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오. 분위기 좋은데?”
류세라의 목소리에 윤해온은 눈을 떴다.
정확히는 뜨려고 노력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몸도 나른했다.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긴장이 풀린 건지, 어젯밤보다 몸은 한결 가벼웠지만 여전히 잠이 쏟아졌다.
“야, 윤해온.”
“……왜.”
“집에 가자.”
해온은 이불 속으로 얼굴을 더 파묻었다.
“몇 시인데.”
“엄마 일어나기 전에 들어가야지.등짝 다 터지고 싶어?"
“그럼 너 먼저 가.”
“와. 남의 집에서 아주 살림 차리셨네?”
세라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해온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제야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는 차이헌이 보였다.
어젯밤.
두 사람이 사귀기로 한 뒤 해온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먼저 잠들었다.
이헌은 해온이 다시 열이 오르지는 않는지 확인하겠다며 옆에 남아 있었다.
그대로 의자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세라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좋~아.”
해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뭐가!”
“내가 뭐랬냐?”
“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발끈해?”
“류세라.”
“네, 윤해온 씨.”
세라가 일부러 고개까지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아 씨. 조용히 해!”
해온은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세라의 등을 떠밀었다.
“나가!”
“아, 왜! 나도 차이헌한테 인사는 해야지.”
“깨우지 마!”
“와. 벌써부터 남자친구 챙기네?”
“죽을래?”
세라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해온이 세라를 방 밖으로 밀어내려는 순간이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헌이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온은 세라의 어깨를 잡은 채 그대로 굳었다.
세라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차이헌.”
이헌은 상황을 대충 파악한 듯 해온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려고?”
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모 일어나시기 전에 들어가야 된대.”
“데려다줄게.”
“뭐 하러. 피곤할텐데 더 자. 세라랑 가면 돼.”
이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내가 데려다줘야지.”
세라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너 원래 이런 성격 아니잖아.”
“어떤 성격인데?”
“말도 없고. 싸가지도 없고.”
이헌이 가만히 해온을 바라봤다.
“넌 안 귀찮은데.”
“…….”
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우와.”
해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차이헌. 너 진짜…….”
“왜.”
“말을 왜 그렇게 해!”
“뭘.”
“아, 됐어!”
세라는 옆에서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세라의 장난은 끝나지 않았다.
“윤해온 씨.”
“왜.”
“오늘 아침에 아주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네가 닥치면 더 좋아질 것 같은데.”
“아이고 무서워라.”
해온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라가 어젯밤 마신 술 때문에 피곤하다며 택시를 잡은 덕분에, 이헌까지 함께 차에 타고 있었다.
문제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해온과 이헌을 세라가 조수석에서 계속 돌아본다는 것이었다.
“앞이나 봐.”
“왜. 보면 안 돼?”
“안 돼.”
“손이라도 잡고 있나?”
“류세라!”
세라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헌은 그 소란 속에서도 별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해온이 창가에 기대 기침을 하자 가방에서 물을 꺼내 건넸다.
“목 아프면 마셔.”
해온은 잠깐 물병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받아 들었다.
“……응.”
조수석에서 세라의 어깨가 들썩였다.
해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집에 가서 보자.’
“들었냐?”
다음 날 점심시간.
옥상 난간에 기대 있던 세라가 대뜸 물었다.
해온은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뭘.”
“소문.”
“무슨 소문.”
세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랑 차이헌.”
해온의 손가락이 멈췄다.
“……뭐?”
“푸학!?너 몰라?”
세라가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해온은 휴대폰을 내렸다.
“뭔데.”
“학교 애들이 다 알던데?”
“뭘 알아?”
“네가 차이헌이랑 사귄다는 거.”
해온의 얼굴이 굳었다.
“…….누가 아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침부터 애들이 나한테 물어보던데?”
“뭐라고?”
“네 사촌 진짜 차이헌이랑 사귀냐고.”
해온은 입을 다물었다.
세라는 그런 해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축하한다, 윤해온.”
“하나도 안 기쁘거든.”
“왜. 남자친구 생겼잖아.”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해온이 발끈하자 세라는 더 즐거워했다.
“아, 진짜 웃겨.”
“류세라.”
“알았어. 안 놀릴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꼬리는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해온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하지만 게임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사귄다고 말한 사람은 세라와 태겸뿐이었다.
그런데 벌써 학교에 소문이 났다고?
“차이헌이 말했어?”
해온의 질문에 세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확히 누구한테 말했는지는 모르겠는데.”
“…….”
“걔가 여기저기 너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더라.”
해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
세라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너 백승모 기억하지?”
“응.”
“걔 같은 애들이 또 괜히 너한테 시비 걸까 봐 신경 쓰이나보지.”
