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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Author: 네입클로버
“할머니...”

강지연은 이제 더 이상 할머니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랑 온하준은 사실 안 맞아요. 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온하준은 제가 그를 구해줘서 저랑 결혼한 거예요. 사실 온하준은 저를 좋아하지도 않고 저도 이제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헤어지는 게 맞아요.”

홍순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강지연을 꼭 끌어안았다.

“결혼이라는 게 억지로 한다고 되는 건 아니야. 할머니도 다 알아. 행복하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는 게 더 나은 일이지. 그런데 너 며칠 뒤면 출국이잖니. 하준이한테는 계속 말 안 할 거니?”

강지연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을 꺼내는 순간 온하준이 어떻게든 막아설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건 그 뒤에 펼쳐질 파장이었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떠나면 온하준도 나중에 알아차릴 거로 생각했다.

“할머니, 말할 거예요. 적당한 때를 정해서요.”

‘떠나는 날 온하준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면 되겠지.’

강지연은 홍순자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할머니, 저 오늘 할머니랑 같이 잘래요.”

“그래.”

홍순자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할머니, 여권은 며칠 뒤 집으로 바로 배송될 테니 안심하세요. 제가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때 함께 비자도 신청하시면 돼요. 그러면 아마 8월 안으로 고모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알았어.”

눈을 떠보니 출국까지 남은 기간은 닷새였다.

남은 닷새 동안 강지연은 집에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오전에는 한의원에 가서 치료받고 오후엔 할머니 곁에 붙어 있을 작정이었다.

배우진이 책임감을 가지고 끝까지 재활을 끌어가 주길 바랐던 만큼 그녀는 며칠 만이라도 더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날 아침, 할머니와 마주 앉아 아침을 먹으려는 그때 마당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

강지연의 아버지 강성호의 목소리였다. 강지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인간이 왜 온 거야?’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강성호는 이미 집 안으로 들이닥쳤고 그 뒤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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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209화

    강지연이 샤워를 마치고 장시범이 사다 준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대충 정리를 끝냈을 즈음,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저예요. 먹을 것 좀 사 왔어요.”문을 열자 장시범이 양손에 커다란 봉투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봉투 안에는 식당에서 포장해 온 음식들과 과일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배고팠죠? 빨리 드세요.”장시범은 웃으며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음식을 펼쳐놓으며 말을 이었다.“선배가 뭘 좋아하시는지 잘 몰라서요. 그냥 이것저것 아무거나 조금씩 사 봤어요.”강지연이 음식을 쭉 훑어보자 결코 ‘아무거나’가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었다.그중 특히 눈에 들어온 건 담백한 생선찜 요리였다. 그녀가 예전부터 가장 좋아하던 메뉴였다.강지연은 담백한 맛을 좋아했지만 온하준은 늘 얼얼하게 매운맛을 선호했다.폭풍 같은 오전을 겪었던지라 현재 강지연과 장시범은 극도로 허기진 상태였다.두 사람은 생선 한 마리와 국 한 그릇, 볶음요리 하나, 나물 반찬 하나를 모조리 싹 다 해치웠다.장시범이 웃으며 말했다.“선배, 우리 춤추던 사람들 같지가 않네요.”강지연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내려놓은 지 오래야.”그래도 식습관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오랫동안 몸을 관리해 온 탓인지 평소의 강지연은 과하게 먹는 일이 드물었다.“선배, 열정은 이곳에 있는 거죠. 겉모습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장시범이 가슴을 꾹 누르며 그녀를 바라보자 강지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선배, 이제 좀 쉬세요. 저는 옆방에 있을 거니까 필요하시면 부르시고요.”장시범은 재빨리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물건들을 치운 뒤 강지연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맞다. 아까 경찰에 신고했으니 뒷일은 경찰이 알아서 처리할 거예요.”오늘 일은 그녀에게 분명 큰 충격이었다. 온하준이라는 인간은 원래부터 짐승 같은 놈이었지만 오늘의 선택은 특히나 사람 마음을 깊게 후벼 팠다.장시범은 일이 정리되면 온하준이 틀림없이 강지연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208화

