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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Auteur: 양순이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3-28 08:11:08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이 마치 경고음처럼 느껴졌다.

액정에 뜬 ‘오빠’이라는 두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 강서우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부렸던 여우 같은 여유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해인은 주위 눈치를 살피며 쫓기듯 비상구 근처의 한적한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어, 오빠.]

최대한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내려 애썼지만, 가파른 호흡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따.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한참 기다렸잖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도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 뒤에 깔린 묘한 압박감이 해인의 뒷목을 서늘하게 훑었다.

[주변이 시끄럽네. 어디야?]

[그냥, 백화점. 구경 좀 할 게 있어서 나왔어.]

[설마…… 아니지?]

[응? 뭐가 아니…… 풋]

도윤의 의도를 알아차린 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보나 마나 자신이 밖으로 나돌며 또 몰래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였을 것이다.

어제 보았던 차갑고 계산적인 낯선 모습은 그저 한순간의 예민함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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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게 오는 남자들   65화

    해인은 도윤의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맞닿은 등을 타고 해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하지만 도윤의 머릿속에는 그 온기 대신, 지독하게 축축하고 아득했던 선상에서의 기억이 플래시백처럼 터져 나갔다.약에 취해 늘어져 있던 해인.그 아찔한 열기 앞에서 끝내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굴었던 자신.다시는, 두 번 다시는 이 아이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수백 번 뼈를 깎으며 다짐했는데.“……착각하지 마.”도윤은 굳은 얼굴로 제 허리를 감싼 해인의 손을 떼어냈다. 떨리는 손끝을 애써 감추며,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갑게 선을 그었다.“넌 지금 차민영의 얄팍한 도발에 오기가 생긴 것뿐이야. 아니면 낯선 분위기에 휩쓸렸거나.”“오기 아니야! 휩쓸린 것도 아니라고!”해인이 도윤의 앞을 가로막으며 돌아섰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나…… 오빠 좋아해.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남자로 좋아한다고.”숨통을 끊어놓을 듯한 돌직구였다. 도윤의 호흡이 일순간 멈췄다.“그러니까 오빠도 솔직하게 대답해 줘. 오빠는 정말 단 한 번도, 나를 여자로 본 적 없어?”해인의 젖은 목소리가 객실 안을 울렸다.도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힐 지경이었지만, 그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짓씹듯 거짓말을 뱉어냈다.“……어. 없어.”나 같은 새끼는, 너를 안을 자격이 없으니까.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처절한 진심을 삼키며 도윤이 등을 돌리려던 찰나였다.지이익-어두운 객실의 정적을 찢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도윤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윤해인,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도윤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해인의 두 손이 등 뒤로 향해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원피스의 지퍼가 허리춤까지 속절없이 길을 내어준 채였다.스르륵.얇은 천이 해인의 하얀 어깨선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흘러내렸다.은은한 간접 조명 아래로, 단 한 번도

  • 내게 오는 남자들   64화

    “이런 질 낮은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 없…….”도윤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민영이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왜 그렇게 정색해요, 도윤 씨? 설마…… 둘이 아직 한 번도 안 해본 건 아니죠?”해인의 어깨가 일순간 흠칫 튀어 올랐다.민영은 해인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입꼬리를 더 짙게 끌어올렸다.“그럼 내가 완전 은인이네. 오늘 해봐요. 사실 남녀관계는 침대 위를 안 거치면 모르는 거거든. 그 전까지 좋던 감정도 침대 위에서 싸하게 식을 수도 있고, 미적지근하던 감정도 순식간에 확 뜨거워질 수 있는 거고.”침대 위.그 노골적인 단어에 도윤의 미간이 무섭게 일그러졌다.그가 이 저급한 도발을 차갑게 쳐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였다.‘……확인해 보고 싶어.’해인은 테이블 아래로 치맛자락을 꽉 틀어쥐었다.가짜 연애라는 명분 아래 꽁꽁 숨겨두기만 했던 내 진짜 감정을.그리고 언제나 다정하고 완벽한 오빠인 척하지만, 가끔씩 숨 막히도록 서늘한 눈빛을 흘리는 저 남자의 진짜 감정을.민영의 가벼운 도발은 오히려 해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위험한 오기에 불을 지폈다.침대 위에서 싸하게 식든, 아니면 통제할 수 없이 뜨거워지든, 더 이상 이 애매한 선 위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가요, 그럼.”정적을 깨고 나온 해인의 뜻밖의 대답에 도윤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윤해인. 너 지금 무슨…….”“비지니스는 철저하게 해야지. 얻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할 것 아냐.”도윤의 당혹스러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해인은 애써 떨리는 손을 감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태껏 한 번도 그래본 적 없는 사람처럼, 도윤의 단단한 팔을 먼저 잡아끌며 민영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가요. 차민영 씨가 말하는 은인 노릇, 오늘 한번 확인해 볼 테니까.”라운지를 빠져나와 객실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코너마다 배치된 호텔 직원들부터 대낮임에도 식당이나 헬스장을 이용하려

  • 내게 오는 남자들   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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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게 오는 남자들   62화

