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
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
“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
“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
“그날 잠깐이었거든?”
“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
“그러니까 더 슬프다고.”
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내려.”
“싫어.”
“권태겸.”
“학교 늦어.”
“야!”
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그럼 나는?”
해온이 물었다.
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
“넌 차이헌 거 타.”
“뭐?”
“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
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
“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
“누가 너랑 같이 탄대.”
이헌이 짧게 잘랐다.
“봐. 본인도 싫대.”
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
“그냥 타. 학교 늦겠다.”
“…….”
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
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괜찮겠어?”
세라가 물었다.
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
“아.”
앞이 잠깐 가려졌다.
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
“내가 들 수 있는데.”
“무겁잖아.”
“안 무거워.”
“어제 무겁다고 했잖아.”
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
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
“오오.”
세라가 바로 옆구리를 쳤다.
“입 닥쳐.”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그 얼굴이 말하고 있어.”
해온이 마지못해 이헌의 뒤에 올라탔다.
잠시 뒤 바이크가 움직이자 해온은 놀라 본능적으로 이헌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앞에서 이헌의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갑자기 출발하지 마.”
“미리 말했는데.”
“못 들었어.”
“잘 잡고 있어.”
“명령하지 마.”
그러면서도 손은 놓지 않았다.
조금 앞에서는 세라의 뒤에 탄 태겸이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류세라! 더 빨리!”
“닥쳐! 내려버린다!”
“아, 무서워라!”
“진짜 떨어뜨린다!”
해온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쟤네는 아침부터 시끄럽네.”
“원래 그래.”
“너도 힘들겠다.”
“익숙해.”
짧은 대화가 끝났다.
차가운 아침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해온은 괜히 목을 움츠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추웠다.
“아, 추워.”
점심 전 청소시간.
해온은 수도가 있는 복도 끝에서 대걸레를 빨다가 몸을 잔뜩 웅크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봄이 오는 것 같더니 갑자기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셔츠에 교복 재킷 하나만 걸친 채 물까지 만지고 있으니 손끝이 얼얼했다.
“씨…….”
해온이 대걸레를 물에 푹 담갔다.
“왜 하필 오늘 청소 담당이야.”
그때.
목덜미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
검은색 목도리가 해온의 목을 한 바퀴 감았다.
고개를 돌리자 이헌이 서 있었다.
“뭐야.”
“목도리.”
“그건 보여.”
이헌이 해온의 빨개진 코끝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추울 거라고 했잖아.”
“아침에는 괜찮았어.”
“지금 안 괜찮아 보이는데.”
“조금 추운 것뿐이야.”
“손 줘봐.”
“왜.”
대답도 하기 전에 이헌이 해온의 손목을 잡았다.
차갑게 식은 손끝을 확인한 이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얼음장이네.”
“그러니까 놓으라고.”
해온이 손을 빼려 하자 이헌은 오히려 해온이 들고 있던 대걸레를 빼앗았다.
“야.”
“가만있어.”
“내 청소야.”
“내가 할게.”
“왜 네가 해.”
“손 빨갛잖아.”
“이 정도 가지고 뭘 유난이야"
해온이 다시 대걸레를 잡으려 했지만 이헌이 한쪽으로 피했다.
“차이헌.”
대답 없음.
“야.”
이헌은 아예 해온 대신 대걸레를 빨기 시작했다.
“진짜 지 멋대로야.”
해온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한발 물러났다.
검은 목도리 안으로 차가운 코끝을 푹 묻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이헌에게서 나는 향이 났다.
해온은 괜히 목도리를 조금 더 끌어올렸다.
잠시 후 이헌은 대걸레를 들고 양동이까지 챙겨 교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해온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야.”
이헌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같이 가!”
해온이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갔다.
“공주님.”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권태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온은 이미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태겸은 이헌의 손에 들린 대걸레와 양동이를 번갈아 보더니 입꼬리를 크게 올렸다.
“이야.”
“뭐.”
“우리 공주님은 기사님까지 따로 계시네?”
해온의 얼굴이 굳었다.
“Shut up.”
“장갑도 아니고 목도리까지 받았어?”
“권태겸.”
“이헌아, 서비스가 너무 좋은데?”
휙.
해온이 칠판 지우개를 집어 던졌다.
태겸이 고개를 숙였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다.
퍽.
칠판 지우개가 얼굴 정면에 맞았다.
하얀 분필 가루가 얼굴에 그대로 묻었다.
“…….”
해온이 만족스럽게 말했다.
