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두 사람은 함께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은은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도겸은 원래 화가 치밀어 올랐다.재벌 집 도련님인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남을 기다리게 한 적은 있어도 남을 기다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소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계속 사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화는 뜻밖에도 이렇게 가라앉았다.촤악-철저히 가라앉았다.“그때 넌 너무 바빴지. 그 후에 데이트를 할 때도 거의 내가 먼저 도착한 후에 음식을 주문해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잖아. 가장 오래 기다렸을 때가... 오미선 교수님이 널 데리고 세미나에 참가한 그때인 것 같은데.”“주최 측이 임시로 진행을 고쳤기에 세미나가 두 시간 지연되어 끝났어. 네가 도착했을 때, 레스토랑은 이미 문을 닫았고.”정은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은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두 사람은 그때 처음으로 말다툼을 벌였다.그리고 도겸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또 한 번은 네가 오미선 교수님과 표본을 채집해야 한다며 바로 출장을 갔잖아, 나한테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난 바보처럼 학교로 달려가서 널 기다렸는데, 오전 내내 기다렸지만 널 보지 못했어...”도겸은 계속 말을 했지만 정은은 시종 침묵을 지켰다.“정은아, 그때의 일들 아직 기억하니?”“지나간 일은 벌써 잊은지 오래야.”도겸은 정은의 싸늘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 않고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괜찮아, 다 기억할 거야.”몸소 겪은 일을 어찌 그리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잊은 척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이었다.30분 후, 차는 교외의 한 영국식 정원에서 멈췄다.도겸은 손을 뻗었다.“내리자, 정은아.”정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남자도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눈앞의 정원을 바라보았다.“여기 기억나?”정은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력이 너무 좋았다.이 정원은 사실 와인 창고였다.한 모임의 카드 게임에 동건이 도겸에게 졌던 것이다.도겸은 친구들과
도겸이 갑자기 정원에 나타났던 것이다.정은이 기뻐서 달려들기도 전에, 도겸은 직접 명령을 내렸고, 한 무리의 경호원들이 즉시 정원으로 뛰어들었다.그녀가 그동안 정성껏 가꾼 꽃까지 뿌리째 뽑았다.“그러게 누가 심으래! 나한테 꽃을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 답장도 하지 않고! 다 이 화초 때문인 거지? 다 뽑아버려!”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푸릇푸릇하던 꽃밭은 너덜너덜해졌다.정은이 이주 동안 기울인 심혈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정은은 그 경호원들이 들이닥쳤을 때부터 철저히 멍해졌다.도겸이 명령을 내리는 순간, 경호원들은 폭력적으로 푸른 기운이 감도는 정원을 파괴했는데, 정은은 그저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았다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위로 한 짓이었다.두 사람은 사상 최대의 말다툼을 벌였다.도겸이 말했다.“넌 꽃을 심고, 휴가를 보내고, 여유롭게 즐길 시간은 있고, 내 전화를 받을 시간이 없는 거야?”“난 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모든 경비를 동원하여 J시 전체를 뒤질 뻔했는데, 이게 뭐야?”“여기에 숨어서 꽃을 심고 있었다니?! 소정은, 난 네 학업보다 중요하지 않고, 우리의 감정은 네 미래보다 중요하지 않은 거지?”“그래, 나도 네 꿈을 존중했어. 그래서 매번 데이트할 때도 내가 먼저 도착해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어.”“빠를 때는 십여 분, 길 때는 몇 시간, 난 한 번도 널 버리고 간 적이 없잖아!”“그런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난 내가 네 학업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건 인정해. 그러나 지금 이 꽃 때문에 내 문자를 씹다니?!”“소정은, 넌 날 전혀 사랑하지 않아!”...“소정은, 나를 먼저 생각할 순 없는 거야?”...“내가 외국에서 일주일 더 머물겠다고 말했을 때, 난 네가 화를 내지 않더라도 적어도 실망은 할 줄 알았어. 그러나 네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고!”...“정은아, 나한테 좀 더 신경 써
