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간은 시냇물처럼 야속하도록 빠르게 흘렀다. 4학년 봄날 피아노 학원 발표회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여름이는 5학년 수학여행을 다녀왔고, 6학년 마지막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아빠 넷의 요란한 응원을 받으며 계주 대표로 달렸다. 거실 벽 기둥에 빼곡하게 그어진 여름이의 키 측정 선은 해마다 위로 쑥쑥 올라갔고, 신발장에 놓인 여름이의 운동화 크기는 어느덧 아빠들의 손바닥만 한 사이즈를 훌쩍 넘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훌쩍 자란 여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중학교 입학을 앞둔 2월의 어느 날. 셰어하우스 거실에는 비장함마저 감도는 포장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로 몇 달 전 태준이 4학년 대청소 시절부터 은밀하게 모아두었던 그 통장—[여름이 중학교 입학 교복 및 가방 펀드]의 결실로 맞춰온 브랜드 중학교 교복 상자였다. "드디어 오늘이군." 태준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형, 나 진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강태가 가슴을 쥐어짜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초등학생 가방 메고 뽈뽈거리던 애가 중학생이라니… 이제 교복 입으면 진짜 다 자란 거잖아!" "강태 형, 울지 말고 카메라나 제대로 잡으세요. 4K 60프레임으로 찍을 거니까." 유준이 초고화질 카메라인 렌즈를 연신 점검하면서도 자신의 눈가에 번진 물기를 쓱 닦아냈다. "얘들아, 여름이 나온다. 조용히 해봐." 이수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장갑을 벗어 던지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 탈의실로 쓰인 방문이 스르르 열리고, 짙은 네이비색 재킷에 단정한 체크무늬 체크 치마, 백색 와이셔츠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여름이가 수줍게 걸어 나왔다. 어느덧 아빠들의 가슴팍까지 훌쩍 자란 여름이가 어색한 듯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아빠들… 어때? 너무 어색하지 않아? 치마가 조금 긴가?" 순간 거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네 남자의 눈에 반사된 것은 더 이상 아기 같던 10살 꼬마가 아니었다. 약간의 사춘기 티가 풍기며
"아빠! 나 다음 달 학원 모범 연주회에서 듀엣 연주하기로 했다? 피아노 한 대에 둘이 같이 앉아서 치는 거!" 평화로운 저녁 식사 시간, 여름이가 가방에서 악보집을 꺼내며 던진 환한 한마디에 식탁 위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숟가락을 들고 있던 네 남자의 손이 일제히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듀... 엣?" 강태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혹시 누구랑 치는데? 우리 여름이 혼자 치면 안 되는 거야?" "응! 같은 반 민준이라고 있는데, 키도 크고 피아노 진짜 잘쳐! 둘이 한 의자에 붙어 앉아서 네 손 연주하는 거야!" 여름이가 아무런 사심 없이 베시시 웃으며 자신의 밥그릇에 소시지를 올렸지만, 아빠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핵폭탄이 터지고 있었다. "한 의자... 붙어 앉아... 네 손..." 강태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흙빛으로 변했다. "어떤 놈이야, 그 민준이라는 녀석?! 감히 우리 딸내미 옆자리를 차지해?!" 태준이 서둘러 안경을 밀어 올리며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강태야, 정서적으로 침착해라. 피아노 포핸즈(Four Hands) 연주는 음악 교육학적으로 매우 흔한... 은 무슨, 피아노 의자의 평균 가로 길이는 65cm다. 두 사람이 앉으면 어깨와 팔꿈치가 동선상 10cm 이내로 밀착할 수밖에 없어!" 분석을 마친 태준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제가 그 민준이라는 친구 부모님께 연락해서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를 두 대 따로 기증하겠습니다. '투 피아노(Two Pianos)' 연주로 바쑤시죠." 