“조용해졌네.”
태겸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윤해온.”
“왜.”
“사람 얼굴에 칠판 지우개를 던져?”
“응.”
“사과 안 해?”
“싫어.”
“차이헌. 네가 얘 교육 좀 시켜라.”
이헌은 이미 교탁 앞에서 바닥을 닦기 시작한 뒤였다.
“싫어.”
“둘이 아주 환상의 짝이다.”
해온이 이헌 뒤로 다가갔다.
“줘. 내가 할게.”
“됐어.”
“내가 해야 된다니까.”
“앉아 있어.”
“싫어.”
해온이 밀대 자루를 잡아당겼다.
이헌은 놓지 않았다.
둘이 밀대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자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였다.
정확히는 해온보다 이헌을 보는 시선이었다.
평소 청소시간이면 사라지기 일쑤인 차이헌이.
그것도 남의 청소구역을 대신 닦고 있었다.
해온도 그 시선을 느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학생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뭐야.
왜 다 저래.
그때 태겸이 해온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냥 냅둬.”
“야!”
태겸이 해온을 자기 자리 쪽으로 끌고 갔다.
“기사님 일하시게 놔두시죠, 사모님.”
“그따위로 부르지 말랬지!”
“그럼 공주님.”
“그것도 싫다고!”
“까다롭네.”
“권태겸 죽어!”
해온은 책상 위에 있던 교과서를 집어 태겸을 때리려 했다.
태겸은 웃으며 쏙쏙 피했다.
“야! 가만히 있어!”
“맞아줄 미친놈이 어디 있어.”
“너!”
“싫은데?”
결국 약이 오른 해온이 교과서를 책상 위에 탁 내려쳤다.
이헌이 밀대질을 하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설마.”
태겸이 해온의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내려다봤다.
“공부?”
“절로 좀 가.”
해온은 이어폰 한쪽을 빼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쉬는 시간.
해온은 참고서와 교과서를 펼쳐놓은 채 샤프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태겸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웬 공부야.”
해온이 샤프 끝으로 칠판을 가리켰다.
칠판 한쪽.
시험까지 남은 날짜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D-11.
태겸의 표정이 굳었다.
“아.”
그제야 기억난 모양이었다.
“시험이 있었지.”
“너 진짜 학생 맞아?”
“학생이지.”
“시험 날짜도 모르면서?”
“성적표 나오면 알지.”
“미친놈.”
태겸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난 잠이나 자야겠다.”
“그러든가.”
교복 재킷을 머리까지 뒤집어쓰는 태겸을 한심하게 바라본 해온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각. 사각.
그때 옆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해온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이헌이었다.
교과서를 펼쳐 읽고 있었다.
심지어 여기저기 밑줄도 그어져 있었다.
해온이 눈을 깜빡였다.
“너 공부해?”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
“왜.”
“아니.”
“나 공부하면 안 돼?”
“그건 아닌데.”
해온은 이헌을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되게 안 어울려.”
“너도.”
“뭐가?”
“공부.”
“죽을래?”
이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해온은 인상을 쓰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차이헌이 공부를 한다.
그것도 꽤 진지하게.
세라가 설명해줬던 차이헌과는 묘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차이헌 걔 공부 잘해.”
점심시간.
옥상 난간 근처에 앉아 도시락을 먹던 해온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어.”
세라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존나 잘해.”
“얼마나.”
“거의 전교권.”
해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진짜?”
“내가 그걸로 구라를 왜 쳐.”
세라는 도시락 속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걔 집안 대단하다는 얘기 했었지?”
“응.”
“집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건지 뭔지는 나도 자세히 몰라. 아무튼 혼자 나와 사는 대신 조건이 성적 유지라는 얘기는 들었어.”
“성적 떨어지면?”
“다시 집 들어가야 된다던데.”
“그래서 공부하는 거야?”
“아마.”
세라가 물병 뚜껑을 열었다.
“애초에 머리도 좋아. 공부를 아예 못하는 애가 노력해서 붙들고 있는 그런 느낌은 아니야.”
해온은 아침에 교과서를 보고 있던 이헌을 떠올렸다.
“의외네.”
“뭐가.”
“그냥.”
“그리고 영어도 잘하잖아.”
“응.”
“어릴 때 외국에서 학교 좀 다녔다던데.”
해온이 세라를 쳐다봤다.
“그래?”
“응. 권태겸이 그러던데.”
세라가 잠시 해온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왜.”
