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밤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바다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별빛도 흐릿했다.마치 세상이 잠시 멈춘 듯했다.수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불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어도 눈앞에는 늘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언니의 웃음. 피로 물든 하얀 셔츠.그리고 그 옆에서 숨을 몰아쉬던 한 남자의 얼굴.그 얼굴이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강혁.’그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았다.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그 이름의 울림이 가슴 안쪽에서 진동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달빛이 희미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그 빛은 하얗게 식어 있었다.그녀는 손끝을 들어 달빛을 가렸다.그 순간, 그녀의 그림자가 벽에 겹쳤다.그림자는 둘이었다.하나는 그녀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디선가 따라온 듯한 또 다른 실루엣이었다.“언니…?”그녀는 작게 속삭였다.바람이 불었다.커튼이 흔들리고, 달빛이 깨졌다.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아주 낯선 장소였다.습한 공기, 땅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 그녀는 서 있었다.앞에는 붉게 물든 바닥, 멀리선 총성이 들렸다.그녀는 걸었다.몸이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그녀의 발끝이 닿은 곳,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수민이었다.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그녀는 그 옆에 또 한 사람을 보았다.강혁이었다. 그는 피를 뒤집어쓴 채, 수민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일어나요… 제발…”“그만… 가요…”그녀는 멈췄다.그 순간, 수민의 시선이 움직였다.그 시선이 정확히 그녀를 향했다.“수진아.”그녀는 숨이 멎었다.그건 꿈인데도, 너무 선명했다.수민의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이 사람을, 미워하지 마.”그녀는 울음을 삼켰다.“언니!”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입은 열렸지만, 소리는 사라졌다.수민의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그녀는 그를 향해 달려갔지만,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피가 번지고, 세상이 하얘졌다.숨이 막혀
해남의 새벽은 유난히 고요했다.밤새 내리던 비가 멎은 뒤, 마을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공기 속엔 젖은 흙냄새와 바다의 짠내가 섞여 있었다.수진은 문턱에 앉아 있었다.꽃잎을 말리는 철망 위엔 아직 물방울이 남아 있었고,그녀는 그 한 점 한 점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손끝으로 떼어냈다.그 물방울이 터지는 소리조차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그녀의 귀는 지금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듣는 것처럼 예민했다.“사람은, 믿을 때만 사랑할 수 있어.”언니의 말이 떠올랐다.그 말은 이제 더 이상 기억의 문장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였다.문득, 바람이 불었다.꽃잎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녀는 그 바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언니,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스스로에게 묻는 소리처럼 들렸다.대답 대신,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었다.그 바람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오늘은 일찍 왔네요.”강혁의 목소리였다.그녀는 그를 돌아봤다.새벽빛이 그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그 빛이 마치 오래된 슬픔을 덮어주는 것 같았다.“밤새 잠이 안 와서요.”그녀는 담담히 말했다.“그럴 줄 알았어요.”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어제 그 얘기, 미안해요.”“무슨 얘기요?”“언니의 마지막 순간을 말한 거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미안할 필요 없어요. 그건 내가 들어야 할 말이었어요.”잠시 정적이 흘렀다.둘 사이에는 라벤더 향이 가득했다.가게 한쪽 벽에 걸린 시계 초침이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였다.그 리듬이 두 사람의 숨과 맞아떨어졌다.“그날 이후로,”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나는 매일같이 생각했어요. 왜 그녀가 내게 ‘살라’고 했는지.”그녀는 눈을 들었다.“살라니요?”“마지막 말이었어요.”그는 창문 쪽을 바라봤다.“살아요. 내가 그 사람 대신 살게요. 그 말이 뭐였는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어요.”“그 사람 대신이
새벽이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다.바다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해남의 끝자락은 언제나 그렇듯,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수진은 유리창 너머로 흐릿한 수평선을 바라봤다.눈앞에 있는 건 분명 바다인데, 마치 기억 속의 한 장면처럼 불투명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언니의 이름이 끊임없이 맴돌았다.“김수민…”한때는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이 따뜻했는데,지금은 단 한 번의 발음조차 가슴을 갈랐다.꽃집 문을 여는 순간, 조용한 종소리가 울렸다.그 소리가 이상하게 낯설었다.그녀는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그때, 문가에 낯선 그림자가 섰다.“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의외네요.”수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혁이었다.그는 새벽 바람에 젖은 듯,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눈 밑엔 잠 못 잔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미안해요. 이상하게 이곳 불빛이 꺼지면, 잠이 안 와요.”“그럼 켜둘까요?”“아니요. 오늘은 그냥,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그녀는 찻잔 두 개를 꺼냈다.그의 손이 테이블 위에 닿자, 그 사이로 묘한 온도가 번졌다.찻물이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은 쉽게 식었다.“예전에 말했죠.”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그리움은 살아 있는 사람의 감정이고, 죄책감은 죽은 사람의 그림자라고.”“네.”“그림자가 길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을 잃어요.”그의 눈동자가 창가로 향했다.“내가… 그런 그림자 속에 살았던 것 같아요.”그녀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그의 눈빛엔 오래 묵은 후회가 있었다.하지만, 그 후회가 진심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강혁 씨, 언니를 아세요?”수진의 질문은 조용했지만, 그 속엔 숨겨둔 칼날이 있었다.그의 손이 멈췄다.한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그 이름…”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잊을 수가 없어요.”그 한마디에 수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그녀는… 아
