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규 비서가 정은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정은은 차에서 내려 감사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옆에 있는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20분 후, 정은이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서 재석이 저녁 햇살을 받으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은 이미 조금 어두워졌지만, 재석의 몸은 주황빛 노을에 감싸여 있었고, 원래도 긴 그림자가 더 길어 보였다. 재석은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마치 어떤 일에 집중한 것처럼 걸어오고 있었다.“오, 또 만나네요.” 정은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재석은 고개를 들어 안경을 살짝 밀며 대답했다. “그러네, 또 만났네.”“저녁 먹었어요? 제가 장을 좀 많이 봤는데, 같이 먹을래요?”재석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정은의 요리 솜씨를 떠올리며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의 집은 재석이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다. 앞쪽 발코니에는 튤립이 활짝 피어 있었고, 뒤쪽에는 네모난 어항 안에서 두 마리의 붉은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흰색 커튼은 저녁 햇살 속에서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체리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는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 온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유리 테이블 위에는 대학원 시험 문제지와 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재석은 한눈에 문제지에 적힌 답이 거의 모두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뭐 마실래요?”“물만 줘.”정은은 재석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고마워.”“오늘 장을 좀 많이 봐서요. 샤부샤부 해 먹기 딱 좋은 재료들이에요.”정은은 장바구니를 열어 다양한 채소와 한 덩이의 소고기, 그리고 손수 만든 미트볼을 꺼냈다. 그리고 집에는 지난번 남겨둔 소고기 뼈가 있었기에, 담백한 소고기 샤부샤부를 만들기에 딱 맞았다.“선택 문제 하나 틀렸어.”재석이 갑자기 말하자 정은의 시선이 재석의 시선을 따라가 오늘 아침에 푼 시험지로 향했다. 그리고 재석이 말하는 문제가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 문제는 생물학과 물리학의 교차 학문에 관
수민은 사시미를 좋아해서 신선한 연어와 평소에 자주 먹는 새우 등 해산물을 주문했다. 정은은 차가운 음식을 잘 못 먹기 때문에 라멘과 스시를 시켰다. 라멘 맛은 그저 그랬지만, 재료가 신선한 덕에 먹을 만했다. 수민은 정은이 꽤 잘 먹는 걸 보고 일부러 장난을 쳤다. “이 연어 진짜 신선하고 맛있는데, 한 번 시도해 볼 생각 없어?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자 정은이 웃으며 거절했다. “너도 알잖아, 나는 날 것을 심리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그냥 라멘이나 먹을게.” 그 말에 수민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넌 한결같아.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말이야.” 수민은 정은이 좋아하는 것에는 항상 고집 있게 행동한다는 걸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다. 마찬가지로,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도 항상 그랬다.“그러고 보니, 며칠째 스파를 못 갔더니 손이 거칠어졌어. 요즘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었거든.” 수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 아빠 탓이야. 요즘 자꾸 나 보고 소개팅을 하라고 하셔. 엄마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아빠와 함께 나를 몰아세우고 있어.”“나를 못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게다가 사촌 오빠도 아직 결혼 안 했는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수민이 조재석을 언급하자 정은은 그들이 비록 이웃이지만 각자 바빠서 거의 만날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함께 핫팟을 먹은 후, 삼각김밥을 한 번 가져다준 것 외에는 따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민은 정은의 생각을 읽지 못하고, 스시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그때 너 내 오빠랑 같이 오미선 교수님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그 후에는?” 정은은 고개를 숙여 면을 흡입하고 한동안 씹더니 이내 삼키며 말했다. “그게 말이야. 오미선 교수님께서 나를 위한 티오 이미 마련해주셔서, 올해는 반드시 통과해야 해.” 그 말에 수민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재석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물리학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속도와 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이 멈추라고 한다고 해서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고승찬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한번 말해본 것뿐입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다. 재석이 돌아섰을 때, 정은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이웃.”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은은 아까의 일을 피하려는 듯 가볍게 대화를 이어갔다. “지난번 도움 주신 덕분에, 요 며칠간 문제 풀이가 순조로웠어요.” 그러자 재석이 겸손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잘 이해한 덕분이야. 오미선 교수님께는 다녀왔어?” 정은은 손을 뒤로 잡고, 발밑의 돌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아뇨, 몇 번 전화만 했어요. 오미선 교수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서 곧 학교에 돌아오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오미선 교수님은 항상 자신의 교육 업무에 책임감을 가지고 계셔서, 이 며칠 쉬는 것도 아마 답답하실 거야.” 해가 점점 저물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균형을 잡지 못해 흔들거렸다. 정은은 마침 고르지 않은 돌판을 밟아 비틀거렸고, 균형을 잡지 못해 자전거와 부딪칠 뻔했다. 순간적으로 재석은 정은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고는, 조금 힘을 주어 정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정은은 자전거와 충돌하지 않고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괜찮아?” 재석의 따뜻한 손이 옷소매 너머로 정은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여름옷은 얇았기에 따뜻한 온기는 곧바로 전해졌고, 정은의 귀는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두 사람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호흡이 닿을 듯 가까웠다. 이 사실을 인지한 정은은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재석도 그제야 깨닫고, 손을 놓았다. 그 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집까지 걸어갔다. 이윽고 집에 도착하자 각
