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진은 강지한의 질문에 어쩔 수 없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텅 빈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아이가 있다는 건 웬 말인가?‘하지만 강 대표님은 왜 한 아이가 손짓했다고 하지?’잠시 머뭇거리다가 성무진은 작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대표님은 아가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환각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아이를 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강지한의 차가운 눈빛이 성무진의 얼굴에 드리우며 쌀쌀하게 말했다.“내가 아픈 것 같아?”그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마저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성무진은 입을 다물었다. 아픈지 아닌지는 그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분위기가 싸늘해졌을 무렵,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휴대폰을 꺼내 발신자 번호를 보던 강지한은 먹구름이 진 것처럼 어두웠던 얼굴이 금세 맑아졌고 입꼬리마저 씩 올라갔다.전화가 연결되고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어디 있어요? 왜 아직도 안 와요? 약속을 지키지 않잖아요. 흥!”마지막에는 화를 내는 것처럼 콧소리를 냈지만 부드럽게 들렸다.강지한의 마음은 얼음이 녹아내린 것처럼 따뜻해져 목소리마저 부드러워졌다.“미팅이 있어서 늦었어. 미안해, 하지만 이미 주차장에 도착했으니까 이 분 후면 곧 만날 수 있어.”강지한의 웃음 어린 표정을 바라보며 성무진은 작은 아가씨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작은 아가씨가 없었더라면 강지한은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강지한은 전화를 끊은 후 두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성무진을 흘겨보았다.“사라고 했던 케이크는 어딨어?”성무진은 난처한 표정이다.“사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가씨가 케이크를 드시면 충치가 더 심해진다고 했어요.”‘실은 케이크 한 조각을 먹어도 충치가 생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지만 대표님은 작은 아가씨의 일이라면 너무 신경 쓰잖아.’“내가 그런 말을 했어?”강지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네.”성무진은 했던 말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하는 강 대표님이 이젠 환각이 생기는 것은 물론 기억력도 떨어졌다고
강 대표님은 작은 아가씨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했다. 어떤 것은 먹으면 몸에 해로울 것 같았고 심지어 어떤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성무진, 빨리 전화로 케이크를 주문해서 하늘 하우스로 보내라고 해.”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성무진은 잠시 생각을 끊고 얼른 대답했다.“네.”역시, 조금 전까지 아가씨가 케이크를 먹으면 충치가 생긴다고 하던 대표님이 지금은 케이크를 주문하라고 한다.강 대표님은 이렇게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강지한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문을 나서자마자 낯익은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박유진?3년 전 그는 건강이 회복된 후 이 세계에서 사라진 것처럼 소식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여기서 볼 수 있을 줄이야.그럼 혹시...심미연도 살아있다는 걸까?그의 머릿속에 이 생각이 튀어나왔을 때 그는 갑자기 멍해졌다. 심미연이라는 이름을 마음속에 깊숙이 감춘 지 어느덧 3년이 넘었다.강지한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동안 심미연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신을 억제했다. 지금 갑자기 그녀 생각을 하자 명치끝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박유진 씨!”강지한은 아픈 가슴을 참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박유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칠흑처럼 검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일이죠?”심태하의 얼굴을 떠올리며 박유진은 경성이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돌아서자마자 만나게 된다니.“건강은 어때요?”강지한은 넌지시 질문했지만 스스로도 왜 말을 걸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저는 좋아요.”박유진은 말을 마친 후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뒤돌아서서 그의 뒷모습을 보던 강지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심미연을 잊었어요?”그는 예전에 박유진이 심미연을 깊이 사랑했던 것을 떠올랐다.심미연이 죽었다. 설마 벌써 심미연을 잊은 게 아닐까?강지한은 가슴 막힌 것처럼 불편했다.박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를 돌아봤다.“미연이가 떠나자마
