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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 이름

Author: 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8 18:43:42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

시험은 끝났다.

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콜록, 콜록.”

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

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아, 진짜…….”

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

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

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다.

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

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것도 습관인가.’

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

“시험 끝났다!”

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시끄러워.”

“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

“그럼 춤이라도 춰?”

“춤추면 재밌겠는데?”

“꺼져.”

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

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

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

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야, 이거.”

이헌이 돌아봤다.

“왜 벗었어?”

“이제 괜찮아.”

“기침하잖아.”

“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

“밖에 추워.”

“너도 춥잖아.”

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

“집에 갈 때까지 입어.”

“야.”

“목도리는?”

“가방에.”

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

“답답해서 뺐는데.”

“밖에서는 하고 있어.”

“나 애 아니거든?”

“알아.”

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건넸다.

해온은 결국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겸이 혀를 찼다.

“이야, 아주 지극정성이야.”

“권태겸.”

“왜요, 공주님.”

“시험 끝나자마자 맞고 싶어?”

“아닙니다.”

태겸은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해온은 다시 이헌을 돌아봤다.

자기가 입으면 손등까지 내려오는 소매.

어깨선도 한참 아래로 떨어졌다.

“근데 이거 너무 크지 않냐?”

“따뜻하면 됐지.”

“네 옷이니까 당연히 크겠지.”

“그럼 내일 작은 거 가져올게.”

해온의 손이 멈췄다.

“……뭐?”

“작은 거.”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거든?”

이헌은 대답 없이 웃었다.

해온은 괜히 재킷 소매를 끌어내렸다.

“아, 씨발! 권태겸!”

학교가 끝난 뒤에도 세라의 짜증은 계속됐다.

“바이크 없으면 나한테 엉겨붙지말고 그냥 걸어 다니라고!”

태겸은 이미 세라 옆에서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하네. 승질하고는.. 시험 끝난 날인데.”

“그거랑 네 바이크 잃어버린 거랑 무슨 상관이야?”

“기분 좀 내자는 거지.”

“네 기분을 왜 내 바이크로 내는데!”

해온이 두 사람을 지나쳐 이헌 쪽으로 걸어갔다.

“또 시작이네.”

이헌이 짧게 대꾸했다.

“그러게.”

며칠 전부터 해온은 학교를 마치면 이헌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세라가 태겸과 투닥거리는 사이 이헌이 해온을 챙겨주는 일이 어느새 당연해져 있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

이헌이 물었다.

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열은 없어.”

“목은?”

“조금 아파.”

“집에 가서 그냥 푹 쉬어.”

“알았어.”

이헌이 잠시 해온을 바라봤다.

“웬일로 말을 잘 듣네.”

“그럼 듣지 마?”

“아니.”

이헌이 피식 웃었다.

해온은 목도리를 조금 더 단단히 감았다.

멀리서 세라가 소리를 질렀다.

“윤해온! 먼저 간다!”

“응!”

태겸이 그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공주님, 내일 봐!”

“안 봐!”

“너무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해온은 한숨을 쉬며 이헌을 돌아봤다.

“가자.”

“응.”

집으로 돌아오자 이모는 곧장 해온의 이마부터 확인했다.

“열은 안 나는 것 같네.”

“괜찮다니까요.”

“기침은?”

“조금 해요.”

“시험도 끝났으니까 오늘은 푹 쉬어.”

“네.”

해온은 따뜻한 물로 씻은 뒤 이모가 내준 약까지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저녁이었다.

시험 때문에 책상 한쪽에 밀어뒀던 책을 꺼내 침대에 누웠다.

보송보송한 이불.

따뜻한 방.

아무도 문제집을 풀라고 하지 않는 시간.

“와…….”

해온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이게 천국이지.”

그런데 시험이 끝나면 꼭 읽겠노라 했던 책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빼꼼히 열렸다.

“윤해온.”

해온은 책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싫어.”

세라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네 표정이 말하고 있어.”

“와, 진짜.”

세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따라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해온은 불길한 예감에 책을 덮었다.

“뭔데.”

세라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시험도 끝났는데.”

“응.”

“이렇게 집에만 있을 거야?”

“응.”

“야.”

“왜.”

“애들이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해온의 얼굴이 굳었다.

“싫어.”

“왜!”

“아직 감기 안 나았잖아.”

“아까 괜찮다며.”

“괜찮은 거랑 놀러 나가는 건 다르지.”

