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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or: 십일
어젯밤엔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새벽이 되자 선우가 또 한잔하자고 했고, 강도겸은 운전기사가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려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이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구나.’

몽롱한 상태에서 도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을 뜨자, 위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으으...”

도겸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며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속 쓰려! 소정은!”

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은은 참 대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버텼던 그녀였다.

‘좋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근데… 약은 어디에 뒀지?’

도겸은 거실로 나가 약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서랍을 뒤져보았지만, 약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왕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장약을 찾으시는 건가요? 약상자에 넣어둔 걸로 알고 있어요.]

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약상자가 어디에 있죠?”

[옷장 서랍 안에 있어요. 정은 아가씨가 도련님이 술을 마신 후 아침이면 위가 아플 걸 알고 쉽게 찾을 수 있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보세요? 도련님? 아직 듣고 계시죠? 전화 끊으신 건 아니죠?]

도겸은 옷장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주 먹던 위장약이 다섯 통이나 들어 있었다. 약을 삼키고 나니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랍을 닫으려는 순간, 도겸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랍 속에 보석과 명품 가방은 여전히 있었지만, 정은의 모든 신분증, 여권, 학위증, 졸업증 등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구석에 쌓여 있던 캐리어 중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좋네, 좋아...”

도겸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무 자유롭게 둬도 안 돼. 자유를 줄수록 더 고집을 부리니까.’

그 순간, 아래층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어... 너였구나?”

신발을 갈아 신던 서정이 도겸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누구를 기대했길래 그래?”

도겸은 소파에 앉으며 무기력하게 말했다.

“왜 왔어? 무슨 일 있어?”

“왕순자 이모님이 오빠 위가 아프다고 해서 엄마 명령으로 오빠 돌봐주러 왔지.”

서정은 주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 아직 점심도 못 먹었는데, 온 김에 밥 좀 먹어야겠다.”

서정이 정은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녀의 뛰어난 요리 실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30초 뒤, 서정의 볼멘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오빠! 여기 왜 이렇게 냉랭해?”

“정은 언니 어디 갔어? 오늘 집에 없어?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정은이 이미 요리를 해 두고 도겸이 내려와 먹을 준비를 했을 것이다. 서정은 운이 좋으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소정은, 또 소정은...’

도겸은 이마를 짚었다. 서정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서정은 실망한 표정으로 주방에서 나왔다.

“어디 아픈가? 어제 병원에서 봤을 때도 얼굴이 안 좋아 보였는데...”

“병원에서 봤다고?”

도겸은 무심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응. 어제 서광병원에 교수님 뵈러 갔거든. 병원 앞에서 정은 언니 봤어. 오빠, 오미선 교수님이 나한테 티오 하나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도겸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병원에 있었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오빠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언니가 아픈 게 아닐 수도 있어. 다른 사람을 보러 간 걸 수도 있지. 그런데 언니에게 친구가 있었던가? 언니 삶에는 오빠 말고 다른 사람이 없잖아.”

“말 다 끝났어?”

“어?”

“다 말했으면 빨리 나가, 나 아직 덜 잤어.”

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정말 나가라고? 알았어, 갈게.”

서정은 신발을 신으며, 화가 난 듯 말했다.

“맞다, 오늘 온 이유가 있었지.”

도겸은 듣고 싶지 않아,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일 오후 2시, 르 프리미어, 엄마가 잡아준 선 자리야. 늦지 마!”

“말이 많네”

서정은 도겸의 뒷모습에 대고 메롱 하며 떠났다. 이런 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도겸이 정은과 만나는 걸 알면서도 집안에서는 적당한 결혼 상대를 찾았다. 요 몇 년 동안 도겸은 이런 자리에 많이 나갔었다. 대부분은 형식적인 자리였고, 부모님의 기대에 응하는 데 불과했다.

서정이 떠난 후, 도겸은 서재로 가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초기에 도겸은 집안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홀로 창업을 시작했다. 처음 3년은 정말 힘들었다. 집안의 도움을 거부했고, 그의 곁에는 정은뿐이었다.

최근 2년 동안에야 겨우 자리를 잡고 자신의 회사를 세워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꼬리표를 떼었다. 그즈음, 집안의 태도도 부드러워지며 도겸에게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점은 그들이 처음에는 정은과의 관계를 강하게 반대하다가, 이제는 눈감아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업무를 마치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도겸은 배고픔을 느꼈다. 도겸은 휴대폰을 꺼내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고 있어?”

