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화

Author: 십일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

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속 쓰려! 소정은!”

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

‘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

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

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약상자가 어디에 있죠?”

[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

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좋네, 좋아...”

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그 순간, 아래층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어... 너였구나?”

신발을 갈아 신던 서정이 도겸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누구를 기대했길래 그래?”

도겸은 소파에 앉으며 무기력하게 말했다.

“왜 왔어? 무슨 일 있어?”

“왕순자 이모님이 오빠 위가 아프다고 해서 엄마 명령으로 오빠 돌봐주러 왔지.”

서정은 주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 아직 점심도 못 먹었는데, 온 김에 밥 좀 먹어야겠다.”

서정이 정은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녀의 뛰어난 요리 실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30초 뒤, 서정의 볼멘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오빠! 여기 왜 이렇게 냉랭해?”

“정은 언니 어디 갔어? 오늘 집에 없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정은이 이미 요리를 해 두고 도겸이 내려와 먹을 준비를 했을 것이다. 서정은 운이 좋으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소정은, 또 소정은...’

도겸은 이마를 짚었다. 서정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서정은 실망한 표정으로 주방에서 나왔다.

“어디 아픈가? 어제 병원에서 봤을 때도 얼굴이 안 좋아 보였는데...”

“병원에서 봤다고?”

도겸은 무심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응. 어제 서광병원에 교수님 뵈러 갔거든. 병원 앞에서 정은 언니 봤어. 오빠, 오미선 교수님이 나한테 티오 하나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도겸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병원에 있었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오빠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언니가 아픈 게 아닐 수도 있어. 다른 사람을 보러 간 걸 수도 있지. 그런데 언니에게 친구가 있었던가? 언니 삶에는 오빠 말고 다른 사람이 없잖아.”

“말 다 끝났어?”

“어?”

“다 말했으면 빨리 나가, 나 아직 덜 잤어.”

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정말 나가라고? 알았어, 갈게.”

서정은 신발을 신으며, 화가 난 듯 말했다.

“맞다, 오늘 온 이유가 있었지.”

도겸은 듣고 싶지 않아,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일 오후 2시, 르 프리미어, 엄마가 잡아준 선 자리야. 늦지 마!”

“말이 많네”

서정은 도겸의 뒷모습에 대고 메롱 하며 떠났다. 이런 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도겸이 정은과 만나는 걸 알면서도 집안에서는 적당한 결혼 상대를 찾았다. 요 몇 년 동안 도겸은 이런 자리에 많이 나갔었다. 대부분은 형식적인 자리였고, 부모님의 기대에 응하는 데 불과했다.

서정이 떠난 후, 도겸은 서재로 가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초기에 도겸은 집안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홀로 창업을 시작했다. 처음 3년은 정말 힘들었다. 집안의 도움을 거부했고, 그의 곁에는 정은뿐이었다.

최근 2년 동안에야 겨우 자리를 잡고 자신의 회사를 세워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꼬리표를 떼었다. 그즈음, 집안의 태도도 부드러워지며 도겸에게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점은 그들이 처음에는 정은과의 관계를 강하게 반대하다가, 이제는 눈감아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업무를 마치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도겸은 배고픔을 느꼈다. 도겸은 휴대폰을 꺼내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고 있어?”

수업 종소리가 울리다가 곧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미안해요, 나 수업 중이라 수업 끝나고 보러 갈게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도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 그럼 끊을게.”

도겸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옆에 던졌다.

30초 뒤, 누군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지만, 도겸은 확인도 하지 않고 계속 업무를 했다. 위가 다시 통증을 일으킬 때까지, 도겸은 서재를 떠나지 않았다.

선우와 그 친구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 도겸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여자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깨끗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연희?”

“미안해요. 노크했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여기서 기다렸어요.”

서연희는 도겸의 팔에 걸쳐진 양복을 보며 말했다.

“나가는 거예요?”

도겸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기를 어떻게 찾았어?”

그러자 연희는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오빠 친구에게 물어봤어요.”

“전선우?”

“아니요, 고동건 오빠요.”

“일단 들어와.”

연희는 다시 웃으며 집으로 들어오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빠가 전화를 끊고 다시 받지 않아서, 걱정 많이 했어요.”

“너 수업 중 아니었어?”

“결석했어요. 남자 친구가 더 중요하잖아요.”

