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말투였다.아마 이진영이 신하린을 좋아할 거라고 심미연은 추측했다.아니면...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생각에 빠졌던 심미연은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박유진이 왜 나한테 전화했지?’의심이 들었지만 그녀는 곧 전화를 받았다.“오빠!”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박유진이 많이 도와줘서 그녀는 큰 신세를 졌다.“늦은 밤에 전화해서 미안해.”부드러운 박유진의 소리를 들으면 그의 얼굴에 띈 웃음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심미연은 당황했다.“아무 일도 없어.”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저녁에 박인우, 강지한, 그리고 이진영이 함께 술 마신 거 알아?”“몰라.”심미연은 정말 몰랐다.이진영이 신하린을 데리러 왔을 때도 말하지 않았다.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뭔가 짐작이 갔는지 더듬거리며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아니면 박유진이 이렇게 늦은 밤에 일부러 전화해서 이 일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진영이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랑 사귀나 봐.”박유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한씨 가문의 아가씨인 것 같은데 연구원에서 일한대. 배경도 있고 능력도 좋으니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이 결혼할 것 같아.”그러나 그의 추측으로 보아 양가에서는 만족할 것이다. 다 정계 배경을 가졌으니 양가에서 정말 한 가족이 된다면 서로 돕고 더 발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그래서 신하린은 그저 놀고 버려질 게 분명하다.그가 심미연에게 이런 일을 알려주는 건 신하린에게 너무 빠지지 말라고 귀띔하기 위해서다. 결국 그녀 자신만 다치게 되니까.“알았어, 고마워.”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꽉 움켜쥔 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신하린이 술에 취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항상 이진영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술에 취하면 이진영의 이름만 불렀다.막상 헤어지면 신하린은 이 상처에서 헤쳐나올 수 있을까?심미연은 이 일을 신하린에게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이때 박유
온지유는 어색한지 사레에 걸린 것처럼 기침을 했다.“만약 네가 대신 결정 내릴 수 있다면 내가 당장 말하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전화 바꿔! 아니면 후회할 건 너야.”심미연이 차갑게 말했다.그녀는 온지유의 속셈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와 말을 섞기도 싫었다. 그저 빨리 이 혼인을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었다.“왜 나한테 화를 내?”온지유의 목소리는 갑자기 울음이 섞인 것처럼 아련해졌다.심미연은 대뜸 강지한이 왔다는 것을 알아듣고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너와의 대화는 이미 녹음되고 있어. 나한테 구정물 끼얹을 생각하지 마.”강지한과 이혼할 건데 온지유에게 체면을 남겨줄 필요도 없었다.잠시 어리둥절해진 온지유는 그제야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년이 감히 녹음하다니!’“이젠 강지한과 통화할 수 있겠어?”실은 온지유에게 전달해 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기야말로 진짜 사모님인 것처럼 으스대는 태도가 싫어서 심미연은 그녀와 말을 하는 것도 귀찮았다.“나와 지한은 아이를 달라고 사찰에서 기도하는 중이야. 기도가 끝나면 너에게 전화하라고 할게.”온지유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난 그저 지한 씨에게 오늘 이혼 절차를 밟는 날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사찰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니 일단 전화를 끊어야겠네. 이혼은 다음 날에 해도 상관없어!”심미연의 말투는 여전히 쌀쌀했다. 그녀가 장담하건대, 온지유는 즉시 강지한을 불러 전화를 받게 할 것이다.심미연이 이런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온지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들려왔다.“지한 씨, 빨리 전화 받아! 심미연 씨 전화야.”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온지유는 아마 너무 기뻐서 하늘을 날 것 같겠지?’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귓가에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나 지금 구청으로 가는 길이야.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구청으로 와.”강지한을 마음에서 내려놓은 후 그녀는 강지한과 대화를 하더라도 마음이 평온했다.마치 평범한 낯선 사람을 만
