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그건 네 착각이고. 다른 여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 조수민은 감정이 없는 여자야.”동건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쯧쯧, 넌 왜 자꾸 웃어?” 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럼 울라고?”“그래, 내가 휴지 줄게.”동건은 말없이 라이터를 꺼냈다.수민이 손을 흔들자, 그는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이야, 이 여자가 드디어 눈치 있게 불을 붙여주려는 건가?’하지만 이것 역시 동건의 착각이었다.탁.수민은 동건의 손을 세게 내리쳤다.“담배 달라고! 왜 엉뚱하게 라이터를 주는 거야? 넌 눈치도 더럽게 없네...”동건은 어이가 없었다. 먼저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이번에 수민이 말할 필요도 없이 얌전하게 라이터로 그녀를 위해 불을 붙였다.불빛은 여자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수민은 고개를 숙였다. 하얀 이빨로 담배꽁초를 문 다음 붉은 입술을 가볍게 오므리자, 담배꽁초에 선명한 립스틱 자국이 나타났다.동건은 뜻밖에도 그 모습이 넋을 잃었다.“야, 불 꺼.”“어? 아!”동건은 라이터를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두 사람은 클럽에서 두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었다. 와인 한 병을 마시고 나왔을 때, 이미 새벽이 되었다.둘 다 술을 마셨기에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수민은 대리를 부르려고 했지만,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야,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여기 전부 클럽이잖아. 한밤중이라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해.”“그럼 직접 택시 하나 잡으면 되겠다. 내일 시간 내서 다시 내 차 몰고 가야지.”그러나 그 결과, 택시를 타려면 3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수민은 말문이 막혔다. 이때 그녀는 눈알을 굴리더니 동건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돌아갈 거야?”“난 어디도 안 가.”“그게 무슨 뜻이야?”“맞은편 호텔 봤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어, 그런데?”“내 거야.”“그래서?”“직접 호텔에서 자면 되잖아. 귀찮게 왜 집에 가? 너 바보 아니야?”수민은 그제야 깨달았다.“역시 너야. 그럼
이 말을 듣고 동건은 미간을 찌푸렸다.‘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닌데.’“필요 없어, 그냥 데리고 가.”지배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지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치 있게 물러났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지연이 물었다.“도련님께서 호텔에 오시면 꼭 여자를 찾으셨다면서요? 왜 오늘은...”“전에는 줄곧 그랬지만, 가끔 예외도 있는 법이야. 도련님께서 여자 때문에 호텔에 오신 줄 알아?”“그런데 저는...”지연은 어렵게 이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지배인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도련님의 생각에 달렸으니까. 탓하고 싶으면 너 자신을 탓해. 어쩜 이렇게 운도 없는 거야? 도련님께서 오늘 지치셨기 때문에 쉬고 싶으신 거겠지. 넌 얼른 가서 일이나 해. 주제넘은 생각하지 말고...”여자가 이를 갈았다.다른 한편, 수민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그녀는 동건인 줄 알았다.“밤늦게 무슨 일... 어?”동건이 아닌 한 젊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수민을 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미안해요, 내가 문을 잘못 두드린 것 같아요.”“괜찮아.” 말을 마치자마자 수민은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그러나 남자는 문을 받치며 그녀가 닫지 못하게 막았다.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또 다른 일 있어?”“정말 날 모르는 거예요?”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은 섭섭함으로 가득 찼는데 은근히 울먹이고 있었다.수민은 웃으며 진지하게 그를 훑어보았다.그녀는 처음부터 문을 잘못 두드렸다는 이유를 믿지 않았다.이곳은 꼭대기층이었고, 스위트룸이 딱 두 칸밖에 없었으니까.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건의 방이었다.남자는 자신이 문을 잘못 두드렸다고 했지만, 한밤중에 이렇게 입고 동건을 찾으러 갈 리가 없었다.그는 흰색 티셔츠에 연두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운동화까지 신고 있으니 그야말로 해맑은 대학생이었다.‘청춘이여!’
