세 사람은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서 비어 있는 유일한 의자는 레인 옆자리였다. 나는 그것이 문제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를 정신없이 만들 것이다. “그럼, 레이야…….” 내가 자리에 앉자 레인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들의 목소리만큼이나 낮았고 거의 똑같았다. 마치 레인이 나이가 든 모습 같았다. “요즘 내 아내가 자네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더군.”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왜 그녀는 나에게 그를 유혹하라고 한 걸까? 그는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이것이 내가 모임을 싫어하는 이유와 같았다. 나는 항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레이야, 어디에 사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레인이었다. “웨스트 애비뉴, 링컨 스트리트, 6번 아파트요.” 나는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냥 웨스트 애비뉴라고만 말했어야 했다. “가족과 함께 살아요?” 그가 계속 물었다. 바로 그때 주방 사람들이 음식과 함께 들어왔고 접시가 우리 앞에 놓였다. 구운 감자의 달콤한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아니요. 혼자 살아요.” 나는 한입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음식이 혀 위에서 녹자 입안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 같았다. 정말 맛있었다. “왜?”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점점 정말 긴장하기 시작했다. 질문받는 것이 싫었다.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제 동생은 병원에 있어요. 뇌암에 걸렸어요.” 나는 속삭였다. 끔찍한 침묵이 이어졌고 식탁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내가 한 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꽤나 슬픈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 삶이었다. 나는 누구와도 그것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레이야. 정말 안됐구나.” 레인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나는 속삭였다. 그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나는 포크로 음식을 찔렀다. 이제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베개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싶었다. 식탁의 침묵은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고, 테트라 부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괜찮다면, 내가 자네 동생을 한번 만나러 가고 싶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테트라 씨의 매력적인 눈과 마주쳤다. 그 역시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저…….” “내가 꼭 가고 싶네, 레이야.”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잘랐다. 내 시선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 내가 그를 유혹하는 것. “그렇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부끄러움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안나를 만나기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알기만 한다면,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음식 한입을 베어 물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아주 빨리 깨어나야 했다.내 눈은 거실 전체를 훑었다. 그곳은 내가 예전에 살던 아파트 전체 크기와 같았고, 아니, 아주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둘러보던 중 내 눈에 예전 집에 있던 안락의자가 들어왔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새것이었다. 안락의자가 연한 갈색이었기 때문에 다른 소파들도 같은 색을 사용하고 있었다. 커다란 TV 앞에는 긴 소파가 놓여 있었고, 두 개의 1인용 소파는 내 예전 소파를 포함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또한 거실 끝부분에 유리창으로 된 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창들은 자연광을 안으로 들여보내 미색으로 칠해진 벽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정말 아름다웠다.오른쪽을 보니 주방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흰색을 테마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거실의 페인트와도 잘 어울렸다. 위쪽 벽에 걸려 있는 손잡이 없는 수납장과 바닥에 붙어 있는 하부장들은 모두 흰색이었다. 바닥 수납장 위에 놓인 대리석 상판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 색은 양문형 냉장고부터 전자레인지, 식기세척기, 오븐을 비롯한 수많은 주방 가전과도 어울렸다. 완벽하게 기능하는 주방이었다. 나는 그저 마음에 쏙 들었다.“그럼 네가 아파트에 익숙해지도록 나는 자리를 비켜줄게.”데이비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가 아직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옆에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나 약속된 미팅이 있어서, 한…”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롤렉스를 바라보았다. 1초 후, 다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한 시간 후에.”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이 아파트 정말 멋져요.”나는 마지막 단어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그는 소리를 죽여 웃었다.“정말 고마워요, 데이비드.”나는 몸을 기울여
“걸어서 갈 수 있겠어요, 아니면 휠체어를 요청할까요?”“휠체어로 부탁해요.”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멀쩡하게 걸을 수 있었지만, 그냥 휠체어에 실려 나가기로 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겠는가?“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데이비드는 방에서 급히 나갔다. 그는 나를 병원에서 데려가기 위해 왔다. 내 새 집은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내 옷과 다른 소지품들을 예전 아파트에서 옮기는 것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데이비드는 내가 예전 아파트가 있는 지역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아주 확고했다. 내 물건을 가지러 가는 것조차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집을 알아봐 주던 남자에게 내 모든 물건을 새 집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물론 그것들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정리할 예정이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나’는 데이비드가 나와 함께 살도록 고용한 새 가정부를 의미했다.“자, 갑니다.”데이비드는 두 명의 간호사와 의사를 뒤에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간호사 중 한 명이 자신의 앞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나는 입술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내게 건넨 미소에 답했다.“제가 도와드릴까요?”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간호사 중 한 명이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바로 내 곁으로 달려왔다. 공중에 늘어뜨려져 있던 내 팔을 잡은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비행기에서 ‘취급주의’라고 적힌 상자라도 된 기분이었다.내 팔을 단단히 잡은 간호사는 뒤에서 다른 간호사가 잡고 있던 휠체어에 나를 천천히 앉혔다. 나는 다리를 발판 위에 올려놓고 밀려나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독특한 병원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면서도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내 평생 해본 일 중 단연코 가장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해냈다. 