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새벽 4시 10분.
국가 데이터 물류센터 3층 중앙 제어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천장 위 거대한 냉각 장치가 낮게 진동했고, 끝없이 늘어선 서버 랙의 LED 불빛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였다.
웅우우웅—
기계 팬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강시온은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한쪽에는 의자에 묶인 서유진.
다른 쪽에는 총과 전원 차단 장치를 동시에 쥔 남자.
제이드 리.
그리고 그의 발 아래엔 붉은 비상 차단 스위치가 놓여 있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국가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
공기 자체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제이드가 천천히 웃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저 여자를 구할지.”
철컥.
총구가 서유진 쪽으로 향했다.
“아니면 국가 시스템을 지킬지.”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전원 차단 장치 위에 올라갔다.
삐— 삐—
경고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오민석은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선택지가 너무 최악입니다…”
“조용히.”
임태건은 낮게 말했다.
총구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제이드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숨 쉬는 속도.
시선 방향. 손목 각도.단 한 순간의 빈틈이라도 생기면 바로 움직일 준비였다.
한채린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시간 끌지 마.”
그녀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제이드에게 고정돼 있었다.
“네 목적은 따로 있잖아.”
제이드는 피식 웃었다.
“역시 빠르군요, 한채린 실장.”
“인정 욕구형 범죄자는 티가 납니다.”
순간 제이드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웃었다.
“당신들은 늘 그래.”
“……”
“사람이 무너지기 전까진 아무것도 안 보지.”
강시온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처음엔 단순히 위험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분노.
흥분. 광기.그 안쪽에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억울함.
그리고—
누군가 자기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길 바라는 얼굴.
시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해임됐다고 했죠.”
제이드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서요?”
“억울했던 겁니까?”
한채린이 순간 시온을 돌아봤다.
예상 밖의 접근이었다.
임태건도 잠깐 눈빛을 움직였다.
이 상황에서 범인의 감정을 건드린다?
보통 협상 방식은 아니었다.
제이드는 비웃듯 말했다.
“동정이라도 하려고요?”
“아닙니다.”
시온은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 하는 짓은 최악입니다.”
“……”
“사람 겁주고, 다치게 하고, 나라 시스템을 인질로 잡는 거.”
시온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데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던 것 같진 않아서요.”
짧은 정적.
웅우우웅—
기계음만 낮게 울렸다.
제이드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마치 가장 숨기고 싶었던 부분을 들킨 사람처럼.
그는 낮게 웃었다.
“…대통령이 사람 심리 상담도 해줍니까?”
“아니요.”
시온이 솔직하게 말했다.
“저 원래 취업 면접도 계속 떨어지던 사람입니다.”
오민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자기소개…”
“근데 사람 표정 보는 건 좀 합니다.”
시온은 제이드를 똑바로 바라봤다.
“진짜 망가진 사람 눈은 다릅니다.”
제이드 입꼬리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삐— 삐—
경고음이 더 날카롭게 울렸다.
제이드는 낮게 말했다.
“난 이 나라를 지키려 했습니다.”
“……”
“수십 번 경고했죠.”
그의 목소리에 억눌린 분노가 섞이기 시작했다.
“보안 허점.”
“내부 데이터 거래.” “권력층 커넥션.” “불법 정보 유출.”그는 이를 악물었다.
“근데 아무도 안 들었습니다.”
“……”
“다들 조용히 덮으려고만 했어요.”
한채린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테러를 했나?”
“그래야 들으니까!”
제이드가 소리쳤다.
그 순간 서버실 공기가 크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조용히 말하면 아무도 안 듣잖아!”
그의 목소리엔 분노보다 절망이 더 짙게 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시끄러운 것만 봐!”
“피 흘려야 관심 갖고!” “터져야 움직인다고!”정적.
오민석도 말을 잃었다.
임태건조차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강시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틀린 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은 종종 조용한 경고를 무시한다.
큰 사고가 터진 뒤에야 후회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시온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단단했다.
“당신 말이 맞았더라도.”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사람을 다치게 하면 틀리는 겁니다.”
제이드 눈동자가 흔들렸다.