박유진은 당황해서 강상미의 말을 막으려 했는데 이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지한 씨, 바쁘니까 시간 내서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박유진은 고개를 들어 다가온 여자를 바라봤다. 심서연이다. 방금 심태하에게 손찌검을 했던 사람이다.설마 심태하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에 아까 손을 쓰려고 했을까? 그렇다면 이 여자가 더는 상처 주지 못하게 심태하를 잘 지켜야 할 것이다.심서연은 그제야 박유진을 보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전에 심서연은 박유진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그가 3년 동안 소식이 없자 이미 어딘가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을 줄이야.“아저씨, 토끼를 돌려줄 수 있어요?”강상미는 박유진 손에 들린 찌그러진 인형을 보며 망가질까 봐 걱정되어 서둘러 돌려달라고 말했다.박유진은 손에 든 토끼 인형을 다듬어준 후 강상미에게 돌려줬다.“좋아하는 물건은 잘 지켜야 하지 상처받게 해서는 안 돼. 알았지?”강지한이 심태하에 대해 조사를 할까 봐 걱정스러웠지만 그들이 경성에 돌아오기로 선택했으니 다시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지난 3년 동안 박유진은 현재 눈앞에 차려진 행복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고 내일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강상미는 토기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박유진이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며 떠나려고 할 때 언뜻 심서연을 보았다.심서연도 그곳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교한 메이크업을 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지만 그 깊은 눈동자에는 소용돌이 같은 악랄함과 모략이 숨겨져 있었다.갑자기 마주친 눈빛은 마치 예리한 두 칼날이 공중에서 소리 없이 부딪힌 것처럼 파문을 일으켰다.그녀의 눈빛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던 박유진은 갑자기 놀라운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이렇게 예쁜 강상미가 정말 심서연의 친딸이란 말인가?생각하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이런 생각이 싹트자
강지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심서연의 마음은 촘촘한 바늘에 찍힌 것처럼 불편했고, 모든 근심걱정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오라기처럼 그녀의 몸을 숨 막히게 감싸는 것 같았다.그녀는 강지한의 그윽한 눈빛에서 약간의 감정 변화를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거울처럼 잔잔한 두 눈을 통해 내심의 변화를 읽어낼 수 없었다.강지한이 뭔가를 알아챘을까 봐 심서연은 은근히 조마조마해졌다. “아빠, 왜 말이 없어요?”앳된 목소리가 울려서야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강지한은 품에 안긴 딸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딸이 심미연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착각일까? 그는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빠, 왜 이런 눈빛으로 저를 봐요?”어린아이가 품에 안긴 채로 나긋나긋하게 물었다.강지한은 생각을 접고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아이를 달랬다.“우리 상미가 너무 예뻐서 아빠가 좀 더 봤을 뿐이야!”강상미는 예쁜 두 눈을 깜박였다.“엄마도 예쁜데 아빠는 왜 엄마를 보지 않아요?”심서연은 수줍은 얼굴로 강지한을 바라봤다. 지난 3년 동안 강지한이 자신을 봐주기를 바랐지만 그의 모든 눈빛은 강상미에게로만 향해 그저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강지한은 심서연의 시선을 피하며 그저 강상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아빠는 눈이 너무 작아 상미밖에 보이지 않아!”심서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런 결과를 진작 알고 있어서인지 이젠 마음도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아빠, 거짓말! 아빠는 눈이 커요.”강상미는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강지한은 그녀의 작은 손을 떼지 않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기분이 좋음을 보아낼 수 있다.강상미는 그의 천사였다. 만약 강상미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 이 세상에서 없어졌을지도 모른다.“상미야, 장난치지 말고 손을 치워. 아빠가 길을 보지 못하면 넘어질 수 있거든.”심서연이 곁에서 호통을 치자 강상미는 순순히 손을 내려놓으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강