유준이 수표책을 만지작거리며 진지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이수는 조용히 썰고 있던 대파를 칼로 '팍!' 하고 짓이기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오늘부터 연습실 간식은 내가 직접 챙긴다. 아주 마늘 향이 강한 갈릭 파스타와 매운 떡볶이로 준비해서, 감히 둘 사이에 달콤한 기류가 흐르지 못하게 하겠어." 그리하여 이튿날 오후, 피아노 학원 맞은편 카페 2층에는 검은 선글라스와 트렌치코
봄 기운이 만개한 5월의 어느 토요일, 동네 구민회관 소강당은 알록달록한 풍선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늘은 캠핑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여름이의 생애 첫 피아노 학원 발표회 날이었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은은한 분홍빛 튜튜 드레스에 앙증맞은 화관을 쓴 여름이가 쑥스러운 듯 걸어 나왔다. "아빠들... 나 어때? 조금 어색하지?" 그 순간, 대기실복도는 일순간 거대한 통곡의 장으로 변했다. 190cm 거구의 강태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어떡해, 우리 딸 너무 예뻐! 나중에 시집보낼 때 나 진짜 죽는다!"라며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태준은 안경을 차마 올리지도 못하고 자꾸만 김이 서리는 렌즈를 연신 닦아내며 입술을 깨물었고, 이수는 손에 든 대형 꽃다발을 꼭 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코를 훌쩍였다. 유준은 8K 초고화질 캠코더를 든 손을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카네기 홀이다... 여긴 구민회관이 아니라 카네기 홀이야..." 마침내 무대 조명이 켜지고, 여름이가 수줍게 걸어 나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지자, 객석 맨 앞줄을 점령한 네 남자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똠, 똠, 똠, 똠... 여름이가 두 달 동안 피나게 연습한 '작은 별'과 '할아버지의 11일 시계' 연주가 소강당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약간의 박자 실수가 있었지만,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앙증맞은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 무사히 곡을 마쳤다. 여름이가 연주를 마치고 일어서서 인사하는 순간, 네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객석은 네 아빠의 폭풍 같은 눈물과 박수 소리로 뒤흔들렸다. 하지만 진짜 대소동은 발표회가 모두 끝난 직후에 벌어졌다. 원장 선생님이 "오늘 참가한 어린이들을 위해 학부모님 한 팀의 깜짝 축하 무대가 있겠습니다!"라고 안내하자, 갑자기 정장 차림의 네 남자가 무대 위로 당당하게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4월의 주말, 셰어하우스 마당에는 엄청난 크기의 캠핑 장비 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봄을 맞아 "아빠들이랑 숲속에서 밤하늘 별 보면서 자고 싶다!"라는 여름이의 한마디에 네 아빠가 각자의 방식대로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형들, 진짜 캠핑은 자본과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입니다." 유준이 해외에서 특송으로 공수한 초대형 스마트 에어텐트를 리모컨으로 꾹 누르자, 텐트가 스스로 바람을 푹푹 흡입하며 5분 만에 웅장한 '2층 궁전'으로 변신했다. 내부에는 가죽 소파, 위성 인터넷, 휴대용 에스프레소 머신에 빔프로젝터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옆에서 뼛속까지 야생파인 강태가 코웃음을 쳤다. "에이, 저런 게 무슨 캠핑이야! 완전 호텔을 통째로 옮겨왔네. 캠핑은 모름지기 흙바닥에서 땀 흘리고, 부싯돌로 불을 피우는 야생의 맛이지!" 강태는 비장하게 부시크래프트 전용 나이프와 장작을 꺼내 들며 '인간 대 자연'의 서바이벌을 선언했다. 