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가을이 깊어갈수록 바다는 묘하게 무거워졌다.하늘은 잿빛으로 가라앉았고, 파도는 한결 느려졌다.마을 사람들은 태풍이 지나갔으니 이제 한동안 조용하겠다고 말했지만,강혁은 알고 있었다.진짜 폭풍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새벽 네 시,그는 항구 끝에 있는 낡은 공터에 홀로 서 있었다.옛 창고였던 그곳은 국정원의 비밀 물류창고로 쓰이던 장소였다.그가 손전등을 비추자 먼지 낀 간판 하나가 드러났다.해남수출입조합 1997.이곳이 한때 ‘흑거미 프로젝트’의 현장 중 하나였다.그의 손에는 낡은 지도 한 장이 있었다.어제 새벽, 수진이 건넸던 USB 속에서 추출한 데이터였다.‘흑거미 실험 기록 - 장소 코드명 07. 바다의 집.’강혁은 지도의 X 표시를 따라 눈을 좁혔다.“여기가… 그 시작이었군.”바람이 스쳤다.문이 덜컥 열리며 녹슨 철제 냄새가 퍼졌다.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어둠 속, 벽면엔 낡은 사진들이 가득했다.훈련 중의 아이들, 눈 덮인 골목, 중국어로 적힌 슬로건. 그 가운데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사진 속에는 젊은 여자가 두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그녀의 눈매가 낯익었다. 강혁은 숨을 죽였다.‘윤혜란… 흑거미의 본명.’사진 밑에는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照明, 그녀를 살려라.”그는 문득 수진의 이름을 떠올렸다.‘조명(照明)’ - 린자오밍.그 이름이 단순한 가명일 리 없었다.그 시각, 수진은 꽃집 뒷방에서 백합잎을 손질하고 있었다.칼끝이 살짝 빗나가 손끝이 베였지만, 그녀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피가 떨어지는 자리에 한 송이 검은 장미가 놓였다.그건 말린 장미였다.‘검은 꽃.’언니가 죽던 날 그녀가 들고 있던 바로 그 꽃.수진은 조심스럽게 장미를 꺼내어 유리병에 꽂았다.그녀의 시선이 그 잎사귀를 따라 천천히 내려앉았다.'이 꽃은 죽지 않아. 시간이 지나도, 색이 바래도… 끝내 향을 남기니까.'탁상 위에는 오래된 녹음기와 수첩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수첩을 펼쳤다.안에는 복잡하게
밤의 해남항은 조용했다.태풍이 지나간 뒤의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모든 걸 쓸어가고 난 뒤의 고요만 남아 있었다.수진은 항구 끝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백합 향이 거의 사라진 가방 속에서 작은 녹음기가 희미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수진아, 사람은 언젠가 자신이 속인 것에 갚음을 받게 돼.”“그게 사랑이라면 더 빨리.”언니 수민의 목소리였다.오래전 캄보디아, 흑거미가 두 사람에게 심리훈련을 시킬 때 몰래 녹음해두었던 파일.그녀는 눈을 감고 그 음성을 들었다.‘언니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사랑이 언제나 끝내는 파멸로 향한다는 걸.’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그녀는 눈을 떴다.멀리 부두 끝, 불빛 하나가 깜박였다.그건 강혁의 집 방향이었다.'그 사람은 오늘도 잠 못 이루겠지.’'나도 그래요, 혁 씨. 우린 같은 바다 위에 있지만 서로 다른 섬에 있는 사람 같아요.’그 시각, 강혁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USB를 돌려받은 후, 그는 매일 밤 그 안의 영상을 다시 봤다.흑거미 프로젝트의 내부 파일.언니 수민의 죽음, 수진의 흔적, 배신구의 음성.“실험체 C-07, 감정 각성 단계 진입. 복수심 강화. 피실험자 대상 감정이입 제한 불가.”그 문장을 볼 때마다 그의 손이 떨렸다.“감정 각성이라니…사람을 도구로 만든 건가.”그는 책상 위에 놓인 낡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집어 들었다.그 안에는 수민의 웃는 얼굴,그리고 그 옆에서 장난스럽게 카메라를 가리던 어린 수진의 모습이 있었다.“그땐 몰랐지. 그 아이가 이렇게 자랄 줄은.”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밀려 들어왔다.바람 끝에는 소금기와 꽃 냄새가 섞여 있었다.그 향기가, 언제나 그녀였다.다음 날 아침. 해가 구름 사이로 비쳤다.수진은 꽃집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라디오에서는 경쾌한 트로트가 흘러나왔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엔 웃음이 없었다.가게 문이 열리고 강혁이 들어왔다.그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