“대표님을 닮았어요.”성무진이 잇달아 말했다.“작은 아가씨는 대표님의 판박이 같아요.”강지한은 눈썹을 찌푸렸다. 모든 사람이 강상미가 그를 닮았다고 말하지만 그는 왠지 눈매가 심미연을 닮은 것 같았다. 맑고 깨끗한 두 눈은 하늘의 별처럼 예뻤다.“상미는 아빠를 닮아서 예뻐요.”장난감을 놀고 있던 강상미는 고개를 들어 강지한을 바라보며 웃었는데 그 모습은 꽃처럼 예뻤다.어린아이가 아는 단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예쁘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말이다.강지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그럼. 넌 아빠를 닮았어.”“무슨 얘기를 하였기에 분위기가 이렇게 즐거워요?”심서연이 차 문 옆에서 부드럽게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강지한은 웃음을 거둬들이며 담담하게 웃었다.“어머니께서 보고 싶어 하니 기사를 시켜 데려다주게 할게요. 난 일단 상미를 데리고 회사로 가야겠어요.”“저도 함께 갈까요?”심서연이 당황해서 다급하게 말했다.‘방금 화장실에서 참지 못하고 강상미에게 손찌검을 했는데 혹시 아이가 이 일을 강지한에게 일러바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강지한이 이렇게 쌀쌀한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닐까?’강지한은 강상미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기사를 시켜 어머니한테로 바래다 줄게요.”심서연은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불렀다.“상미야.”강상미는 고개를 들어 애꿎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 저를 불렀어요?”강상미는 엄마가 싫었지만 증조할아버지는 싫어하는 사람과 꼭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이 겉으로만 친구를 하되 속으로 경계심을 가지면 된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녀는 엄마와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잘못 들었어. 계속 놀아!”강지한이 부드럽게 말하자 심서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강지한은 그녀의 마지막 희망을 깨버렸다.“네.”강상미는 옆에 놓인 토끼 인형에 뽀뽀하며 아까 그 오빠의 이름이 무엇이든지 생각했다.강지한은 차 문을 닫으며 말했다.“회사로 가.”심서연은 두 걸음 물러서서 차가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봤다.“심서연
“아빠, 사랑해요!”예쁜 어린아이가 입을 삐죽 내밀고 통통한 작은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그에게 하트를 그리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아빠도 상미를 제일 사랑해!”강지한은 부드럽게 말했다.심미연은 예전에 그를 사랑할 줄 모르는 냉혈인간이라고 말했다.상미가 나타난 후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고 다음 생이 있다면 심미연을 잘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심미연 생각에 그는 또 가슴에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아파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강상미는 그의 괴로운 모습을 보고 급해서 울음을 터뜨렸다.“아빠, 아픈 거 아니에요?”강상미의 말을 들은 성무진이 백미러를 통해 강지한의 상태를 살피다가 재빨리 속도를 높여 이안 병원으로 운전했다....하늘 하우스.심태하는 주방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었고 심미연은 신하린과 거실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이 두 사람은 평소에 자주 영상통화거나 전화를 했지만 3년 넘게 만나지 못해 할 말이 많았다.심태하는 다 끓인 커피를 작은 밀차에 싣고 거실로 밀고 갔다. 한창 얘기 중인 두 사람을 보고 그는 인사를 한 후 다시 밀차를 끌고 나갔다.2층에 있는 침실은 그가 직접 고른 것인데 안방과 멀리 떨어있어 마침 엄마 몰래 그의 비밀을 감출 수 있었다.신하린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심태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심미연에게 물었다.“태하가 정말 코드를 잘 알아?”3살배기 아이라면 보통은 말도 제대로 표달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심태하는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도 잘해서 매우 뜻밖이었다.어쨌든 이런 천재는 처음이다.“방원호가 가르쳐줬었는데 지금은 해킹 기술이 대단해. 재테크도 잘해서 통장에 돈이 꽤 있거든.”아들에 관해 말하자 심미연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신하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대박!”심미연이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아마 허풍을 떨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대단한 아이가 있을 수 있다니!“태하는 라이브 방송을 통해 게임을 하고 있어.
