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했으니 이젠 구청으로 가.”심미연은 사인한 문서를 변호사에게 넘겨주며 강지한을 향해 말했다.“심미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강지한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변호사는 서둘러 물건을 챙기고 급히 떠났다.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그가 어찌 감히 들을 수 있겠는가?“난 이미 마음을 굳혔어. 가자.”심미연은 눈앞의 익숙한 이 얼굴을 보면서 마음은 평온했다. 그녀의 마음은 그의 거듭되는 상처와 거짓말 속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어젯밤에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자기 자신에게 제일 미안하다고 생각했다.“심미연...”강지한은 또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때 강준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변호사가 그러는데 사인을 마쳤다며? 왜 아직도 안 가? 꾸물거리다간 구청이 퇴근하겠어!”강준형의 기운찬 목소리가 문간에 울려 퍼졌다.강지한은 말문이 막혔다.‘도대체 누구의 할아버지야? 왜 내가 심미연과 이혼하지 않을까 봐 안달이지?’심미연은 몸을 돌려 대문으로 걸어가며 강준형의 팔짱을 끼고 부드럽게 말했다.“지금 가요.”심미연은 그들이 이혼하면 강준형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 이 상태를 보니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오히려 강지한이 이혼하고 싶지 않다고 차일피일 미루며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강준형은 돌아설 때 강지한을 유심히 보았는데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도 이혼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예전 같으면 그도 심미연을 타이르겠지만 강지한이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 나서 이런 말들을 할 수 없었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후에야 강지한이 급히 달려오자 심미연은 손으로 문을 막았다.강지한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들어왔다.강준형이 그를 노려보며 구석으로 밀어붙였는데 분명히 꼴도 보기 싫다는 태도였다.강지한의 눈길은 심미연을 향했다.심미연도 그를 바라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강준형을 향해 방긋 웃으며 부드럽
“이번에는 지한이가 아니라 미연이가 무조건 이혼하겠다고 했어.”강준형은 너무 속상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미연이 외할머니께서 얼마 전에 돌아갔는데 지한이는 전화를 아예 꺼둔 채 오지도 않았어. 그동안 미연이는 힘들게 혼자 버텨왔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그 애를 붙잡아.”방금 심미연 앞에서는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사실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강준형이 예전에는 속상한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 못 할 일은 심미연에게 자주 털어놓았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혼자 감당해 내야 했다.“그, 그러면 말하기가 좀 그렇겠네요.”운전기사인 장현수도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강지한은 어쨌든 경성에서 유명인이고 그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여자들이 아마 경성을 한 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심미연은 그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강씨 가문에 시집왔는데 이제 와서 모든 명예와 재산을 버리고 그 사모님 자리를 포기하겠다고 했으니 과연 그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할까 싶었다.“됐어. 너는 그냥 천천히 앞에 차만 따라가면 돼. 난 눈 좀 붙여야겠다.”강준형은 머리가 너무 아파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그리고 머리를 살살 문지르다가 눈을 꼭 감았다.이때 다른 차 안.심미연은 가방에서 두 장의 이혼 서류를 꺼내 강지한에게 건네줬다.“이건 우리 두 사람의 이혼 합의서야. 보고 수정할 곳이 있으면 알려줘.”그녀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강준형이 이노하이브 주식을 넘겨주겠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이혼 서류를 준비했다.어차피 지금 그쪽 주식을 갖고 있었고 또 매년 몇백억씩 수익이 나오니까 강지한과 굳이 힘들게 재산분할을 할 필요가 없었다.강지한은 서류를 건네받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심미연, 무슨 뜻이야?”혹시나 나중에 두 사람이 이혼할 때 강지한 쪽에서 여자에게 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뒤에서 얼마나 욕할지 상상만 해봐도 짜증 났다.심미연은 그가 지금 불같이 화내는 이유가 혹시 결혼 후에 산 그 미니카를 요구했기 때문은 아닌지 생
운전기사는 문득 백미러로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참 잘 어울린다고 속으로 감탄했다.그렇게 모두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 차는 법원에 도착했다.문 앞에 도착해 보니 예전에 그 변호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심미연은 왠지 씁쓸해졌다.이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하는지.“강 대표님, 사모님, 이건 이혼 합의서인데 두 분께서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두 사람의 이혼 사건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이렇게 이혼 합의서를 직접 가져다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심미연은 서류를 건네받고 읽어 보다가 깜짝 놀랐다.합의서에는 그녀에게 재산 200억을 나눠주고, 추가로 시가 100억 정도 되는 별장과 벤틀리 한 대까지 주겠다고 적혀있었다.강지한이 이만큼 넘겨주는 것과 또 강준형이 주는 주식까지 합치면 이혼하자마자 졸부가 되는 셈이다.하지만 심미연은 바로 사인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강지한에게 물었다.“서류가 잘못된 건 아니지?”“내가 너한테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단 건 알고 있는데 이혼해도 물질적인 보장은 내가 해주고 싶어. 미연아, 그냥 사인해.”사실 다른 목적이 있긴 했다.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 사람은 완전히 끝날 것 같았고 혹시나 순순히 이혼해 주면 그래도 나중에 심미연이 얼굴은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와 완전히 인연이 끊어지는 건 싫었다.그러자 심미연이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확실해?”3년이라는 시간 동안 생활비라고는 고작 몇천만 원만 내놓던 사람이라 여태껏 깍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혼하려니까 갑자기 통이 큰 모습을 보여주니 의심이 드는 게 당연했다.“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나 정신이 말짱하니까 걱정하지 마.”강지한이 다시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이 여자가 애초에 자기 재력만 보고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내숭을 떠나 싶었다.“그래. 일단 사인할 테니까 혹시나 후회되면 바로 말해. 받았던 물건들은 다 돌려줄 테니까.”심미연은 혹시나 나중에 강지한이 정신 차리고 오늘의 일이