세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차이헌네서 놀기로 했는데.”

해온의 손이 잠깐 멈췄다.

세라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

“뭐.”

“방금 반응했는데?”

“안 했거든.”

“차이헌네라고 하니까.”

“헛소리하지 마.”

세라가 씩 웃었다.

“권태겸도 온대.”

“그럼 더 가기 싫어.”

“아, 왜!”

“시끄러우니까.”

세라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한 번만 가자. 시험 끝난 기념으로.”

“너 혼자 가.”

“네가 없으면 권태겸이 나한테만 지랄한단 말이야.”

“그건 네 사정이지.”

“가족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만 사촌이지.”

세라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해온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근데 진짜 몸 안 좋으면 가지 말고.”

해온이 세라를 바라봤다.

“…….”

“왜.”

“웬일로 정상적인 소리를 해?”

“죽을래?”

해온이 피식 웃었다.

세라가 다시 물었다.

“갈 거야, 말 거야?”

해온은 침대에 기대 잠시 고민했다.

집에서 책을 읽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시험이 끝났는데도 혼자 방에만 있는 건 조금 아쉽긴 했다.

무엇보다.

‘…….’

해온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차이헌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로.

“잠깐만 갔다 올 거야.”

세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케이!”

“늦게까지 안 있어.”

“알았어.”

“나 아프다고 술도 먹이지도 마.”

“알았다니까.”

세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럼 옷 입어!”

“아, 귀찮아.”

“내가 골라줄까?”

“절대!”

해온이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세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헌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태겸이 와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널 기다리고 있었다!!”

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 좀 줄여.”

“우리 공주님 감기 아직 안 나으셨습니까?”

“응. 그러니까 조용히 해.”

태겸이 얌전히 입을 다무는 시늉을 했다.

세라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거실을 둘러봤다.

“음식 왔어?”

“다 왔지.”

태겸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치킨에 족발, 중국 음식까지 한가득이었다. 구석에 어김없이 빠지지않는 술까지

해온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걸 누가 다 먹어?”

세라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우리.”

세라는 벌써 테이블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와, 나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해온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얘는 진짜 먹는 거에 진심이야.”

“너도 먹어!”

세라가 대꾸했다.

그때 이헌이 주방에서 나왔다.

“왔네.”

“응.”

이헌은 해온의 얼굴부터 살폈다.

“괜찮아?”

“내가 애야? 아까부터 다들 왜 그것만 물어.”

“그래서?”

“괜찮다고.”

“알았어.”

이헌이 해온 앞에 따뜻한 물을 내려놓았다.

해온은 물컵을 바라봤다.

“……고마워.”

이헌이 잠깐 멈췄다.

“뭐?”

“못 들었으면 말고.”

“들었어.”

“그럼 왜 물어!”

그제야 이헌이 웃었다.

해온은 괜히 물컵을 들어 입을 가렸다.

저녁은 시끄러웠다.

정확히는 세라와 태겸 때문에 시끄러웠다.

“야, 그거 내 거야!”

“음식에 이름 써놨냐?”

“내가 아까 먹으려고 놔뒀잖아!”

“그럼 먹었어야지.”

“권태겸!”

“아, 알았어. 새 거 줄게.”

태겸이 치킨 접시를 세라 앞으로 밀었다.

세라는 못마땅한 얼굴로 하나를 집어 먹었다.

해온은 둘을 보다가 작게 웃었다.

“둘이 잘 논다.”

세라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뭐?”

“아무말도 안했는데?"

“윤해온.”

“밥 먹어.”

태겸이 낄낄거렸다.

한참 뒤 음식을 거의 다 먹었을 때였다.

세라가 빈 맥주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야, 진실게임이나 할까?”

태겸이 곧장 반응했다.

“오랜만인데?”

해온은 소파에 기대 쿠션을 끌어안았다.

“난 안 해.”

“넌 맨날 안 한대.”

“피곤하니까.”

“구경만 해.”

세라가 빈 병을 테이블 가운데 내려놓았다.

“병 돌려서 입구가 가리키는 사람이 질문받기.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패스.”

“뭐야. 그럼 다 패스하지.”

태겸이 투덜거렸다.

세라가 눈을 흘겼다.

“그럼 재미없게 패스하는 사람은 맥주잔에 소주 이빠이.”

“그건 괜찮네.”

해온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참 별것도 아닌 걸로 잘 논다. 감기가 여전히 남아있는듯 몽롱한 해온은

귀에 맴도는 시끌벅적한 소리도 모르는채 잠이 들었다.