“변호사님, 방금 소송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드렸어요. 집에 도착했어요?”임현의 목소리는 경쾌했다.“이미 도착했어요. 점심 식사 함께할래요?”심미연이 물었다. 당시 그녀가 바다에 떠밀려 죽었다는 현상을 만든 후 제일 먼저 연결한 사람이 바로 임현이다.온지유의 사건은 그녀가 직접 법정에 나설 수 없어 임현에게 부탁했다.그녀와 3년 동안 함께 했고 또 임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절대 그녀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임현은 이 소송으로 경성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심미연은 신하린과 로펌을 오픈했고 임현도 도우려고 함께 참여했다.지난 3년 동안 로펌이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는 데는 임현의 헌신적인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현재 임현은 이미 동업자가 되어 연봉이 수억 원에 달했다.“경성에 새로운 인기 레스토랑이 열렸는데 많은 사람이 방문하러 가더라고요. 듣기론 디저트가 아주 맛있다고 하던데 태하도 좋아하잖아요? 태하데리고 이 레스토랑에 가보는게 어떨까요?”신분, 지위, 돈 등 모든 것을 얻은 임현은 심미연이 발탁해준 은혜에 항상 감사했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심미연이 돌아오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좋아요!”심미연은 먹는 것에 대해 가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심태하는 편식했고 많은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유독 단 음식을 좋아했다.심미연은 예전에 강지한도 단 음식을 좋아했던 것을 떠올렸다.그녀가 웃을까 봐 몰래 훔쳐먹곤 했는데 심미연은 알면서도 까밝히지 않았다.심태하는 생긴 것은 물론 먹는 것까지 강지한과 똑같았다...“그럼 제가 룸을 하나 예약할게요.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시면 되니 서두르지 마세요.”“알았어요.”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었다.신하린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임현 씨야?”심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하린은 그녀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때 나 몰래 떠나면서 오히려 개인적으로 임현 씨와 연락하더라고. 이건 내가 너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라는 거잖아.”사실 이 일에 대해 심미연은 설명한 적이 있었
신하린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분명히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하나를 잃었으니 지난 몇 년 동안 심미연이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른다.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심미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조용히 심태하의 방문을 열었다.방안의 카펫 위에 작은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 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는 온통 코드로 가득 차 있다.심미연은 발을 들여놓지 않고 오히려 손을 들어 노크했다.노크 소리에 작은 아이는 신속히 노트북을 닫은 후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엄마, 무슨 일 있어요?”심미연은 그의 비밀을 들켜버린 것처럼 켕겨 하는 모습을 보고 묻지 않았다.“임현 이모가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고 했으니 나갈 준비를 해야 해.”그녀는 무심코 바닥에 놓인 컴퓨터를 힐끗 보았다.‘이 녀석이 방금 무엇을 하고 있었지?’심태하는 즉시 그녀를 향해 달려와 품에 안기며 고개를 들어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엄마, 너무 사랑해요!”심미연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엄마가 말했지? 해킹 기술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지 않으면 난 화내지 않아.”이 녀석은 항상 입에 발린 말을 하며 그녀를 즐겁게 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심태하는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난 가끔 나쁜 사람을 벌할 뿐이에요.”“엄마는 널 믿어. 됐어,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가야지.”언제든지 심미연은 아들을 무조건 믿었다.“엄마 최고예요!”심태하는 그녀의 다리를 껴안고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는데 이 친근한 동작에 심미연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려 손을 뻗어 그를 안아 올렸다.심태하는 그녀의 목을 껴안고 작은 얼굴을 내밀어 얼굴에 뽀뽀했다.“엄마, 저를 아들로 낳아주셔서 고마워요.”그의 주변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엄마는 걸핏하면 때리거나 욕했는데 그의 엄마는 이렇게 대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런 엄마가 있어 행복했고 심지어 하늘이 준 행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