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심미연과 신하린은 주얼리 샵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우연히 가게 안에서 반지를 고르고 있는 여자가 익숙한 얼굴이라는 걸 느꼈다. 그녀는 신하린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갔고 그 여자가 다름 아닌 5년 전 남편의 불륜과 가정폭력으로 리우를 찾아와 이혼 소송을 맡겼던 나윤미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그때 심미연은 리우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 사건은 스승님이 맡으셨다. 그런데 그 이혼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스승님이 갑자기 투신자살하셨다. 그녀는 스승님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이 까다롭고 종종 화를 내기도 했지만 절대 자살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세상을 떠난 후 심미연은 나윤미를 찾아가 상황을 물어보려 했지만 나윤미는 집을 팔고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 후 5년 동안 심미연은 계속해서 스승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추적했으며 나윤미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윤미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듯 아무런 유용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갑자기 그녀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자 심미연은 문득 나윤미가 이 5년 동안 경성 어딘가에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은 어떤 액세사리를 찾고 계시는가요?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직원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신하린은 가방에서 남자가 준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안쪽에서 천천히 고를게요. 괜찮죠?” 직원은 카드를 보고 깜짝 놀라다 이내 부러워했다. 그 카드는 경성에서 몇몇 가문만이 가질 수 있는 한정판 카드였다. 눈앞의 여자는 매우 젊어 보였고 아마도 상류 사회 가문의 사모님일 거라 짐작했다. “두 분,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두 사람을 안내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분도 함께 모셔서 천천히 고를 수 있죠?”신하린은 말할 때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마치 재벌 집 아가씨처럼 말했다. “물론입니다!” 직원은 물건을 조금이라도 더 팔아 인센티브를 챙기기 위해 서둘러 대답했다. 심미연은 신
그러고는 서둘러 몸을 돌려 급히 자리를 떠났다. 신하린은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심미연이 그녀를 붙잡았다. “쫓아가 봤자 소용없어.” 조금 전 그 여자의 반응은 그녀가 바로 나윤미라는 걸 더욱 확실하게 증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우리 그냥 갈까?” 신하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카드까지 줘놓고는 구경도 안 하고 그냥 가겠다고?” 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조금만 기다려보는 게 좋을걸. 그 여자가 곧 너를 찾으러 올 거야.” 카드를 건넸으니 상대는 카드를 확인하려고 당연히 주인에게 연락할 것이다. 나윤미 쪽에는 따로 사람을 붙여 뒤를 쫓게 하면 된다. 다시 돌아온 이상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신하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 난 그 사람 돈을 쓰고 싶지 않아. 근데 내가 돈을 안 쓰면 그 사람은 내가 사랑 같은 걸 원한다고 착각해. 그리고 자기는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며 그래.” 그녀와 그가 관계를 한 건 사랑과 상관없이 서로 원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가 준 돈을 쓴다면 이 관계는 변질될 것이며 거래로 바뀐다. 신하린은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준 돈이 그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면 그냥 써. 마음 놓고 써버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사랑 따위는 아무 가치 없으니 바보같이 굴지 마! 나처럼 몇 년을 사랑하고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지 말라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 그녀는 그저 가치 없다고 느꼈다. 신하린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감싸안았다. “미연아...” 만약 그녀가 좀 더 강했더라면 심미연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걱정하지 마!”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반드시 강하게 살아야 했다. 신하린은 마음이 아픈 듯 그녀를 더욱 꽉 안아줬다. “미연아, 너 지금 휴직 중인데 내
“나윤미, 왜 소리 질러?” 전화기 너머에서 날카롭고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진운혁!” 나윤미는 두려움에 떨며 간신히 이 이름을 내뱉었다. 진운혁은 5년 전 뛰어내려 죽은 변호사이자 심미연의 스승님이었다. “그 자식은 5년 전에 죽었어!” 남자는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너 혼자 겁먹고 있는 거야!” “그 사람! 안 죽었어요. 아직 살아 있어요! 바로 내 앞에...” 나윤미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너를 속이고 겁을 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남자는 경고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진짜예요!” 눈앞의 나타난 그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현실적이라 나윤미는 순간적인 충격에 쓰러져 버렸다. 폰이 땅에 떨어지고 화면이 깨졌다. “나윤미! 대답해!”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가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나윤미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번쩍이는 구두를 신고 나타난 남자가 나윤미의 앞에 멈추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폰을 집어 들고 화면에 있는 번호를 확인한 뒤 옆에 있는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 밀크티 가게 안의 여자들이 남자가 들어오자 모두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너무 잘생겼어!” “스타일도 너무 좋은 아저씨야!” 남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밀크티를 주문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나윤미는 빠르게 구급차에 실려 갔다. 남자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눈빛은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었다. 주얼리 샵에서. 심미연은 두 개의 팔찌를 고른 뒤 하나는 신하린에게 선물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찼다. 디자인은 간단하지만 그녀의 손을 더욱 하얗고 아름답게 돋보이게 했다. 심미연은 매우 맘에 들었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강지한과 결혼한 이후 분기마다 성무진은 옷과 보석 그리고 액세서리를 보내왔지만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공식적인 자리나 연회에서나 겨우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번이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액세서리를 산
