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강지한을 정말 화나게 하면 그는 정말 의료진을 철수시킬 가능성이 있다.그렇게 되면 외할머니는 치료를 받지 못하고 눈 뜨고 죽을 수밖에 없다.“화나지? 나를 물어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지?”강지한은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만지며 직설적으로 말했다.“결국, 네가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잡히는 거야.”심미연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강지한의 말대로 확실히 그녀는 강하지 못하다.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강지한을 떠날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떠나 지금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내가 말했잖아. 순순히 내 곁에 있으면서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을 갖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의 외할머니는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강지한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예전에 그는 심미연과 잠자리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었고 심미연에게 뭘 시키든 그녀는 순순히 따랐다.지금 심미연은 그와의 스킨십을 거절하고 있다. 그가 심미연에게 뭔가 시켜도 그녀는 이리저리 미루고 있다.그는 심미연이 그 통제할 수 없는 사고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는 그녀가 영원히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비열한 수단일지라도 말이다.강지한이 외할머니로 위협하니 심미연은 울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울 수도 없었다.생각을 정리하고 그녀는 화장대에 가서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아래층, 차 안.강지한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차 문은 닫지 않았는데 남자의 얼굴은 반쯤 불빛 속에서 잘생긴 윤곽만 보였다.심미연은 그가 온지유와 전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온지유와 통화할 때만 이렇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이 멈춘 그녀는 다가가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면 좀 곤란할 것이다.강지한은 전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다가 여자의 예쁜 눈동자를 마주했다.그 순간 마음속에 어느 정도 기쁨이 일렁이었다.마치 예전에 집에 돌아가면 여자의 모습을
심미연은 이제 강씨 가문 사모님을 직업으로 생각하는 간가?그녀는 그에게 협조하고 있다. 사랑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분명히 이것은 그가 원하는 결과인데 왜 그는 여전히 즐겁지 않은 걸까.심미연은 다리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감정에 조금도 기복이 없었다.그녀는 일에 대해 줄곧 진지한데 이 일은 외할머니가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외할머니의 건강만 좋아지신다면 자기를 팔더라도 상관없었다.강지한은 기분이 좋지 않아 차를 빨리 몰았고 가는 내내 두 사람은 더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강지한도 말을 하지 않고 심미연도 말을 하지 않았다.곧 차가 레스토랑 문 앞에 세워졌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에게 차 키를 던져주고 주차를 맡긴 강지한은 심미연을 향해 구부린 팔을 내밀며 많다.“팔짱 껴.”심미연은 그를 힐끗 보고 순순히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고 억지로 다정한 척했다.“울상 짓지 말고 미소 좀 지어.”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힘을 주어 얼굴에 옅은 자국을 냈다.심미연 눈썹을 찡그린 채 다행히 옅은 화장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이 힘으로 화장이 모두 번졌을 것이다.“언니, 형부, 오셨어요? 빨리 들어가세요!”심서연의 목소리에 심미연은 들어 고개를 들어 눈앞의 심서연를 바라보았다.특별히 빨간 외투를 입어서 그녀의 피부는 더 검게 보였다.방금 외출할 때 그녀는 강지한이 어디로 밥을 먹으러 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는데 뜻밖에도 그녀를 여기에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현재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알고 있어서 그녀의 마음은 매우 평온했다.이것은 단지 일에 불과하니 정서적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언니, 얼굴이 왜 안 좋아 보여? 아픈 거 아니야?”심서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고 두 눈은 심미연 몸을 왔다 갔다 하며 훑어보았다.그녀는 철이 들었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심미연이 예쁘고 다재다능하며 배우는 대로 할 줄 아는 천재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가끔 사람들은 심미연을 추켜세움과
박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심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제대로 앉아.”그와 심서연 사이는...거래일 뿐이었다.사랑하는 척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면 되는데 그러는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룸에는 모두 지인들이니 유진 씨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심서연은 박유진의 보기 흉한 안색을 보지 못한 척하면서 한쪽 팔을 다시 뻗어 그의 허리를 껴안고는 나긋나긋하고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에게 어떻게 질 수 있겠는가.짙은 향수 냄새가 코에 파고들자 박유진의 부드러운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더니 심서연를 밀치고 일어섰다.“나가서 담배 피우고 올게.”더 있으면 그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온화한 가면을 직접 뜯어낼 것 같았다.“박유진! 가지 마!”심서연은 씩씩거리며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아당겨 가지 못하게 했다.그가 가면 그녀의 체면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이미자의 안색이 좀 안 좋게 변했다.