수업 종소리가 울리다가 곧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미안해요, 나 수업 중이라 수업 끝나고 보러 갈게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도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 그럼 끊을게.”

도겸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옆에 던졌다.

30초 뒤, 누군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지만, 도겸은 확인도 하지 않고 계속 업무를 했다. 위가 다시 통증을 일으킬 때까지, 도겸은 서재를 떠나지 않았다.

선우와 그 친구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 도겸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여자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깨끗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연희?”

“미안해요. 노크했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여기서 기다렸어요.”

서연희는 도겸의 팔에 걸쳐진 양복을 보며 말했다.

“나가는 거예요?”

도겸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기를 어떻게 찾았어?”

그러자 연희는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오빠 친구에게 물어봤어요.”

“전선우?”

“아니요, 고동건 오빠요.”

“일단 들어와.”

연희는 다시 웃으며 집으로 들어오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빠가 전화를 끊고 다시 받지 않아서, 걱정 많이 했어요.”

“너 수업 중 아니었어?”

“결석했어요. 남자 친구가 더 중요하잖아요.”

정은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 좋아했을 때, 정은은 대학 1학년이었고, 수업이 많았지만 결석하지 않았다. 나중에 두 사람이 사귀게 되고, 4학년이 되어 수업이 줄어들자 그제야 도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자기 아직 밥 안 먹었죠? 내가...”

“보양식 죽 끓일 수 있어?”

도겸은 갑자기 물었다.

“보양식 죽?”

“응.”

“할 줄 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

...

연희가 하룻밤 묵고 가고 싶다는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후, 도겸은 연희가 가져온 배달 음식을 먹고,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는 선우를 만나러 갔다.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도겸은 휴대폰을 보았다가 서정이 말한 병원에서 정은을 봤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미 헤어졌지만 오랜 시간 함께 했기에 정이 남아 있었다. 보통 친구라 해도 몇 마디는 해야 했기에 톡을 열었다.

[아파?]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과 상태 메시지,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을 보니 도겸은 그녀에게 차단당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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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952화

    문 두드리는 소리도 제법 컸고, 말하는 목소리도 일부러 낮추지 않았다.그런데도 정은은 깊이 자느라 끝내 깨지 않았다.재석은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엄마... 정은이가 애 낳을 때...”재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깐 목이 메었다.강서원이 재석을 봤다.“응? 낳을 때 왜?”재석은 어렵게 말을 이었다.“아파서 토하기까지 했어요. 대체 얼마나 아픈 거예요?”강서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은은 그 잠을 그대로 정오까지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강서원이 돌아가고 병실에 없었다.결국 아침밥이 그대로 점심이 됐다.재석은 정은이 눈을 뜨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뜨거운 물을 받아오고, 컵을 건네고, 직접 세수를 시켜주고 손까지 닦아줬다.그 사이 정은이 몇 번이나 자기가 하겠다고 했지만, 재석은 단호하게 다 막았다.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나는 애만 낳았지, 생활 능력을 잃은 건 아닌데. 정말.’씻는 걸 마친 뒤에는 재석이 세심하게 정은의 얼굴에 세심하게 크림까지 발랐다.정은이 물었다.“당신, 크림도 챙겨왔어?”정은이 그렇게 묻는 것도 당연했다. 출산 가방은 전부 재석 혼자 챙겼으니까.커다란 가방 하나가 꽉 차 있었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정은은 아예 묻지도 않았고, 전혀 알지도 못했다.재석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럼. 우리 여보 얼굴도 소중한데 대충할 수 있나.”“말은 참 잘해...” 정은은 웃으면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가, 시간이 벌써 점심이라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오래 잤다고?”“말소리도 안 들리고, 문 두드려도 안 깼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정은은 하품했다.“진짜 너무 졸렸어...”아이를 낳아내던 그때, 정은은 마치 천근만근 짓누르던 짐이 마침내 어깨에서 내려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그저 홀가분했다.하지만 그 뒤를 따라온 건 극심한 피로였다.‘한숨 자고 싶다...’그런데 회복실에서는 의사가 잠들지 못하게 했고, 관찰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서는 정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951화

