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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십일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도와줄까요? 음?”

도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 형, 누나... 아직 안 돌아왔어요?”

이미 3시간이 넘었고 도겸은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이 장난이야?”

그 말을 마치고 도겸은 선우를 지나 소파에 앉았고,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진짜 헤어진 거야?’

하지만 곧 선우는 머리를 흔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겸이라면 이별을 말한 뒤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정은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정은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도겸아, 왜 혼자야?”

고동건이 재미있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내기한 3시간은 이미 지났고, 하루가 다 갔어.”

그러자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벌칙을 받아야지. 벌칙은 뭐야?”

진심으로 하는 말에 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다른 거 해보자. 술 마시는 거 말고.”

“뭔데?”

“정은이한테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는 거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라고.”

동건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는 도겸의 전화로 정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차단된 건가?’

도겸은 잠시 멍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아마도 진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걸 거예요. 정은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잖아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선우는 말하며 자신도 민망해졌고 동건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어쩌면 정은이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몰라.”

그러자 도겸은 코웃음을 쳤다.

“이별이 진짜지 그럼 가짜야? 이별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이런 내기 다시는 하지 말자. 앞으로 누가 소정은에 대한 말을 꺼내면, 친구로 지낼 수 없을 거야.”

동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만 후회하지 않으면 돼.”

도겸은 입꼬리를 올리며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도겸은 한 번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심현빈은 그 상황을 보고 급히 분위기를 풀려고 말했다.

“이렇게 심각하게 굴지 말자, 하하... 다 절친들인데.”

...

아침 7시.

수민이 조깅을 마치고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하얗고 곧은 다리를 드러낸 하운드투스 원피스를 입은 정은이 뜨거운 국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도 아름다웠다.

“빨리 샤워하고 와. 아침 먹어.”

“어? 머리 스타일 바꿨네? 검은 생머리에 높은 포니테일? 예쁘게 차려입고 돌아갈 준비하는 거야? 강도겸이 데리러 왔어?”

“하하, 말 좀 좋게 해줄래?”

“강도겸이 직접 데리러 온다는 거 좋은 말 아니야?”

수민은 식탁으로 다가가 푸짐한 아침 식사를 발견했다.

“샤워해.”

정은은 수민이 뻗은 손을 툭툭 쳐냈다.

“더럽다니까.”

“내로남불이야! 강도겸이 그럴 때는 안 그러더니 왜 나만 때려?”

“응,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때릴게.”

“쳇, 퍽이나 네가 그러겠다.”

수민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정은은 이미 보온병을 들고 나가고 없었다.

“어휴, 벌써 자기 남자한테 아침을 못 챙겨줘서 안달이구만. 친구는 안중에도 없지!”

서광병원, VIP 병실.

“미선아, 오늘 기분은 어때?”

오미선은 손에 들고 있던 논문을 내려놓고, 안경을 제대로 고쳐 썼다.

“신명철? 너 여긴 왜 온 거야?!”

“안 일어나도 돼.”

신명철은 급히 오미선의 등 뒤에 베개를 넣었다.

“상처가 아직 다 안 아물었잖아.”

“충수염, 작은 수술이야. 나이 때문에 회복이 늦어져서 의사가 이렇게 오래 잡아둔 거야. 맞다, 올해 학교 석사 모집 정원은 결정됐나 모르겠네?”

“결정됐어. 너는 3명, 나는 4명.”

“3명이라니…”

오미선이 중얼거렸다.

“왜? 올해도 2명만 받을 거야?”

“응, 나이 들어서 2명밖에 못 데리고 있겠어.”

그 티오 하나는 특별히 남겨둔 거면서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오미선의 모습에 신명철은 입을 삐죽였다.

“오미선 교수님! 어? 신명철 교수님도 계시네요?”

하성준이 후배 두 명과 함께 들어와 과일과 꽃을 내려놓았다.

“교수님, 병문안 왔어요.”

잡담 중에 한 학생이 말했다.

“올해 1학년 신입생 중에 아주 대단한 학생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우리 단과대학 학·석·박사 통합 연계 과정에 합격했대요.”

서비대학교 생명과학대학에서 지난 10년간 학·석·박사 통합 연계 과정을 밟은 학생은 3명을 넘지 않았다.

“작년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랑 소프트웨어 경진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더라고요.”

“금메달 2개? 나쁘지 않네요. 예전에 오미선 교수님의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학부 입학 때 금메달 4개로 특례입학한 학생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수학, 물리, 화학, 컴퓨터 모든 분야에서 금메달을 따냈다고 들었는데, 이름이 뭐였지? 소 무슨 은이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신명철이 제때 말을 꺼냈다.

“다들 이만 학교로 돌아가 보세요.”

“아, 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병실을 나서며, 한 학생은 풀이 죽어 성준에게 물었다.

“선배,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오미선 교수님이랑 신명철 교수님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지셨죠?”

성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병실 안에서

“학생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오미선은 손을 저었지만, 입술이 떨렸다. 결국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천재가 왜... 왜 본인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걸까?”

“흥분하지 마.”

“명철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사랑이 필요하다더라. 하하, 사랑이 필요하다고? 걔는 내 마음을 산산조각 냈어.”