밤이 깊어졌다.‘린꽃방’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가게 안은 조용했지만, 공기엔 무언가 묵직한 기운이 맴돌았다.수진은 오늘 하루 종일 꽃잎을 만졌다. 무의식이었다.손끝으로 잎맥을 따라 문지르고, 줄기를 정리하며 색을 맞추는 일.하지만 정작 그녀의 시선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그녀의 머릿속엔 오늘 들은 강혁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그리움은 살아 있는 사람의 감정이고, 죄책감은 죽은 사람의 그림자죠.”그림자. 그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책상 위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오래된 흑백. 사진 속의 언니는 웃고 있었다.그 미소가 따뜻해서, 오히려 슬펐다.수진은 사진을 손끝으로 덮었다.그 순간, 심장이 묘하게 아팠다.사진 속 언니는 늘 자신보다 강했다.모든 걸 감싸던 사람.그런 언니가 왜, 그날 그 작전에서 자신을 버리고 그 남자를 구했을까.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기억 속의 방이 열렸다.흐릿한 불빛. 냄새는 철 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캄보디아의 밤이었다.수민은 피투성이가 된 강혁을 끌어안고 있었다.“일어나요, 제발.”“도망쳐요… 수민 씨.”“당신 먼저 보내면, 난 평생 못 살아.”그녀는 그때를 똑똑히 기억했다.언니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눈빛은 고요했다.그리고, 총성이 들렸다.수민의 몸이 쓰러졌다.피가 튀었다.그녀는 달려가지 못했다.몸이 굳었고, 숨이 멎었다.“언니!!!”그녀의 비명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눈을 떴을 때, 가게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흐릿하게 보였다.뺨은 젖어 있었다.언제부터 눈물이 흐른 건지도 몰랐다.“언니… 그 사람을 그렇게까지 믿었어요?”그녀는 허공에 물었다.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아주 미세한 속삭임이 들렸다.“사람은, 믿을 때만 사랑할 수 있어.”그 말이 너무 따뜻해서, 그녀는 오히려 차가워졌다.그때 문이 열렸다. 바람이 들어왔다.강혁이었다.그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와, 젖은 신발을 벗었다.“아직 안 잤네요.”“잠이 안 와요.
비가 멈춘 지 하루가 지났지만, 마을 골목은 여전히 젖은 냄새로 가득했다.해남의 하늘은 낮게 깔려 있었고, 바다는 잿빛으로 일렁였다.‘린꽃방’의 문을 여는 순간, 수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햇빛은 흐리게 구름 사이를 비추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엔 여전히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꽃잎을 만지는 손끝이 유난히 차가웠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일까.언니의 목소리가 꿈속에서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수진아, 세상에 복수란 건 없어. 다만 미움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만 있지.”그 말이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새벽 내내 눈을 감을 수 없었다.“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해요?”낯익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들어왔다.수진이 고개를 들자 강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검은 우비를 벗으며, 마치 한참을 망설인 사람처럼 문턱에서 멈춰 있었다.“이상하죠.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멈췄는데, 마음은 오히려 더 무겁네요.”그녀는 짧게 웃었다.“비가 멈추면, 오히려 세상이 너무 조용해져요.그동안 가려졌던 소리들이 다 들리거든요.”“소리요?”“사람 속삭임, 못했던 말, 그런 것들이요.”그녀의 말투엔 언제나 묘한 여운이 있었다.그 말의 끝은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느리게 흘렀다.강혁은 그녀의 손끝에 시선을 두었다.꽃잎을 정리하는 손이 무척 섬세했다.그 손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다정하게 피워낸다면,그 누군가가 얼마나 부러울까.“요즘 잠을 잘 못 주무시죠?”수진이 불쑥 물었다.그는 놀란 듯 눈을 돌렸다.“티가 나요?”“피곤한 사람은 눈빛이 묽어요. 마치 오래 젖은 종이 같달까요.”그녀의 말은 너무 정확했다.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끔… 꿈을 꿔요.”“누구의 꿈이요?”“죽은 사람의.”그녀의 손끝이 멈췄다.라벤더 향이 공기 중에 번졌다.“그 사람이… 많이 그리운가 봐요.”“그리움이라기보다… 죄책감이죠.”“그건 다르지 않아요.”“다르죠. 그리움은 살아 있는 사람의 감정이고, 죄책감은 죽은 사람의 그림자니까.”그
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땅끝 마을 해남의 바다는 회색이었다.파도는 거칠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울음처럼 잔잔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수진은 꽃집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었다.가게 이름 - 린꽃방.하얀 글씨로 새겨진 간판이 비에 젖어 흐릿하게 번졌다.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흐림뿐이었다.꽃잎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도 또 하나의 조각이 떨어졌다.그건 언니 수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눈 속에 쓰러져 있던 언니의 입술은 끝내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지만,그 표정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그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언니, 왜 그렇게 웃었어요? 왜 나를 두고 그 사람을 지키려 했어요?’복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눈처럼 차가웠고, 눈처럼 부서지기 쉬웠다.“오늘은 향이 다르네요.”낯선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문을 밀며 들어왔다.수진이 고개를 들자, 그곳엔 강혁이 서 있었다.그는 젖은 어깨를 털며, 수진의 앞에 작은 화병을 내려놓았다.“오늘은 백합 대신 라벤더를 섞었어요.”그녀가 말했다.“라벤더는 기억의 향이에요.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을 다시 꺼내오게 하죠.”“기억이라…”그는 낮게 중얼거렸다.“그럼 잊고 싶은 사람에게는 어떤 향을 써야 해요?”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런 향은 없어요. 잊고 싶은 사람은 향이 아니라…시간으로 지워야 하니까요.”그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그 말은 마치 자신을 향한 칼날처럼 들렸다.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수진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강혁 씨.”“…….”“오늘은 비가 오잖아요. 비가 오는 날엔 사람 마음도 잠시 숨을 쉰대요.”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햇빛 아래선 다들 억지로 웃잖아요. 근데 비가 오면, 그냥 울어도 되니까.”그 말에 강혁은 멈춰 섰다.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여는 듯 가슴 속 깊은 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