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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23 09:42:32

서우가 등을 돌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해인은 굳게 닫힌 문에 가만히 이마를 기댔다.

‘……강서우 말이 맞아.’

언제까지 도윤의 그늘에 숨어 잔뜩 겁먹은 채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 그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며, 오빠에게 민폐만 끼치는 짐덩이로 남는 것은 끔찍하게 싫었다.

해인의 시선이 방 한구석, 어젯밤 꺼내어 둔 낡은 스케치북에 가닿았다.

‘도윤 오빠 옆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 적어도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괜찮은…… 동생이 되고 싶어.’

누군가 내쳐도 기꺼이 제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

해인은 스케치북의 거친 표지를 가만히 쓸어내리던 손을 거두어, 괜스레 제 뺨을 꾹 문질러 보았다. 마른 손바닥과 마찰한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문득 엉망으로 터진 얼굴을 하고 도윤의 집앞에 나타났던 강서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 어머니 작품이지.]

친아들의 뺨도 주저 없이 후려쳐 핏발을 세우게 만드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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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기괴한 비명 소리와 조잡한 귀신 모형들.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감도는 공기는 그 어떤 장치보다 서늘했다.도윤은 깍지 낀 손을 절대 놓아주지 않은 채, 앞장서 걷는 해인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해인의 손은 그저 무생물처럼 도윤의 손안에 담겨 있을 뿐, 그 어떤 힘도 온기도 돌려주지 않았다.결국 참지 못한 도윤이 해인을 잡아 세웠다.“윤해인, 잠깐만.”“……왜. 무서워? 조금만 더 가면 출구야.”해인이 귀신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도윤은 이를 악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이러는 거 너랑 안 어울려. 우리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날 세우며 지낸 적 없잖아.”도윤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네가 감히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는 오만함과, 제발 예전처럼 나를 보며 웃어달라는 구걸이 뒤섞인 기묘한 호소였다.“예전? 아…… 10살 때?”해인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그땐 어렸잖아. 다 큰 성인 남녀가, 남매끼리 누가 이렇게 손을 꽉 잡고 다녀?”“…….”“오빠. 오빠라는 핑계로 자꾸 통제하려고 들지 마. 진짜 내 손을 잡고 싶으면, 그 알량한 오빠 노릇부터 집어치우고 남자로 다가오든가.”해인은 깍지 껴진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리며, 어둠 속에서 도윤을 향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얄팍하게 굴지 마.”도윤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용기도 없으면서'라는 조소가 비수처럼 정곡을 찔렀다.그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어떤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이제 그만 놔. 저기 출구 보이네.”해인의 시선이 닿은 곳.바깥의 화려한 야경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 바로 앞, 어둠이 짙게 깔린 사각지대에 익숙한 두 실루엣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민영과 태건이었다.“어머, 이제 오네요? 귀신한테 잡혀간 줄 알았네.”민영이 팔짱을 낀 채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자, 이제 보는 눈 많은 밖이니까 다시 원래 파트너로 돌아

  • 내게 오는 남자들   73화

    귀신의 집으로 향하는 첫 번째 게이트를 지나자, 거대한 동굴처럼 꾸며진 서늘한 실내 대기줄이 나타났다.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조명은 점차 자취를 감췄고, 인파 역시 뚝 끊기며 사방은 짙은 어둠과 음산한 배경음으로 가득 찼다.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완벽한 사각지대.도윤은 그 찰나의 어둠을 놓치지 않았다.그는 앞서 걷던 태건과 해인의 사이로 거침없이 파고들며, 태건의 팔짱을 끼고 있던 해인의 손목을 낚아챘다.“어……?”당황한 해인이 작게 숨을 들이켜며 끌려오자, 도윤은 보란 듯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제 품으로 바짝 붙였다.해인의 어깨 너머로 태건을 향해 쏘아붙이는 도윤의 눈빛은 살벌했다.그 험악한 기세에 태건이 슬쩍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한발 물러섰다.때마침 진짜 귀신의 집 본 입구를 알리는 직원의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자, 두 분씩 5분 간격으로 입장하시겠습니다! 앞 팀 먼저 들어가실게요!]“그럼 저희가 먼저 들어갈게요. 두 사람, 5분 뒤에 천천히 와요!”민영이 생긋 웃으며 태건의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의 형체는 무거운 검은 커튼 너머, 어두운 입구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바깥의 소음이 단숨에 차단된 눅눅한 복도.사방에서 스산한 바람 소리와 귀신 모형이 튀어나왔지만, 두 사람의 걸음은 산책을 나온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잠시 뒤를 힐끗 살피며 눈치를 보던 태건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민영아, 나 진짜 네가 시키는 대로만 한 거다. 사심은 맹세코 하나도 없었어.”그의 말에 민영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알아, 아주 연기력 훌륭하던데? 수고했어. 아까 권도윤 표정 봤어? 와, 사람 하나 죽일 기세더라.”민영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걸음을 옮기며 가볍게 덧붙였다.“그 질투에 눈먼 눈동자를 보니까, 진짜 없던 사랑도 활활 타오르겠던데?”그 순간.옆에서 걷던 태건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어? 왜 그래?”어둠 속에서 태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영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능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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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게 오는 남자들   71화