정은은 병실 문 앞에 서서 보온병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죄송해요. 교수님.’

결국 정은은 들어갈 용기가 없어, 보온병을 간호사실에 놓았다.

“이거 오미선 교수님께 전달 좀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어? 누구신지 아직 못 적었는데! 어디 가세요?”

정은은 병동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죄책감에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은 언니?”

큰 키의 세련된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디올 레이디 마이크로백을 들고 다가왔다. 세미 정장과 일자 치마,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자는 굉장히 지적으로 보였다.

강서정, 강도겸의 친여동생이었다.

“정말 언니네요? 언니가 여기 병원에는 무슨 일이에요?”

서정은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입원 병동이었고 산부인과는 아니었기에 서정은 자신의 엄마를 대신해 안도했다. 정은이 정말 임신해서 결혼하게 된다면, 서영숙 여사는 기절할 것이다.

“서정아.”

정은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눈이 왜 이렇게 빨개요? 울었어요?”

정은은 말이 없었다.

“또 우리 오빠랑 싸운 거예요?”

“아니야.”

서정은 정은이 말을 하지 않자, 동정의 눈빛을 보였다. 사실 서정은 정은을 꽤 좋아했다. 외모도 좋고, 성격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강씨 집안의 기준에 못 미쳤다. 특히 서영숙은 학벌을 매우 중시해서, 명문대 출신의 고학력자만을 며느리로 삼길 원했다.

“저희 오빠랑 지내는 거 힘들죠? 오빠 성격이 안 좋아서 많이 힘들 거예요.”

“사실 우리 헤어...”

“저기, 저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말을 마치고 시간을 확인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정은 오미선 교수를 방문하러 왔다. 똑똑하고 예의 바른 학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오늘 특별히 차려입었다. 박사 특례입학 티오는 이번 병문안에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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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석은 여전히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음식은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일 뿐, 맛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없었다.“다 씻었어.”정은이 손질한 홍고추와 청경채를 바라보며, 그것들이 마치 강박증 환자의 손길을 거친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모습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왜 웃어?” 재석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묻자, 정은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나가 계세요.”“알았어.” 재석은 물기를 닦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은은 상을 가득 채울 만큼의 음식을 만들었다. 맛은 담백한 것을 중심으로, 대부분 오미선 교수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오미선 교수는 감탄하며 식사를 마쳤다. 정은은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재석도 주방으로 들어와 도왔다. 따뜻한 불빛 아래 서 있는 재석의 모습이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보였다.정은의 시선에서 보면, 재석의 옆모습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인물 조각상처럼 날카로운 윤곽을 띠고 있었다. 그때 오미선 교수가 문틀 옆에 서서 물었다.“정은아, 너랑 재석이는 어떻게 알게 됐니?”재석은 오미선 교수의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였고, 정은은 오미선 교수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 오미선 교수는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먼저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교수님, 손님이 오셨어요!”그 소리에 오미선 교수는 거실로 돌아가자 한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강서정입니다. 전에 병원에서 뵙고, 올해 대학원 티오에 대해 여쭤봤던 사람입니다.”오미선 교수는 알아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일단 앉아요.”서정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교수님께서 요양 중이시라고 들어서, 특별히 보약을 좀 가져왔습니다.”오미선 교수는 티테이블 위에 놓인 선물 상자들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인삼, 녹용, 홍삼 등등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오미선 교수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서정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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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마치고, 도겸은 바로 차에 올라타더니 액셀을 밟고 떠났다. 그 모습을 본 수민은 그 자리에서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사람 정말 뭐야?! 쓰레기 같은 놈! 개자식! 진짜 미치겠네!” “내가 말했잖아!” 수민은 옆에 있던 남자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은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절대!” 남자는 화를 내는 수민을 겨우겨우 달랬다. “그래, 그래, 진정해.” 하지만, 가능할까? 도겸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은 게 분명했다. 남자는 수민을 몰래 한 번 쳐다봤다. 수민도 정은처럼 자신에게 그렇게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 ‘잠깐! 그건 안 되지!’ 남자는 그런 생각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 차 안에서, 도겸은 전화를 받았다. 기분이 목소리도 차가웠다. “무슨 일이야?” [자기야, 최근에 발견한 맛집이 있는데, 게가 엄청 통통해요.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우리 가서 먹어요, 응?] 서연희의 맑고 밝은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연희는 도겸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서 도겸의 취향을 맞추려 했다. 게다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둘이 연락하지 않아 연희는 마음속으로 불안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불안함이 연희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전에는 대부분 도겸이 먼저 데이트를 계획했고, 연희는 단지 부끄러워하며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승낙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도겸이 먼저 연락을 하는 횟수가 줄었고, 메시지도 간결해졌으며, 때로는 답장조차 없었다. 물어보면, 바쁘다고 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그렇다. “토요일? 바빠서 안 돼.” [토요일에 일이 있다면, 일요일도 괜찮아요.] 연희는 핸드폰을 꼭 쥐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바쁘다니까, 이만 끊자.” 말을 마치고, 도겸은 전화를 끊었다. 연희는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불안함이 다시 연희를 휘감았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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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6화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5화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4화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3화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2화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1화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0화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9화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8화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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