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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핑크색 쿵 방지 쿠션과 VVIP의 비밀 영수증

Author: 8489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8 10:20:52

"거기, TV 장식장 모서리! 1mm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붙여! 애 이마 찢어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주말 아침, 이태준의 불호령이 셰어하우스를 뒤흔들었다. 한 손에 줄자를 든 태준은 마치 건설 현장 소장처럼 거실을 누비며 위험 요소를 색출하고 있었다.

여름이가 '뒤집기'라는 신기술을 장착한 지 불과 3일. 얌전히 바운서에 누워있던 천사는 사라지고, 눈만 떼면 매트 밖으로 굴러가 바닥을 핥거나 테이블 다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직진형 굴삭기'가 탄생했다.

결국 태준은 '제2차 베이비 룸 개조 작전'을 선포했다.

"아니, 형! 왜 하필 다 핫핑크색이냐고! 내 미니멀리즘 인테리어가 완전히 파괴됐잖아!"

이수가 핫핑크색 '모서리 쿵 방지 스펀지'를 식탁 모서리에 붙이며 절규했다.

"시끄러워. 다이소에 남은 재고가 핑크색밖에 없었다잖아. 색깔이 중요해? 애 안전이 중요하지!"

태준이 쏘아붙이자, 이번엔 구석에서 자신의 소중한 20kg짜리 덤벨에 에어캡(뽁뽁이)을 칭칭 감고 있던 강태가 울상을 지었다.

"태준이 형… 덤벨에 뽁뽁이 감으니까 운동할 때마다 '뽀시락' 소리 나서 집중이 안 돼…."

"그럼 창고에 넣든가! 애가 그거 핥으면 파상풍 걸린다고!"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막내 유준이 거대한 택배 상자들을 들고 나타났다.

"형들! 제가 당근마켓에서 최고급 친환경 실리콘 매트 무료 나눔 받아왔어요! 그리고 이건 북유럽산 자작나무 베이비룸 펜스!"

"오, 역시 우리 총무! 생활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강태가 감탄하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수 역시 세련된 우드톤의 펜스를 보며 "이건 좀 예술적이네" 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 북유럽산 자작나무 펜스가 강남 최고급 백화점 VVIP 라운지에서만 주문할 수 있는 수백만 원짜리 수제 가구라는 사실을. 유준은 형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박스에 매직으로 대충 '당근 쿨거래 ㄳ'라고 적어두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띠링-

화기애애하게 펜스를 조립하려던 찰나, 유준의 주머니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한 유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김 실장님 (해성그룹 비서실)]**

"어… 형들, 저 화장실 좀!"

유준이 황급히 펜스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변기 뚜껑을 닫고 앉은 유준이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 [도련님. 언제까지 그 허름한 연희동 주택에서 서민 체험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회장님께서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고 계십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 실장의 냉랭한 목소리에 유준이 마른세침을 삼켰다.

사실 유준은 대한민국 재계 순위 5위 안에 드는 해성그룹의 막내손자였다. '밑바닥부터 부동산 실물 경제를 배우겠다'는 그럴싸한 핑계로 가출하듯 나와 이 셰어하우스를 차렸지만, 사실은 숨 막히는 집안의 통제와 정략결혼의 압박에서 도망친 것이었다.

"아유, 실장님. 제가 지금 밑바닥 서민 경제의 눈물겨운 애환을 몸소 체험하며 훌륭한 경영 후계자로 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껜 비밀로 좀…."

— [서민 경제 애환을 체험하시는 분이, 어제 압구정 백화점에서 스위스산 프리미엄 분유를 박스 떼기로 결제하십니까?]

"헉."

— [게다가 덴마크산 최고급 유기농 기저귀, 북유럽산 수제 자작나무 베이비룸… 도련님 개인 카드로 결제된 내역을 보고 회장님께서 '유준이가 어디서 혼외자라도 낳아 숨겨둔 거냐'며 뒷목을 잡으셨습니다.]

유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해성그룹의 정보력을 너무 얕봤다. 만약 할아버지가 이 집에 핏줄도 모르는 아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장 경호원들을 풀어서 아이를 보육원으로 보내버리고, 자신은 강제로 끌려가 감금당할 것이 뻔했다.

"아, 아닙니다! 오해예요! 그, 그 분유는…!"

유준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제, 제가 요즘 단백질 보충제로 분유를 먹거든요! 유기농이라 근성장에 아주 기가 막힙니다! 기저귀는… 그래! 우리 셰어하우스 형들 중에 현대 미술 하는 형이 있는데, 그 형이 기저귀로 '자본주의의 배설'이라는 엄청난 설치 미술을 하고 있거든요! 제가 후원자로서 팍팍 긁은 겁니다!"

— [……도련님. 그 말씀을 회장님께서 믿으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실장님! 저 한 번만 살려주세요! 진짜 혼외자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제가 조만간 집에 한 번 들어갈 테니까 방어 좀 해주세요, 네?!"

유준이 변기통을 부여잡고 싹싹 비는 사이, 화장실 문 밖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나유준! 안에 빠졌냐? 애 분유 온도 맞추게 빨리 나와봐!"

강태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 [방금… 애 분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 아, 아뇨! '내 분유'라고 한 겁니다! 제 근성장용 분유! 끊습니다, 실장님! 충성!"

유준이 황급히 전화를 끊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화장실 거울을 쳐다보며 유준은 자신의 뺨을 가볍게 쳤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이 완벽주의 변호사 형, 철없는 예술가 형, 눈물 많은 곰돌이 관장 형… 그리고 천사 같은 여름이까지.

'내가 지켜야 해. 할아버지한테 들키면 우리 셰어하우스는 끝장이야.'

비장한 각오를 다진 유준이 화장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어느새 핫핑크색 쿠션과 원목 펜스가 기괴하게 혼합된 혼종의 인테리어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안전한 펜스 안에서, 여름이가 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태준을 향해 기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어어! 온다, 나한테 온다! 이수야, 뒤에서 받쳐!"

태준이 넥타이도 잊은 채 바닥에 엎드려 여름이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빙구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엉망진창이고 우스꽝스럽지만, 너무나도 따뜻한 풍경.

유준은 남몰래 콧잔등을 찡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수백억짜리 주식이나 강남의 빌딩보다, 지금 이 거실의 풍경이 그에겐 훨씬 더 값지게 느껴졌다.

"형들! 제 근성장용 분유… 아니, 우리 여름이 맘마 제가 타올게요!"

재벌 3세 나유준의 이중생활은, 여름이를 위해 더욱더 치밀하고 처절해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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