심미연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제가 상상 임신이라도 했을까 봐요?”변호사는 심미연의 대답을 듣고 난처해졌다.‘잠자리도 안 가지는 부부였네.’보아하니 부부가 금실이 좋아지려면 속궁합도 잘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강지한이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차갑게 말했다.“역시 변호사라 그런지 예리하시네.”“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나랑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볼까?”이 순간 심미연은 혹시나 그가 진짜로 가자고 할까 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뱃속에는 아이가 하나가 아닌 둘이 있기 때문이다.하여 지금 검사하면 바로 알아낼 수 있는데 강지한의 의심을 거두려면 어쩔 수 없이 세게 나가야 했다.그리고 강지한이 결국에는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내가 네 말을 안 믿는다고 했어?”강지한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그제야 예상대로 자기 말을 믿어주는 것 같아 심미연은 살짝 안심할 수 있었고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임신이 아닌 게 확실하면 두 분께서는 여기에 사인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사인하시기 전에 혹시나 다시 한번 고민해 보실 필요 없는지 확인 부탁드릴게요. 일단 서류에 사인하는 즉시 이혼으로 확정되는 거라서요.”변호사는 끝까지 자기 임무에 충실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순간 짜증이 몰려왔다.서류에 사인만 하면 되는 일을 왜 이리도 시간을 끄나 싶었기 때문이다.강지한은 원래부터 이혼을 반대했던 사람인데 혹시나 변호사의 설득에 넘어가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네. 바로 사인할게요.”심미연은 재빨리 펜을 들고 서류에 사인했다.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서류를 강지한에게 넘기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9년이라는 사랑이 이렇게 끝나버렸고 이제 다시는 강지한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이 순간 그녀의 기분은 유달리 평온했다.하지만 강지한은 그저 심미연의 사인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글씨가 참 정갈하고 깔끔한 게
이혼 철회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잠깐 눈을 붙였다.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의 눈빛에는 더 이상 조금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괴로웠다.심미연이 법원에서 나오니 신하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미연아, 어디야?”“나 방금 법원에서 나왔어.”“자유의 몸이 된 걸 축하해주려고 내가 특별히 흥원각을 예약해 뒀는데 지금 데리러 갈까?”신하린은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혼자 갈 수 있어.”심미연은 사실 아직도 방금 강지한이 변호사에게 묻던 말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아 마음이 심란했다.“그래. 그럼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넌 천천히 와.”신하린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심미연은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미연아, 왜 그래? 강지한 그놈이 혹시 또 널 괴롭혔어?”강준형의 목소리에 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는데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할아버지...”목이 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강지한이 이대로 순순히 이혼해 주지 않을 것 같았고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삶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미래가 보이지 않고 너무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왜 울어? 무슨 일인지 빨리 할아버지한테 말해.”강준형은 그녀가 우는 모습에 깜짝 놀라 재빨리 다가왔다.“한 달간의 숙려기간에 지한 씨가 만약 생각이 바뀌어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하죠?”심미연은 여태껏 너무 힘들게 버텨왔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터지니 결국 멘탈이 무너졌다.강준형은 너무 서글프게 우는 심미연을 보고 가슴이 아파 다급히 그녀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지한이가 이혼에 대해 번복하지 못하도록 이 할아버지가 막아줄게.”심미연이 강지한과 함께 있어봤자 불행하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강제적으로 두 사람을 붙여줄 수는 없었다.심미연은 어쩌면 강지한과 헤어지고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녀가 행복하
