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안으로 들어선 해인의 시선은 곧장 책상 앞의 도윤을 향해 있었다.갑작스러운 호출에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쪽 소파에서 여유롭고도 나른한 목소리가 먼저 끼어들었다.“안녕하세요. 태성그룹 차민영입니다.”해인의 고개가 흠칫 놀라며 옆으로 돌아갔다.슈트를 입은 화려한 여자.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지키고 선 남자.순간, 해인의 머릿속에 어제저녁 권 회장이 식사 자리에서 흘리듯 뱉었던 말이 날아와 박혔다.오빠의 맞선 상대.‘나한테 소개해 준다던 사람이 저 여자……, 아니 저 사람이었어?’해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왜인지 모를 수치심과 원망이 발끝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자신을 굳이 이 자리에 부른 이유가 고작, 앞으로 새언니가 될 저 화려하고 완벽한 여자를 보여주며 자신의 처지를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단 말인가.핏기가 가셨던 해인의 뺨이 이내 모멸감과 배신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요동치는 감정을 누르고서, 우아한 미소를 얼굴에 덧씌웠다.“아, 오빠랑 맞선 보신 분이시군요. 이야기 들었어요.”해인은 도윤을 향했던 원망 어린 시선을 거두고 민영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동생 윤해인입니다. 진작 새언니 되실 분인 줄 알았으면 빈손으로 오지 않았을 텐데요. 결례를 범했네요.”철저하게 가족이자 동생으로 선을 긋는 완벽한 방어였다.도윤의 미간이 불쾌감으로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러나 소파에 기대어 있던 차민영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픽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요.”민영은 제 뒤에 선 태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덧붙였다.“난 그쪽 남자한테 관심 없으니까.”그쪽 남자라는 노골적인 단어에 해인의 사고 회로가 일순간 정지했다.방금 전까지 완벽하게 둘러썼던 동생이라는 가면이, 자신의 진짜 마음을 꿰뚫어 본 민영의 돌직구 한 방에 와장창 깨져버린 기분이었다.그 아슬아슬한 정적을 깬 건 도윤이었다.자리에서 천천히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이 마치 경고음처럼 느껴졌다.액정에 뜬 ‘오빠’이라는 두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 강서우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부렸던 여우 같은 여유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해인은 주위 눈치를 살피며 쫓기듯 비상구 근처의 한적한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어, 오빠.]최대한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내려 애썼지만, 가파른 호흡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따.[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한참 기다렸잖아.]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도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 뒤에 깔린 묘한 압박감이 해인의 뒷목을 서늘하게 훑었다.[주변이 시끄럽네. 어디야?][그냥, 백화점. 구경 좀 할 게 있어서 나왔어.][설마…… 아니지?][응? 뭐가 아니…… 풋]도윤의 의도를 알아차린 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보나 마나 자신이 밖으로 나돌며 또 몰래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였을 것이다.어제 보았던 차갑고 계산적인 낯선 모습은 그저 한순간의 예민함이었기를.해인은 핸드폰 너머의 그가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다정한 오빠이기를 간절히 바랐다.[그런 거 아니야, 진짜 구경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오빠야 말로 어쩐 일이야?][잘됐네. 마침 네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소개해 줄 사람?’해인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생각해 보면 오빠의 주변 지인이나 일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나를 소개해 줄 사람이 누구일까.묘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피어올랐다.도윤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지금 사무실로 와. 기다릴게.][지금? 나 아직 구경할 게 남았는데…….]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끊긴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찾아왔다.해인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갑작스러운 호출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오빠의 지인을 만난다는 사실이 어쩐지 가슴 한구석을 들뜨게 만들었다.해인이 다시 카페 쪽 복도로 돌아가자, 서우가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었다.“누나! 누구 전화인데 그렇게 급하게 받아?”“서우야, 나 갑자기 가봐야