정은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 좋아했을 때, 정은은 대학 1학년이었고, 수업이 많았지만 결석하지 않았다. 나중에 두 사람이 사귀게 되고, 4학년이 되어 수업이 줄어들자 그제야 도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자기 아직 밥 안 먹었죠? 내가...”

“보양식 죽 끓일 수 있어?”

도겸은 갑자기 물었다.

“보양식 죽?”

“응.”

“할 줄 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

...

연희가 하룻밤 묵고 가고 싶다는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후, 도겸은 연희가 가져온 배달 음식을 먹고,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는 선우를 만나러 갔다.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도겸은 휴대폰을 보았다가 서정이 말한 병원에서 정은을 봤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미 헤어졌지만 오랜 시간 함께 했기에 정이 남아 있었다. 보통 친구라 해도 몇 마디는 해야 했기에 톡을 열었다.

[아파?]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과 상태 메시지,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을 보니 도겸은 그녀에게 차단당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365화

    “그럼에도 지금까지 나 편집장님과 제가 나무엔터를 두고 움직이지 않았던 건, 이 회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함께 세우고, 함께 키워온 곳이니까요. 하지만 정말 끝까지 가야 한다면—그 정도 감정쯤은 내려놓을 수 있어요.”“이런 나무엔터, 청류재단은 여전히 탐나시나요?”이미숙의 말투는 또렷했고, 흐름은 매끄러웠다.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준비된 듯 망설임 없었고, 뒤로 갈수록 더 단단했다.이 자리에 앉은 건 파국을 원해서가 아니었다.가능하다면, 나석천도 살리고 나무엔터도 지켜내고 싶었다.그게 이미숙이 지금 강서원 앞에 앉은 이유였다.정작 나석천의 문제는 그녀에게 큰 걱정이 아니었다.이미 대응할 방법은 충분히 세워뒀다.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 건, 바로 강서원의 태도였다.‘아무리 사업은 사업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여기까지 오는 동안 강서원이 단 한 번도 정은과 재석의 관계를 고려했다는 흔적은 없었다.사적으로 친분이 없으니, 모든 건 철저히 비즈니스로 판단한다.그 논리는 이해가 되지만, 적어도 아들의 연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고려조차 되지 않는 태도는...‘강 여사는 정은이를 애초에 사람으로 안 보는 거야.’이미숙의 간담이 서늘해졌다.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또 설 연휴 때 일이 떠올랐다.한밤중,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다음 날엔 조기봉을 데리고 일방적인 식사를 준비했던 그날.‘이유가 있었구나...’강서원은 처음부터 이 관계를 반기지 않았다.더 정확히 말하면, 정은의 존재 자체를 탐탁지 않아 했다.바로 그때, 직원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음식을 상에 올려도 될까요?”정은이 대답하려던 찰나, 이미숙이 먼저 움직였다.조용히 일어나더니, 가방을 들고 딸의 손을 잡았다.재석은 잠시 얼어붙었다.강서원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이미숙은 곧게 선 허리를 더 반듯하게 세우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죄송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제가 경솔했습니다. 나 편집장님의 일은 앞으로 법적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364화

    정은은 잠시 말을 멈췄다.“나도 내부의 자세한 일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누군가 최대한 악의로 했다고 짐작하고 싶지도 않고요.”비록 강서원이 자신에게 그리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추측하고 싶지는 않았다.‘설령 나에겐 냉담했을지라도, 이 문제와 연결 지을 근거는 없어.’“정은아...”재석이 정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남자의 손바닥은 익숙하고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네가 원하는 건 뭐야? 내가 뭘 하면 돼?”서로의 눈빛이 맞닿는 순간, 정은은 무언가가 풀린 듯 가슴이 놓였다.그전까지 정은은 내심 걱정했다.혹시라도 재석이 ‘지금 이 타이밍에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뭘까’라며 오해하진 않을지, 혹은 이걸 계기로 두 집안 사이를 의도적으로 뒤흔들려는 건 아니냐는 의심을 하진 않을지.하지만 지금 보니, 그 모든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다.‘내가... 내 남자친구를 너무 얕봤나 봐.’그 생각이 스치자 정은은 재석에게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러나 지금은 자책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하루라도 빨리 나석천의 문제를 풀어야 했다.“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요. 엄마랑... 당신 어머님이 직접 얼굴 보고 얘기 나누셨으면 해요.”“좋아.”재석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준비할게.”약속은 바로 다음 날 점심으로 잡혔다.재석이 강서원에게 전화를 걸자, 전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강서원은 먼저 통화 목적을 미리 짐작했다.물론 재석도 돌려 말할 생각은 없었다.짧고 간결하게 나석천 관련 상황을 설명하고, 식사 자리를 제안했다.예상외로, 강서원은 의외로 담담하게 응했다.[좋아. 식사 한번 하자.]...다음 날, 날씨는 화창했다.가을 하늘은 높고, 구름은 옅었으며, 공기에는 선선한 기운이 감돌았다.정은과 이미숙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해 룸에서 기다렸다.정은은 살짝 긴장한 듯 손끝을 만지작거렸고, 이미숙은 물잔을 들고 창밖을 응시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5분쯤 지났을 무렵, 문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363화