“너 왜 이렇게 관심 많냐?”
“뭐가.”
“차이헌.”
“내가 언제.”
“지금 계속 걔 얘기 물어보고 있잖아.”
해온이 바로 도시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냥 아침에 공부하길래 신기해서.”
“그래?”
“응.”
세라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흐음.”
“뭔데.”
“아무것도.”
“그 표정 뭔데.”
“밥이나 먹어.”
세라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도시락을 먹었다.
하지만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온은 괜히 찝찝했다.
“나 먼저 내려갈래.”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해온은 목을 움츠렸다.
오늘 아침 이헌이 둘러준 목도리를 아직도 하고 있었다.
돌려주려고 몇 번 생각했지만 추워서 결국 계속 두르고 있었다.
세라가 담배를 꺼내 들다가 해온을 봤다.
“공부하려고?”
“응.”
“시험 이틀 남았다고 갑자기 모범생 됐네.”
“한국 와서 첫 시험이잖아.”
“너 그러다 쓰러진다.”
“안 쓰러져.”
“너 원래 몸 약하잖아.”
“안 약해.”
“지난번에 몸살 걸려서 며칠 앓은 사람이?”
“그건 예외.”
세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알아서 해.”
해온이 옥상 문으로 향했다.
그때 마침 옥상으로 올라오고있던 이헌과 태겸
이헌은 내려가려는 해온을 보고는 담배를 태우려고하다 이내 마음을 바꾼 듯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나도 내려갈게."
해온이 돌아봤다.
"너도?"
"응."
이헌은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도로 갑에 집어넣고는 해온에게 다가왔다.
"가자."
"뭐, 마음대로."
둘이 나란히 옥상 문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혔다.
세라는 한동안 그 문을 바라봤다.
“뭐야, 저것들은.”
태겸이 옆에서 말했다.
“왜.”
“뭔가 이상하지 않냐?”
태겸이 웃었다.
“이제 알았어?”
“뭘.”
“눈치 존나 느리네.”
세라가 눈을 흘겼다.
“뭐라는 거야.”
태겸이 어깨를 으쓱했다.
목이 뻐근했다.
해온은 샤프를 내려놓고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요 며칠 계속 놀고 사건에 휘말리느라 시험이 이렇게 가까이 온 줄도 몰랐다.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보는 시험이었다.
성적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시작부터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뒤에도 자리에 남아 몇 시간째 문제만 풀었다.
“아…….”
목 뒤가 뻐근했다.
손을 올려 주무르려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따뜻한 손이 목 언저리에 닿았다.
해온의 몸이 순간 굳었다.
이헌 역시 곧바로 손을 멈췄다.
“싫으면 안 할게.”
다같이 이헌의 집에서 자던 그날 밤.
이헌은 해온이 잠결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해온은 잠깐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니.”
“…….”
“괜찮아.”
그제야 이헌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목과 어깨 근처의 굳은 부분만 살살 눌렀다.
“아.”
해온이 눈을 감았다.
“시원하다…….”
“너무 오래 했어.”
“조금만 더 하고.”
“시험 열흘이나 남았어.”
“열흘 밖에 안 남은 거지.”
“열흘이나 남은 거야.”
해온이 눈을 뜨고 이헌을 올려다봤다.
“전교권이라며.”
이헌의 손이 잠깐 멈췄다.
“누가 그래.”
“세라랑 권태겸이"
“별걸 다 얘기하네.”
“진짜야?”
“뭐가.”
“전교권.”
“가끔.”
“와.”
해온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너 공부 잘하는 애처럼 안 보여.”
“칭찬 고맙다.”
“칭찬 아니거든.”
이헌이 피식 웃었다.
해온은 다시 교과서를 보려다 문득 옆을 바라봤다.
가까이에서 보니 이헌의 턱선이 유난히 선명했다.
높은 콧대.
무표정하게 내려간 눈매.
‘…….’
잘생겼네.
아주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자각한 순간.
해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미쳤나 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책에 얼굴이라도 처박을 기세였다.
이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얼굴 빨개졌는데.”
“더워서 그래.”
“아까 춥다며.”
“지금은 더워.”
“그래?”
“공부나 해.”
이헌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다 다시 자기 교과서로 시선을 돌렸다.
해온은 책만 뚫어져라 노려봤다.
‘미쳤구나, 윤해온.’
진짜 미쳤어.
“아으, 추워!”
학교가 끝난 저녁.
세라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바이크가 세워진 곳으로 걸어갔다.