달빛은 물처럼 부드러웠고, 기나긴 밤이 지났다.이튿날 오전 9시, 동건은 깨어나자마자 수민을 찾아갔다.노크를 하려고 할 때, 문이 안에서 열렸다.“조...”‘엥!’한 젊은 남자가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머리카락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는데, 딱 봐도 금방 잠에서 깨어난 게 분명했다.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치자, 동건은 아예 멍해졌다.이에 비해 성후는 훨씬 담담했다. 그는 동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쉿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안쪽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작게 말해요. 누나 아직 자고 있어요.”말을 마치고 바로 가버렸다.동건은 복도에서 멍을 때리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X발!”‘조수민이 뜻밖에도 내 호텔에서, 내가 안배해준 방에서, 내 맞은편에서 다른 남자와 잤다니?!’동건은 얼른 들어가서 고의로 문을 닫으며 큰 소리를 냈다.그러나 그의 호텔은 최고급이라 전부 무음문을 사용했기에 전혀 큰 동정을 낼 수 없었다.동건은 화가 나서 의자를 발로 찼지만, 바닥에 카펫을 깔았기 때문에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그 카펫은 심지어 퀄리티가 가장 좋은 것이었다.촤악.하다 못해 동건은 창가에 가서 커튼을 열었다. 햇빛이 방안에 쏟아지자, 수민은 마침내 깨어났다.“진성후, 이게 무슨 짓이야?! 방금 한 말 다 잊은 거야?!”수민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지만 햇빛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침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그 사람이 성후인 줄 알고 명령했다.“커튼 닫으라고!”수민은 다 좋은데 유독 아침에 일어날 때 성질이 좀 있었다.평소에 정은조차 아침에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동건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지었다.여자의 목과 가슴에 키스 자국이 널려 있었고, 심지어 색깔조차 달랐다. 모두 성인이었기에 동건은 두 사람이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조수민! 너 아주 신이 났구나?”이 목소리에 수민은 멍해졌다.그녀가 눈을 깜박거리
“왜 날 그렇게 쳐다봐? 빨리, 나 목말라 죽겠어!”동건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얼음물 한 잔을 마시니, 수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니까 좀 부끄럽네...”남자가 물을 따르러 가는 틈을 타서 수민은 이미 옷을 다 입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어머, 벌써 11시라니!’“부끄러워? 우리 조수민 아가씨가?! 넌 아주 당당하던데!”동건은 마치 찔려 터진 고무공과 같았다. 전에는 겨우 참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 쌓인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당당하게 나에게 물 좀 따르라고 시켰잖아? 그게 부끄러워서 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말을 마치자 동건은 작은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수민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뭐 잘못 먹었어? 왜 나한테 성질이야?”“오늘 아침에 네 방에서 나간 그 남자부터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수민은 영문을 몰랐다.“설명할 게 뭐가 있어? 넌 여자와 잤다고 특별히 남에게 설명할 거니?”동건은 말문이 막혔다.“아니, 나도 지금 어쨌든 네 남자친구잖아?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난 뭐가 되는 건데?”그를 바라보는 수민의 눈빛은 더욱 의혹에 빠져들었다.“첫째, 넌 내 가짜 남자친구야. 둘째, 난 남들 앞에서 다른 남자와 잔 게 아니라, 단지 내 방에서 잤을 뿐인데. 이게 너한테 무슨 영향을 준다는 거지? 합작하기 전에 우리 이미 약속했잖아, 서로의 감정에 간섭하지 말자고. 난 계약을 위반한 적이 없어. 그런데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동건은 말로 수민을 이길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났다.수민은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그나저나, 이 호텔 정말 좋네. 앞으로 여긴 내 방이야. 다음에 또 와야지.”‘방금 다음에 또 올 거라고 했어?!’“참, 이따가 프론트에 전화해서 룸 카드 한 장 더 준비해 달라고 해.”“뭐 하려고?”“한 장은 나 혼자 쓰고, 다른 한 장은 남에게 주려고!”‘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물어보다니.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아예 바보로 된
