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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일곱 해의 계산

Author: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5 05:28:07

한세아가 말한 ‘다른 사람’은 끝내 이름을 얻지 못했다.

―그날 병원에 네가 혼자였던 건 아니야.

―누구였는데?

읽음 표시만 남았다.

전화를 걸자 전원이 꺼져 있었다.

세아는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시켰다.

기다리는 것.

“쫓아가지 마.”

어머니가 내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쟤가 부르는 곳으로 뛰어가면 또 끌려다녀.”

“그럼 가만히 있어?”

“네가 가진 것부터 봐.”

내가 가진 것.

그 말에 방구석의 상자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아무렇게나 쓸어 담아 온 짐이었다.

최무겸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내 물건들.

나는 상자를 뒤집었다.

영수증, 충전기, 사원증, 말라붙은 립스틱.

바닥에서 오래된 휴대전화가 나왔다.

무겸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쓰던 것이었다.

전원을 켜자 수백 개의 메시지가 살아났다.

보고 싶어.

사랑해.

조금만 기다려.

검색창에 ‘결혼’을 입력했다.

대화는 많지 않았다.

내가 물었고, 무겸은 피했다.

―우리 결혼은 언제 해?

―지금은 회사가 복잡해.

―어머니께는 언제 말씀드릴 건데?

―적당한 시기가 오면.

적당한 시기.

무겸은 그 말을 오 년 동안 사용했다.

정확한 날짜가 필요할 때마다 뜻 없는 말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다 음성 파일 하나가 검색됐다.

녹음 날짜는 오 년 전이었다.

그날 무겸은 술에 취해 내 무릎에 누워 있었다.

나는 장난처럼 휴대전화를 켰다.

“최무겸 씨, 이연희 씨와 결혼할 생각 있습니까?”

과거의 내가 웃었다.

“있습니다.”

무겸도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 하실 겁니까?”

“서른넷.”

“왜 하필 서른넷인데?”

“승계 정리하고, 내 자리 만든 뒤에.”

“그럼 칠 년을 기다려야 하네?”

“기다려.”

“싫다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넌 기다릴 거잖아.”

파일이 끝났다.

웃음소리만 방 안에 남았다.

나는 날짜를 계산했다.

무겸이 약속했던 결혼까지는 아직 칠 년 가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한세아와의 결혼식은 다음 달이었다.

나와 결혼하려면 회사가 안정돼야 했다.

후계 구도가 정리돼야 했다.

어머니의 허락도 필요했다.

하지만 세아와 결혼하는 데는 그 모든 조건이 필요 없었다.

“결혼을 못 한 게 아니었네.”

어머니가 나를 봤다.

“뭐가?”

“나랑 하기 싫었던 거야.”

입 밖으로 내놓으니 오히려 단순해졌다.

오 년 동안 나는 무겸의 사정을 이해했다.

그가 힘들다고 하면 기다렸다.

회사가 위험하다고 하면 숨어 만났다.

임신했다는 말을 들은 날조차 그는 기뻐하기 전에 물었다.

누가 또 아느냐고.

나는 세아만 안다고 답했다.

그 순간 무겸의 표정이 어땠는지 이제야 떠올랐다.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무겸에게서 온 문자였다.

―세아가 무슨 말을 했든 대응하지 마.

나는 곧바로 답했다.

―나와 결혼하려면 칠 년이 필요하다며.

한참 뒤 답장이 왔다.

―상황이 달라졌어.

―내 아이가 없어져서?

―감정적으로 연결하지 마.

―그럼 정확하게 묻자. 내 수술과 네 결혼 사이에 무슨 상황이 달라졌는데?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는 청첩장을 다시 펼쳤다.

봉투 안에는 예식장 안내지와 회신 카드가 들어 있었다.

카드 뒷면 아래에 작은 인쇄번호가 있었다.

어머니가 돋보기를 가져왔다.

“이게 뭐냐?”

“제작 일자 같아.”

인쇄소 이름을 검색해 전화했다.

“청첩장 제작 날짜를 확인하고 싶은데요.”

직원이 번호를 물었다.

잠시 키보드 소리가 들렸다.

“접수일은 작년 10월 17일이네요.”

10월 17일.

내가 수술받은 날이었다.

“접수한 사람 이름도 나오나요?”

“네. 주문자는 최무겸 고객님입니다.”

나는 전화를 끊지 못했다.

직원이 다시 말했다.

“급행 주문이었어요. 당일 오후에 접수하셨네요.”

“몇 시요?”

“오후 네 시 십이 분입니다.”

그 시각, 나는 아직 수술대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다.

최무겸은 내 아이가 사라지기도 전에 한세아와의 청첩장부터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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