서연희는 몇 걸음 만에 계단을 내려와 학교 대문 쪽으로 달려갔고 도로 옆에 주차된 도겸의 차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도겸은 차 앞에 기대 서 있었다. 베이지색 티셔츠 위에 짙은 회색 긴 코트를 걸치고, 매끄러운 라인의 검은색 캐주얼 바지를 입어 대학생처럼 보였다. 또한, 젊고 활기찬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도겸은 세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이 10시였지만, 이미 10시를 지난 후였다. 도겸이 핸드폰을 꺼내 연희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려던 순간,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도겸의 코끝을 맴돌았다.연희는 두 손으로 도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너 늦었어.” 도겸은 검은 눈동자로 연희를 힐끗 보며, 두 손을 느긋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미안해요, 다음엔 꼭 제시간에 올게요.” 연희는 도겸이 화내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타.” 연희의 작은 속셈을 도겸이 모를 리 없었지만, 도겸은 굳이 그것을 들추지 않았다. 연희는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고, 차 안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도겸은 핸들을 돌리며 앞만 바라보았고, 간혹 대답만 했다. 신호등에서 차가 멈추었을 때, 연희는 우연히 창밖을 보았다. 커다란 LED 화면에 새로 개장한 유니버설랜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연희는 순간 마음이 설렜는지 도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자기야, 오늘 우리 유니버설랜드에 갈래요?” “그래.” 오늘은 연희의 생일을 위해 시간을 낸 거기 때문에 도겸은 어디를 가든 상관없었다. 이윽고 도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명품 주얼리 로고가 새겨진 가방을 건네주며 말했다. “생일 선물이야.” 연희가 열어보고는 놀라서 외쳤다. “이거 C사 최신 시즌 한정판 팔찌잖아요? 엄청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 건데!” 연희는 바로 상자에서 팔찌를 꺼내어 손목에 착용했고, 조개 모양 디자인에 체인에 박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때요?
수민은 정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 오기 전에 내가 계획을 다 세웠어. 오늘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 “아아! 누가 살려줘!”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5분 동안 귀에서 멈추지 않았다. 정은은 귀가 멍해져서 손으로 문질렀다. 그리고는 방금 토하고 나서 창백해진 얼굴의 수민을 보고 웃음이 나오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에 수민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좀 나아졌어?” “나, 웩.” 수민이 다시 쓰레기통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토할 것 같다. 정은은 재빨리 휴지를 꺼내고 물병을 열어 수민이 토하고 나자마자 물을 건네주었다. 이윽고 수민이 입을 헹구고 더 이상 토하지 않자, 정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 롤러코스터가 악마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 정말 지옥 같았어. 너무 무서워.” 수민은 힘없이 말하며 입을 닦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정은이 말했다. “누가 익스트림을 하겠다고 했더라? 네가 자초한 일이야.” 수민은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런데도 이런 놀이기구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 그저 겁이 많으면서도 놀기를 좋아하는 거였다. “흑흑, 지금 와서 후회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제 안 할래.” 수민은 정은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숨을 골랐다. 잠시 쉬고 난 수민은 그제야 기력을 회복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정은은 먼저 식사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수민과 정은은 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하늘을 보며 흥분해서 사진 찍는 모습에 덩달아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풍선이 엄청 많네. 이게 무슨 개장 기념 이벤트인가?” “요즘 상인들 왜 이렇게 경쟁이 치열해? 저렇게 많은 풍선을 불려면 몇 시간은 걸렸을 텐데?” 정은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푸른 하늘에 거대한 풍선들이 떠다니며, 마치 거대한 푸른 바다를 연상케 했다. 풍선에 묶인 컬러 리본이 자연스럽게 내려오면서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마치 나비들이 춤추는 것 같았다. 관광
점심을 먹고 난 후, 수민은 동물 공연 티켓 두 장을 사서 소정은과 함께 돌고래 쇼를 보러 가자고 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지나 두 사람은 남서쪽에 있는 동물 공연장에 도착했다.공연장 안에는 에어컨이 켜져 있어 밖의 뜨거운 열기와는 전혀 다른 천국 같은 분위기였다. 정은은 동물 공연에 크게 흥미가 없었지만, 수민이 돌고래를 매우 좋아했기에 관객들과의 호응시간에 수민이 정은에게 카메라를 맡기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수민의 밝은 미소에 감염된 정은도 미소를 지었다.30분 후, 공연이 끝나자 정은은 가방을 수민에게 건네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이윽고 모퉁이를 돌자,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있는 서연희가 보였다.정은은 연희를 발견한 후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연희를 지나쳐 그대로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나왔을 때, 연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보아하니, 정은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정은은 그런 연희를 무시한 채 손을 씻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주변은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분위기는 점점 긴장감이 더해졌다. 