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언제 돌아가려고요?”“상황을 봐야죠.”이담은 고개를 숙였다.“어차피 이제 이 손으로는 집도의로 일할 수도 없으니까요. 아예 다른 일을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지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이담은 연회장을 빠져나온 뒤 은호의 전화를 받았다.은호는 이담이 연회장에 있다는 걸 알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이담아, 무슨 일 있어?]이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아니에요. 그냥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회장에 무슨 모래가 있어...]은호는 그 말을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황급히 물었다.[누가 우리 이담이 괴롭혔어?]“아니에요.”[이담아, 오빠한테까지 거짓말할 거야?]이담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오빠, 저 집에 가고 싶어요.”이담에게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진짜 집이라고 부를 곳이 없었다.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대신 가슴 한구석이 아파왔다.[알겠어. 강준한테 데리러 가라고 할게.]용주시.통화를 끝낸 은호는 곧바로 연회에 참석하고 있던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부하는 이만옥이 이담에게 시비를 걸었고, 결국 이담을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전후 사정을 들은 은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우리 계열사 중에 하씨 집안과 협력하는 곳이 있어?”[용주시에 두 곳이 있습니다.]“전부 협력 끊어.”상대방이 당황했다.[하지만 하씨 집안과 협력을 끊으면 저희 쪽에도 손해가 클 텐데요?]“꼭 하씨 집안과 협력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며칠 뒤 권씨 가문은 하성그룹과의 협력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겠다고 발표했다.하성그룹의 지분도 모두 정리했다.이 소식을 들은 허미란은 사무실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하필 지금 이 시점에 권씨 가문이 협력을 끊다니!”비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듣기로는 큰사모님 때문이라고 합
“알겠어요.”여정아는 미소를 지으며 휴게실을 나왔다....휴게실에서 나온 여정아는 연회장 입구에서 지훈과 마주쳤다.잠시 멈칫한 여정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가갔다.“지훈아, 네가 여긴 웬일이야?”지훈의 표정은 차가웠다.“어머니가 이만옥 사모님을 여기로 부르신 겁니까?”여정아는 대답하지 않았다.“왜 그러셨어요?”지훈이 여정아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여정아는 시선을 피하면서 가방 끈을 꽉 움켜쥐었다.“네가 심이담한테 빠져드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어. 걔는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이담 씨가 저한테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일입니다. 어머니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난 네 엄마야.”“제가 납치됐을 때는요?”지훈의 목소리에 억눌린 분노가 묻어났다.“그때도 저한테 어머니였습니까?”그 말이 여정아의 가슴을 찔렀다.“지훈아...”“전 이해가 안 됩니다.”지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왜 꼭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십니까?”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불만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났다.“제 감정은 제가 알아서 결정하라고 하셨으면서 왜 이담 씨만큼은 선택하면 안 되는 겁니까?” “하진혁과 결혼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어머니가 예전에 사랑했던 남자의 아들과 결혼했던 사람이라서요?”여정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가방 끈을 움켜쥔 손이 떨렸다.“그만해!”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걸 깨달은 여정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리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그런 얘기는 다시는 하지 마.”더 이상 아들과 다투고 싶지 않았던 여정아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한편 이담은 직접 고승범을 찾아갔다.고승범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담이 먼저 말했다.“교수님이 어떤 입장인지 이해해요. 그러니까 더 이상 교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쯤에서 프로젝트에서 빠질게요.”고승범은 잠시 멍하니 이담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차라리 네가 나를 원망했으면 좋겠구나.”고승범이 무거운
고승범의 비서가 이만옥에게 다가가 뭔가를 속삭였다.이만옥은 그 말을 듣고서야 고승범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이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만옥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잠시 후 이만옥이 단상에 올랐다.먼저 나노 의약품 연구 성과를 축하하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뜻을 밝혔다.“나노 연구 프로젝트의 후속 협력은 하씨 집안과 고씨 집안이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역시 이씨 집안의 딸답게 당당했다.남의 축하연에 와서도 당당하게 조건을 내걸다니.고승범이 이만옥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조건이 무엇입니까?”“심이담 씨가 이 프로젝트에서 빠지는 겁니다.”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담에게 쏠렸다.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담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하씨 집안에서 저렇게까지 나오는지 의아해했다.하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이담이 한때 하씨 집안의 며느리였다는 사실을.고승범의 미간이 더욱 깊게 일그러졌다.역시나 예상했던 일이었다.지훈이 이담에게 다가가서 위로하려고 했지만 여정아가 막아섰다.