강혁은 그 시각,창고 깊숙이 숨겨둔 국정원 기록을 뒤지고 있었다.그는 손전등을 들고 서류 박스를 하나씩 꺼냈다.습기 찬 냄새, 오래된 종이의 거친 질감.그가 찾은 건,‘Project Spider - 흑거미 작전’이라는 문서였다.표지에는 윤혜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윤혜란, 전직 정보 브로커.실험명: Voice Manipulation (음성조작)피실험자: 김수민, 김수진.”강혁의 눈이 커졌다.“실험…?”그는 문서를 넘겼다.거기엔 ‘보이스피싱’이라는 단어가 있었다.단순한 사기 수법이 아니라, 국정원이 처음 설계한 심리 조작 실험 프로그램이었다.그는 손끝으로 그 문서를 움켜쥐었다.“그럼… 그 여자들은 처음부터 이용당한 거야.”그 순간, 창문이 흔들렸다.누군가 바깥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손을 허리로 가져가 권총을 꺼냈다.총구가 창문을 향했다.하지만 창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비만 쏟아졌다. 그런데 문득, 창문 위에 붙은 흰색 스티커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照明(조명)”그는 그 글자를 손끝으로 떼어내며 낮게 중얼거렸다.“린자오밍… 당신은 도대체 누구의 편이야.”해남의 도로 끝,서여진의 차는 이미 항구 근처에 멈춰 있었다.와이퍼가 거칠게 움직였고, 그녀의 손목에는 권총이 감겨 있었다.“배신구 원장님, 명령대로 실행하겠습니다.”통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짧았다.“감정 끼워넣지 말고, 일만 처리해.”“걱정 마세요. 전 이제 아무 감정도 없으니까.”그녀는 전화를 끊고 조용히 총알을 장전했다.탄피가 차갑게 부딪히는 소리가 차 안의 침묵을 깨트렸다.그러나 그녀는 알 수 없었다.손끝이 이렇게까지 떨리는 이유를 그건 두려움이 아니었다.‘嫉妬(질투)’였다.그녀는 중얼거렸다.“선배, 그 여자가 죽으면…당신은 날 봐줄까?”밤 11시, 비가 그쳤다.항구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수진은 그곳에 서 있었다.그녀는 흰 우비를 입고, 손에 작은 백합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그녀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유리 위에서 흘러내리며 마치 오래된 기억들을 지워내는 듯했다.강혁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엔 낚싯대와 서류더미, 그리고 한 잔의 식은 커피가 있었다.그의 노트북 화면에는 오래된 문서가 떠 있었다.제목: 캄보디아 작전 보고서 - K17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그는 이미 모든 문장을 외워버렸지만, 그날의 진실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대상 수민, 임무 중 폭발로 사망. 현장에 요원 강혁 확인됨.”그 한 줄의 기록은 그의 모든 삶을 멈추게 만들었다.그는 손끝으로 스크린을 천천히 훑었다.“거짓이야…”중얼거리듯 한마디.그의 시선이 멈춘 곳,기록 하단의 담당자 서명.‘배신구’.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국정원장. 그리고 자신을 함정에 넣은 남자.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화면 구석에 깜빡이는 또 하나의 문서가 있었다.암호화된 파일, 이름은 단 한 글자.“L”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강혁은 망설였다.하지만, 왠지 '린자오밍'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그는 손끝으로 천천히 입력했다.L I N Z H A O M I N G“Access granted.”컴퓨터가 낮게 알람을 울렸다.그 순간, 화면에 재생된 영상 속엔 그가 본 적 없는 얼굴이 나타났다.수진이었다.지금보다 조금 더 어리고, 표정이 훨씬 냉정했다.“프로젝트 ‘흑거미’ - 실험체 B-09 보고합니다.대상 수민, 현지 작전 투입 완료. 요원 강혁, 감정 개입 위험 수준 3단계.통제 유지 불가 시 제거 권고.”강혁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그 문장 속, ‘감정 개입’이라는 단어.그는 몸을 일으켜 벽에 손을 짚었다.“수민이… 그녀가 내 감정을 알고 있었다고?”그의 눈가가 떨렸다.그 순간, 영상 속 수진의 눈이 정면을 향했다.마치 화면 너머 그를 보고 있는 듯했다.“누군가를 사랑하면, 결국 약해지죠. 그 약함이 우리를 죽입니다.”영상이 꺼