    현빈은 윤우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다 이야기해 줬다.물론 임시호의 죽음에 관한 얘기도 포함해서였다.이야기를 마친 뒤 현빈은 고개를 들어 정은을 봤다. 그런데 정은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현빈만 바라보고 있었다.현빈은 정은이 왜 이제야 말했냐고 서운해하는 줄 알고, 급히 입을 열었다.“그동안 너 임신 중이었고, 그것도 쌍둥이였잖아. 괜히 이 얘기 듣고 마음 복잡해질까 봐 일부러 말 안 했다...”“감사해요.”정은이 현빈의 말을 끊었다.현빈은 잠시 멍해졌다.“뭐?”“임시호가 얼마나 교활하고,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저는 알아요. 그런데 저 때문에 오빠가 그런 사람을 건드렸잖아요. 만약 그 사람이 안 죽었으면, 오빠는...”“근데 죽었잖아, 그렇지?”정은은 그 말에 잠깐 말을 잃었다.정은은 정말 묻고 싶었다.‘그게 정말 오빠 손에 피를 묻힐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어?’하지만 굳이 물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현빈이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면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원래는 정은이 짊어져야 할 일이었는데, 그걸 현빈이 대신 감당하게 됐다.이 큰 빚은, 어쩌면 정은이 평생을 두고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현빈은 마치 정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살짝 웃었다.“부담 가질 필요 없어. 전부 내가 원해서 한 일이니까. 그냥...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돼.”“보상이요?” 정은은 미간을 좁혔다. “오빠는 저한테 빚진 거 없어요.”“누가 없대?”현빈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때 나는 네가 강도겸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것도 봤고, 도겸이가 너한테 상처 주는 것도 여러 번 봤어. 그런데도 나는 한 번도 나서서 널 지켜주지 않았지.”“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봤어. 내가 못 지킨 게 아니더라. 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거야.”“네가 강도겸의 본모습을 똑똑히 보고 완전히 마음을 접길 바랐어. 그래서 도겸이 너한테 상처를 주고, 배신하고, 또 너를 울리고 무너지게 하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대로 놔뒀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950화

    “조심해!”현빈이 곧바로 앞으로 다가와 정은의 몸을 붙잡아 안정시켰다.다행히 큰일은 아니었다.“감사해요, 오빠.”현빈은 웃으며 숟가락을 건넸다.“천천히 먹어.”“네네.”정은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달걀프라이를 세 개나 먹어 치웠다.봉수진은 그 모습을 보다가 눈가가 금세 젖었다.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고,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렇게 허기진 채 먹을까 싶어서였다.그래도 많이 부쳐오길 잘했다.정은이 말했다.“배불러요.”봉수진이 물었다.“하나 더 있는데, 그것도 먹을래?”정은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정말 더는 못 먹겠어요, 외할머니...”“그래, 그럼 그만 먹자.”현빈이 컵을 건넸다.“물 좀 마실래?”“네네.”정은이 손을 뻗으려 하자, 현빈은 빨대를 직접 잡고 정은 입가에 가져다줬다.“감사해요, 오빠.”현빈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 자신이 뭔가라도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괜히 기뻤다.그때는 이미 새벽 다섯 시였다.밤새 이렇게 정신없이 지냈으니, 정은은 다들 몹시 지쳤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저 이제 괜찮아요. 아버님, 어머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오빠, 형님과 아주버님도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가장 먼저 지언과 리아가 인사를 하고 나섰다.나가기 전, 리아가 말했다.“이틀쯤 뒤에 다시 보러 올게.”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봉수진과 이춘재도 돌아가기로 했다.봉수진이 말했다.“정은아, 외할머니가 조금 있다가 아침밥 가져다줄게.”정은이 막 뭐라고 말하려던 때, 강서원이 웃으며 끼어들었다.“어머님, 좀 쉬세요. 아침에는 제가 가져올게요. 어머님 마음은 알겠는데, 저녁밥을 어머님이 가져오시는 걸로 할까요?”봉수진은 잠깐 생각하더니 그 제안이 괜찮다고 여겼다.이춘재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봉수진은 이제 나이가 적지 않았다. 지금이 새벽 다섯 시인데, 아침밥을 일곱 시나 여덟 시에 다시 가져오려면 집에 가서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을 것이다.이춘재는 아내가 그렇게 무리하다가 버티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949화