“……”
“억울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 인생까지 망가뜨릴 권리는 없어요.”
그 순간.
의자에 묶인 서유진이 몸부림쳤다.
“읍…! 읍!”
한채린 시선이 흔들렸다.
묶인 채 눈물을 참고 있는 친구.
늘 시끄럽고.
장난 많고. 자기보다 남 걱정 먼저 하던 사람.그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유진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차갑고 완벽하던 한채린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서유진은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괜찮다는 듯.
자신 말고 상황부터 보라는 듯.
그 눈빛을 본 순간 한채린 입술이 작게 떨렸다.
강시온은 그 장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한서준은 동생을 한번 살폈다.“얼굴 좋아졌네.”“갑자기?”“전에는 맨날 피곤해 보였잖아.”한채린은 대답 대신 보온병을 내려다봤다.한서준이 돌아섰다.“센터 들어간다.”“응. 조심해서 가.”몇 걸음 가던 그가 돌아봤다.“둘 다 무리하지 마.”강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예.”한서준은 그대로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강시온이 작게 물었다.“저도 포함해서 걱정해 주신 거 맞죠?”“욕심내지 마십시오.”한채린이 먼저 걸었다.강시온이 웃으며 따라갔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박은호가 보낸 메시지였다.「제이드 리 관련 최종 보고. 치료 종료 후 보호 관찰 전환. 잔여 조직 수사 협조 완료.」그 아래에는 제이드 리가 남긴 문장이 있었다.「이제는 남이 정한 길 말고 제 길로 가보겠습니다.」강시온은 화면을 잠시 바라봤다.“좋은 소식입니까?”“예.”그는 휴대전화를 넣었다.“이번에는 정말 자기 선택대로 살아보겠답니다.”한채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7시 15분.대통령 관저 정원.공식 일정이 끝난 뒤 강시온은 약속대로 한채린과 저녁을 먹고 정원으로 나왔다.휴대전화가 울렸다.루카가 보낸 사진이었다.야외 카페에서 엘리아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데이트 중입니다. 대통령님도 열심히 하세요.」강시온이 피식 웃었다.“이 사람은 연애를 해도 여전하네요.”한채린이 사진을 확인했다.“엘리아나 씨가 고생하시겠네요.”“그래도
몇 달 후.오전 8시 30분.대통령 관저 집무실.강시온은 책상 위의 보고서 첫 장을 바라봤다.「뉴(New) 세계 평화 프로젝트 제1차 공동운영회의」첫 장 아래에는 한 사람의 이름 대신 참여국들의 서명이 빼곡했다.“현재 참여국은 62개 국가입니다.”한채린이 태블릿을 확인했다.“오늘 회의 이후 추가 참여를 결정할 국가도 있습니다.”강시온이 다음 장을 넘겼다.“최고 승인권자는 없고요?”“없습니다.”“후보 평가도?”“없습니다.”“몰래 사람을 관찰하는 일도?”한채린이 그를 바라봤다.“그 질문을 매번 하실 생각입니까?”“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요.”강시온이 웃었다.과거의 세계 평화 프로젝트 자료는 공개됐고.누군가를 몰래 고르고 움직이던 조직은 사라졌다.새 프로젝트는 각국이 같은 권한으로 참여하고 주요 결정과 예산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사람을 선택하는 계획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움직이기 위한 약속이었다.강시온은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했다.“이제 조금 실감이 나네요.”“무엇이 말입니까?”“이전과는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는 게요.”“시작만 했습니다.”“좋은 분위기를 오래 두는 법이 없으시네요.”“오늘 일정이 많으니까요.&rdquo
강시온이 천천히 웃었다.“그러면 한 번 더 해도 됩니까?”이번에는 한채린이 대답 대신 그의 재킷을 가볍게 잡아당겼다.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조금 길었다.멀리서 사람들의 박수가 다시 터졌다.World Harmony Fest의 마지막 순서가 끝나고 있었다.두 사람이 천천히 떨어졌다.한채린이 말했다.“이제 정말 돌아가셔야 합니다.”강시온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같이 가시는 거죠?”“예.”강시온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한채린은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행사장으로 돌아갔다.오후 7시 34분.World Harmony Fest 메인 행사장.마지막 공식 일정까지 모두 끝난 뒤였다.루카는 무대 뒤 통로에 기대 서 있었다.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아직 안 가셨어요?”루카가 고개를 들었다.엘리아나가 걸어오고 있었다.“누굴 좀 기다렸어요.”“누구를요?”루카가 웃었다.“그걸 꼭 물어봐야 알아요?”엘리아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오늘 무대 좋았어요.”“봤어요?”“네. 끝까지요.”루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럼 됐네요.”“뭐가요?”