해남의 새벽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희미하게 녹아들며, 세상이 잠시 숨을 멈춘 것 같았다.수진은 여느 때처럼 ‘린꽃방’의 문을 열었다.하지만 오늘따라 공기 속에 묘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소금기와 습기 사이에, 낯선 금속의 냄새. 그건 오래전 훈련장에서 맡던 냄새였다.“……누가 왔나.”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계산대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손끝이 닿은 건 미세한 감지센서였다.작게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 천장 구석의 미니 카메라가 작동했다.화면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잡혔다.짙은 회색 재킷, 검은 선글라스, 그리고…보도블록에 닿는 구두 소리.‘서여진.’그녀는 곧장 알아봤다.“재밌게 노는구나, 국정원.”수진은 낮게 중얼거렸다.한때 자신이 속했던 그림자의 세계, 지금은 그녀가 그 그림자를 조종하고 있었다.서여진은 그날 아침, 강혁의 집 근처에서 오랜만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의 머리는 늘 정돈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흐트러져 있었다.눈 밑엔 잠이 부족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이런 데까지 내려와서 뭐 하는 거예요?”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강혁은 피곤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다.“여진 씨는 여전히 정보보다 감정이 앞서네.”“전 그게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그게 때론,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그녀는 웃었다.“선배는 이미 망가졌잖아요.”그 말에 강혁의 눈빛이 잠시 멎었다.그러다 곧, 한숨처럼 웃어버렸다.“그렇지. 이미 망가진 사람이라, 고치는 건 포기했지.”“그럼 그 여자는요? 그 꽃집 여자, 린자오밍.”강혁은 잔을 내려놓았다.“왜 그 여자가 나와?”“그 여잔, 뭔가 숨기고 있어요.”“그건 나도 알아.”짧은 대답에, 여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그걸… 알고도 옆에 둔다고요?”“응.”그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사람은, 숨긴다고 해서 다 거짓은 아니니까.”여진은 그 대답을 듣고,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오래전부터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마음속엔
그날 이후, 강혁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들려왔다.그날의 전화, 그 여자의 목소리.“선생님, 해남시 병원입니다. 옆집 할아버지가”짧은 문장, 낮게 떨어지는 억양,감정선을 교묘히 숨긴 발음.그건 단순한 사기꾼의 톤이 아니었다.訓련된 사람의 목소리였다.그는 오래전 작전 중 들었던 음성 기록을 떠올렸다.캄보디아, 프놈펜 근처의 작은 호텔.그곳에서 들었던 한 여성의 목소리.“대상, 확보했습니다. 송금 확인해주세요.”그 목소리는 어딘가… 지금의 그녀와 닮아 있었다.단어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아침이 밝자, 강혁은 낚싯대를 챙기지 않았다.대신 노트북을 열었다.이곳 마을에서 발생한 보이스피싱 피해 리스트를 불러왔다.이름, 통화 일시, 목소리 특성. 그는 데이터를 비교했다.모든 통화의 공통점“끝에 숨을 삼키는 듯한 호흡.”그는 그 특유의 호흡을 기억하고 있었다.언젠가 그녀가 꽃을 포장할 때도 그랬다.리본을 묶은 뒤, 아주 미세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그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돼…”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이미 알고 있었다.그게 ‘린자오밍’, 아니, 김수진의 습관이었다.한편 수진은 가게 문을 닫고 조용히 뒷골목 카페로 향했다.그녀는 매주 수요일 같은 시간, 한 남자와 마주 앉았다.그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이번 주 명단이에요.”“좋아. 돈은 내일 오전에 입금할게.”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눈빛은 매섭게 날카로웠다.“혹시… 국정원 쪽 움직임 있어?”“해남에 내려온 감시 인원 하나 있어요. 서여진이라고…”그 이름에 수진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 여자는 신구 밑이지?”“맞습니다. 이번엔 좀 다릅니다. 현장에서 독자 행동 중이래요.”“흠.”수진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그녀의 속눈썹이 떨렸다.'강혁 주변을 감시하겠다는 뜻이겠지.'밤이 깊어갈수록, 해남의 바다는 검은 벨벳처럼 출렁였다.수진은 그날 밤 유난히 오래 불을 켜둔 채 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