한편, 태준은 안전모와 방충 스프레이, 구급상자를 완벽하게 갖춘 뒤 캠핑장 지도와 비상 연락망을 체크하고 있었고, 이수는 이동식 냉장고 3개에 최고급 한우 토마호크와 특제 수제 소스를 가득 채워 넣고 있었다. 마침내 산속 캠핑장에 도착하자, 두 아빠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빠, 불은 언제 켜져? 고기 배고파!" 여름이의 말에 강태가 팔뚝 핏줄을 세우며 부싯돌을 팍팍 튀겼다. 하지만 습기를 머금은 장작은 연기만 폴폴 피워 올릴 뿐, 30분이 지나도록 불씨가 살아나지 않았다. 강태의 얼굴은 그을음으로 칠칠하게 범벅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강태 형, 고생하지 말고 이 최첨단 원터치 파이어 토치를 쓰시죠." 유준이 비웃으며 가스 토치를 꺼내 들자, 강태는 "사내 자식이 자존심이 있지!"라며 이빨을 악물고 연신 부싯돌을 그어댔다. 결국 보다 못한 이수가 "애들 배고프다. 비켜라."라며 이수 표 특제 숯불을 3초 만에 지펴내어 강태의 야생 자존심은 가볍게 무
"아빠, 나 다른 친구들처럼 피아노 학원 다니고 싶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온 여름이의 한마디에 식탁 위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딸의 첫 '예술 교육' 선언에 네 아빠의 머릿속 센서가 일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당장 독일에서 스태인웨이 앤 선즈 그랜드 피아노 하나 주문할게. 거실에 두면 딱이겠네." 유준이 태연하게 수표책을 떠올리자, 태준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제지했다. "유준아, 과유불급이다. 지금 중요한 건 장비가 아니라 체계적인 커리큘럼이야. 바이엘과 체르니 중 어느 과정을 채택하는지, 연주회 주기는 어떻게 되는지 면밀히 분석해야 해." 태준이 즉시 노트북을 켜고 동네 피아노 학원 리스트와 평가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강태는 가슴을 치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우리 여름이 가녀린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다가 무리 오면 어떡하냐? 그리고 원장 선생님 인성이 제일 중요하지! 애들한테 소리 지르는 사람 아니어야 해!" 이수는 허허 웃으며 야무진 수제 쿠키를 상자에 담았다. "첫 방문인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 원장님이랑 선생님들 드실 간식 챙겨놨으니까 같이 둘러보러 가자." 다음 날 오후, 동네 상가 피아노 학원 밀집 지역에 거대하고 훤칠한 사내 넷이 등장했다. 첫 번째 클래식 전문 학원. 태준은 안경을 번뜩이며 학원 이력서와 방음 시설의 데시벨 측정을 꼼꼼히 확인했고, 강태는 의자가 너무 딱딱해서 여름이 엉덩이가 아프지 않을지 손으로 일일이 눌러보았다. 유준은 "연습실 전 소음 차단 공사와 최신형 에어컨 교체를 지원하겠다"며 자본주의적 제안을 던져 원장 선생님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결국 여름이가 선택한 곳은 알록달록한 체리 그림이 그려진, 친구들이 깔깔거리며 피아노를 치는 따뜻하고 정겨운 동네 학원이었다. 며칠 뒤, 첫 수업을 마치고 온 여름이가 거실 한가운데 놓인(유준이가 층간소음 방지용으로 몰래 설치한 최고급 디지털 피아노) 의자에 수줍게 앉았다. "아빠들! 나 오늘 배운 거 보여줄
오전 7시 30분,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는 마치 군대의 새벽 비상 소집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터질 듯한 근육 위에 야광 형광 조끼를 꽉 끼게 껴입고, 손에는 경찰용 LED 야광봉을 쥔 강태가 신호등 앞에 우뚝 섰다. 그 뒤로는 스톱워치를 들고 신호 주기를 정밀 측정한 태준과, 도로변 불법 주정차 차량을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며 사비로 초고선명 LED 가변 표지판을 도배한 유준이 배수진을 쳤다. 교문 앞에서는 이수가 추운 아침 등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수제 꿀유자차를 보온병에 담아 나눠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작전명 '어린이 보호구역 철통 방어'. 오늘 단 한 대의 차도 스쿨존 속도위반을 허용하지 않는다!" 