정은은 너무 담담해서 마치 이 모든 것이 그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았다.도겸은 마음이 답답했다. 뭔가를 꽉 쥐고 싶을수록 그것이 점점 더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전에 도겸은 사람들 시켜 정은이 힘들게 심은 꽃을 뽑으라고 했는데, 지금 그는 정은에게 향기롭고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꽃을 가득 심은 정원을 돌려주었다.하지만 정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괜찮아, 네가 싫다면 우리 다른 곳에 가자.”“아니야, 난 이곳이 좋아.” 정은은 도겸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하게 말했다.“이 꽃들은 정말 예뻐. 이것은 단지 아름다움을 향한 내 감상일 뿐이야. 하지만 만약 이것이 네가 나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이 꽃들이 네가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건 이 아름다운 사물들을 저버리는 거야. 난 그런 느낌을 좋아하지 않아.”도겸은 중얼거렸다.“난 단지 전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을 뿐이야.”“너도 예전의 일이라고 했잖아. 지나간 이상 더 고민할 필요가 없어. 넌 많은 신경을 쓰면서 이렇게 예쁜 꽃을 심었으니, 난 네가 내 취향으로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 꽃들을 좋아하고 감상했으면 좋겠어.”“마치 네 인생처럼 말이야. 일을 통해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자유와 편안함을 느껴야지, 돌이켜서는 안 될 감정을 만회하기 위해 엉망으로 만들면 안 되잖아. 도겸아,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고, 각자 인생의 목표가 있어.”“따라서 서로 다른 전진 방향을 가지고 있지. 예전에는 우리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갔지만, 지금은 이미 갈라졌어. 다시 만나도 서로의 안부에 대해 물어볼 순 있지만, 미래에 계속 함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면 안 돼.”“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우리는 모두 더 좋은 사람을 만났 수 있을지도 몰라. 과거를 내려놓고 떳떳하게 모든 것이 가능한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어?”1년만에 도겸은 마침내 자신이 그리워하던 ‘도겸아’란 호칭을 들을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 도겸은 조금도
이건 도겸 같지가 않았다.“하지만 6시간 후면 오늘은 끝난 셈인데.”“응. 매 순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지만, 겨울에 넌 꼭 낮잠을 좀 자야 했잖아. 그렇지 않으면 오후에 졸릴 거야.”정은은 잠시 침묵했다.“그럼 나 혼자 방 하나 쓸 거야.”남자는 웃으며 눈빛이 씁쓸해졌다.“원래 그럴 계획이었어. 난 그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야.”정은은 동의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은 더욱 씁쓸해졌다.“그때 별장에서는 네가 책을 옮기고 바로 떠나길래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나도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 후에 나도 내가 왜 이성을 잃고 그런 짓을 했는지 생각해 봤어...”“하나는 네가 며칠이나 사라져서 네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너에게 겁을 주면 네가 다시 내게 돌아올 줄 알았어...”도겸을 바라보는 정은의 눈빛은 그야말로 복잡했다.이해하지 못했지만 은근히 그를 동정하고 있었다.그렇다, 동정.사랑조차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앞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성장할 수 있었다.그리고 정은은 단지 그의 시작점에 불과했다.‘그래도 다행이야, 시작점일 뿐이라서.’정은은 가정부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아가씨, 바로 이 방입니다. 들어오세요.”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정은이 그때 주워 온 꽃병조차 창턱에 놓여 있었다.이 방이 바로 정은이 여름방학 때 묵었던 방이었다.“그럼 얼른 쉬세요.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절 부르시면 됩니다.”“네, 감사합니다.”가정부는 나가면서 가볍게 문을 닫았다.정은은 40분 동안 잠을 잤다.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도겸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눈앞에 마시지 않은 차 한 잔이 놓여 있었고, 눈빛은 마치 무슨 생각을 하고 듯 초점을 잃었다.회전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고, 다음 순간 약간 긴장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정은아, 일어났어? 방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당장 사람...”“아니야.” 정은은 그의 말을
