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굳이 눈앞의 손익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강준형은 콧방귀를 뀌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 모습을 보고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며,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말했다.“팔찌 돌려줬으니 나 먼저 갈게.”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강지한을 바라보는 눈빛도 한없이 다정했다.“내가 데려다줄게.”강지한이 말했다.“됐어. 나 혼자 갈게. 지한 씨는 할아버지랑 더 있어.”온지유의 마음속으로는 사실 강지한이 자신을 데려다주길 바랐다. 하지만 속으로는 저 고약한 노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강지한이 자신을 배웅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만 더 키울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강씨 가문에 남아 앞으로 호강하며 살려면 이 노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지금은 조금 참아도 괜찮아. 나중에 저 고약한 늙은이에게 배로 갚아줄 거야!’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왜 항상 남 생각만 해? 바보 아니야?”“지한 씨, 나...”온지유는 목구멍에 맺힌 말을 겨우 꺼내려 했지만, 강준형이 그녀를 가로막았다.“가고 싶으면 얼른 가! 미연이가 오면 너 보는 게 불편할 거 아니야!”그녀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강준형은 속이 상했다.온지유는 금세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이만 갈게...”강지한은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보며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온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며 안쓰럽게 고개를 저은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걷던 그녀는 문 앞에서 막 들어오던 심미연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심미연은 온지유보다 키가 훨씬 컸고, 온지유의 이마는 그대로 심미연의 가슴에 닿았다.“아, 미안!”온지유가 급히 사과하자, 심미연은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온지유는 심미연의 목소리를 듣고 눈빛에 순간 꿍꿍이가 스쳤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싸며
온지유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강지한을 올려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지한 씨, 이건 미연 씨의 잘못이 아니야. 내가 부딪혀서 넘어졌어. 미연 씨한테 사과받을 필요 없어!”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진심 어린 듯 들렸지만, 그 안에는 교묘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온지유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연기를 하고 싶다면 하게 둬야지. 어차피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상관없어.’강지한은 심미연을 힐끔 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너, 걸을 때 앞 좀 보고 다니면 안 돼?”심미연은 대꾸할 의욕조차 없는 듯 무심하게 받아쳤다.“알았어. 다음엔 조심할게.”‘분명 온지유가 날 들이받았는데, 왜 내가 잘못한 게 되는 거야? 강지한,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이젠 내가 숨 쉬는 것도 죄냐?’한편 강준형은 어두운 표정으로 온지유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온지유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강지한이 심미연을 오해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저 계략이 보통이 아니구나. 미연이가 저런 애를 어찌 이기겠어!’강준형의 시선을 느낀 온지유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아차, 이 고약한 노인을 잊고 있었네. 내가 무슨 속셈인지 눈치챘을지도 몰라. 만약 진실을 들추면 어떡하지?’그녀는 더 이상 연기를 이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글썽이며 심미연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미연아, 내 잘못 때문에 지한이가 널 오해했어. 정말 미안해.”심미연은 고개를 살짝 젓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사과는 받겠는데, 용서는 못 해.”‘대놓고 이렇게 속 보이는 연기를 하다니. 강지한, 네가 정말 눈이 멀었구나.’강지한은 그 말에 화가 나 심미연을 노려보며 말했다.“미연아, 너무 심한 거 아니야?”그러면서 온지유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심미연은 두 사람이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온지유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강지한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너랑 지한이 결혼한 지도 벌써 3년이야. 이제 애를 가져야 하지 않겠니?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몸조리하면서 준비하는 게 어때? 애 낳고 나서 다시 일하면 되잖아.”그는 간절히 심미연이 아이를 가지길 바랐다. 아이가 생기면 강지한도 자연스레 가정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심미연은 얕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간을 가르며 들려왔다.“아버님, 이노하이브 주식을 미연이한테 넘기신다면서요? 저는 절대 동의 못 해요!”고개를 든 심미연은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문소영의 분노에 찬 얼굴을 마주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듯 헝클어진 모습으로 보아, 그녀가 급히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강준형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내 주식을 내가 누구한테 주든 내 마음이야. 네가 동의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문소영은 심미연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야 멈춰 섰다. 그녀는 심미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주식을 받을 거면 지한이랑 이혼해!”문소영은 심미연이 강지한에게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심미연이 강지한을 위해 주식을 거절할 것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심미연은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어머님이 지한 씨를 설득해서 저랑 이혼하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당장 서명할 수 있습니다.”그 말에 강준형은 속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울분을 문소영에게 풀며 고함쳤다.“닥쳐! 내 일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 놔라 배 놔라야!”강준형의 얼굴은 분노로 질려 있었다.“아버님, 갖고 계신 이노하이브 주식이 고작 8%밖에 안 되는데, 그중 5%를 이 아이한테 준다고요? 강씨 가문에 며느리가 심미연 하나뿐이에요?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문소영은 화가 나 얼굴이 일그러졌다.‘심미연이 지한이랑 이혼하겠다고? 말도 안 돼. 혹시 요즘 떠도는 소문 때문인가?’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심미연은 문소영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사실 그녀는