    상영관의 불이 켜지자마자 도윤은 도망치듯 해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로비의 찬 공기가 뺨에 닿았지만, 해인의 귓가에는 여전히 영화 속 여주인공의 아찔한 교성이 맴도는 것 같았다.“……미장센이, 참 붉더군.”도윤이 넥타이를 고쳐매며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아, 그, 그러게. 붉다 못해…… 암튼, 예술은 참 심오하네. 하하.”해인 역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타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애썼다.그저 이 묘한 열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일 때, 누군가 도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우리 취향이 비슷한가봐요.”낮게 깔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걸음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태건과 민영이 비딱하게 서 있었다.“……당신들이 여기 왜 있지?”도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태건을 마주한 순간, 도윤의 시선이 그의 입가 한구석에 멈췄다.입술 가장자리에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선홍빛 립스틱 조각이 붉은 낙인처럼 번져 있었다.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그들이 어떤 ‘예술’을 즐겼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노골적이고도 지저분한 흔적이었다.‘……공공장소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가. 부끄럽지도 않은 건지.’도윤은 제 입가가 미세하게 실룩이는 것을 느꼈다.혐오감과 함께, 방금까지 해인과 나란히 누워 숨을 죽였던 기억이 겹치며 얼굴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 태건의 그 파렴치한 흔적이 마치 자신들의 위태로운 긴장감까지 발가벗기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왜긴요. 우리도 영화 보러 왔죠. 바로 두 칸 뒤에서.”민영이 팔짱을 낀 채 해인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어머, 해인 씨.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설마 영화 내용에 너무…… 몰입한 건 아니죠?”“아, 그게…… 히터가 좀 세서요.”“아, 하긴 좀 덥긴했어. 아,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우리 더블데이트라도 할까요?”민영이 화사하게 웃으며 해인과 도윤을 번갈아 보았다.“마침 우리 호텔 아르테(Arte)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같이

  • 내게 오는 남자들   61화

    프리미엄 상영관 전용 라운지는 일반 관람객의 북적임과는 거리가 멀었다.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과 은은한 조명, 라운지에 퍼지는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향까지.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어른들의 공간 같았다.문제는 그 공간의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전광판이었다.해인이 웰컴 드링크를 고르는 사이, 전광판에서는 두 사람이 예매한 영화 의 예고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느릿하고 관능적인 첼로 선율을 배경으로, 화면 가득 얽혀드는 남녀의 적나라한 살색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컥.”커피를 한 모금 삼키려던 도윤의 목구멍에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놀란 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도윤은 재빨리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시선을 애먼 허공으로 돌렸다. 하얗던 그의 귀 끝이 불이라도 붙은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미치겠군. 저런 걸 나란히 앉아서 보자고?’뒷목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끼며, 도윤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윤해인 앞에서 당황한 티를 낼 수는 없었다.그는 짐짓 여유로운 척, 헛기침을 한 번 더 하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전광판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이거, 박찬… 아니, 그 유명한 예술 영화 감독 작품이네. 작년 해외 영화제에서 미장센으로 대상도 받은 검증된 영화지. 마침 보고 싶었던 거다.”뻔뻔하기 짝이 없는 도윤의 지식인 코스프레에 해인도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췄다.“아, 그, 그렇지? 나도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평론을 본 것 같아. 예매 잘했네, 뭐.”누가 봐도 예술성보다는 다른 곳에 시선이 꽂힌 예고편이었지만, 두 사람은 애써 예술을 논하며 서로의 시선을 회피했다.“관람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상영관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직원의 정중한 안내에 두 사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뻣뻣한 걸음으로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이쪽입니다. 편안한 관람 되십시오.”직원이 묵직한 방음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앞장서 들어가던 도윤의 발걸음이 돌부리에 걸린 듯 우뚝 멈춰 섰다.뒤따라가던 해인이

  • 내게 오는 남자들   60화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햇살이 별채의 창가를 두드렸다.해인은 눈을 뜨자마자 어제 서우가 열고 들어왔던 창문부터 확인했다.하루아침에 벌어진 그 많은 일들이 꿈이었나 싶었지만, 화장대 위에 놓인 낯선 향수병과 도윤의 반지가 그 모든 일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어제 분명 깨끗이 씻고 잠들었건만, 침구에서 몸을 일으킬 때마다 아주 미세하고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서우가 장난스럽게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진짜 무슨 향수가 이래.”그때,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진동했다.[1시간 뒤에 준비하고 나와.]도윤이었다.다정한 데이트 신청이라기 보다는 거절할 수 없는 명령에 가까웠다.“먼저 제안을 한 건 난데……, 빚쟁이가 된 이 느낌은 뭐지.”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입가에 비집고 나오는 실없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해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벌써 미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평소라면 스킨로션에 선크림 정도로 대충 마무리했을 외출 준비였지만, 오늘따라 해인의 손길은 유독 분주했다.조금 더 매끄럽게 베이스를 두드리고, 옅은 음영으로 눈매를 길게 뺐다. 화장대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평소엔 잘 바르지 않던 채도 높은 붉은 립스틱까지 꺼내 들었다.‘가짜 애인 노릇 하러 가는 건데, 너무 꾸민 티가 나면 우스우려나.’속으로는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도, 입술 선을 따라 색을 채워 넣는 손끝에는 기분 좋은 떨림이 묻어났다. 거울 속의 자신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조금 더 낯설어 보였다. 그 낯섦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단장을 마친 해인은 마지막으로 화장대 한쪽에 놓여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서늘한 금속이 안착하자, 비로소 오늘이 그와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같은 시각, 별채 앞 진입로에 정차된 검은색 세단 안.운전석에 앉은 도윤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스티어링 휠을 톡톡 두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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