“그전에.”“도련님께서 분부하셨으니...”“더 전에.”“1901호 방이 체크아웃을 마친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그 여자 이미 떠났다고?!”“네, 약 10분 전에요.”“젠장!”지배인은 영문을 몰랐다.“그 여자들 전부 나가라고 해! 보기만 해도 짜증 나니까.”‘아니, 전에 전화하셨을 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는데.’짜릿하고 두근거리는 이쪽과 달리, 정은 쪽은 여전히 평온했다.아침 7시, 그녀는 스스로 깨어난 다음, 아침을 차려 놓고 장을 보러 나갔다.9시,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 정은은 소진헌이 감탄하는 것을 들었다.“이야, 조 교수는 물리 연구를 잘 할 뿐만 아니라 화초를 다루는 데도 이렇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니!”신발을 바꾸던 정은은 잠시 멈칫했다. 이때 익숙한 목소리가 베란다에서 들려왔다.“아니에요, 과찬이세요.”재석이었다.정은은 채소를 주방에 놓은 다음, 아침에 끓인 차 두 잔을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소진헌과 재석은 베란다 문을 등진 채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예닐곱 개의 화분이 놓여 있었고, 흙과 식물이 함께 파였다.“아빠, 선배님, 차 좀 마셔요.”“정은이 돌아왔구나. 오늘 시간 있으니까 이 화분들 전부 정리해 줄게. 이 꽃들은 뿌리가 이미 썩었어.”말하면서 소진헌은 손을 뻗으며 차를 받으려 했다. 자신의 손에 진흙이 묻은 것을 보고 그는 얼른 손 씻으러 갔다.“선배님.”재석은 많이 똑똑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일회용 장갑을 꼈기 때문이다.장갑을 벗은 후, 그는 직접 컵을 받았다.“고마워.”“선배님은 언제 왔어요?”“30분 전에.”“오늘은 실험실에 안 가도 되는 거예요?”“오후에 갈 거야.”“그럼 어떻게...” ‘우리 집에 찾아온 거지?’정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석은 웃으며 대답했다.“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쓰레기를 버리러 가시는 아저씨와 부딪쳤거든.”소진헌은 또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재석이 오전에 한가하고 오후에야 실험실에 가면 된다는 것을
갑자기 되살아난 기억에 정은은 당황하기 그지없었다.‘남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린 사람이 나라고?’남자와 눈을 마주치자, 정은은 어색해서 땅만 바라보았다.“생각났어?”“미안해요, 난...”“그런 문제를 물어볼 필요가 있겠어? 당연히 안 되지. 남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드럼도 아니고. 너도 말했잖아. 많이 두드리면 바보가 된다고.”재석의 말 한마디에 어색한 분위기가 좀 풀렸다.“그럼 왜 내 머리를 두드린 거예요...”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기억이 돌아오자, 정은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분명히 선배님이 먼저 날 건드렸는데...’재석은 정색했다.“그래도 술 좀 적게 마셔. 맛있어도 욕심 부리지 말고.”“네.”정은은 또 어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손을 씻고 돌아온 소진헌은 차를 들고 한 입에 마셨다.재석은 천천히 음미하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술에 관한 얘기요...”“참, 조 교수, 자네 점심에 여기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건 어떤가? 우리 술 한 잔 하자고. 지난번에 그 원자력 발전 신기술에 대해 말했잖아... 그때 얘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오늘 계속 이야기하자!”재석은 처음으로 바로 응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해?”“술, 술은 마시지 말죠?”‘술을 마시다 또 무슨 망신을 당할지도 몰라!’“선배님은 오늘 오후에 실험실에 가야 하잖아요. 그러니 술을 마시면 안 돼요. 아빠도 술 마시지 말고 그냥 식사만 하세요.”소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조 교수는 마실 수 없지만, 우리 둘이 좀 마시면 되잖아.”“어?” 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정은이는 술을 아주 좋아하나 봐요?”“그럼, 어제도 나랑 술 한잔하자고 했는데, 정은이 엄마가 못 마시게 말렸거든.”정은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아빠도 참. 내가 이렇게 눈짓을 하고 있는데! 왜 선배님한테 이런 얘기까지 하시는 거냐고!