병이 빙글빙글 돌았다.

첫 번째는 태겸이었다.

세라가 손뼉을 쳤다.

“아싸.”

“뭐야, 왜 그렇게 좋아해.”

“질문한다.”

“해봐.”

세라가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 마지막으로 야동본게 언제야?”

태겸이 정색했다.

“야.”

“왜.”

“너무 날 남자로도 안보는 질문 아니냐?”

“대답해.”

“……기억 안 나.”

세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태겸은 맥주잔 끝에서 넘칠듯 찰랑거리며 가득 차있는 소주를 이내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벌개진 얼굴로 세라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아픈 사람 놀리지 마.”

“누가 아파?”

“마음이.”

“지랄.”

이번에는 태겸이 병을 돌렸다.

몇 번 빙글빙글 돌던 병 입구가 이헌을 향했다.

태겸의 눈이 반짝였다.

“오.”

세라가 고개를 들더니 태겸의 말을 가로채며 언성을 높였다.

"나!! 나 내가먼저 나 꼭 물어봐야 할게있다고오"

이헌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뭔데.”

세라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은?”

태겸은 세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슬쩍 웃었다.

“질문 괜찮네.”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라의 질문에 거들며 태겸이 재촉했다.

“있어, 없어?”

“……있어.”

순간 세라의 눈이 커졌다.

태겸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오.”

세라가 다시 물었다.

“누군데?”

이헌이 잠깐 해온 쪽을 바라봤다.

소파 끝에서 쿠션을 안고 눈을 감고 있는 해온.

정말 잠든 것 같았다.

세라의 질문에, 이헌이 담배 연기를 뿜다 말고 해온의 얼굴을 봤다.

그러자 태겸이 세라의 머리통을 밀었다.

"몰라서 묻냐. 저기서 자고 있는 윤해온이잖아, 윤해온."

"야,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딱 보면 사이즈 안 나오냐? 얼굴에 써 있구만. 요래 요래.

너 차이헌이 개소름돋게 딴 사람한테 이러는 거 본 적 있냐?"

"……없긴 없지."

"없지? 그럼 끝난 거야."

세라가 머리를 문지르며 대꾸하다 이헌을 봤다.

"아니, 그래도 본인 입으로 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나 지금 팩트 체크하는 중이거든?"

"팩트 체크 같은 소리 하네. 넌 궁금한 게 아니라 확인받고 싶은 거잖아."

태겸이 혀를 찼다. 이헌은 대꾸 없이 담배를 종이컵에 눌러 껐다.

지지직, 짧게 꺼지는 소리가 났다. 둘이 동시에 조용해졌다.

이헌의 시선이 잠깐 소파 쪽으로 넘어갔다가 돌아왔다.

해온은 팔을 베고 모로 누운 채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 목소리 낮춰. 깨겠다."

"알았어, 알았어. 조용히 할게. 근데 이건 증거 채택이야."

세라가 한숨을 쉬더니, 태겸의 팔을 툭 쳤다.

“야, 이제 됐어.”

“왜? 이제 재밌어지는데.”

“알아될거 알아서 이제 재미없어"

태겸은 못내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해온을 돌아봤다.

“근데 공주님 자는 것 같은데.”

세라가 해온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 몸이 안 좋나 봐.”

이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쉬게 할게.”

“윤해온.”

낮은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해온은 곤히 잠이 든듯 대답을 하지않았다.

이헌이 무릎을 짚고 일어나, 곤히 잠든 해온의 목 뒤와 무릎 아래로

팔을 밀어 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해온을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준 세라가

베개를 챙겨 바닥으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자는 줄 알았던 해온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낮게 들렸다.

그때 해온이 불렀다.

“차이헌.”

이헌은 베개를 든 채로 멈췄다.

"…… 안 잤어?"

"네가 들어 올릴 때 깼는데."

"그럼 진작 말하지."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뭘.”

“아까.”

“응.”

해온은 손가락으로 이불 끝을 만지작거렸다.

“……다 들었어.”

이헌이 잠시 말이 없었다.

“뭘?”

“내 이름.”

그제야 이헌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해온은 고개를 들었다.

“나 좋아한다며.”

이번에는 이헌도 부정하지 않았다.

“어.”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해온은 오히려 당황했다.

“……그렇게 바로 인정한다고?”

“그럼 거짓말해?”