“추워, 추워, 추워. 씨발 존나 추워!”
해온이 옆에서 인상을 썼다.
“너만 추운 거 아니니까 좀 조용히 해.”
“까칠하기는.”
세라가 키를 꺼내다 해온의 목을 봤다.
“근데.”
“왜.”
“그 목도리 아직도 하고 있네?”
해온이 흠칫했다.
“아.”
아침부터 두르고 있던 검은 목도리.
“돌려주려고 했는데.”
마침 뒤에서 태겸과 이헌이 걸어오고 있었다.
해온은 목도리를 풀기 시작했다.
“야, 이거.”
이헌이 손을 저었다.
“그냥 하고 가.”
“그래도 네 건데.”
“난 안 추워.”
태겸이 냉큼 해온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맞아. 이헌이 추위 존나 안 타.”
“너한테 안 물어봤어.”
“그러니까 추위 존나 타 보이는 윤해온 씨가 그냥 두르고 계세요.”
해온은 잠시 고민했다.
그 순간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결국 풀던 목도리를 다시 감았다.
“……그럼 내일 줄게.”
이헌이 짧게 대답했다.
“응.”
세라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잠깐.”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세라가 해온을 붙잡았다.
“왜.”
“같이 좀 밖에서 걷다가 들어가자.”
“추워 죽겠는데?”
“잠깐이면 돼.”
“집에서 말하면 되잖아.”
“엄마 있잖아.”
“뭔데.”
세라는 대답하지 않고 근처 놀이터 쪽으로 향했다.
해온은 세라를 노려보다 결국 따라갔다.
밤이 된 놀이터는 조용했다.
그네가 바람에 흔들리며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해온은 그네에 앉아 이헌의 목도리 안으로 코끝을 묻었다.
“빨리 말해.”
옆 그네에 앉은 세라가 잠시 머뭇거렸다.
“있잖아.”
“응.”
“차이헌.”
해온의 눈이 슬쩍 움직였다.
“차이헌 왜.”
세라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너 걔 어떻게 생각해?”
“……뭐?”
해온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뭘 어떻게 생각해.”
“그냥.”
“같은 반 애.”
세라가 픽 웃었다.
“친구?”
“그렇지.”
“그 말 할 줄 알았다.”
“뭔데.”
“근데.”
세라가 몸을 조금 돌려 해온을 바라봤다.
“걔는 너 친구로만 보는 것 같지 않은데.”
해온의 손이 멈췄다.
목도리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굳었다.
“뭔 소리야.”
“말 그대로.”
“말도 안 돼.”
“왜.”
“왜긴 왜야.”
해온이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난 너 한국 오기 전부터 이헌이 봤어.”
세라가 천천히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권태겸 때문에 몇 번씩 엮였고.”
“그래서?”
“걔 원래 저렇게 남 챙기는 애 아니야.”
해온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말도 없고, 성격도 좆같고.”
“욕을 꼭 그렇게 해야 돼?”
“사실이잖아.”
“…….”
“근데 너한테는 다르잖아.”
목도리.
아침마다 옆자리에서 자는 이헌.
청소 대신 해준 것.
책을 보다가 목이 아프다고 하자 조심스럽게 주물러줬던 손.
며칠 전 자신이 악몽을 꿨던 날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해온은 그네 아래만 내려다봤다.
“몰라.”
“나도 걔 속까지는 모르지.”
세라가 말했다.
“근데 좋은 애야.”
해온이 고개를 들었다.
차이헌을 그렇게 질색하던 세라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네가 걔 칭찬을 다 하네.”
“그러니까 나도 지금 존나 소름 돋는다.”
해온이 피식 웃었다.
세라도 웃었다.
그러다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튼.”
“응.”
“네가 싫으면 싫은 거고, 좋으면 좋은 거야.”
“…….”
“그러니까 어떤 감정이던 괜히 겁먹고 도망가지만 마.”
해온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
세라는 그걸 보고도 더 묻지 않았다.
“그냥 생각해보라고.”
해온은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더 깊숙이 묻었다.
“별걸 다 신경 써.”
“가족이니까.”
“오글거려.”
“나도 말하고 후회했다.”
“가자.”
“그래. 존나 춥다.”
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해온의 손은 계속 검은 목도리 끝을 만지작거렸다.
다음 날 아침.
“에취!”
해온의 재채기가 거실을 울렸다.
이 여사가 바로 달려왔다.
“아이고, 해온아.”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얼굴이 벌게졌는데.”