두 사람은 전망대에 서서 함께 일몰을 보았다.불타는 태양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동그란 모양에서 반쪽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사라지며 쉽게 흩어지지 않은 노을만 남겼다.정은이 말했다.“이제 돌아가자.“그래. 데려다줄게.”바람이 살랑살랑 불었고,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자, 모두 평온했다.차 안에서.정은은 전화 한 통을 받은 후 도겸에게 말했다.“학교로 데려다줘. 교수님이 나 찾으셔.”“응.”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 차는 서비대학교 교문 앞에 세워졌다.도겸은 먼저 내려온 다음, 직접 정은을 위해 차 문을 열었다.정은은 몸을 굽혀 내려온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난 이미 네가 시킨 대로 했으니, 이번에는 더 이상 약속을 번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도겸은 시종 평온한 여자애의 얼굴을 보면서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다.그러나 예상대로 정은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도겸의 손을 피했다.“정은아,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리고 진심으로 너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줘, 응?”정은은 애원이 가득한 도겸의 표정을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네가 이 요구를 제기했을 때, 난 정말 동의하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잘 생각해 보니, 그래도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서 이렇게 동의한 거야.너도 내 의도를 알 수 있겠지? 난 단순히 너와 화해하고 다시 사귀기 위해 오늘 하루 만나자는 네 제안에 동의한 게 아니야.”정은이 계속 입을 열려 할 때, 도겸은 저도 모르게 피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는 듣지 않을 수 없었다.“깨진 거울은 다시 원상 복귀할 수 없어. 어떤 일들은 일단 흠이 생기면 영원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단 말이야. 네가 더 이상 시간과 정력을 나에게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넌 비즈니스맨이니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보답이 없는 장사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기보다 제때에 손을 거두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조금 아플 수도 있겠지만, 썩은 살을 도려내야 그 상처
예상대로 남자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경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패딩으로 몸을 꽁꽁 싸매며 이렇게 도겸과 함께 교외의 벤치에 앉아 찬바람을 맞으며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며 먼 상가의 네온사인 간판도 하나둘씩 반짝이기 시작하자, 움직이지 않던 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경혜는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이봐요...”도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차에 올라 이곳을 떠났다.그 순간, 경혜는 뜻밖에도 정은을 약간 부러워했다.‘어떻게 이렇게 도도한 남자로 하여금 기꺼이 자신을 기다리게 할 수가 있지? 또 어떻게 고급차와 명품에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방금 경혜는 도겸이 정은을 데려다 준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거리가 너무 멀어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의 실의에 빠진 표정은 아주 잘 보였다. 정은이 그를 거절했던 것이다.심지어 완곡하게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경혜는 두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고, 손바닥은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이렇게 추운 날에, 또 찬바람 속에서 도겸과 오랫동안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에 부츠를 신어도 발은 여전히 얼었다.그러나 경혜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방금 남자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한 번 훑어보았는데, 적어도 그는 경혜를 알아보았다.경계는 웃으며 남자가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부러움은 서서히 욕심과 자신감으로 변했다.도겸을 처음 만났을 때, 경혜는 단지 이 남자가 좀 궁금했을 뿐이었다.그러다가 뜻밖의 만남이 잇따르면서, 경혜는 상대방이 바로 자신이 평생 노력해도 닿지 못하는 상위 1%의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이런 기회는 놓치면 앞으로 다신 없을 것이다.‘그럼 뭘 더 망설여? 하지만... 그 남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운 것 같은데?’여기까지 생각하니 경혜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의욕이 넘쳤다.‘난이도가 좀 있어야, 더 많은 수익이