    청수벤처스를 찾아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텐스출판사의 지분 구조를 따라가며 주주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결국은 정답이 보이기 마련이었다.“청수벤처스?”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을 손에 든 채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청수벤처스는 생긴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벤처캐피탈 업계에서 요즘 엄청나게 주목받고 있어요. 처음엔 연예계 인기 스타들과 파트너십을 맺으면서 빠르게 입지를 다졌고, 지금은 본격적으로 영상 산업 쪽으로 뛰어들었어요.”정은의 눈이 빠르게 스크롤을 따라갔다.“이번에 나무엔터를 노리는 건, 아마 영화 산업 진입 티켓이랑 IP 판권 기반의 수익 모델을 손에 넣으려는 거예요. 그리고...”페이지를 넘기며 정은은 몇 개의 투자 흐름을 훑었다.“청수벤처스, 작년부터 이미 관련된 포석을 깔기 시작했어요.”이미숙의 눈매가 좁혀졌다.“그럼 청수벤처스랑 텐스출판사는 무슨 관계야?”“청수벤처스가 텐스출판사의 최대 주주예요.”‘그래서였구나...’이미숙은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방선근이 겁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겁은 났지만, 손을 뗄 수가 없었다.정은은 말없이 계속 화면을 넘겼다. 스크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청수벤처스의 실질 지배 구조를 보면...”그 순간, 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눈빛이 단단히 굳었다.“왜 그래, 정은아?”이미숙이 조심스레 불렀다.“왜 그래? 청수벤처스 뒤에 누가 있는 거야?”정은의 입에서 천천히 두 글자가 흘러나왔다.“청류재단.”그리고 그 재단의 최대 출자자는 강서원이었다.정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왜... 그분이 여기에...?’...같은 시각, 텐스출판사.쾅!사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선근이 들어섰다.책상을 박차고, 의자를 걷어차고, 서류 뭉치를 벽에 집어 던졌다.“아오, 진짜 미친 거 아냐?!”그는 하영규를 불러들였다.하영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방선근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도대체 누가 계약 기간을 10년에서 2년으로 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362화

    방선근의 돌변에도, 이미숙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물론이죠. 제가 한 말, 한 글자까지도 책임질 수 있습니다.”그 순간, 방선근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미쳤구나, 진짜! 당신 지금 계약 상태라는 거 알고는 있어? 텐스출판사랑 정식 계약이 돼 있는 사람이 감히 우리를 협박해?!”벌떡 일어나더니, 방선근은 손가락으로 이미숙을 가리켰다.“‘선생님’이란 호칭, 체면 차려서 불러준 건데... 당신 진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나석천은 나석천이고, 당신은 당신이야. 우리 출판사를 이런 방식으로 협박하려고? 우릴 만만하게 봤구나?”정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이미숙의 시선 역시 차갑게 가라앉았다.‘손가락질까지...?’그다음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나왔다.“저, 손가락질당하는 거 싫어해요.”“손 치우시죠.”잠시 정적.그걸 깨듯 방선근은 코웃음을 쳤다.“뭐? 손가락질 좀 했다고 뭐? 내가 너희 따위한테...”툭-그리고 바로 그 순간.두 개의 커피잔이 동시에 들려 방선근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쏴악!쏟아졌다.순간, 정적.회의실 전체가 얼어붙었다.방선근은 한쪽 뺨에 커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 있었다.이미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손가락질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람 말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정신 좀 차리시라고 커피 드린 겁니다.”“당신... 당신...!”방선근은 벌벌 떨며 입술을 씹었다.이마에 핏대가 올랐다.“네가... 나한테 커피를 부어? 감히?!”정은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왜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이왕 붓는 거, 날짜 가려야 되나요?”“이미숙! 정신 차려! 당신 계약 내 손에 있어! 진짜 날 건드리면, 이 출판계에서 못 버티게 만들어줄 수 있어! 당장 퇴출시킨다!”그 말에 정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엄마, 이 사람이 지금 엄마를 못 버티게 만들겠다는데요?”이미숙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마치 예상이라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361화