해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왜 내 얘기를 하고 다녀?”
“그게…….”
세라가 잠시 말을 골랐다.
“차이헌이랑 사이 안 좋은 애들이 좀 있잖아.”
“그래서?”
“걔랑 가까웠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애들이 존나 더러운 일을 겪은 적도 있어.”
해온의 손이 멈췄다.
“다른 애들?”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이헌이랑 잠깐 만났던 애들도 그렇고.”
“…….”
“물론 그렇게 시비 쳐 거는 놈들이 문제지. 근데 존나 웃긴건 차이헌이 그런 기지배들은 신경도 안썻다 이거야"
해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라가 덧붙였다.
“그런 기지배들이랑은 다르니까 아예 널 지꺼라고 못을 박고 다닌다 이거지”
“…….”
“듣고 있어?”
“응.”
세라가 해온의 표정을 살폈다.
“왜.”
“뭐가.”
“표정이 왜 그래?”
해온이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머릿속에는 방금 들은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전에 차이헌이랑 잠깐 만났던 애들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차이헌이 여태 아무도 좋아한 적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다른 여자애들과 만났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
세라가 해온을 힐끗 봤다.
“너 설마.”
“아니거든.”
“나 아직 말도 안 했는데?”
“시끄러워.”
세라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질투하냐?”
“아니라고!”
“알았어, 알았어.”
해온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왜 질투를 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과거는 과거고.
지금 사귀는 사람은 자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날까.
“야, 사 왔다!”
옥상 문이 열리며 태겸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매점에 없어서 밖에까지 갔다 왔잖아.”
태겸이 봉투에서 초코에몽 를 꺼냈다.
해온이 평소 좋아하던 것이었다.
“자, 공주님.”
해온은 받지 않았다.
태겸이 눈을 깜빡였다.
“뭐야.”
“안 먹어.”
“왜?”
“안 먹는다고.”
태겸이 황당한 얼굴로 초코에몽을 내려다봤다.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너나 먹어.”
“아니, 이거 사 오라고 이헌이가”
그 말에 해온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태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이헌이 보였다.
해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해온?”
이헌이 불렀다.
해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나가면서 이헌의 어깨를 툭 쳤다.
“비켜.”
그리고 그대로 옥상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태겸의 입이 벌어졌다.
“……쟤 왜 저래?”
세라는 괜히 물병 뚜껑만 만지작거렸다.
태겸이 그녀를 돌아봤다.
“너 또 뭔 소리 했냐?”
“내가 뭘.”
“저 반응이 아무것도 아닌 반응이냐?”
“난 몰라.”
“류세라.”
“모른다고!”
이헌은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세라에게 말했다.
“얘기해.”
세라의 표정이 굳었다.
“뭘.”
“무슨 얘기 했어.”
“…….”
태겸이 한숨을 쉬었다.
“아, 이건 백 퍼센트네.”
세라는 난간에서 몸을 떼며 투덜거렸다.
“아니, 그냥 예전에 너 만났던 애들 얘기 좀 했는데…….”
이헌의 눈썹이 움직였다.
“뭐?”
“그거 가지고 저렇게 화낼 줄 내가 알았냐?”
태겸이 이마를 짚었다.
“와. 류세라.”
“왜!”
“너 진짜 눈치 없다.”
“닥쳐, 씨발!”
이헌은 세라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옥상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
“해온이 찾으러.”
문이 닫혔다.
세라가 태겸을 돌아봤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냐?”
태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진짜!”
해온은 계단을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왜 내가 화가 나는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차이헌이 전에 누구를 만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기도 이헌에게 과거를 전부 털어놓은 건 아니었다.
해온은 한숨을 쉬었다.
“아, 몰라.”
일단 세수나 하자.
머리라도 식히고 나면 조금 진정될 것 같았다.
해온은 복도 끝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안쪽은 한산했다.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바닥 위로 흘렀다.
그때였다.
“어, 얘 맞지?”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해온은 고개를 들었다.
거울 너머로 여학생 셋이 보였다.
모두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해온을 가리켰다.
“윤해온.”
해온은 손을 씻던 동작을 멈췄다.
“……?”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너 차이헌이랑 사귄다며?”
해온의 표정이 굳었다.
“누군데.”
“뭐?”
“너희 누구냐고.”
앞에 서 있던 여학생이 코웃음을 쳤다.
“와. 씨발 소문대로 개 싸가지 없네.”
해온은 수도꼭지를 잠갔다.
“할 말 없으면 비켜.”
그러고는 세 사람 사이로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앞에 서 있던 학생이 길을 막았다.
“잠깐.”
“왜.”
“차이헌이 너한테 뭐라고 하디?”