“하린아...” 심미연이 말하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열렸다. 심하린이 고개를 들어 남자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담긴 눈빛과 마주쳤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미연이가 예상한 대로 빨리 왔네.’ “널 찾으러 왔어. 둘이 얘기해. 난 밖에서 기다릴게.” 심미연은 신하린을 살짝 밀며 일어섰고 손으로 옷을 정리한 뒤 몸을 돌려 남자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진영 도련님.” “강 부인.” 심미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목소리를 살짝 낮춰 말했다. “심미연이라고 부르세요.” 예전에 심미연은 ‘강 부인’이라는 호칭이 아주 좋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호칭이 혐오스럽고 웃음거리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고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나윤미가 길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고 지금 응급처치 중입니다.”심미연의 얼굴에서는 미세한 변화가 일렀다. “어떻게 된 거죠?” “무언가를 보고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 같아요.” 심미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윤미가 스승님을 봤나?’ 5년 전 스승님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녀는 현장에 갔었고 그것이 분명히 스승님이었음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나윤미가 오늘 본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계속 지켜가고 있을게요. 새로운 소식 있으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아직 나윤미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나윤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당시 그 소송은 또 어떻게 된 일일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며 그녀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어?” “주얼리 샵에서 엄청 예쁜 결혼반지를 봤어. 지한 씨, 우리는 결혼했는데 결혼반지조차 없네.” 심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말을 돌렸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강지한은 그녀에게 병원에 가서 온지유를 돌보라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감정을 추스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미르 파크엔 하인들도 있는데 왜 그 얘기는 안 해? 그리고 지금 해커들이 IP 주소를 바꾸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나? 이걸로 나를 범인으로 몰겠다는 거야?”아침에 강지한이 이 말을 했을 때 그녀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일이 아니었기에 당당했지만 지금 분명히 누군가가 뒤에서 예전처럼 그녀를 모함하고 있었다. 이전에 찾은 증거들을 강지한에게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집안의 하인들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 몰라!” 심미연의 피식 웃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런 걸 모른다는 건 누굴 무시하는 말인지 모르겠네.’“할아버지께서 빨리 결혼식을 준비하라고 하셨어. 그리고 내일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결혼을 발표하라고 하셨어.” 강지한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번의 실검으로 너는 공식적인 강 씨 사모님이 되고 웅장한 결혼식을 할 수 있어. 아무리 봐도 너야말로 최고의 승자 아니야?”심미연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한 씨, 제발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은 그만하고 나한테 누명 그만 덮어 씌어! 다시 말하는데 난 그런 짓 하지 않았어.”그녀는 그를 단순히 전우로만 여겼을 뿐인데 어떻게 뒤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냐고! 게다가 둘은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진짜 부부였고 두 사람의 관계를 굳이 폭로해 강지한이 그녀를 싫어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강지한이 그녀를 싫어한다면 그녀의 삶도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증거까지 다 나왔는데 아직도 변명해? 이렇게 말 잘하는 거 보니 리우 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강지한은 분노가 치밀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반박했다.‘왜 이 여자는 온지유처럼 온순하게 말을 듣지 않을까?’ 심미연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꽉 쥐었다.이미 이런 결말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강지한이 직접 말하는 걸 들으니 마음속에서 억제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인턴 생활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오기까지 그녀는 큰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뒤에서 신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아, 우리 밥 먹으러 가자!” 심미연은 감정을 억누르며 돌아서서 신하린과 마주했다. “하린아, 미안해. 나 병원에 좀 가봐야 해서 점심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다음에 내가 꼭 밥 살게!”