    “오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정은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봉수진과 이춘재가 걱정할까 봐, 정은은 연락할 때 두 사람만은 일부러 피했었다. 그런데도 결국...봉수진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눈으로 정은을 바라봤다. 속상하고 화도 나고, 마음도 아픈 기색이 그대로 묻어났다.“이렇게 큰일을 우리한테 숨겨? 몸 회복하고 나면 그때는 내가 그냥 안 넘어가.”정은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이춘재도 한마디 보탰다.“네 엄마가 전화 안 했으면 우리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겠다. 정은아, 너는 정말...”이춘재도 알고 있었다. 외손녀가 자신과 봉수진을 배려해서 그런 거라는 걸.하지만 분명 전부터 약속했었다. 출산할 때가 되면 꼭 가장 먼저 알려주기로.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두 사람이 조금 서운하고 화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봉수진이 목이 메어 말을 이었다.“다행히 네가 무사해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내가 정말...”이미숙과 소진헌은 다른 도시에 있어 바로 달려올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봉수진과 이춘재마저 자리에 없었다면, 정은 쪽 식구는 사실상 아무도 정은의 출산 현장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봉수진이 사돈댁을 못 믿는 것도 아니었고, 재석을 못 믿는 것도 아니었다.그저 사람 마음이라는 걸 믿지 못할 뿐이었다.정말 중요한 때에 자기 식구를 제일 걱정하고 돕는 건 결국 자기 식구뿐이니까.현빈은 제자리에 선 채, 이춘재와 봉수진 너머로 막 출산을 마친 정은을 가만히 바라봤다.정은은 안색이 조금 지쳐 보였고, 머리카락도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도 눈빛만은 또렷하고 환했다.원래는 높이 불러 무서울 정도로 커 보이던 배도 이제는 푹 꺼져 넉넉한 병원복 안에 가려져 있었다.그 모습을 보면 정은이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도 살짝 올라간 입가에는 처음 엄마가 된 사람의 기쁨이 분명히 어려 있었다.고생은 했지만, 정은은 그마저 기꺼이 받아들인 듯했다.정은을 병실까지 데려가는 내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948화

    의사는 잠깐 말을 멈췄다. 산모 보호자 쪽의 망설임과 의문을 눈치챈 듯, 먼저 설명을 덧붙였다.“원래 산후 관찰 시간은 두 시간으로 정해져 있고,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만 하찬영 교수님께서 30분 정도 더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그제야 재석은 알겠다고 답하고, 의사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정은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아까는 너무 졸려서 자칫 잠들 뻔했다. 의사가 핸드폰이라도 보면서 버티라고 해서 그제야 꺼내 들었던 거였다.사진첩 안에는 두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체중계 위에 올려졌을 때 찍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한 아이는 아주 얌전했고, 다른 아이는 작은 발을 번쩍 들고 있었다.정은은 그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웠다.정은이 입을 열었다.“두 꼬맹이 봤어, 못 봤어?”재석은 잠깐 굳었다.정은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 있었어? 나한테 숨기지 마!”“아니, 급한 일은 없고. 그냥...”“나 아직 애들 못 봤어.”정은은 말문이 막혔다.재석은 조금 민망한 듯 덧붙였다.“당신 보려고 방호복 갈아입는 데만 정신 팔려서 바로 들어왔거든. 애들 볼 틈이 없었어.”재석이 되물었다.“당신은 봤어?”정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당연하지.”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의사가 가장 먼저 정은 앞에 데려와 성별부터 확인시켜 줬다.그다음에는 몸무게를 재고, 기저귀를 채우고, 배냇저고리까지 입혔다.다 입힌 뒤에는 다시 정은 곁으로 데려왔다.하찬영은 정은에게 윗옷을 올리게 한 뒤, 아이들을 정은의 가슴 위에 엎드리게 했다.정은이 설명했다.“그거 캥거루 케어라고 하더라. 교수님 말로는 아기랑 엄마 사이에 친밀감이 생기는 데도 도움이 되고, 수유 관계 형성에도 좋대.”“또 시상하부에서 옥시토신이 나오게 해서 자궁수축을 돕고, 오로 배출도 빨라진다고 했어. 아무튼 아기한테도 좋고, 엄마한테도 좋대.”재석은 그 말을 듣고 잠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947화