도윤의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점심이나 먹죠, 파트너.”서류를 검토하던 도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칼같이 재단된 크림 화이트 컬러의 슈트를 입은 차민영이 들어서고 있었다. 헐렁한 재킷 소매 아래로 언뜻 보이는 볼드한 골드 뱅글이 바깥세상의 빛을 반사했다.“하아…, 비서실을 갈아치워야 하나.”“또 뭘 그렇게까지. 난 프리패스거든요. 물론 권한은 권 회장님께서 주셨고.”도윤의 시선이 민영을 지나쳐, 그녀의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태건에게로 꽂혔다.무표정한 가드의 얼굴 너머로, 어젯밤 그가 꿰뚫어 보았던 맹목적인 불장난의 냄새가 어른거렸다.도윤은 들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 위에 툭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저놈이랑 같이? 말했던 것보다 날 너무 알뜰하게 이용하는 거 아닌가.”자신의 사무실 안까지 버젓이 제 진짜 애인을 대동하고 나타난 차민영의 뻔뻔함에 도윤이 서늘하게 일갈했다. 하지만 민영은 기죽기는커녕 픽 웃으며 도윤의 책상 앞 의자에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손해 보는 것 같으면 당신도 좀 써먹어요. 이렇게 삭막하게 일만 하지 말고.”민영은 텅 빈 전무실 안을 턱끝으로 가리키며 도발적으로 속삭였다.“아니면 마음에 드는 여자 하나 비서로도 곁에 못 둘 정도로, 우리 파트너가 능력 부족인가?”정곡을 찌르는 민영의 말에 도윤의 턱관절에 찰나의 힘이 들어갔다.문득 윤해인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슬리기 시작했다.“……무슨.”도윤은 감정을 갈무리하며 서늘하게 비웃었다.“굳이 곁에 둘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부르면 언제든 오는 위치에 잘 있으니.”그는 보란 듯이 책상 위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단축 번호를 누르자, 핸드폰 너머로 일정한 통화 연결음이 새어 나왔다.차민영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었고, 도윤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하지만 그의 확신과 달리, 연결음은 한참이 지나도록 끊어지지 않았다.**“뭐야? 오빠가 이런 구석진 데서 커피를 다 마셔?”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팝업 카페
해인은 거울 앞에서 높게 묶은 머리를 한 번 더 바짝 조여 맸다. 늘 뒷목을 가리던 답답한 머리카락을 치워버리니 시야가 한결 넓어진 기분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이 집의 분위기에 눌려 괜스레 얌전한 옷들만 골라 입었었다. 하지만 오늘 해인이 선택한 건 빛바랜 슬랙스에 소매를 걷어붙인 셔츠 차림이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어쩐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다시 할 수 있어.’해인은 책상 위에 놓였던 묵직한 캔버스 백을 어깨에 메었다. 어젯밤 잠을 설치며 채워 넣은 러프 스케치북과 연필 통이 가방 안에서 덜컥거리며 기분 좋은 무게감을 만들어냈다.그러나 그 산뜻한 결심은 대문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가로막혔다.“어, 누나. 지금 나가?”스포츠카 보닛에 기대어 있던 서우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해인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찌푸려졌다.없던 일이라고 되뇌었지만, 선박에서의 일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어떻게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했지? 저런 말간 얼굴로… 아니네. 다시 보니 문란하게 생겼어.’어제는 한 여사의 카드 때문에 함께 했다 해도, 다시 그와 사적으로 친목을 다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따라오지 마.”그녀는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오늘은 나 혼자 갈 데가 있어.”“에이, 그래도 누나 이 동네 길도 잘 모르잖아. 내가 모셔다드릴게. 타.”평소처럼 능글맞게 차 문을 열어젖히는 서우를 향해, 해인은 차가운 눈빛을 던지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서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쾅, 하고 거칠게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차 엔진 소리가 멀어지겠거니 했던 해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저박, 저박.일정한 거리를 두고 해인의 뒤를 따르는 발걸음 소리.해인이 걸음을 빨리하면 그 발걸음도 빨라졌고, 해인이 멈추면 그 발걸음도 우뚝 멈춰 섰다.참다못한 해인이 홱 고개를 돌렸다.십 미터쯤 뒤에서, 서우가 마치 주인을 잃어버린 유기견처럼 엉거주춤 서 있