    금요일 저녁, 놀이동산의 입구.해가 지고, 매표소 너머로 야간 개장을 알리는 화려한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오늘 밤의 메인이벤트인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 속에서, 도윤은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며 휴대폰 화면을 쓸어내렸다. 인터넷 브라우저 탭에는 낮에 회의실에서 몰래 검색해 보았던 유치한 키워드들이 여전히 띄워져 있었다.[놀이동산 데이트 스킨십][인파 속에서 자연스럽게 보호하는 법][여사친 심쿵하게 만들기]도윤은 황급히 브라우저를 종료하며 마른세수를 했다.미친놈.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내 그럴싸한 변명거리로 속내를 덮었다.‘어릴 때 이런 소란스러운 곳엔 한 번 제대로 데려온 적이 없었으니까. 오빠로서 못 해준 거, 이참에 조금 잘해주고 싶은 것뿐이야.’그래, 어디까지나 오빠로서의 알량한 책임감.도윤이 기대하는 오늘의 그림은 명확했다.낯선 인파에 치여 자연스럽게 제 옷자락을 쥐고 의지하는 모습.그러면서도 애인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이 불쑥 다가가 어깨를 감싸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뺨을 붉히는 그 무방비한 얼굴.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게 여기며 기대는 ‘동생’의 모습과,제 작은 손짓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여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고 싶다는 이중적이고 기형적인 마음.도윤은 그 완벽한 통제감이 주는 우월감을 기꺼이 즐길 작정이었다.“해인 씨, 생각보다 좀 늦으시네요. 길을 헤매나?”맞은편에 서 있던 차민영이 팔짱을 낀 채 가볍게 투덜거렸다.그녀의 파트너로 나온 태건이 민영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사람 좋게 웃었다.“금요일 저녁이잖아. 어차피 불꽃놀이까지는 시간 넉넉하니까 좀 느긋하게 기다려.”“뭐, 그건 그렇지만. 난 놀이기구도 타고 싶거든.”도윤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여유로운 척 대꾸했다.“금방 올 겁니다. 이런 곳은 초행길이라 조금 늦는 모양이네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한번에 오는 교통편도 없을 텐데 왜 굳이 혼자서 오겠다고 한 건지.’