강준형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답했다.“지한아, 너랑 미연이 관계도 오늘부로 끝났는데 난 여전히 그 애가 너무 아쉬워.”그는 강지한이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인지 살피다가 다시 어떻게 결정할지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강지한은 백미러로 그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문득 되물었다.“할아버지, 하시고 싶은 말이 뭐예요?”강준형은 당연히 심미연 편을 들겠다고 예상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지금은 알고 싶었다.“이혼을 안 하려는 거지?”강지한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강지한도 굳이 숨길 마음이 없어 솔직하게 답했다.“그렇다면 난 지금 당장 법원에 전화해서 숙려기간 없이 바로 이혼 신청에 넣어달라고 말할 거야.”강준형은 핸드폰을 들고 그에게 보여줬다.“할아버지, 왜 그러세요!”강지한은 놀라기도 하고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친손주는 바로 저예요. 어떻게 다른 사람이랑 손을 잡고 저를 모함할 수 있어요?”그러자 강준형이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난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놨어. 미연이가 너랑 이혼이 확정되면 난 내 생일에 바로 큰 잔치를 열 거야. 그리고 전 경성에서 괜찮다고 하는 젊은 남자들은 모두 참석하게 해서 미연이더러 혹시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골라보라고 할 예정이야.”그때 가서 미연이를 자기 손녀도 들일 생각이다.그렇게 되면 강지한과는 부부였다가 남매사이로 되기에 한방에 단념시킬 수 있을 것이다.‘그러니까 옆에 있을 때 소중하게 여겼어야지.’“할아버지, 저랑 미연이는 이혼하려면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어요. 만약 이 기간에 미연이가 마음이 바뀌면요?”강지한은 심미연이 그토록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쉽게 그와 이혼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강준형은 백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고 답했다.“다른 여자였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연이는 아니야. 그 애가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정말 너에 대한 모든 정이 떨어진 것이고 이혼하자고 했으면 이미 마음이 돌아섰다는
성무진은 케이스를 힐끔 바라보더니 공손하게 답했다.“이건 강 대표님께서 사모님 생일에 드리려 했던 선물입니다. 그동안 진성 쪽 일들을 처리하느라 깜빡 잊고 못 드렸다고 하셔서 오늘 마침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미안하다는 말도 꼭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심미연은 재빨리 그 케이스만 성무진에게 돌려줬다.“합의서만 받고 이건 지한 씨한테 돌려줘요. 이제 이혼하면 남남이 되는 건데 누구에게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전달 부탁드립니다.”“사모님, 이건...”성무진은 한껏 난감한 얼굴로 손에 든 케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이걸 다시 강지한에게 가져가면 분명 비서라는 사람이 이런 작은 일도 처리하지 못했다고 월급 깎이는 건 고사하고 해고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심미연은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신하린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성무진은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급히 심미연을 쫓아갔다.주차장까지 달려와 보니 심미연은 이미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하여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가 차 창문을 두드렸고 심미연은 그의 모습에 차창을 내렸다.“할 말이 더 남았을까요?”심미연은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죄송한데 혹시 이 물건을 직접 강 대표님께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가져다드리면 분명 뭐라 할 것 같아서요.”성무진은 고개를 수그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히 강지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심미연은 그의 손에서 다시 케이스를 뺏은 뒤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자, 이제 돌아가서 보고하셔도 됩니다.”“...”이혼하더니 심미연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 모습이 오히려 더 편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적어도 강지한에게 끌려다니는 게 아닌 자기 주관이 있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오빠, 빨리 가자.”심미연은 차창을 다시 올리고 앞에 앉은 박유진에게 말했다.그러자 박유진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다시 한번 자기 마음을 거절당한 박유진은 속상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말했다.“그럼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대명으로 와.”박유진은 심미연과 같이 대명을 발전시키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말에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이를 낳으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 예약해 두는 거야? 내가 그때 가서 아이를 낳고 더 이상 변호사 일이 하기 싫어질 수도 있잖아.”“기다릴게.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박유진의 말에는 사실 두 가지의 뜻이 담겨 있었다.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신하린은 순간 심미연이 부러워졌다.그녀도 주변에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가 있으면 바로 결혼했을 것이다.“나중의 일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심미연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나중에 다시 얘기해.”박유진은 재빨리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사실 넌 어렸을 때부터 춤에 소질이 있어서 나중에 댄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글쎄 뜬금없이 변호사가 될 줄은 나도 몰랐거든.”“어렸을 때는 돈이 너무 없다 보니 그저 빨리 돈만 벌고 싶었어. 그리고 나중에 커서 불공평한 일을 많이 마주치다 보니까 변호사가 되어서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내가 만약 변호사가 아닌 춤의 외길을 걸었다면 아마 온지유 씨 같은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겠지?”말을 마친 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순간 너무 자기중심적인 발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혼자 운영할 수 있는 자본이 없는데 어떻게 세계 최고의 댄서가 될 수 있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상을 받을 수 있겠어?”신하린은 한껏 그녀를 비웃었다.“자기 실력이 아닌 남자 꼬시는 방법으로 최고의 무대에 오를 수는 있겠다.”아마 온지유를 모르는 사람들만이 그녀의 실력이 훌륭하다고 생각할 것이다.사실 강지한이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말이다.박유진은 심미연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진 걸 발견하고 아직 그녀가 강지한을 잊지 못했다는 걸 알아챌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