    분만실 문이 열리고, 하찬영이 밖으로 나왔다.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앞으로 몰려들었다.재석이 가장 먼저 물었다.“제 아내는요?”강서원이 다급하게 뒤를 이었다.“산모랑 애들은 다 괜찮아요?”조기봉도 바로 입을 열었다.“낳은 거지?”리아가 물었다.“자연분만했어요, 제왕절개수술 했어요?”지언은 한발 늦는 바람에 안쪽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리아 뒤에 선 채 코끝만 괜히 한 번 만졌다.하찬영은 먼저 재석을 바라봤다.“축하드립니다. 아드님 한 분, 따님 한 분입니다.”그 뒤에야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자연분만으로 잘 끝났고, 산모와 아이들 모두 무사합니다.”“조금 있다가 회복실 관찰 시간이 지나면 산모는 먼저 병실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쌍둥이 조산이라 위험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어서...”“아기들은 오늘 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경과를 봐야 합니다. 큰 이상이 없으면 내일 아침에는 나올 수 있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안에서 간호사 두 명이 아기 침대가 달린 이동용 카트를 밀고 나왔다.두 아이는 각각 분홍색 포대기와 파란색 포대기에 싸여 있었다.한 아이는 눈을 꼭 감은 채 얌전히 있었고, 다른 아이는 작은 발을 바둥거리며 입도 오물오물 움직이고 있었다.하찬영이 간호사들에게 잠시 멈추라는 눈짓을 보냈다.“보호자들, 가까이 오셔서 보셔도 됩니다. 다만 너무 바짝 붙지는 마시고, 공기 통할 정도 거리는 유지해 주세요.”그제야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갔다.“어? 재석이는 어디 갔어? 얼른 와서 애들 봐야지.”이쪽을 봐도 없고 저쪽을 봐도 없었다.“아버지, 엄마, 저 대신 잠깐 봐주세요. 저는 먼저 들어가서 정은이 곁에 있을게요.”재석은 이미 방호복을 전부 갖춰 입고 소독까지 마친 상태였다. 얼굴도 단단히 가려져 있었으니, 다들 한참을 찾아도 못 알아본 게 당연했다.강서원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아? 어, 그래! 얼른 들어가. 내가 대신 보고 있을게.”강서원은 정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손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46화

    ‘5억... 난 평생 일하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서야 겨우 이 돈을 모을 수 있을 텐데.’정은은 마음이 찔렸다.“그동안 저도 그저 먹고 논 게 아니에요. 그래서 돈을 좀 모았죠.”그러던 중, 말을 하지 않던 이미숙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어떻게 모았는데?”그녀의 눈빛은 무척 날카로웠다.정은은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엄마도 그 헛소문들을 들은 것 같군.’“엄마, 이건 다 제가 스스로 당당하게 번 돈이에요. 깨끗하니까 편하게 써도 돼요.”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처음에 강도겸은 정은과 함께하기 위해 심지어 부모님과의 인연까지 끊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5화

    “야! 이게 뭐야?”“두 사람 미쳤어?!”“그만해요! 도겸 형! 현빈 형.”두 사람은 얼른 도겸과 현빈을 잡았고, 이때 선우가 먼저 말했다.“도겸 형, 화 좀 풀고 진정해요!”동건도 따라서 입을 열었다.“현빈아, 정신 좀 차려! 친구들끼리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싸우고 그래?!”도겸과 현빈은 동시에 말했다.“이거 놔! 놓으라고!”두 사람이 주먹을 쥐고 계속 싸우려는 것을 보니, 선우와 동건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 동건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무슨 일 있으면 상의할 수 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화

    현빈은 오히려 웃었다.“그건 내 마음이니까 상관하지 마. 시도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결과를 알 수 있겠어?”정은이 물었다.“그 결과가 당신을 크게 실망시키더라도?”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럼 나도 받아들여야지.”정은은 그의 고집이 이렇게 셀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빈은 정은의 감정을 알아채며, 말을 잇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함께 파도 소리를 감상했다.한밤중이 되어서야 현빈은 이곳을 떠났다.정은은 방금 그가 소리 없이 고집을 부리며, 꿋꿋이 버티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사실 현빈은 분수가 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5화

    인기척을 듣고, 선우는 바로 문 앞으로 달려가 도겸을 맞이했다.그러나 도겸이 연희의 손을 잡고 들어올 줄이야!‘이게 뭐야!’선우는 숨을 들이마셨다.도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선우야.”“도, 도겸 형 왔네요. 빨리 앉아요...”선우는 얼른 인사하면서, 술을 따르며 또 과일을 건네주었다.후에 연희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선우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형,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 사람과 헤어졌잖아요? 그런데 왜 이곳에 데려온 거예요?”술 두 잔을 마시자, 도겸은 눈빛이 좀 흔들리기 시작했다.“연희는 아직 어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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