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한채린의 말이 끝난 뒤 강시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수없이 미뤘던 말인데, 막상 허락을 받고 나니 준비했던 문장들은 필요 없었다.“좋아합니다.”한채린의 눈빛이 멈췄다.“한채린이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처음에는 저도 잘 몰랐습니다.”강시온이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늘 옆에 계셔서 의지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일이 없어도 보고 싶었고, 안 보이면 찾게 됐습니다.”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대통령이라서 제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비서실장이라서 옆에 계셨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요.”강시온은 결국 가장 쉬운 말로 돌아갔다.“그냥 제가 한채린이라는 사람 옆에 있고 싶습니다.”한채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제가 너무 늦었습니까?”“많이 늦으셨습니다.”강시온의 표정이 굳자 한채린이 아주 작게 웃었다.“그래도 기다렸습니다.”이번에는 강시온이 말을 잃었다.한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도 처음에는 이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각하를 걱정하는 것도, 찾는 것도 업무라고 생각하면 편했으니까요.”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걸 업무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해
한채린이 그를 바라봤다.“그렇게 멀리 앉으실 필요는 없습니다.”강시온이 고개를 돌렸다.“가까이 앉아도 됩니까?”“아까는 제 어깨에도 기대셨잖습니까.”강시온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건 꽤 강력한 근거네요.”그는 한채린의 옆자리에 앉았다.어깨 사이에 손 하나 들어갈 만큼의 거리만 남았다.멀리서는 아직 박수와 음악이 이어지고 있었다.한채린이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소리가 멀게 들립니다.”“저도요.”강시온은 정면을 바라봤다.“지금은 저쪽보다 여기가 더 신경 쓰여서요.”한채린의 손이 무릎 위에서 잠깐 멈췄다.강시온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대신 자신의 손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한채린도 손을 치우지 않았다.둘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였지만, 먼저 물러나는 사람도 없었다.서로 기대지도, 붙잡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굳이 멀리 있을 이유가 없는 사이 같았다.강시온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한채린이 그 움직임을 보고 물었다.“왜 그러십니까?”“괜히 손이 움직일 것 같아서요.”“무슨 뜻입니까?”강시온이 그녀의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오늘은 안 잡으려고요.”한채린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왜요?”이번에는 질문이 그녀에게서 먼저 나왔다.강시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6시 19분.World Harmony Fest 행사장 뒤편 정원.강시온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한채린의 태블릿이 무대 뒤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정원 끝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한채린은 난간 앞에 서서 멀리 행사장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늘 다음 일을 준비하던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한채린이 먼저 그를 알아차렸다.“각하.”강시온이 가까이 다가갔다.“여기 계셨습니까?”“잠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태블릿까지 두고요?”한채린이 짧게 웃었다.“그 정도로 급하게 나온 건 아닙니다.”“저한테는 꽤 큰일처럼 보였습니다.”“왜요?”“한 실장님이 태블릿을 두고 자리를 비우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한채린은 다시 행사장 쪽을 바라봤다.멀리서 폐막을 알리는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강시온은 그녀 옆에 섰다.이번에는 이유를 재촉하지 않았다.잠시 뒤 한채린이 먼저 말했다.“연설을 듣고 있으니까 조금 이상해졌습니다.”“뭐가요?”“처음 각하를 만났던 날이 생각났습니다.”강시온의 표정이 멈췄다.대통령이 된 이유조차 몰랐고, 일정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날.“좋은 기억은 아닐 것 같은데요.”“그때는 아니었습니다.&rdq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