강준형의 말이 끝나자, 문소영은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지성이 죽은 게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지성을 죽게 했어요...”강준형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짜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어서 나가! 여기서 시간 끌어봤자 아무 소용 없어! 내가 결정한 일을 네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심미연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강씨 가문의 복잡한 갈등들이 떠올랐다.강지한은 열 살이 되어서야 강씨 가문으로 들어왔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고, 이로 인해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으며, 다른 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경계했다.하지만 강준형은 처음으로 심미연을 보았을 때, 그녀라면 얼어붙은 손주 녀석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강지한은 심미연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왔고, 그녀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을 여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온지유가 갑작스럽게 임신을 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강지한은 온지유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외부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시선이 생겨났다.이 모든 상황이 강준형에게도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강준형이 심미연에게 주식을 주려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를 붙잡아두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강씨 가문에서 당당히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그 때문에 강준형이 내린 중요한 결정은 문소영의 몇 마디 말로 흔들릴 리 없었다.문소영은 강준형의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든 듯했다. 그녀는 다시 심미연을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심미연이 손주며느리면, 우리 지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식을 나눠주려면 공평하게 나눠주셔야죠. 심미연에게 몇 퍼센트를 주시든, 온지유에게도 똑같이 주셔야 합니다.”“할아버지, 저는...”심미연이 겨우 입을 열려는 순간, 강준형이 갑자기 의자에 쓰러졌다.심미연의
온지유는 팔찌를 돌려주기 전에 이미 강지한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쯤 어머님이 올라가셨을 텐데... 만약 강지한이 따라 올라가면 어머니 계획이 다 망가질 거야. 안 돼, 강지한은 어떻게든 막아야 해!’강지한이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내가 뭐라고 했지? 몸이 안 좋으면 집에서 푹 쉬라고 했잖아.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고. 애는 네가 원해서 가진 거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알겠어?”목소리는 낮았지만,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온지유는 놀란 표정으로 손을 움츠렸고, 억울한 표정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난 그냥... 심미연이랑 너랑 싸울까 봐 걱정돼서 팔찌를 돌려주러 온 것뿐이야. 내가 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건 아니야.”강지한은 냉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나한테 전화해. 성 비서를 곤란하게 하지 말고.”그의 말투는 직설적이었고, 온지유에게 일말의 체면조차 남기지 않았다.사실 강지한은 과거 자신을 구해준 온지유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요구를 어느 정도 봐주곤 했다. 하지만 그의 인내를 넘는 행동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당황했다. 그녀는 회사에 오기 전 성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강준형이 주식 양도 문제로 회사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래서 서둘러 달려온 것이었다.온지유는 자기 행동이 들키지 않았을 거라 자부했지만, 강지한이 그렇게 직설적으로 지적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수치심과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내가 어릴 때 도와준 것도, 온씨 가문을 위해 애쓴 것도 이제 다 끝난 거야. 그런데 만약 강지한이 나랑 관계를 끊는다면, 우리 집은 끝장난다고! 절대 그럴 순 없어!’온지유는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온지유는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지한 씨, 내가 네 소식을 너무 알고 싶어서 성 비서님께 전화를 드린 거야. 앞으로는 정말 전화 안 할게. 약속해.”강지한은 그
“할아버지는 괜찮으실 거야...”강지한은 문소영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녀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말했다.“성 비서가 집까지 데려다줄 거야..”할아버지가 이렇게 된 상황에서, 주식 양도는 당연히 불가능해졌다.할아버지가 이런 상태가 된 이상, 주식 양도는 당연히 불가능해졌다.“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갈게. 그냥 두고 가면 마음이 안 놓여.”심미연은 여전히 강준형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직접 그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다.강지한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자라온 환경은 그의 냉정한 성격을 만들었고, 누구에게도 따뜻함을 쉽게 보이지 않았다. 심미연이 그의 아내라고 해서 그가 다르게 대할 이유는 없었다.“할아버지가 깨어난다고 해도 주식을 네가 가질 일은 없을 거야. 어서 나가!”문소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기분 나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심미연은 그녀를 무시했다.이곳은 강지한의 사무실이었고, 강지한이 나가라고 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문소영은 심미연의 무시하는 태도에 속이 뒤집혔지만, 강지한이 있는 앞에서 화를 내는 건 체면상 할 수 없었다.“성 비서, 문 여사님을 모시고 나가!”강지한이 냉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문소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나보고 나가라니? 난 네 엄마야!”‘강지한이 심미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래! 저 아이를 위해 나서는 거야?’“성 비서.”강지한의 어조가 더 무거워졌다.성 비서는 어쩔 수 없이 다가가 공손히 말했다.“문 여사님, 이쪽으로 나가시죠.”문소영은 화가 치밀었지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강지한, 난 네 엄마야!”문소영은 눈으로 레이저를 쏠 것 같았지만, 최대한 자제했다. 회사에서 체면을 구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강지한은 미간을 짚으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계속 고집부리시면 경비를 불러서라도 내보낼 겁니다.”그는 누구에게나 냉정했다.