이 여사는 약 봉지를 해온 손에 꼭 쥐여줬다.
“이거 점심 먹고 먹고. 이건 저녁 거.”
“네.”
“약 꼭 챙겨 먹고.”
“네.”
“그냥 오늘 하루 쉬면 안 되겠니?”
해온은 마스크를 쓰며 고개를 저었다.
“시험 열흘밖에 안 남았어요. 한국에서 보는 첫시험이라.."
해온이 말끝을 흐렸다.
“시험보다 네 몸이 먼저지.”
“정 못 견디겠으면 조퇴할게요.”
이 여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무리하지 말고. 진짜 안 되겠다 싶으면 선생님한테 바로 말해.”
“네.”
옆에서 도시락 가방을 챙기던 세라가 중얼거렸다.
“나는 감기 걸리면 물이나 먹고 나가라고 하면서.”
이 여사가 눈을 흘겼다.
“류세라.”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해온이 가방 들어.”
“왜 나만.”
“류세라.”
“아, 들어! 든다고!”
세라가 투덜거리며 해온의 가방까지 챙겼다.
해온은 두꺼운 패딩에 장갑, 마스크까지 하고 집을 나섰다.
“너 왜 이렇게 골골거리냐.”
“목 아프니까 말 시키지 마.”
“어제 춥다 할 때 집에 바로 들어가지.”
해온이 힘없이 세라의 등에 이마를 기댔다.
“말 시키지 말라니까…….”
평소 같으면 바로 욕부터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세라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진짜 아픈가 보네.”
“응.”
“윤해온 공주님. 오빠 오셨—”
태겸의 말이 끊겼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해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뭐야.”
평소라면
Fuck you
하면서 가운데 손가락 정도는 바로 날아왔을 텐데 오늘은 대꾸조차 없었다.
태겸이 가까이 다가갔다.
“야, 너 왜 이렇게 힘이 없어.”
해온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이 잔뜩 풀려 있었다.
“나 오늘 아프니까…… 저리 가.”
손을 뻗어 태겸의 옆구리를 힘없이 밀었다.
“나 오늘 건들지 마.”
태겸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라.”
옆자리에 앉던 이헌도 곧바로 해온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붉게 오른 뺨. 푸석해진 입술.
힘없이 내려앉은 눈꺼풀. 그리고 가끔씩 작게 떨리는 어깨.
이헌의 손이 해온의 이마 가까이 올라갔다.
그러다 잠시 멈췄다.
지난번 악몽이 떠올랐다.
“이마 만져봐도 돼?”
해온이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응…….”
그제야 이헌의 손바닥이 조심스럽게 이마에 닿았다.
표정이 바로 굳었다.
“뜨겁잖아.”
태겸도 놀라 고개를 숙였다.
“많이?”
“응.”
“너 이 상태로 학교를 왜 왔냐?”
해온은 책상 위 문제집을 바라봤다.
“시험…… 열흘밖에 안 남았어.”
“와.”
태겸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 상황에서도 공부 생각이 나?”
“처음 보는 시험이란 말이야…….”
해온이 샤프를 다시 들었다.
하지만 글씨를 쓰기도 전에 이헌의 손이 샤프를 빼앗았다.
“야.”
문제집도 덮었다.
교과서도 덮었다.
연습장까지 죄 덮었다.
“뭐 해.”
“보건실 가자.”
“싫어.”
“가.”
“나 공부해야—”
“윤해온.”
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해온이 입을 다물었다.
“열 나.”
“약 먹었어.”
“그래도.”
“좀 있으면 괜찮—”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해온의 몸이 순간 휘청했다.
이헌이 바로 잡았다.
“봐.”
“…….”
“혼자 걸을 수 있어?”
해온은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런데 교실 바닥이 살짝 흔들려 보였다.
“……조금 어지러워.”
이헌은 잠시 해온을 바라봤다.
그리고 몸을 낮췄다.
“업혀.”
“뭐?”
“업힌다고?”
태겸이 옆에서 눈을 크게 떴다.
해온도 마찬가지였다.
“싫어.”
“그럼 걸어.”
해온이 한 걸음 내디뎠다.
휘청.
다시 이헌이 잡았다.
“…….”
“업혀.”
해온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반 애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싫어. 쪽팔려.”
“그럼 내가 부축해.”
“그것도 쪽팔려.”
“그럼 여기서 쓰러져.”
이헌이 내려다 보며 이야기했다
"선택해.”
해온이 입술을 삐죽였다.