잠시 후, 정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연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나 곧바로 시선을 돌려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무심하게 행동했다. 그러자 연희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 정말 우연이네요.”정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연희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요즘 잘 지내세요?”정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응.”연희는 정은의 차분한 태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알아내려는 듯 정은을 자세히 관찰했다. 몇 초 후, 연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정말로요? 빌라에서 나와 사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그러자 정은이 단호하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사실 제가 정은 언니에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진심으로 말이에요.” 연희는 말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순수하고 어린 얼굴에 눈물이 고이니 정말 청순하고 연약해
“이제 들어가셔도 돼요.” 직원 뒤에는 양옆으로 나뉘어 열리는 커튼이 있었고, 안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커튼 사이로 어둠이 깔린 통로가 보였다. 간간이 비명이 들려오자, 조수민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소정은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정은은 그런 수민을 거의 끌어당기듯이 데려갔고, 수민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우리 그냥 가지 말까?” “안 돼! 여기까지 왔잖아!” 왔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가 한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었다.수민은 무섭다고 하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용감한 척하며 정은을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갑자기 한 공포 인형이 튀어나오자 수민은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아아아! 정은아, 살려줘!” 그때, 강도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방금 누군가 정은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그 익숙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겸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한편, 서연희는 도겸이 잠시 멍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도겸의 팔을 꼭 끼고 말했다. “오빠, 나 무서워요. 오빠가 나 지켜줄 거죠, 그렇죠?” 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 앞은 너무 어두워, 간간이 깜빡이는 붉은 불빛만 보였다. 연희는 도겸의 팔을 꽉 붙잡고, 두려움에 몸을 더욱더 도겸 쪽으로 기울였고, 스스로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 얼굴의 반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묻은 여자 귀신 분장을 한 실물 NPC가 나타나자, 연희는 소리를 지르며 더욱더 도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흑흑. 너무 무서워, 오빠, 귀신 나갔어요?”연희는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도겸의 가슴에 묻었다. 도겸은 대충 연희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응, 없어졌어.”조잡한 분장과 더러운 여자 귀신 복장은 도겸에게는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은이라면 이렇게 무서워하지
곧 이 작은 공간에 소정은 혼자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 경보가 울린 후 조명이 이전보다 밝아졌고, 두 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가자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두 번째 구역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은 그쪽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는데, 아마 출구 쪽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막힌 것 같았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때, 뒤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정은은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정은을 벽 쪽으로 밀쳤고, 누군가는 정은의 발을 밟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은은 울퉁불퉁한 벽에 몸이 밀착된 채, 가슴이 압박되어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느낀 정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강도겸은 이 처참한 모습의 정은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정은이었다. 방금 들린 정은아라는 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은이 귀신의 집을 탐험할 기분이었다는 사실에, 이별 후에도 꽤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오빠?” 연희는 도겸의 팔을 흔들며 긴장한 눈빛으로 정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은은 눈을 내리깔며, 이 두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 군중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군중 속에서, 동굴 안의 조명이 희미하게 깜빡이던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잠시 후, 공중에 매달린 나무 칼이 흔들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나무 칼이 떨어지는 바로 그 아래에는 다름 아닌 정은이 있었다.“조심해!” 도겸은 본능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연희를 밀어내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재빨리 정은을 안전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쾅! 나무 칼이 땅에 떨어지면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그제야 그 칼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만 나무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을 뿐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