강태가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마침내 아이들의 등교가 시작되자 강태의 폭주가 개막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 강태는 호루라기를 삐익-! 소리가 나게 불며 항공모함 유도 요원처럼 절도 있고 화려한 손짓으로 차량들을 가로막았다. 190cm 거구의 형광빛 거인이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막아서자, 출근길 승용차들은 감히 정지선을 1cm도 넘지 못하고 덜컥 멈춰 섰다. 심지어 정지선을 슬그머니 넘어서려던 배달 오토바이 한 대는, 맹수 같은 눈빛으로 야광봉을 치러 든 강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횡단보도 10미터 전부터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정지했다. "선생님! 서행입니다, 서행! 스쿨존 제한 속도는 시속 30km입니다!" 강태가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고도 압도적인 경고를 날리자, 운전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선을 물러섰다. 그 광경을 보며 친구 지훈이와 함께 걸어오던 여름이는 순간 자리에 얼어붙었다. 도로 한가운데를 지배하는 형광 조끼의 강태, 옆에서 카메라로 불법 주정차를 채증 중인 태준, 커피 차를 대동해 학부모들에게 음료를 돌리는 유준, 아이들에게 "천천히 걸어가라"며 유자차를 쥐여주는 이수까지. "여름아... 너네 아빠들 진짜 무슨 특수
"거기, TV 장식장 모서리! 1mm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붙여! 애 이마 찢어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주말 아침, 이태준의 불호령이 셰어하우스를 뒤흔들었다. 한 손에 줄자를 든 태준은 마치 건설 현장 소장처럼 거실을 누비며 위험 요소를 색출하고 있었다.여름이가 '뒤집기'라는 신기술을 장착한 지 불과 3일. 얌전히 바운서에 누워있던 천사는 사라지고, 눈만 떼면 매트 밖으로 굴러가 바닥을 핥거나 테이블 다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직진형 굴삭기'가 탄생했다.결국 태준은 '제2차 베이비 룸 개조 작전'을 선포했다."아니, 형!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4월의 주말 오후.평화로운 연희동 셰어하우스 거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거실 한가운데 깔린 뽀로로 퍼즐 매트 위. 그곳에는 엎드린 채 낑낑거리며 용을 쓰고 있는 생후 7개월 여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네 명의 성인 남자가 숨죽인 채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다.사건의 발단은 10분 전이었다.매트 위에서 모빌을 보며 놀던 여름이가 갑자기 한쪽 다리를 번쩍 들더니, 허리를 활처럼 휘며 몸을 옆으로 틀기 시작한 것이다."어? 어어?! 형들! 이거 봐! 여름이 몸이 반으로 꺾였어!"가장
오전 5시 30분.이태준의 아침은 언제나 완벽한 통제 아래 시작되어야 했다. 알람이 울리기 1분 전에 눈을 뜨고, 세안 후 피부 수분 유지를 위해 정확히 3초 안에 달바(d'Alba) 미스트를 뿌리는 것. 그것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승률 99% 변호사 이태준의 철칙이었다.하지만 오늘, 그의 완벽한 아침은 알람 시계 대신 고막을 찌르는 앙칼진 사이렌 소리에 무참히 박살 났다.**"으아아아아앙-!!!"**"아악! 내 귀!"태준이 침대에서 튀어 오르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밤새 한숨도
강남 로펌에서 연희동 셰어하우스까지 정확히 45분. 이태준(32세, 변호사)은 대문 앞에 서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에 젖은 그의 손에 들린 각 잡힌 루이비통 서류가방이 평소보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퇴근길이었다. 매사를 분 단위로 쪼개며 철저한 루틴대로 살아가는 그에게, 입주 한 달 차를 맞은 이 셰어하우스는 그야말로 통제 불능의 무법지대였다."하… 진짜 미치겠네."대문을 열고 들어선 태준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비틀즈와 머라이어 캐리의 희귀 빈티지 LP판들이 위태로운 탑처럼 쌓여 있었다. 비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