온지유는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난감해졌다.‘강지한이 이렇게 급하게 나와 선을 그은 이유는 무엇일까?’“지한 씨... 나...”온지유는 뭔가 설명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며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찾았어?”“휴대폰에 차단 기록이 있습니다. 실은 그게... 상대방의 번호를 대표님께서 차단했습니다.”성무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온지유에게 퇴원절차를 해줘.”강지한은 쌀쌀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심미연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진성시에서 업무를 보고 있어 휴대폰이 조종당한 걸 몰랐고 그래서 어르신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심미연은 원래 그를 싫어하다 보니 그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결국 유일하게 그에게 전화할 수 있었던 어르신의 번호가 차단당했다.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다!“그리고?”“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강지한은 전화를 끊고 손을 뻗어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는 마치 심미연이 우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며칠 동안 혼자 버티느라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담배를 다 피운 후 그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마치자마자 어르신이 전화를 걸어왔다.“강지한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어?”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강준형의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한은 손에 든 담배꽁초를 눌러 끄며 차갑게 말했다.“곧 돌아갈게요.”‘할아버지는 심미연을 제일 좋아하지 않았어? 심미연이 나와 이혼한다는데 말리지 않고 나더러 빨리 구청에 오라고 재촉하다니. 나 참...’강준형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은 미간을 주무르며 할아버지는 그를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누가 친손자인지 모르겠어.’이때 심미연은 강준형과 함평 집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강준형은 해물 죽을 그녀에게 떠밀었다.“네가 제일 좋아하는 해물 죽이야.
“방금 누가 전화 왔어요?”심미연이 물었다.“지한이 어머니야.”강준형의 말투가 나빠졌다.“저와 지한 씨가 이혼하는 거 어머님은 알아요?”심미연은 문소영이 전에 사람을 시켜 배 속의 아이를 없애려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호감이 있을 수 없었다.이런 여자는 그녀의 어머님이 될 자격이 없다.“알려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알려줄 생각이 없어.”강준형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뭔가 이상해서 물었다.“왜요?”‘강지한의 어머니인데 왜 알려주지 않는 거지?’“지한이가 문소영과 지한이 관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어?”강준형이 되물어보자 심미연은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저었다.강지한이 그녀를 이토록 싫어하는데 어찌 이런 것을 알려 수 있겠는가.“실은 문소영은 지한이 친엄마가 아니야.”강준형은 한숨을 쉬며 심미연의 표정을 살핀 후 머뭇거리며 계속해서 말했다.“지한이 친엄마는 어릴 적에 돌아갔어. 그런 후 지한은 강씨 가문에 돌아왔는데 신분이 특별해서 줄곧 내가 키웠어. 하지만...”강준형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그런 과거에 대해 회억하고 싶지 않았다.“말씀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세요. 저도 꼭 알아야 하는 일이 아니라서요.”아는 것이 많을수록 점점 더 내려놓을 수없어질 것이다. 그녀는 그저 편해지고 싶었다.“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얘기가 길어져서 두세 마디로 다 할 수가 없어! 미연아, 지한이가 이렇게 변한 건 다 내 잘못이야!”강준형은 과거를 회억하기 싫었는데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마음이 괴로웠다.“그럼 말하지 마세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얘기해요.”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숟가락을 들고 죽을 먹었다. 그녀와 강지한은 곧 이혼하니 그에 관한 일은 알 필요가 없었다.“너에게 지한이 과거에 관해 말해야겠어. 만약 걔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면 넌 지한이 성격이 왜 그렇게 차가운지 알게 될 거고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지도 알게 될 거야.”‘두 사람이 이혼하게 되는데 만약 미연이에게 지한에 관한 일을 알려준