“…….”
“지 여자친구 건드리지 말라고 여기저기 얘기했다며.”
해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제 겨우 사귄 지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해온이 물었다.
“그게 너희랑 무슨 상관인데.”
상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
“나 너희 몰라. 너희도 나한테 볼일 없잖아.”
해온은 가방 끈을 고쳐 멨다.
“비키라고.”
그러자 한 명이 해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내 말 안 끝났거든?”
해온의 몸이 순간 굳었다.
갑작스럽게 닿은 손.
막힌 출입구.
그리고 자기보다 숫자가 많은 상대.
기분 나쁜 익숙함이 밀려왔다.
“손 놔.”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상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차이헌 없으니까 아주 개 지랄을 떠네?”
“놓으라고.”
해온이 손을 떼어내려 하자 여학생이 거칠게 밀쳤다.
해온이 세면대에 기대 겨우 균형을 잡았다.
“…….”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야.
여기는 LA가 아니었다.
그때도 아니었다.
해온은 숨을 고르며 휴대폰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앞에 서 있던 학생이 다시 길을 막았다.
“누구 부르게?”
“비켜.”
“차이헌?”
해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비웃었다.
“걸레같은년 차이헌은 그냥 너만나는거야 신선하니까, 너한텐 차이헌이 백마탄 왕자같고 막 그러나 본데”
그 말에 해온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혼자 남겨진 복도.
낯선 말들.
도와달라고 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시간.
해온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금은 달라.’
도망칠 수 있었다.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출입구 쪽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다시 어깨를 밀쳐졌다.
“야!”
해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하라고!”
순간 상대의 손이 날아왔다.
해온은 충격에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해온은 얼얼한 뺨을 감싸 쥔 채 상대를 바라봤다.
믿기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고.
세라와 싸우고.
태겸의 장난에 욕하고.
이헌과…….
‘차이헌.’
그 이름을 떠올리자 괜히 눈앞이 흐려졌다.
화가 났다.
상대에게도.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린 자기 자신에게도.
“……비켜.”
해온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한 명이 다가오자 해온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달그락.
화장실 출입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뭐야?”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윤해온.”
해온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
“안에 있어?”
차이헌이었다.
앞에 서 있던 여학생의 표정이 굳었다.
“씨발, 어떻게 알고…….”
이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윤해온. 대답해.”
해온은 입술을 달싹였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헌이 바깥에 있던 선생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출입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차이헌과 눈이 마주쳤다.
이헌의 시선이 해온의 얼굴에서 멈췄다.
“……윤해온.”
그의 표정이 굳었다.
해온은 그제야 꽉 쥐고 있던 가방 끈에서 힘을 풀었다.
차이헌이었다.
12화. 네가 뭔데 내 이름을“오오. 분위기 좋은데?”류세라의 목소리에 윤해온은 눈을 떴다.정확히는 뜨려고 노력했다.눈꺼풀이 무거웠다. 몸도 나른했다.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긴장이 풀린 건지, 어젯밤보다 몸은 한결 가벼웠지만 여전히 잠이 쏟아졌다.“야, 윤해온.”“……왜.”“집에 가자.”해온은 이불 속으로 얼굴을 더 파묻었다.“몇 시인데.”“엄마 일어나기 전에 들어가야지.등짝 다 터지고 싶어?"“그럼 너 먼저 가.”“와. 남의 집에서 아주 살림 차리셨네?”세라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해온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그제야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는 차이헌이 보였다.어젯밤.두 사람이 사귀기로 한 뒤 해온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먼저 잠들었다.이헌은 해온이 다시 열이 오르지는 않는지 확인하겠다며 옆에 남아 있었다.그대로 의자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세라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아주 좋~아.”해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뭐가!”“내가 뭐랬냐?”“뭘!”“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발끈해?”“류세라.”“네, 윤해온 씨.”세라가 일부러 고개까지 숙였다.“축하드립니다.”“아 씨. 조용히 해!”해온은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세라의 등을 떠밀었다.“나가!”“아, 왜! 나도 차이헌한테 인사는 해야지.”“깨우지 마!”“와. 벌써부터 남자친구 챙기네?”“죽을래?”세라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해온이 세라를 방 밖으로 밀어내려는 순간이었다.“왜 이렇게 시끄러워"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헌이었다.잠이 덜 깬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해온은 세라의 어깨를 잡은 채 그대로 굳었다.세라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좋은 아침, 차이헌.”이헌은 상황을 대충 파악한 듯 해온에게 시선을 옮겼다.“가려고?”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모 일어나시기 전에 들어가야 된대.”“데려다줄게.”“뭐 하러. 피곤할텐데 더 자. 세라랑 가면 돼.”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