  • 내게 오는 남자들   70화

    회의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가 한 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펜을 돌리던 도윤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아침 식탁에서 해인이 지어 보인 그 건조한 얼굴, 그리고 서우에게 고기를 얹어주며 짓던 그 낯선 미소가 환영처럼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후…….”‘걸어 다니는 삼계탕이라.’도윤은 결국 서류를 덮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비틀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어처구니가 없었다.자신은 밤새 괴로웠는데, 그녀는 어쩜 그렇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아니, 애초에 그게 그녀의 진짜 얼굴이 맞기는 한 걸까?도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불과 어제 낮까지만 해도 제 아래서 무너지듯 울던 여자였다.그 맹목적인 감정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흔적도 없이 증발할 리 없었다. 만약 아침 식탁에서의 그 얄미운 여동생 행세가 자신을 밀어내기 위한 얄팍한 연기라면.‘착한 오빠 노릇은 나도 잠시 접어둬야겠군.’그녀가 쓴 그 완벽한 무관심의 가면을 제 손으로 기어이 벗겨내고 싶어졌다.진짜 네 모습이 뭔지,어디까지 그 쌀쌀맞은 얼굴을 유지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오만함이 고개를 쳐들었다.도윤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으로 향했다.그에게는 아직, 해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던져준 완벽한 패가 하나 남아 있었다.6개월간의 가짜 연애.해인이 먼저 제안했던, 그래서 먼저 취소할 수 없는 명백한 계약.‘철저하게 남매로 지내시겠다? 네가 차민영 앞에서는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하네.’도윤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망설임 없이 '차민영'의 번호를 눌렀다.두어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도윤 씨? 웬일이에요, 먼저 전화를 다 하고?][별일은 아니고. 조만간 시간 좀 괜찮습니까?][나야 도윤 씨 시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무슨 일인데요?][우리 더블데이트나 한번 하죠. 민영 씨 파트너랑 같이.]전화기 너머로 차민영의 당황한 듯한, 그러나 이내 흥미롭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윤은 창밖을 응시하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 내게 오는 남자들   69화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별채의 제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자마자, 해인은 버티고 서 있던 다리에 힘을 풀고 침대 위로 털썩 누워버렸다.“하아…….”천장을 향해 길게 뿜어낸 한숨에 홧홧한 열기가 섞여 있었다.보란 듯이 계란말이를 뺏어 먹고, 혈관 기름 운운하며 샐러드 접시를 밀어주던 그 당돌한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침대 시트를 꽉 거머쥔 해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눈을 감자 방금 전 다이닝룸에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리플레이 됐다.자신이 뱉은 유치한 대사에 스스로 당황해 굳어버렸던 도윤의 눈동자.어른스러운 척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결국 수치심을 숨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그의 뒷모습.‘……오빠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나.’늘 고결하고 완벽했던 권도윤이었다.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내려다보는 줄만 알았던 사람이, 고작 갈비찜 한 조각과 나이라는 유치한 공격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해인은 팔을 들어 두 눈을 꾹 눌렀다.그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 때마다, 제 가슴 한구석도 같이 욱신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같았다.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며 그 미련을 털어냈다.그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먼저 선을 그은 것도 그였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가두려 한 것도 그였다.지금 그가 느끼는 소외감과 수치심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오빠라는 자리가 주는 당연한 대가였다.“잘했어, 윤해인. 울지 마. 넌 이제 그냥 동생이야.”해인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충분히 아파했고, 충분히 구걸했다.이제 남은 에너지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쓸 것이다.똑똑.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와, 우리 누나. 아까 식탁에서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저기 이렇게 열고 들어오는 거면 노크를 하는 의미가 있을까?”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해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문 앞에 선 서우를 쳐다보았다.“아, 그런가? 미안해. 마음이 급해서 하핫.”그

  • 내게 오는 남자들   64화

    “이런 질 낮은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 없…….”도윤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민영이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왜 그렇게 정색해요, 도윤 씨? 설마…… 둘이 아직 한 번도 안 해본 건 아니죠?”해인의 어깨가 일순간 흠칫 튀어 올랐다.민영은 해인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입꼬리를 더 짙게 끌어올렸다.“그럼 내가 완전 은인이네. 오늘 해봐요. 사실 남녀관계는 침대 위를 안 거치면 모르는 거거든. 그 전까지 좋던 감정도 침대 위에서 싸하게 식을 수도 있고, 미적지근하던

  • 내게 오는 남자들   63화

    서우의 단호한 거절에도 여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서우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려 손을 뻗으며 도발적으로 대꾸했다.“누군데? 임자 있어도 상관없어. 너 같은 애한테 사람 없는 게 더 이상하지. 그래도 기회 정도는 줄 수 있잖아.”서우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여자의 손길을 가볍게 피하며, 그는 핫팩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우리 누나.”“뭐?”여자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우리 누나 좋아한다고, 내가.”“강서우, 너 지금 장난해? 친누나 말하는 거야? 아니면 아는 누나?”

  • 내게 오는 남자들   62화

    상영관의 불이 켜지자마자 도윤은 도망치듯 해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로비의 찬 공기가 뺨에 닿았지만, 해인의 귓가에는 여전히 영화 속 여주인공의 아찔한 교성이 맴도는 것 같았다.“……미장센이, 참 붉더군.”도윤이 넥타이를 고쳐매며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아, 그, 그러게. 붉다 못해…… 암튼, 예술은 참 심오하네. 하하.”해인 역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타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애썼다.그저 이 묘한 열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일 때, 누군가 도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우리 취향이 비슷한가봐요.”낮게

  • 내게 오는 남자들   61화

    프리미엄 상영관 전용 라운지는 일반 관람객의 북적임과는 거리가 멀었다.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과 은은한 조명, 라운지에 퍼지는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향까지.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어른들의 공간 같았다.문제는 그 공간의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전광판이었다.해인이 웰컴 드링크를 고르는 사이, 전광판에서는 두 사람이 예매한 영화 의 예고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느릿하고 관능적인 첼로 선율을 배경으로, 화면 가득 얽혀드는 남녀의 적나라한 살색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컥.”커피를 한 모금 삼키려던 도윤의 목구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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