    이제 안전해지긴 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다.괜찮냐고 묻는 장시범의 질문에 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끝은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방금 잡혔던 손목은 붉게 부어올라 있었고 피부 안쪽이 저릿하게 쑤시는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그런데 넌 어떻게 거기 나타난 거야?”강지연의 질문에 장시범은 자초지종을 쭉 들려줬다.이맘때면 바로 옆 지방에서 체리가 한창 익는 철이었다. 체리는 그리 비싸고 진귀한 과일은 아니었지만 장시범의 어머니인 장 여사가 유독 좋아하는 과일이었다.그는 해마다 직접 체리 농장을 찾아가 가장 싱싱한 체리를 따서 어머니께 가져다드리곤 했다.요즘처럼 물류가 발달해 있고 장 여사의 경제력이라면 어떤 과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건 장시범이 끝까지 고집하는 그만의 효심이었다.그래서 어젯밤에도 그는 체리 농장으로 향했고 한밤중에 가장 알찬 체리를 딴 뒤 새벽에 해성으로 돌아왔다.원래 점심 비행기로 진경시에 갈 예정이었는데 문득 강지연도 체리를 좋아한다는 게 떠올라 가는 길에 두 상자를 놓고 가려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그러나 강지연의 집 앞에 도착해 계속 전화를 걸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두 남자가 큰 상자를 들고나왔고 장시범은 그 틈을 타 체리 상자를 둘로 나누어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장시범은 강지연이 몇 층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불쑥 찾아가는 것이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체리는 신선도가 떨어지면 맛도 떨어지는 과일이라 그녀가 집에 없다면 가정부에게 전해두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올라가는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강지연은 끝내 받지 않았다.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집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녀의 휴대전화는 집 안에서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장시범이 문 앞에서 한참을 불러도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이상하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자 문 앞에 놓여 있던 배달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순간, 장시범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까 커다란 가전제품 상자를 들고 나가던 두 남자가 떠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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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죽기를 기다려야 되는 거야?’아니, 그 전에 누가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라도 알아야 했다.“당신들 뭘 하려는 거야?”그녀는 가능한 한 차분히 물었다. 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가까운 거리에서 감시할 뿐이었다.강지연은 돈이 필요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사람 마음은 한순간 탐욕으로 뒤집히는 법이고 혹시라도 자신이 돈이 있다는 힌트를 주면 상황이 더 악화할 것 같았다.삼십 분쯤 지났을까, 새로운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뒤이어 강성호와 이하나도 끌려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눈이 가려진 채였다.난간도 없는 계단으로 질질 끌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강지연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우리 세 사람 다 납치당한 거야? 그러면 이건 저 아버지라는 인간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네. 목표는 온하준한테서 돈을 요구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온하준은 반드시 오겠네. 나 때문이 아니라 이하나 때문이라도.’강성훈과 이하나도 강지연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놔! 얼마면 되는데! 필요한 금액을 말하라고!”이하나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하하, 돈이 꽤 있는 모양인데? 그러면 두 배로 올릴까?”이하나를 끌고 온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입은 남자가 비웃었다.강지연을 납치한 초록색 점퍼 남자가 이하나를 보며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이 여자는 누구야? 도대체 누구를 잡아 온 거야?”“온하준의 아내라는데?”초록색 점퍼를 입은 남자는 강지연을 가리키며 말했다.“뭐? 온하준 아내? 그러면 이 여자는 누구야?”“내가 어떻게 알아!”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너희 엉뚱한 사람 잡아 온 거 아니야?”“온하준 집에서 데려왔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그러면 우리가 잡아 온 저 여자는 뭐야? 요즘 뉴스에 같이 나올 정도로 온하준이랑 붙어 다니던데?”“그러면 뭐야? 아내가 둘이야? 아니면 하나는 내연이겠지. 부자들이 원래 그러잖아.”“둘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지.”초록색 옷을 입은 남자가 강지연과 이하나를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204화

    강지연은 방금 본 예능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 입가에 웃음이 배어 있었다.“김도윤더러 이하나 잘 챙겨주라고 부탁하더라. 너는 이하나를 너무 사랑하지만 이번 생에는 나를 책임져야 한다고.”“끝이야?”온하준이 강지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응. 뭘 더 말했을 것 같아서 찔려?”강지연이 웃으며 되묻자 온하준은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아니, 전혀.”“그러면 됐네. 방해하지 말고 비켜.”강지연은 온하준의 손을 치우고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켰다.“화 안 내?”온하준은 강지연의 웃는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화를 왜 내? 이 예능프로가 얼마나 웃기는데.”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다시 크게 웃었다.그 웃음도 잠시, 온하준이 그녀를 불쑥 껴안으며 뒷머리를 살짝 눌러 자기 어깨에 파묻었다.“강지연, 할머니 언제 돌아오셔?”“왜?”강지연은 온하준이 혹시 눈치를 챈 건 아닌가 싶어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모레 어때? 모레부터 며칠 한가하거든. 우리 할머니 모시고 여행 가자. 약속했잖아.”“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할머니가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겠어.”강지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지? 모레면 할머니와 함께 여행가는 건 맞지만 그 여행에 너는 없어.’“할머니는 도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신 거야? 왜 이렇게 오래 계셔?”온하준의 말투는 걱정을 넘어 심지어 투정에 가까웠다.“내 할머니야. 네가 왜 걱정해?”“네 할머니면 내 할머니잖아.”그는 벌떡 일어나 바지를 챙겨 입었다.“됐어. 나 이제 출근해야 해. 오늘 중요한 일 있어.”강지연은 대꾸도 하지 않고 예능을 보며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아침 못 해줘. 너 알아서 시켜 먹어.”온하준은 말을 마친 뒤 급히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문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강지연은 홍순자에게 영상을 걸었다.할머니는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갓 돌아온 참이었고 얼굴색이 매우 밝았다.그제야 마음을 놓은 강지연은 뭔가를 챙겨 먹으려고 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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