같은 시각, 서울 도심을 매끄럽게 가로지르던 태성그룹의 엠블럼이 새겨진 검은 그림자가 민영의 레지던스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한 층에 오직 한 세대만이 거주하며, 전용 엘리베이터가 집 안까지 연결되는 이 수직의 요새는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을 숨기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다. 일반적인 세단보다 한 뼘은 더 길게 빠진 휠베이스 덕에 주차 칸을 꽉 채우고도 남는 그 거대한 부피감은, 차체가 뿜어내는 정적만큼이나 위압적이었다.엔진 소리가 완전히 멎었지만, 차 안의 누구도 섣불리 문을 열지 않았다.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프라이버시 글라스 너머, 짙은 선팅으로 가려진 뒷좌석에서 민영이 아프게 조여오던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하아…….”숨 막히는 태성그룹 후계자라는 무거운 껍데기를 벗어던지듯, 그녀가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운전대를 쥐고 있던 수행 비서 겸 가드, 태건의 시선이 룸미러를 통해 민영에게 닿았다.감정을 철저히 지워낸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굵은 손마디는 핸들 가죽이 우그러질 만큼 꽉 쥐어져 옅게 핏대가 서 있었다.“……권도윤.”묵직한 정적을 깨고, 태건의 낮고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차 안에 가라앉았다.“그 자를, 정말 믿으십니까.”민영의 입술 사이로 픽, 하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믿어? 내가 그 오만하고 재수 없는 인간을 왜 믿어.”민영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룸미러 너머의 태건과 시선을 맞췄다.“난 권도윤을 믿는 게 아니라, 그 인간의 완벽한 계산을 믿는 거야. 그 남자는 지금 태성이 쥐고 있는 동남아 물류망이 미치도록 절실하거든.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악마하고도 웃으면서 손을 잡을 위인이니까. 6개월 정도 방패막이 노릇을 해주는 건 그쪽한테도 완벽하게 남는 장사지.”차민영의 도발적이고 치밀한 계획.그것은 에이펙라는 거대한 방패를 잠시 빌려 태성의 집안 어른들의 눈을 가리고, 그 6개월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지분을 현금화해 이 지긋지긋한 새장에서 완전히 도망치겠다
별채로 돌아온 해인은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오늘 낮, 화방에서 사 온 빳빳한 캔버스와 전문가용 연필이 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해인은 홀린 듯 연필을 쥐었다. 그리고 빈 캔버스 위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단정하고 곧은 눈썹, 날카롭지만 자신을 향할 때만 둥글게 휘어지던 눈매, 가끔 낮게 웃을 때면 보기 좋게 패이던 입매까지.눈을 감아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그려왔던 모습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캔버스 위를 채워가는 선들이 점점 길을 잃고 엇나갔다.해인의 손끝이 멈칫했다.도무지 눈동자를 그려 넣을 수가 없었다.조금 전 서재에서 마주했던 그 차갑고 서늘한 눈빛이, 캔버스 위에 그려둔 다정한 미소와 지독하게 겉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건 오빠가 아니야.’해인은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을 툭 내려놓았다.이 그림은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지나가버린 그 시절의 다정했던 오빠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 믿고 싶었던 가여운 망상.‘혼담이든 뭐든 방패막이는 되어줄 생각입니다.’‘언제 변할지 모르는 사람 마음에 기대기엔, 내가 쥐고 있는 게 너무 많아.’서재에서 들었던 그의 차가운 음성이 다시금 귓가를 때렸다.그래.이곳은 애초에 자신이 머물 곳이 아니었다.권 회장이 어느 날 갑자기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말했을 때, 미련 없이 이 집을 걸어 나갈 수 있으려면 이깟 환상에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해인은 미련 없이 캔버스를 뒤집어 엎어버렸다.환하게 켜진 이젤 옆 조명 아래, 텅 빈 캔버스의 허연 뒷면이 마치 자신을 비웃듯 드러났다. 허상을 좇던 대가는 이토록 허무했다. 해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연필을 쥐고 있던 손의 긴장을 풀었다.“진짜… 한심하다, 윤해인.”조용한 방안으로 자조적인 헛숨이 새어 나왔다.백화점을 그만둔 이후, 자신이 보낸 날들이 눈 앞에 스쳤다.그저 과거의 다정했던 ‘오빠’라는 환상에 취해, 도윤이 보여주는 찰나의 온기나 서우가 던져주는 장난에 이리저리 휩쓸리기만 했다.그저 아무런 대책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