강준형은 기분이 좋아졌다.심지어 문소영이 전화에서 강지한과 이씨 가문 아가씨가 맞선을 본 일을 말했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이고 죽을 먹었다. 보아하니 강준형은 그녀와 강지한이 이혼하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은데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 두 사람 사이에 정이 있는 줄 오해라도 한다면... 그녀는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었다.밥을 먹은 후 강준형은 심미연을 차에 태운 한 후 기사더러 구청으로 운전하라고 했다.거절하지 못하고 차에 오르는 심미연을 보고 강준형은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구청에 거의 도착했을 때 강지한의 전화가 걸려오자 강준형은 이내 받으며 물었다.“넌 언제 도착해!”“심미연더러 전화를 받으라고 하세요!”강지한이 진지하게 말했다.“무슨 말투야!”강준형이 화를 냈다.“중요한 말이 있어요.”강준형은 그제야 전화를 심미연에에 넘겨줬다.“지한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대.”심미연은 머뭇거리다가 휴대폰을 받아들고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할아버지가 이노하이브 1% 주식을 너에게 넘겼어. 지금 절차 밟으러 갈래 아니면 나중에 할래?”지분에 관한 일을 강준형이 전에 말했었지만 강지한은 바쁘다 보니 이 일을 까먹었다. 오늘 이혼하러 가는 길에 심미연과 지난 3년 동안에 있었던 기억을 더듬다가 이 일을 떠올렸다.“할아버지, 저와 강지한 씨가 오늘 이혼하는 거 알면서 왜 이노하이브 주식을 저에게 넘겼어요? 할아버지, 저는 주식이 필요 없어요!”“너에게 주는 건 그냥 가지면 돼. 거절하지 마!”강준형은 화난 척 돌려 말했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이노하이브 주식은 너무 많아요! 전 가질 수 없어요!”강준형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지한이와 이혼하는데 이노하이브 주식은 위자료라고 생각해. 이 주식을 가지면 앞으로 강지한은 너의 일꾼일 뿐이야. 생각만 해도 기쁘지 않아?”심미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심미연이 이 주식을 가졌으면 했다.“하지만...”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강준
심미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남자를 바라봤다. 심지어 이것이 환각일 뿐 이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심미연, 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나는 출장 중이어서 휴대폰이...”여기까지 말한 강지한은 말을 멈추었다. 지금의 온지유는 그때 그의 어머니를 궁지에 몰아넣고 심지어 어머니를 죽인 그 사람과 정말 비슷했다.‘만약 심지연이 이 일을 알고 온지유를 찾아간다면 어쩌지? 그때가 되면 온지유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그냥 온지유를 보낸 후 다시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그의 말을 반쯤 듣고 나니 심미연은 문득 깨달았다.‘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며칠 동안 휴대폰이 계속 꺼져있었네. 그때 내가 전화하지 않아 다행이야. 아니면 얼마나 어색했겠어.’‘아, 맞다. 그때는 온지유가 낙태되어 슬퍼할 때네. 그렇게 사랑했으니 당연히 그녀 곁에서 돌봐야겠지? 휴대폰을 끄고 모든 외부의 방해가 없어야겠지.’심미연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신경 쓰지 않는다고 알려주기 위해 심미연은 웃으며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 다 이해하니까.”강지한은 눈썹을 찡그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해한다고 하는 거지?’“변호사는 언제 와?”심미연은 그의 언짢아진 표정을 보고 이 화제를 계속하고 싶지 않아 돌려 물었다.변호사가 와야 사인하고 떠나지 않겠는가.이혼하면 이젠 낯선 사람인데 그에게 관련된 일을 알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심미연의 쌀쌀한 태도에 강지한은 당황해서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마침 밖에서 노크가 울려 그는 하려던 말을 되로 삼켰다.“들어와!”문이 열리고 변호사가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오더니 심미연을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강 대표님, 심 변호사님.”심미연이 경성 변호사 중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그들은 서로 아는 사람이다.인사를 하자마자 강지한의 쌀쌀한 목소리가 들렸다.“사모님이라 불러!”변호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사모님!”심미연은 어이가 없었다.‘이 남자는 돌아버렸어? 지금이 언