“그건 아닌데.”

“들었다며.”

해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세라가 며칠 전 놀이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걔는 너 친구로만 보는 것 같지 않은데.

정말 그랬다.

괜히 혼자 신경 쓰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이헌이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부담스러우면 모르는 척해도 돼.”

해온이 고개를 들었다.

“뭐?”

“지금 대답 안 해도 된다고.”

“…….”

“네가 부담스럽다하면 여기까지 하고.”

해온은 한동안 이헌을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상황 자체가 싫었을 것이다.

누군가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는 것도.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헌이 아무렇지 않게 물러나겠다고 말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야.”

“응.”

“누가 싫대?”

이헌의 눈이 해온에게 향했다.

해온은 괜히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냥…….”

입 밖으로 꺼내려니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해온이 결국 짜증스럽게 말했다.

“싫진않아.”

이헌이 가만히 바라봤다.

“…….”

“왜 말이 없어?”

“진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제야 이헌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해온은 그 얼굴을 보고 괜히 시선을 피했다.

“웃지 마.”

“좋아서.”

“…….”

이번에는 해온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이헌이 물었다.

“오늘부터 그럼 우리 사귀는거다."

해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조건 있어.”

“뭔데.”

“두 개.”

“말해봐.”

해온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첫 번째. 쓸데없이 싸우지 마.”

이헌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

“네가 먼저 시비 거는 게 아니어도. 뭐 이유가 어떻든

계속 다치면서까지 싸우는 거 싫어.”

해온이 이헌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제 거의 나았지만 아직도 붕대가 남아 있었다.

“맨날 내가 감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헌은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진짜?”

“응. 그런일 있으면 다른 방법부터 생각할게.”

해온은 그제야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두 번째.”

“응.”

“담배 끊어.”

이헌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담배?”

“응.”

“냄새도 싫고, 몸에도 안 좋잖아.”

해온이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그리고 네가 자꾸 수업 빠지는 것도 싫어.”

이헌이 잠시 생각했다.

“알았어.”

해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도 바로?”

“어.”

“그렇게 쉽게 대답할 거면 진작 끊지 그랬어.”

“이제 끊으면 되지.”

“말만 하면 안 돼.”

“알아.”

해온은 그를 한참 바라봤다.

농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럼.”

“응.”

“일단 만나줄게.”

이헌이 피식 웃었다.

“일단?”

“왜.”

“수습 기간이야?”

“그럴 수도 있지.”

“얼마나?”

“네 하는 거 봐서.”

이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해온도 결국 참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해온은 침대 끝에 앉아 이헌을 바라봤다.

이헌 역시 해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윤해온.”

“왜.”

“가까이 가도 돼?”

해온은 잠깐 망설였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헌이 의자에서 일어나 해온 옆에 앉았다.

해온은 조금 빨개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냥.”

“뭐야.”

“좋아서.”

“아, 진짜.”

해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헌이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던 해온이 손을 내렸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먼저 피하지 않았다.

이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키스해도 돼?”

해온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응.”

이헌이 짧게 입을 맞췄다.

해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응.”

“이거 세라한테는 내가 말할 거야.”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권태겸한테 말하지 마.”

“걔는 이미 아는데.”

“……아.”

해온의 표정이 구겨졌다.

“망했네.”

이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해온도 결국 웃었다.

거실에서는 여전히 세라와 태겸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태겸! 내 거 먹지 말라고!”

“음식에 이름 써놨냐?”

“진짜 죽을래?”

해온은 그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네는 아직도 싸우네.”

“그러게.”

“우리 나가면 바로 눈치채겠지?”

“아마.”

해온이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럼 나 조금만 더 쉬었다 나갈래.”

“그래.”

이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해온이 불렀다.

“차이헌.”

“응.”

“……고마워.”

“뭐가.”

“그냥. 여러 가지.”

이헌은 잠시 해온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해온은 그게 좋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건 굳이 캐묻지 않고, 싫다고 하면 멈추고, 필요할 때는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

그런 사람이 생겼다는 게 아직은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해온은 담요 속으로 몸을 조금 더 웅크리며 웃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누구와도 깊게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쩌다 보니 가장 엮이고 싶지 않았던 차이헌과,

오늘부터 사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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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좋아하는 사람 이름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너 걔 좋아해?

    “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하게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내 옆자리 차이헌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눈 떠보니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 내가 구한 문제아가 나를 살렸다   기억하고 있었네?

    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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