잠시 후 결국 이헌의 등에 조심스럽게 팔을 둘렀다.
“진짜 재수 없어…….”
“응.”
“대답하지 마.”
태겸이 교실 뒤에서 웃음을 참았다.
“권태겸.”
해온이 힘없이 불렀다.
“왜요, 공주님.”
“나 나으면 죽여버릴 거야…….”
“빨리 낫긴 하겠네.”
교실 문이 열렸다.
해온은 이헌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열 때문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보건실 문에는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 잠시 외출 중.
해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운도 없네…….”
이헌이 문을 열었다.
비어 있는 보건실 안은 조용했다.
해온을 침대에 앉히고 두꺼운 담요를 끌어다가 덮어줬다.
“약은?”
“이모가 줬어.”
해온이 주머니 속 약봉지를 보여줬다.
전기장판이 켜진 침대는 따뜻했다.
아까까지는 정신력으로 억지로 버티고 있었는데 몸을 눕히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졸음이 몰려왔다.
해온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갔다.
“차이헌.”
“응.”
“수업 안 가?”
“조금 있다가.”
“왜.”
“너 자는 거 보고.”
“나 애 아니야…….”
“알아.”
“그럼 가.”
“싫어.”
“…….”
오늘따라 말싸움할 힘도 없었다.
이헌이 침대 옆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좀 자.”
가슴께까지 담요를 다시 올려줬다.
해온은 흐릿한 눈으로 이헌을 잠시 바라봤다.
어제 세라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걔는 너 친구로만 보는 것 같지 않은데.’
해온은 이불 끝을 살짝 움켜쥐었다.
“……차이헌.”
“왜.”
“아무것도 아니야.”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이 들기 직전.
이마 위로 차갑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아주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해온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11화. 좋아하는 사람 이름시험은 끝났다.그런데 감기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콜록, 콜록.”윤해온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는 책상에 엎드렸다.처음처럼 열이 심하게 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시험 기간 내내 남아 있던 미열과 기침이었다.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졌고,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손에 힘이 빠졌다.한국에 돌아와 처음 치른 시험인데 하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아, 진짜…….”해온이 작게 투덜거렸다.지난 열흘 동안 이헌이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아침이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담긴 보온병이 놓여있었다.쉬는 시간에 문제집을 붙들고 있으면 이헌은 해온의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처음에는 짜증이 났다.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졌다.오히려 이헌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책상 위가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이것도 습관인가.’해온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시험 끝났다!”권태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해온은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시끄러워.”“와, 윤해온. 시험 끝났는데 반응이 그게 끝이야?”“그럼 춤이라도 춰?”“춤추면 재밌겠는데?”“꺼져.”태겸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 뒤로 이헌이 들어왔다.해온은 팔에 걸쳐두었던 커다란 교복 재킷을 들었다.추워하는 자신에게 이헌이 건네준 것이었다.그날 이후로도 아침저녁이면 계속 빌려 입었다.하지만 시험도 끝났고,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야, 이거.”이헌이 돌아봤다.“왜 벗었어?”“이제 괜찮아.”“기침하잖아.”“기침이랑 추운 거랑 무슨 상관인데.”“밖에 추워.”“너도 춥잖아.”해온이 재킷을 내밀었다.그러자 이헌이 재킷을 받아 펼치더니 다시 해온의 어깨에 걸쳐줬다.“집에 갈 때까지 입어.”“야.”“목도리는?”“가방에.”이헌이 해온의 가방을 열어 검은 목도리를 꺼냈다.“답답해서 뺐는데.”“밖에서는 하고 있어.”“나 애 아니거든?”“알아.”그러면서도 이헌은 목도리를 해온에게
“아이, 씨발. 권태겸 너는 네 바이크 놔두고 왜 자꾸 내 거 타려고 지랄이야?”아침부터 류세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권태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의 바이크 뒤에 올라앉았다.“안 그래도 마음 아픈 사람한테 자꾸 상처 주지 마라.”“누가 자물쇠도 제대로 안 해놓고 세워두래?”“그날 잠깐이었거든?”“그 잠깐 사이에 없어졌잖아.”“그러니까 더 슬프다고.”태겸이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세라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내려.”“싫어.”“권태겸.”“학교 늦어.”“야!”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지난밤 이헌의 집에서 자고 바로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다행히 밤새 말려둔 교복도 어느 정도 말라 있었고, 네 사람 모두 씻고 갈아입고 나니 어제 운동장에서 난리를 쳤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교통편이었다.“그럼 나는?”해온이 물었다.세라가 태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돌아봤다.“넌 차이헌 거 타.”“뭐?”“어차피 차이헌 혼자 타잖아.”태겸이 냉큼 맞장구쳤다.“그렇지. 나랑 차이헌이랑 같이 타면 그림이 너무 더러워.”“누가 너랑 같이 탄대.”이헌이 짧게 잘랐다.“봐. 본인도 싫대.”태겸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세라가 해온을 향해 턱짓했다.“그냥 타. 학교 늦겠다.”“…….”해온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어젯밤까지 차이헌 집에서 자놓고 바이크 뒤에 타는 게 뭐 그렇게 다르냐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게다가 머리도 조금 무거웠다.며칠째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괜찮겠어?”세라가 물었다.해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 머리 위로 헬멧이 푹 씌워졌다.“아.”앞이 잠깐 가려졌다.해온이 헬멧을 바로잡고 고개를 들자 이헌이 해온의 가방까지 받아 자기 앞으로 멨다.“내가 들 수 있는데.”“무겁잖아.”“안 무거워.”“어제 무겁다고 했잖아.”이헌은 대답 대신 바이크 쪽으로 향했다.멀찍이서 둘을 보고 있던 태겸이 입꼬리를 올렸다.“오오.