내 미친 천재 같은 두뇌가 결국 해냈다.내가 직접 집을 보러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데이비드는 누군가에게 내가 새 아파트에서 원하는 것들을 물어보게 한 뒤, 내 취향에 맞는 집을 찾도록 했다. 내가 언급한 몇 가지는 아름다운 주방, 침실 두 개와 그중 적어도 하나에는 욕조가 있는 것, 안나의 새 병원과 가까운 위치였고, 나는 여전히 아파트를 원했다. 계단을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더 나열했지만, 그것들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요 조건들이었다.데이비드 역시 내가 예전 아파트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 집이 준비될 때까지 병원에 머물라고 고집했다. 그것은 곧 나를 위해 집을 알아보고 있는 불쌍한 젊은 남자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꽤 귀여웠다. 나는 우리가 단둘이 있을 때 그가 나에게 추파를 던졌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물론 나도 망설임 없이 그에게 똑같이 추파를 던졌다.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레인은 케이티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지 하루 후, 다행히도 아버지가 병원을 떠난 직후에 그는 내게 찾아와 그녀를 잡기 위한 우리의 계획을 어떻게 진행할지 지시를 받았다.“그러니까 잘 들어.”나는 그의 집중한 눈을 바라보며 흥분을 숨기려고 애쓰면서 말을 시작했다.“케이티는 너를 사랑해. 그것도 희망이 없을 정도로, 위험할 정도로 너를 사랑하고 있어.”“그 정보가 정말 중요한 거야, 레이야?”“아니, 그냥 너 약 올리고 싶어서.”나는 낄낄거리다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는 눈을 굴렸다. 내가 스스로 만족하고 나자 진정했다
데이비드는 나를 담당하는 의사를 찾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몇 분 후 그의 아들이 우아하게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빨리 그를 보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짓자 나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안녕, 아름다운 사람.”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더니 몸을 기울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내 눈은 문으로 재빨리 향했다. 그의 아버지가 언제라도 들어올까 봐 두려웠다.“머리는 어때?”그가 묻는 동시에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길이 이어질 때마다 내 불안은 커졌다. 속이 뒤틀렸고, 동시에 배 속 깊은 곳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데이비드가 곧 들어올 것이라고 알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무슨 일이야, 레이야?”걱정스러운 그의 말투에 내 눈이 다시 그에게 향했다.“불안해 보이는데.”“아무것도 아니야.”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억지로 대답했다.“그냥…”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문을 힐끗 바라봤다.“머리를 쓰다듬는 게 조금 불편해서.”“아, 물론이지.”그는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미안해.”그는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의자에 앉아 내 침대 옆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내 손을 잡아 침대 위에 올려놓은 채 눈을 들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 눈은 문을 바라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레인의 눈이 내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바로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곧바로 기침하는 척하며, 누가 들어오는지에 정신이 팔린 레
레인은 내가 퇴원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을 때까지 내 곁에 있겠다고 고집했지만, 내가 가장 안도했던 것은 우주가 그에게 긴급 수업을 보내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일 때문에 그는 마지못해하면서도 결국 자리를 떠나야 했다.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안나에게 연락하고 싶다고 거짓말했고, 내 휴대전화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자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새 휴대전화를 얻을 완벽한 핑계가 되었다. 레인이 돌아오기까지 몇 시간밖에 없었고, 그 전에 데이비드와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결국 새 휴대전화가 도착했다. 아이폰 15 프로였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부터 사용해오던 7+보다 훨씬 좋은 기종이었다.나는 망설이지 않고 새 휴대전화의 포장을 뜯었고, 잠시 그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아마도 내가 손가락을 대본 기기 중 가장 세련된 기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것이었다. 나는 전원을 켜자마자 곧장 카메라 앱으로 들어갔다. 셀카 카메라를 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 머리를 감싸고 있는 흰 천이었다.내 앞의 화면에 시선을 둔 채, 손가락을 머리로 가져갔다. 하얀 천의 작고 보이지 않는 섬유가 내 손가락 끝을 스쳤다. 솜처럼 느껴졌다.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내 눈에 붕대의 오른쪽 끝부분에 희미한 붉은 얼룩이 들어왔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것이 내 피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내 손가락으로 그 얼룩을 따라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누군가 내가 이렇게까지 미쳐버릴 거라고 말했다면, 나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단칼에 부정했을 것이다. 내 생각들은 나 자신을 무섭게 했다. 가끔은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내 정신이 온전한지 의심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갈 수 없었다.바로 그때 나는 애초에 왜 휴대전화를 부탁했는지 떠올랐다. 나는 병원
나는 레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약간의 분노를 띤 채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충격적인 반응을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과장된 반응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레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는 것이 느껴졌지만,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정말 크게 울려 퍼졌다. 그의 반응은 이 배를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케이티가 너를 정확히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건 알아…”“그녀는 나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야. 날 미워하고, 나를 협박했어.”그는 짧게 숨을 내쉰 뒤 눈을 굴렸다.“마치 그녀가 흉악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그날 그녀가 내 아파트에 왔을 때 네가 봤어야 해.”나는 반박하며 목소리를 차분하게 유지하려 애썼다.“그날 그녀가 나한테 했던 말을 전부 진심으로 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레인은 고개를 저으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릿속이 내 제안에 단 한순간이라도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내 안에서 차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아직도 그녀에게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봐, 나 케이티를 알아.”그의 목소리의 속도가 속삭임으로 줄어들었다.“너한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 그녀와 사귀었어.”짧은 분노가 파도처럼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1년 동안.”그가 계속했다.나는 무례하게 말을 끊을 뻔했지만 꾹 참았다.“그녀에게 약간 극단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녀를 지배하게 내버려두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