심서연은 횡포만 부리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니 앞으로 어떻게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것인지 걱정스러웠다.박지훈은 침묵한 채 마음속으로 심서연이 박씨 가문에 시집오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박유진이 원한다니 그도 막기가 쉽지 않았다.심동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조은하에게 눈짓하자 조은하가 급히 일어나서 심서연을 말렸다.“빨리 앉아. 여기서 창피하게 굴지 말고.”“엄마...”심서연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은하는 표정이 어두워진 채 그녀를 의자에 눌러 앉혔다.“조용히 있어.”그녀는 박유진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심서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이런 장소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방임할 수는 없었다.박씨 가문은 아직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일단 사이가 틀어지면 박씨 가문은 여러 가지 구실을 찾아 결혼을 지연시킬 것이다.심서연은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얌전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조은하는 그녀를 힐끗 본 후 박유진에게 말했다.“유진아, 너 담배 피우러 가.”박유진은 강지한 앞에
눈을 마주친 박지훈과 이미자는 마음이 서로 달랐다.박지훈은 박유진이 심서연과 결혼하면 앞으로 강지한과 한 가족인데, 만약 바렐 그룹과 이노 하이브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바렐 그룹의 미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미자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건 박유진이 심서연과 결혼한 후에 심미연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끊으리라는 것이다. 아들은 그녀가 키웠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책임감이 있고 감정을 중시한다. 유일한 결점은 너무 감정이 한결같다는 것이다.그때 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밥을 먹어요? 심미연이 배가 고파요.”심미연은 식사 시간이 항상 규칙적이었는데 매일 저녁 6시 반에 식사를 시작했다.갓 결혼한 그 기간에 심미연은 매일 그가 집에 돌아와 함께 먹기를 기다리며 음식을 한 번또 한 번 데웠다. 후에 그녀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밥을 먹고 바로 치웠다. 때로는 그가 집에 돌아와 조금도 먹지 못했다.지금 벌써 8시가 다 되어 가니 그녀는 틀림없이 배가 고플 것이다.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데 조금만 더 굶으면 몸이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심미연은 눈을 들어 그를 한 번 보고는 마음속으로 어이없게 웃었다.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생사도 돌보지 않는데 그녀가 배고프든 말든 상관할 리 없지 않은가?강지한이 아무리 그녀가 배고플 거라고 해도 그들은 못 들은 척하며 얼버무릴 뿐이다.조은하는 심미연이 배가 고프다는 말을 듣고 조건반사처럼 욕설을 퍼부었다.“굶어 죽어도 싸!”어려서부터 심보가 사나운 사람인데 누가 그녀의 생사에 관심이 있겠는가.차가운 눈빛으로 조은하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몸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심미연의 등에 흉측한 흉터가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심미연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고 심미연은 어머니가 화상을 입었다고 말했다.그는 사람을 찾아 두 사람의 DNA를 조사했는데 모녀가 확실했다.그는 어떻게 딸에게 그렇게 독한 어머니가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강지한을 바라보며 예쁜 두 눈에 의외라는 눈빛이 가득했다.‘이 남자 오늘 약 잘못 먹은 거 아니야?’온지유 앞에서는 한 마디도 안 해주던 사람이 계속 도와주다니?심서연은 화가 나서 손을 들어 심미연을 때리려 했지만 결국 누군가 손목을 가로챘다. 잡힌 손목은 부러질 것처럼 아파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아파, 놔! 심미연 너 이거 놔!”심미연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무슨 손을 놓는단 말인가.그러나 강지한의 행동은 정말 알 수 없었다.오늘 왜 계속 도와주는지 정말 의아할 나름이었다.“개도 주인을 보면서 때린다는데 심미연은 지금 강씨 가문 사모님이야. 감히 내 앞에서 미연이를 때리려 하다니. 겁대가리 없구나. 당장 사과해!”강지한의 눈에는 냉기가 감돌아 현장을 얼어 붙일 것 같았고 목소리는 뼈를 찔렀다.심미연 마음속에서 막 생겨난 그 한 가닥의 호감은 지금 깨끗이 사라졌다.그녀는 그를 생명의 지푸라기로 여겼는데 그는 그녀를 개로만 여겼다.심서연이 그녀를 상대하는 것은 강지한의 꼬리를 밟아서이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나...”심서연이 막 말을 하려고 하자 남자의 매서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사과해! 빨리!”‘이 여자가 내 앞에서 감히 이렇게 날뛰고 건방지다니. 흥!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심서연은 이를 악물고 아무렇게나 말했다.“미안해.”어쩐지 강지한이 오늘 줄곧 그녀를 겨냥하여 심미연을 대신해서 화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전에 인터넷에서는 이 두 사람의 불화설이 돌며 강지한은 밖에 애인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강지한은 심미연을 돕고 있는 거지? 일부러 연기하는 건가?’그런 생각에 심서연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신이 진실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심미연은 그녀처럼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위로가 되었다.심미연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녀는 즐겁고 심미연이 행복하면 그녀는 화가 나서 죽고 싶었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다 심미연 이 천한 년 때문이야.’박지훈과 이미자는 줄곧 이 모든 것을 차갑게 지켜보며 심서연에 대한 마음속의 인상은 극도로 나빠졌다.이런 며느리를 집에 들이면 정말 가문이 불행해질 것 같았다....복도 끝에서 박유진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 연기는 밤 빛 속에 감돌며 마치 그의 지금 심정처럼 복잡하고 어수선했다.담배꽁초를 비벼 끈 그는 확고한 발걸음으로 룸에 돌아와 사람들을 훑다가 마침내 심미연에 눈빛이 고정되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의 사랑은 조수처럼 용솟음쳤고 모든 세포는 그녀에 대한 갈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그윽하고 열렬하여 마치 그녀를 그 속에 빨아들이려는 것 같았는데 숨길 수 없는 사랑은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눈 부신 빛을 반짝였다.