“아!!!!!!!!!!!!!!”“엄살 좀 그만 부려.”“야, 윤해온. 네 눈에는 이게 엄살로 보여?”권태겸이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뒤로 뺐다.해온이 그런 태겸의 팔목을 다시 잡아당겼다.“가만있어.”“아프다고.”“이딴 생채기 가지고 제일 시끄러워.”“생채기?”태겸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라를 돌아봤다.“류세라. 너도 봐봐. 얘 지금 사람 팔 떨어져 나가게 생겼는데 생채기래.”세라는 소파 반대편에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엄살 맞아.”“와. 둘이 진짜 가족 맞네.”“닥치고 치료나 받아.”“내 편이 한 명도 없냐?”태겸이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팔을 내밀었다.싸움이 끝난 뒤 네 사람은 곧장 차이헌의 집으로 왔다.정확히는 이헌과 태겸이 이 상태로 각자 집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교복에는 운동장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태겸의 팔과 얼굴에는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이헌은 상대적으로 멀쩡했지만 입술 한쪽이 살짝 터져 있었다.반면 세라와 해온은 옷에 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멀쩡했다.그런데도 가장 열받은 사람은 세라였다.“백승모 그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야?”소파에 앉아 있던 세라가 이를 갈았다.“지 애들 잔뜩 데리고 학교까지 찾아와놓고 지는 먼저 빠졌잖아.”태겸이 피식 웃었다.“원래 그런 새끼잖아.”“잡히기만 해봐.”“잡아서 뭐 하게?”태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세라가 눈을 희번덕 떴다.“경찰에 넘겨.”태겸이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뜨렸다.“푸하하! 웬일로 합법적이네?”“그럼 내가 뭐 쫓아가서 패기라도 할 줄 알았냐?”“조금?”“뒤질래?”“그 눈빛 보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해온은 둘의 대화를 무시한 채 태겸의 팔에 깨끗한 거즈를 대고 붕대를 정리했다.“됐어.”“끝?”“응.”태겸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오.”“아프다며.”“갑자기 괜찮아졌어.”“그럼 아까는 엄살 맞네.”“…….”해온이 손을 내밀었다.“다음.”소파 끝에 앉아 있던 이헌이 해온을 바라봤다.“뭘.