강지한은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심미연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이건 이 여자의 생각인가?’심미연은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내 아이디어 아니야.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으니, 강지한은 당연히 나의 의도라고 생각했겠지?’3년 전, 결혼 직후만 해도 심미연은 결혼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그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하지만 결혼식 당일 밤, 강지한은 그녀에게 이 결혼에 대해 아무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차갑게 말했다. 그러고는 차갑게 떠나버렸다.그날 밤,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신혼 첫날밤, 심미연은 홀로 방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그 이후로 심미연은 결혼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게다가 이제는 이혼을 결심한 상황이라 더더욱 필요가 없었다.두 사람 모두 체면이라도 지키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이런! 미연아, 너는 이노하이브의 안주인이야. 사람들한테 인사 좀 한다고 뭐가 문제냐! 지한아, 당장 비서한테 말해서 미연이를 회사 사람들에게 소개해. 아니면 네가 직접 데리고 가서 전 직원들 앞에서 소개해도 돼.”강준형은 이번에는 반드시 강지한이 그렇게 하게 만들겠다는 기세였다.“알겠습니다.”강지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강준형은 재촉하듯 심미연을 보며 손짓했다.“어서 가봐!”심미연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뜻을 보였다. 그러자 강준형은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빨리 가! 네가 주도권을 잡지 않으면, 밖에 있는 여자들이 호시탐탐 네 자리를 노릴 거야!”‘미연이는 그저 마음이 약해서... 언제나 사람들의 기에 눌리는구나... 안타까워라!’“가자.”강지한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말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순간 심미연은 혼란스러워졌다. 마치 그가 자신을 챙겨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강지한은 아무 말도 하
심미연은 옆구리가 회의실 탁자에 찍혀 찌릿한 고통에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아픔을 참지 못해 눈가가 붉어졌다.강지한은 몸을 가까이 밀착시키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 폭발할 듯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너랑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까, 다음 날 네 부모가 사람들을 데리고 호텔 문을 두드렸어. 파파라치 사진까지 들이밀면서 결혼 안 하면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더라.”강지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다.“결혼하겠다고 했더니, 심씨 가문에서 오천만 원짜리 예물을 요구했지. 그 후 3년 동안 내가 심씨 가문 회사에 투자한 돈만 해도 그 이상이야. 네 외할머니 병원비도 내가 절반을 부담해 줬어. 그동안 너는 내 돈으로 편히 살면서, 남편 돌보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아내라면 남편을 위해 요리하고 빨래하고, 일상 챙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그는 냉소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결혼하고 3년 동안 너 잘 지내왔잖아. 그런데 박유진이 돌아오니까 이혼하겠다고? 그래, 그 사람하고 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하지만 난 절대 안 놔줄 거야.”강지한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심미연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우리 일과 박유진은 아무 상관 없어! 내가 이혼하고 싶은 건 그 때문이 아니야. 난 이제 너를 더는 사랑하지 않아! 강지한,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를 놔줘!”그녀는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눈물을 쏟았다.강지한은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도 오히려 비웃음을 흘렸다.“너랑 박유진은 어릴 적부터 죽고 못 살던 사이였지. 그런데 그가 경성을 떠나자마자 날 이용해서 결혼하더니, 이제 박유진이 돌아오니까 나랑 끝내겠다고? 참 뻔뻔하다.”그의 목소리는 더 냉랭해졌다.“너와 네 가족이 강씨 가문에서 누린 게 3년이야. 이혼하면 네 일자리도 없어질 거고, 심씨 가문 회사도 위태로워질 거야. 그래도 이혼할 거야?”그의 눈에는 심미연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