    방선근은 아무 말도 못 했다.방금 제대로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말은 안 했지만,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한편에서, 정은은 여태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건 말할 타이밍이 없어서가 아니었다.‘엄마 혼자서 전장을 평정하는데,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지.’이미숙의 날카로운 발언, 단단한 시선.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에 실리는 힘.정은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이토록 강한 사람이 됐을까?’한때, 아이패드도 ‘싫다’며 거부하던 이미숙이었다.문자보단 메모지를 선호하고, 스마트폰도 한참 지나서야 억지로 쓰게 됐는데, 지금의 이미숙은 출판사 대표 앞에서도 단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나만 성장한 게 아니었구나.’정은은 불현듯 소진헌도 떠올랐다.이미숙의 책 사인회에 따라다니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던 그 시절, 소진헌은 늘 뒷짐 지고 조용히 기다려주었고, 그 와중에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자연스럽게 견문이 넓어졌다.그 영향일까? 요즘 소진헌의 수업은 훨씬 재미있어졌고, 작년엔 전국 교사 수업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까지 받았다.그 학교에서 전국 단위의 교사상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소진헌은 연말에 7년 넘게 묶여 있던 교원 승진 심사를 드디어 통과했다.‘그땐 기대도 안 했는데... 진짜 그냥, 그렇게 되더라.’그는 겉으로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속으로 아주 기뻤다.다시 현실.방선근은 이미숙이 그냥 지나갈 사람 아니라는 걸, 이제야 제대로 깨달은 듯 말투를 바꿨다.“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나 편집장님 관련해서는 저희 출판사도 법적 대응을 준비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 정도 되시는 분이면 아실 겁니다.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이미숙은 짧게, 하지만 꽤 날카롭게 웃었다.“후훗... 그게 바로 자리가 사람을 망친다는 거죠.”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방 사장님, 사장님이 착각하고 있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360화

    사건이 터진 뒤, 금액이 워낙 컸던 탓에 나석천은 불구속 수사도 허락되지 않았다.보석 청구는 바로 기각.결국, 나석천의 아내가 이미숙에게 전화를 걸었다.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그제야 이미숙은 알게 됐다.나석천이 그동안 텐스출판사에서 얼마나 숨 막히게 버티고 있었는지.그동안 이미숙의 책은 텐스출판사에서 출간되어왔지만, 사실 그녀는 출판사 사람들과 직접 마주한 적이 거의 없었다.계약도, 협의도, 문제 대응도,전부 나석천이 중간에서 알아서 처리해줬다.출판사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오거나, 계약 외의 압박을 넣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그녀까지 닿은 적이 없었다.언제나처럼,나석천이 앞에서 다 막아줬기 때문이었다.‘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이렇게 편하게만 일해온 게, 다 그 사람 덕분이었다는 걸.’이미숙이 진심으로 신뢰하는 건 출판사도, 브랜드도, 시스템도 아니었다.오직 나석천이라는 사람이었다.게다가 그는 이미숙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사람이다.처음으로 원고를 ‘작품’이라 불러줬던 편집자.글로 먹고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줬던 유일한 사람.사실, 인제 이미숙의 책은 어느 출판사에서든 나올 수 있었다.굳이 텐스출판사였던 이유는 단 하나.나석천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그걸 텐스출판사는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심지어 이번엔 뻔뻔하게도 나석천을 대체하겠다며 다른 편집자를 이미숙에게 붙였다.이미숙은 단칼에 거절했고, 그 편집자는 나석천의 구속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어떻게 저렇게까지 무신경할 수 있지...?’이미숙은 숨을 고르며 나석천의 아내에게 말했다.“걱정 마요. 나석천 편집장님은 제가 도울게요.”그녀는 즉시 이춘재에게 모든 상황을 정리해 보고했다.이춘재는 곧바로 경찰과 로펌 쪽에 사람을 붙였다.며칠 후, 드디어 경찰이 태도를 바꿨다.정식으로 보석이 승인되었다.하지만, 출판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도 텐스출판사는 끝내 고발을 철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