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신하린은 단번에 그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미연아, 혹시 강지한...” 그녀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미연이 서둘러 말을 잘랐다. “외할머니 쪽에 문제가 좀 생겨서 가보려고.” 그녀는 신하린에게 자신이 강지한에게 억눌려 조금의 자유도 없이 꼭두각시처럼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얼른 가봐. 내일 다시 시간 잡아서 밥 먹자!” 신하린은 심미연이 외할머니를 핑계로 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녀가 외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건 분명 진짜로 일이 있는 것이다. 심미연이 외할머니를 얼마나 아끼는지 심하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심미연은 신하린에게 손을 흔들며 그녀 옆의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은 분주했고 마음은 이미 외할머니에게로 향해 있었다. 신하린은 그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이 어쩐지 씁쓸했다. 심미연이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게 느껴졌다. “심미연 씨와 강지한 사이의 일은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내가 강지한하고 어느 정도 얘기할 수는 있어도 저 사람이 강지한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내가 나서도 내 말을 들을 리 없어.” 옆에 있던 남자가 낮게 말했다. 신하린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심미연이 너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강지한과 결혼했으니 어쨌든 강씨 가문 사모님이야. 강지한이 그녀를 사랑하든 말든 이혼만 안 하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잖아. 뭐 때문에 그렇게 뭐가 그렇게 슬퍼하는 건데?” 남자는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으며 손끝으
“너도 말하지 않고 나도 말하지 않고 온지유도 말하지 않으면 누가 네가 강 부인이라는 걸 알겠어?” 강지한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심미연,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당장 올라가서 온지유 돌봐.” 심미연은 온몸으로 그를 거부하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애원해 봤다. “지한 씨, 제발 안 가면 안 돼?” 그녀가 만약 온지유를 돌보러 가게 되면 온지유는 더욱 그녀를 깔보고 무시할 게 뻔했다. “안 가도 돼. 그럼 네 외할머니 치료는 당장 중단될 거야.” 어렸을 때부터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과 일들 때문에 강지한은 지금의 인간미 없는 사람으로 되어버렸다. 사람을 사랑하지도 못했고 사랑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그는 양경자를 이용해 심미연을 압박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심미연은 분노에 휩싸여 온몸이 떨렸다. 온지유 하나를 위해 외할머니를 볼모로 삼는 강지한이 너무도 잔혹하다고 느꼈다. “온지유를 이틀만 돌봐. 그럼 성무진한테 퇴원 절차를 밟으라고 할게.” 강지한은 마치 협상하는 듯 말했지만 그 말은 사실 통보에 가까웠고 그녀가 선택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온지유를 돌보러 가는 건 좋아. 근데 만약 온지유가 당신에게 내가 괴롭혔다고 거짓말을 하면 그땐 누구를 믿을 거야?” 온지유가 일부러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모함할 거라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때 강지한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결국 외할머니에게 압박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억울함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외할머니가 피해를 보게 해서는 안 된다.강지한은 눈썹을 추켜올리며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온지유는 절대 내 앞에서 네가 자기를 괴롭혔다고 고자질하지 않아! 심미연, 왜 항상 온지유를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해?”심미연은 마음의 아픔을 억누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심미연이 그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것도 왠지 모르게 짜증 났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강지한은 생각을 정리하며 전화를 받았다. “지한 도련님, 다른 두 명의 용병을 찾았어요. 그런데 이미 혀가 잘리고 팔과 다리가 끊어진 잔인한 상태예요. 완전히 살아있는 시체처럼 되어버렸어요! 말을 할 수 없고 글도 쓸 수 없어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 정말 잔인하더라고요!” 전화 속 목소리는 조금 비아냥거리는 듯한 톤이었다. “그나저나 지한 도련님, 지난번에 부인한테 그분 스승님에 관해 물어보라고 한 거 물어봤어요? 아직도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죠?” 마지막 말은 거의 놀리는 듯한 어조가 섞여 있었다. 강지한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난 내 아내랑 관계가 아주 좋아. 언제부터 나쁜 관계였지?”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심미연과의 관계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나빠졌을까?’ 아마 그녀가 처음으로 이혼을 제안했던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네! 관계 좋다는 거 알겠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남자의 목소리는 분명히 대충 얼버무리며 넘기는 듯했다. “큰 사모님 쪽은 조사가 필요해요?” “응.” 강지한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머릿속에는 겨울철 어머니와 함께 쫓기며 죽음을 피하려 도망쳤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몸을 던져 그들을 막지 않았다면 죽은 건 자신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몸 곳곳은 총알에 맞아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픈 것을 두려워했던 사람이 그를 위해 그런 고통을 감수했다.“당신 부인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자료를 조사해 봤어요. 관심 있나요?”전화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고 곧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한 도련님, 부인이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잘 붙잡으세요.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