눈앞의 익숙한 모든 것이 아이러니로 가득했다.‘왜? 내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내가 뭔가에 홀린 것 같아! 내 마음대로 지껄이며 정은이 당시의 고통과 절망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어.’이 1년 동안 정은은 이미 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지만, 도겸은 여전히 이 룸에 갇혔다.나갈 수도 없고, 나갈 생각도 없었다.도겸은 술잔을 세게 쥐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헤어지자고 했을 때는 그렇게 단호했지만, 지금은 후회해 죽을 지경이었다.선우는 이 상황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말릴 수도 없는 이상, 아이고, 모르겠다...’“자, 형, 같이 마셔요.”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은 잔뜩 취했다.선우는 차로 그를 별장에 데려다주었다.도중에 도겸은 두 눈을 꼭 감고 계속 소리쳤다.“정, 정은아... 날 버리지 마라...”선우는 마음이 아팠다.‘나도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을 줄곧 지켜본 셈이지. 그렇게 행복한 두 사람이 어째서 오늘 이 지경으로 되었을까?’선우는 도겸을 침실에 눕힌 다음, 이대로 떠나는 게 마음이 좀 걸렸다.생각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네, 이모님, 본가로 가신 거예요? 지금 도겸이 형 별장에 한 번 오시면 안 돼요?”왕순자는 말문이 막혔다.‘지금 금방 잠들었는데!’30분 후, 왕순자는 졸린 몸을 이끌고 나타났다.선우는 담배를 두 대나 피웠는데, 왕순자를 보자마자 눈빛이 번쩍였다.“아이고 이모님, 드디어 오셨네요!”왕순자는 침대를 힐끗 쳐다보며 어이가 없었다.“왜 또 취하신 거예요?”‘나 좀 조용히 살 게 할 수는 없는 거야?’선우는 어색해서 가볍게 기침했다.“그 뭐지... 오늘 형 기분이 좋지 않아서 좀 많이 마셨으니, 이모님이 잘 좀 돌봐 주세요.”말을 마치자, 선우는 줄행랑을 쳤다.“잠깐만요.”“네?”“방에 쓰레기통이 있잖아요.”선우는 영문을 몰랐다.“알아요, 왜요?”“그럼 다음에 담배꽁초 좀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제가 다
“정은아... 네가 아직도 화가 나 있다는 거 알아...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이모님과 비교할 수가 있니? 정은아... 넌 이모님보다 훨씬 좋아...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마...”‘아니... 내가 뭐? 왜 비교할 수 없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정은아...”“정은, 정은, 그 놈의 정은! 정은은 무슨!”말하면서 왕순자는 손바닥으로 도겸의 머리를 쳤다.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반응하자,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잠시 후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때리니, 마치 무슨 스위치라도 눌렀는지 도겸은 즉시 손을 놓았다.왕순자는 바로 도망을 갔다.자신의 작은 방으로 돌아가자, 왕순자는 또 분노와 걱정에 침대에서 뒤척이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본가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군. 아이고, 정은 아가씨는 정말 돌아오고 싶지 않으신 건가? 그럼 앞으로 누가 저 미친 도련님을 단속하지? 미치겠네.’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왕순자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억지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간 다음, 또 가볍게 안방 방문을 열었다.‘쯧,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가정부잖아...’그러나 다음 순간, 악취가 확 풍겨오더니 왕순자는 하마터면 토를 할 뻔했다.그리고 방 안을 살펴보자, 바닥에 구토물이 가득 있었다.그러나 장본인은 아주 편하게 자고 있었다.‘정말이지,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이튿날, 도겸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그는 깔끔하게 수염을 깎고 양복을 입고 내려왔는데, 어젯밤의 주정뱅이와 전혀 딴판이었다.왕순자는 이미 죽을 다 끓였다.그녀가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도겸이 매번 술에 취할 때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죽을 좀 끓여달라고 시켰기 때문이다.이번에 왕순자는 미리 준비를 했다.죽을 안방으로 가져가려던 참에 도겸이 위층에서 내려왔다.“도련님, 외출하시려고요? 죽 좀 끓였는데, 마시고 가세요.”도겸은 그 죽을 보더니 잠시 넋을 잃었다. 곧이어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평온하게 말했다.“배 안 고파요. 그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