월요일 아침.교실에 들어선 윤해온은 제 자리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뭐야.”분명 자기 자리가 맞았다.창가에서 두 번째 줄.책상 옆에는 며칠 전 자기가 붙여놓은 작은 스티커까지 그대로 있었다.문제는.그 옆자리였다.원래 해온의 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차이헌이 떡하니 엎드려 자고 있었다.해온은 가방을 멘 채 한동안 그 뒷머리를 내려다봤다.잘못 왔나 싶어 교실까지 한번 둘러봤다.아니었다.분명 자기 반이었다.“왜 자리가…….”혼잣말을 하자 엎드려 있던 이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왔네.”“…….”해온이 미간을 좁혔다.“내 짝 어디 갔어?”“저기.”이헌이 턱으로 교실 반대편을 가리켰다.해온의 원래 짝이 저 멀리 권태겸 옆에 앉아 있었다.그 애 역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태겸과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해온이 다시 이헌을 쳐다봤다.“왜 자리가 바뀌었는데?”“내가 바꿨어.”“왜?”이헌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다시 책상에 팔을 괴었다.“잠자기 좋아 보여서.”“……뭐?”“창가고.”“그래서?”“조용하고.”“그래서 남의 자리를 네 마음대로 바꿨어?”“어.”해온은 할 말을 잃었다.“진짜 제멋대로네.”그러거나 말거나 이헌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해온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았다.“내 짝이 싫다고 하면?”“이미 물어봤어.”“뭐라는데.”“상관없대.”멀리 있던 원래 짝과 눈이 마주쳤다.그 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상관없는 모양이었다.“…….”해온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아, 그래. 마음대로 해.”“응.”“대답 진짜 얄미워.”대꾸는 없었다.이미 다시 자는 것 같았다.해온은 한심하다는 듯 이헌을 흘겨보다 문제집을 꺼냈다.어제 하루 종일 놀았으니 밀린 문제라도 풀 생각이었다.몇 문제쯤 풀었을 때였다.“공주님~”멀리서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해온의 샤프가 멈췄다.모른 척했다.“윤해온 공주
골이 깨질 것 같았다.“Ah, shit…….”해온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머릿속에서 누가 북이라도 두드리는 것 같았다.쿵. 쿵. 쿵.조금만 움직여도 금방이라도 게워낼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아…… 미치겠네.”어젯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상태도 모르고 계속 마신 게 문제였다.해온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조금 진정된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떴다.그리고.“……?”눈썹이 찌푸려졌다.낯설었다.벽도.커튼도.눈앞에 놓인 작은 협탁도.분명 자기 방이 아니었다.해온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침대 하나.협탁 하나.벽에 걸린 검은색 후드.그게 끝이었다.“여기가 어디야…….”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어젯밤.세라한테 끌려 클럽에 갔다.권태겸과 차이헌을 만났다.웬 이상한 애들이 시비를 걸었다.차이헌 손에 풀어진 붕대를 다시 감아줬다.그리고…….“…….”그다음이 없다.해온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설마.”그때였다.사각.침대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해온이 그대로 얼어붙었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불 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류세라?”대답이 없다.해온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조금 걷었다.그리고.“……!”짧은머리칼.. 차이헌이었다.“뭐야!”놀란 해온이 뒤로 물러나다 침대 헤드에 등을 부딪쳤다.“아!”그 소리에 이헌도 눈을 떴다.잠이 덜 깬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헝클어진 머리.구겨진 티셔츠.평소 학교에서 보던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다.해온은 그런 이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 옷부터 확인했다.어젯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였다.가디건만 벗겨져 침대 옆 의자에 걸려 있었다.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내가 왜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욱.”갑자기 속이 뒤집혔다.해온이 입을 틀어막았다.“잠깐.”이헌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해온이 침대에서 내려
하이볼을 두 잔째 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어, 류세라?”익숙한 목소리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아…….”아까까지만 해도 팝콘을 집어 먹으며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썩었다.해온도 고개를 돌렸다.“누군가 했더니.”권태겸이었다.그리고 그 뒤에는 차이헌이 서 있었다.해온의 손이 멈췄다.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태겸은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이헌은 그 뒤에 무심하게 서 있었다.얼굴에 남아 있던 상처는 며칠 전보다 많이 옅어져 있었다.하지만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해온이 감아줬던 자리였다.“여기서 또 보네?”태겸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세라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또 뭐.”“또 뭐라니. 아는 사람 만나서 인사도 못 하냐?”“못 해.”“여전히 까칠하네.”“꺼져.”태겸은 그런 세라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웃었다.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해온과 눈이 마주쳤다.“전학생이라며? 전학생도 안녕.”해온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태겸이 씩 웃었다.“학교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안녕.”짧은 대답.그걸 들은 세라가 해온 쪽을 돌아봤다.“굳이 인사까지 해줄 필요 없어.”태겸이 황당한 듯 웃었다.“내가 뭐 전염병이냐?”“비슷하지.”“너 아직도 화났냐?”세라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내가 왜 너한테 화나?”“그럼 왜 볼 때마다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봐.”“네가 싫으니까.”“와. 상처받네.”“안 받아 보이거든.”둘이 투닥거리는 동안에도 이헌은 한마디가 없었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해온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알아본 건가?학교 옥상에서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어젯밤 상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고.세라는 태겸 뒤쪽에 서 있는 이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너도 니친구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