하씨 집안의 일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섣불리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 하나 때문에 이만옥의 미움을 살 이유가 없었다.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고승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적인 감정을 이런 자리에서 꺼내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이만옥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그리고 이담을 한 번 흘겨본 뒤 고승범을 바라봤다.“그럼 따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답을 주시면 되겠네요.”이만옥은 축하연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자리를 떠났다.연회장 안에서 이담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게 됐다.즐거워야 할 연회 분위기는 이만옥의 발언으로 완전히 가라앉아버렸다.결국 중간에 행사를 잠시 멈추고 분위기를 정리해야 했다....민아는 휴게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차 안.진혁은 차창 너머로 이담을 바라보고 있었다.유리창에 비친 얼굴 한쪽에는 아직도 화상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가까이에서 보면 피부 곳곳의 색이 고르지 않은 것도 선명하게 드러났다.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이담의 모습은 유난히 여리고 가냘퍼 보였다.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진혁의 마음이 아팠다.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을 정도였다.“대표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주원 씨가 계속 재촉하고 계십니다.”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진혁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담의 앞을 그대로 지나갔다.하지만 이담은 알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고작 차창 하나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는 걸....1년 후.나노 의약품이 최초로 상용화됐고, 다음 날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이를 기념하는 축하연에는 업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재계의 주요 투자자들도 적지 않았다.안데르 교수는 해외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고, 결국 고승범이 이번 축하연을 직접 주최하게 됐다.고승범이 단상에 올라 축사를 시작했다.이담도 아래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연설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됐다.고승범은 단상에서 내려오자 이담을 불렀다.그리고 의료계 원로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전에 자네들에게 이야기했던 내 제자일세. 심이담이라고 하네.”“심이담이라고요? 이름이 꽤 익숙한데,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한 사람이 이담의 이름을 되짚어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사람이 말을 끊었다.“고 교수님께서 직접 아끼시는 제자라면 분명 남다른 실력이 있겠죠.”이담은 겸손하게 웃었다.“과찬이십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교수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에요.”고승범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그때 몇몇 사람이 고승범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훈의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고승범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이담은 보석함을 열었다.안에는 터키석 크리스마스 로즈 컬렉션의 팔찌가 들어 있었다.이 컬렉션은 몇 년 전 이미 판매가 중단된 제품이었다.전 세계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이담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이것도 살 수 있어요?”“사고 싶으면 살 방법이야 있지.”권은석이 으쓱하며 웃었다.“다른 집안 아가씨들이 가지고 있는 건 내 딸도 가져야지.”이담은 팔찌를 손목에 대보았다.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맞았다.“고마워요, 아빠.”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고용인이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이담이 문밖을 바라보자, 이내 손을 흔들고 있는 민아가 보였다.“친구니?”권은석이 물었다.이담은 웃으며 대답했다.“그게... 이씨 집안 아가씨예요.”“어느 이씨 집안?”“여주시 이씨 집안이요.”여주시 이씨 집안이라는 말에 권은석도 그제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 집안이구나.”민아는 얌전히 안으로 들어와서 권은석에게 인사를 건넸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저는 이민아예요!”권은석은 밝고 활발한 민아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물었다.“밥은 먹었니?”“감사해요, 아저씨. 저 방금 배불리 먹었어요. 그게...”민아가 이담을 바라봤다.“이담 언니 만나러 왔어요.”“그렇구나. 오늘이 크리스마스니까 밖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겠지?”권은석이 이담을 바라보며 말했다.“친구랑 나가서 바람도 쐬고 그러는 것도 좋지.”민아도 고개를 들고 맞장구쳤다.“맞아요. 오는 길에 보니까 사람이 진짜 많더라고요. 특히 쇼핑몰 근처는 엄청 붐볐어요!”이담은 민아의 성화에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나가기로 했다.밤 8시.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거리 곳곳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했고, 사람들 사이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적지 않았다.민아는 이담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누볐다.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눈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을 신기해했다.“여주시에도 이런 야시장 있지 않아요?”“있죠. 그래도 여기는 달라요.”