“사인했으니 이젠 구청으로 가.”심미연은 사인한 문서를 변호사에게 넘겨주며 강지한을 향해 말했다.“심미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강지한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변호사는 서둘러 물건을 챙기고 급히 떠났다.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그가 어찌 감히 들을 수 있겠는가?“난 이미 마음을 굳혔어. 가자.”심미연은 눈앞의 익숙한 이 얼굴을 보면서 마음은 평온했다. 그녀의 마음은 그의 거듭되는 상처와 거짓말 속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어젯밤에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자기 자신에게 제일 미안하다고 생각했다.“심미연...”강지한은 또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때 강준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변호사가 그러는데 사인을 마쳤다며? 왜 아직도 안 가? 꾸물거리다간 구청이 퇴근하겠어!”강준형의 기운찬 목소리가 문간에 울려 퍼졌다.강지한은 말문이 막혔다.‘도대체 누구의 할아버지야? 왜 내가 심미연과 이혼하지 않을까 봐 안달이지?’심미연은 몸을 돌려 대문으로 걸어가며 강준형의 팔짱을 끼고 부드럽게 말했다.“지금 가요.”심미연은 그들이 이혼하면 강준형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 이 상태를 보니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오히려 강지한이 이혼하고 싶지 않다고 차일피일 미루며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강준형은 돌아설 때 강지한을 유심히 보았는데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도 이혼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예전 같으면 그도 심미연을 타이르겠지만 강지한이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 나서 이런 말들을 할 수 없었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에야 강지한이 급히 달려오자 심미연은 손으로 문을 막았다.강지한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들어왔다.강준형이 그를 노려보며 구석으로 밀어붙였는데 분명히 꼴도 보기 싫다는 태도였다.강지한의 눈길은 심미연을 향했다.심미연도 그를 바라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강준형을 향해 방긋 웃으며 부드럽
“이번에는 지한이가 아니라 미연이가 무조건 이혼하겠다고 했어.”강준형은 너무 속상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미연이 외할머니께서 얼마 전에 돌아갔는데 지한이는 전화를 아예 꺼둔 채 오지도 않았어. 그동안 미연이는 힘들게 혼자 버텨왔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그 애를 붙잡아.”방금 심미연 앞에서는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사실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강준형이 예전에는 속상한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 못 할 일은 심미연에게 자주 털어놓았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혼자 감당해 내야 했다.“그, 그러면 말하기가 좀 그렇겠네요.”운전기사인 장현수도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강지한은 어쨌든 경성에서 유명인이고 그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여자들이 아마 경성을 한 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심미연은 그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강씨 가문에 시집왔는데 이제 와서 모든 명예와 재산을 버리고 그 사모님 자리를 포기하겠다고 했으니 과연 그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할까 싶었다.“됐어. 너는 그냥 천천히 앞에 차만 따라가면 돼. 난 눈 좀 붙여야겠다.”강준형은 머리가 너무 아파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그리고 머리를 살살 문지르다가 눈을 꼭 감았다.이때 다른 차 안.심미연은 가방에서 두 장의 이혼 서류를 꺼내 강지한에게 건네줬다.“이건 우리 두 사람의 이혼 합의서야. 보고 수정할 곳이 있으면 알려줘.”그녀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강준형이 이노하이브 주식을 넘겨주겠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이혼 서류를 준비했다.어차피 지금 그쪽 주식을 갖고 있었고 또 매년 몇백억씩 수익이 나오니까 강지한과 굳이 힘들게 재산분할을 할 필요가 없었다.강지한은 서류를 건네받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심미연, 무슨 뜻이야?”혹시나 나중에 두 사람이 이혼할 때 강지한 쪽에서 여자에게 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뒤에서 얼마나 욕할지 상상만 해봐도 짜증 났다.심미연은 그가 지금 불같이 화내는 이유가 혹시 결혼 후에 산 그 미니카를 요구했기 때문은 아닌지 생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