이미숙은 어이가 없었다. ‘남을 칭찬할 때 꼭 자신을 어필한다니깐.’오후 1시, 재석은 떠날 준비를 했다.소진헌은 베란다에 앉아 계속 화분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얼른 정은을 불렀다.“정은아, 네 재석 삼촌 좀 배웅해줘!”재석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은은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섰다.“아빠,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선배님, 나 좀 기다려요...”“응.”정은이 재석을 문 밖으로 배웅하자, 소진헌은 작은 소리로 흥얼거렸다.“지난번에 조 교수를 내 동생으로 삼겠다고 했잖아. 그러니 당연히 삼촌이라고 불러야지...”...눈 깜짝할 사이에 소진헌과 이미숙은 이미 J시에서 이주 넘게 머물렀다. 정은은 때가 됐다 싶어 이미숙에게 나석천을 소개해 주려 했다.“엄마, 사실 이번에 아빠랑 같이 J시에 오라고 한 이유가 따로 있었어요.”“무슨 일인데?”정은은 서류 봉투를 꺼내 이미숙 앞으로 밀었다.“이것은 엄마와 유보영이란 사람과 체결한 계약서예요. 전에 전자판을 달라고 한 다음, 그것을 프린트해서 출판인과 지식 재산권 변호사에게 보여 줬어요...”이미숙은 가슴이 떨렸다.정은은 그녀에게 열어보라고 했다.“위에서 붉은 펜으로 표기된 곳은 모두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에요. 예를 들어, 계약상 이 출판사는 사실 유보영이 주주이고, 그 사람의 가족이 출자한 출판 스튜디오예요.”심지어 정규 출판사라고 할 수도 없었다.출판사는 정규 출판 자격이 있어야 정식으로 도서 번호를 가진 도서를 발행할 수 있지만, 이 스튜디오는 삽화, 오디오 소설, 웹 소설만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이미숙이 10년 동안 제대로 된 책을 발행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좋은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보영이 출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유보영은 이미숙이 쓴 시작과 대강을 전부 부결했던 것이다.“출판을 할 수 없는 이상, 애초에 왜 네 엄마를 찾아서 계약을 한 거야? 그것도 10년이란 계약을 체결했잖아?”이미숙은 이미 충격을 받아 멍해졌다. 소진헌은
“해외?”“네, 이 두 책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전자책 판매량과 종이책 판매량이 모두 상위권에 들어갔거든요.”이미숙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난 이 두 권의 책이 해외에서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는데...”“제가 계산을 해봤는데, 그동안 『살기』와 『황량한 마을 학교』가 가져온 수익이 적어도 이 정도 할 거예요...”정은은 한 손을 내밀었다.소진헌이 말했다. “5천만 원?”“아빠, 더 대담하게 추측해 보세요.”“50억?!”정은은 고개를 저었다.“500억이에요.” 그것도 대충 계산한 결과였다.소진헌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엄마.”정은은 이미숙의 곁에 다가앉아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손을 맞잡았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이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계약이 끝난 만큼, 엄마와 유보영 사이의 10년 묵은 원한도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가 온 거예요. 지금 중요한 건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거예요.”“경제적인 손해보다도,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버린 것이 더 가슴 아픈 일이라는 걸 저도 잘 알아요. 작가에게 십 년이란 시간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니까요.”이미숙은 등을 돌리더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엄마가 그동안 미처 발행하지 못한 원고를 다른 한 편집장님에게 보냈는데, 가서 한번 만나 보세요.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 거예요...”이미숙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래.”그날 밤, 작은방에서 낮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남자의 따뜻한 위로도 있었다.정은은 눈을 뜨고 천장을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정은과 소진헌은 이미숙을 데리고 커피에 갔다.카페는 빌딩을 등지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자 안에 손님이 얼마 없었다.렉돌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하게 프론트에 엎드려 있었다. 딩동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하품을 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왼쪽 창가 자리에 얼굴이 네모난 남자가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