“엄청난 우연인 거죠.”민아는 제멋대로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지훈을 힐끗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저도 근처에 있었는데 마침 두 분이 보여서요!”민아가 샤브샤브를 바라봤다.“맛있겠다. 저도 같이 먹어도 되죠?”이담은 어색하게 웃으며 지훈을 바라봤다.지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담 씨가 사는 거니까, 이담 씨가 결정해요.”“그럼, 뭐...”“새언니 정말 최고에요!”민아는 웃으며 이담의 옆자리에 앉았다.식사를 하던 중 이담이 화장실에 가면서 두 사람만 남게 됐다.민아는 눈빛 하나 숨기지 않고 지훈을 도발했다.“제가 분위기 다 망쳐놔서 기분 나쁘시죠?”지훈이 피식 웃었다.“기분이 나쁘긴요? 오히려 그 사람이 더 속상하겠죠. 그러니까 당신더러 파리처럼 이담 씨 주변을 맴돌게 한 거 아니겠어요?”“내가 파리면 당신은 뭐예요? 두꺼...”민아가 지훈의 얼굴을 바라봤다.아무리 봐도 두꺼비 모습은 아니었다.민아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끈질긴 뱀! 껌딱지!”“그 두 가지는 하진혁 씨한테 잘 어울리겠네요.”“당신 진짜...”민아가 지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하지만 지훈은 조금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민아는 이를 악물었다.그러다 손을 거두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식사에 집중했다.한편 식당 화장실이 쇼핑몰 안에 있는 탓에, 이담은 화장실에서 나온 뒤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그때 앞쪽에서 사복 차림의 임용우와 한 남자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이담의 눈에 들어왔다.그 얼굴은 잠깐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익숙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남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임용우는 문 앞에 선 채 남자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닫힘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이담은 다급하게 그쪽으로 달려갔다.임용우가 몸을 돌리다 이담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이담 씨?”“방금 그 사람 하진혁 맞죠
“다 큰 어른이 뭐 하러 어린애와 사사건건 따져?”이담은 잠시 넋을 잃었다. 진혁이 자신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노골적인 편애에 마음은 미어질 듯 아팠다.이담은 눈이 시큰거렸지만 눈물을 애써 참았다.“전 밀친 적 없어요!”진혁은 피식 웃었다.“그럼 고작 몇 살짜리 애가 스스로 넘어지고 너를 모함한다는 거야?”이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상대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왜 설명했을까...이담은 눈을 내리깔고 안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오늘은 내가 재수 없었네요. 됐죠?”말을 마친 이담
진혁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초연의 손을 놓으려는 순간, 초연이 그를 꽉 붙잡았다.“진혁 씨, 나 아직도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나랑 같이 약 가지러 가줄 수 있어?”여린 이담의 모습이 사라지자, 미간을 찌푸린 진혁은 시선을 거두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동의했다.진혁은 초연과 함께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았다. 진혁에게 고개를 돌린 초연은, 그의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걸 발견하고는 싱긋 웃으며 다가갔다.“진혁 씨, 준희가 사립 유치원에 가고 싶어 해. 아직 가족관계기록부가 없어서 그런데, 잠시만 진혁 씨 아들로 올릴 수
이담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자를 바라봤다.“내가 무안을 줬다고?”‘그러니까 지금 문초연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거야?’“문초연은 네 상사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면 안 되지.”진혁은 업무를 처리하는 듯 공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부부의 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담은 쓰라린 마음을 애써 참으며 피식 웃었다.“집도의가 나라는 거 잊지 마. 나한테 그럴 권리도 없어?”“그러는 너야말로 잊었나 본데.”진혁은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집도의를 교체
진혁은 이담이 이혼을 언급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이혼은 안 돼.”이담은 잠시 멍해졌다.‘이혼하기 싫어하는 게 설마...’미처 희망을 품기도 전에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할머니도 동의 안 하실 거야.”곧이어 쾅 하는 문소리가 이담을 현실로 끌어당겼다.이담은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 순간 솜뭉치가 가슴을 꽉 막고 있는 듯이 답답했고, 자기 생각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하진혁이 나 때문에 이혼을 거절할 리 없지...’진혁은 단지 마동순이 동의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