심미연은 그 뜨거운 눈빛을 느끼자 고개를 들어 박유진의 시선과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 속에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강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이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강지한의 목소리가 갑자기 이 평온을 깨뜨렸다.“예전에 장모님에게서 말씀 들었어요. 박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혼인을 맺는다고 하던데 날짜는 잡았어요?”“지금 날짜를 고르고 있는데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심동현은 심서연을 잡아당기며 웃는 얼굴로 강지한에게 물었다.“아니면 사위가 날짜를 정할래?”어차피 양측 모두 합의를 봤으니 날짜는 누가 정해도 상관없었다.강지한은 핸드폰으로 달력을 뒤졌는데 심미연은 그의 모습이 마치 사기꾼처럼 느껴졌다.‘이렇게 진지하게 날짜를 고르다니.’"그럼 1월 1일 양력설 날로 해요. 아직 20일이 남았으니 준비할 시간이 좀 있어요.”강지한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살짝 감돌았다.두 사람이 약혼했으니 앞으로 박유진이 더는 심미연을 넘보지 않을 것이다.그는 사심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심서연은 멍하니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심동현의 손을 당기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빠, 1월
“살살 해, 나 아파.”심미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강지한을 밀쳤다.이 남자는 정말 여자를 아낄 줄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의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고 방금 얼굴도 그의 가슴에 부딪혀서 심하게 아팠다.“함부로 보지 마!”강지한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말했는데 말투는 위협적이었다.심미연은 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뻗어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며 난처함을 숨기려 했다.박유진이 먼저 찻잔을 들고 그녀 앞에 건네주었다.“네가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기억해. 너는 차의 향을 좋아하지 않잖아. 좋아하지 않으면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지 마.”말 속에 또 다른 말이 들어 있었다.찻잔이 앞에 있는데 심미연은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어려서부터 차 마시는 것을 싫어했는데 차향이 싫어서 그랬다.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녀는 박유진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강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가 여기에 있는데 박유진이 뜻밖에도 심미연에에 아첨하며 또 오해를 사는 말을 했다.‘내 존재를 무시하는 거야?’“유진 씨, 나 차 좋아해. 내가 마실게.”심서연은 기분이 나빠져 차를 달라고 했다.‘심미연 이 더러운 년, 이미 결혼했는데도 내 남자를 유혹하려 하다니. 참 뻔뻔해!’박유진은 심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안 마실 거야?”심미연은 진퇴양난에 빠져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잔에 든 차를 한입에 다 마셨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심미연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네가 주량이 좋다는 걸 알아. 오늘 이 경사스러운 날에는 당연히 한 잔을 마셔야지.”박유진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술을 부인에게 마시게 하면 괴로워하지 않겠어요? 강 대표님은 정말 여자를 아낄 줄 모르는군요."심미연은 주인공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눈썹을 찌푸리고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강지한이 먼저 가로챘다.“미연이는
그는 느릿느릿 말했지만 말투가 무거워 고마움이 느껴진 게 아니라 오히려 귀띔하는 것 같았다.술잔을 든 손을 심하게 떨며 심동현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말도 더듬었다.“부모로서 미연이를 잘 대해주는 건 당연한 거지. 우리 사위 너무 겸손해.”조은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미연아, 앞으로 집에 자주 와. 우린 모두 네가 보고 싶었어.”강지한의 뜻을 알아차린 조은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한이 바람이 났다며 왜 아직도 심미연에게 신경 쓰는 거지? 앞으로 심미연에게 잘해줘야겠어. 그러다가 강지한이 회사에 투자하지 않으면 어떡해? 아니면 내일 심미연을 데리고 옷이나 두 벌 사주며 잘 보여야겠어.’심서연은 화가 나서 두 손을 꼭 잡으며 심미연을 죽이고 싶은 마음조차 생겼다.강지한은 술잔에 든 술을 다 마신 후 고개를 돌려 심미연에게 말했다.“미연아, 술 따라야지!”조용하고 얌전한 심미연을 보며 강지한은 마음이 편해졌다.심미연은 그를 힐끗 보며 술을 따랐을 뿐 부모님이 하는 얘기를 한 글자도 듣지 않았다. 이미 남남이기 때문에 그들과 친한 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두 번째 잔은 강지한이 박지훈과 이미자에게 권했다.다 마신 후 그는 또 심미연더러 술을 따르게 했다.심미연은 맞은편에 앉은 박유진을 슬쩍 보았는데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아마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술을 더 마시면 힘들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강지한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진 오빠는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지한 씨 함께 마시지 마. 일이 생긴다면 지한 씨책임도 있어.”점심에 알코올 중독이 될 때까지 마셨으니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강지한은 얼굴이 어두워졌다.“넌 강씨 가문 사모님이야.”그는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말할 때 언성을 높였다.‘이 여자가 남의 편을 들다니! 박유진을 도와줘?’그는 마음이 불쾌해졌다.“내가 강씨 가문 사모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게 놔둘 수 없어.”맞은편에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