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은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부모는 아이들에게 의지가 되고 기댈 곳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저 그녀를 탓하는 데만 집중했다. 마치 육현성의 잘못이 전부 그녀 때문인 양 말이다. 아버지 앞에서의 그녀는 먼지처럼 비참하게 여겨졌다. [이다은, 경고한다. 만약 육현성과 이혼하려고 한다면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마라.] 이건명은 차갑게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이 체면을 잃을 수 없었다. 이다은은 고개를 들고 눈물을 삼키며 이미 끊어진 전화를 향해 말했다. “그 집. 나도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부모는 그녀를 하나의 도구로 취급했다. 오직 오빠만이 그녀에게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이혼을 잘 끝내려면 오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정말 힘든 순간 이진영의 전화가 울렸다. 이다은은 급히 눈물을 닦고 전화를 받았다. [오빠.]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육현성과 이혼할 생각 해본 적 있어?] 이진영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강지한이 전화를 걸어 육현성이 그를 초대해 식사를 하며 온지유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강지한의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뜻을 이진영은 곧바로 파악했다. 몇 년 전 육현성은 강지한과 적이 되더라도 온지유를 도와 해외로 탈출시키려 했었다. 지금은 또 강지한에게 온지유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꼴이었다. 정말 애틋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와 온지유를 영원히 묶어두면 된다. 이진영은 자기 여동생을 구해내야 했다. 이진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에 이진영의 가슴도 아파왔다. 하지만 급하게 말을 하지 않고 이다은이 울음을 충분히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울음을 그친 이다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 도와줘. 나
‘하린이는 그럼 내가 연루시킨 건가?’ 경비원이 떠난 후 심미연은 문을 잠그고 거실로 돌아가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날의 CCTV 영상을 아직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사진을 들고 그녀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일이 점점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누가 나를 겨냥하고 있는 걸까?’ ‘그럼 왜 마지막에 사고를 당한 건 하린이었을까?’소파에 앉아 있는 취한 박유진은 믿기 어려울 만큼 순해 보였고 그의 눈빛은 그녀를 바라보며 마치 사탕을 갈망하는 아이처럼 맑고 순수해 보였다. “미연아, 안아줘...” 심미연은 순간 마음이 약해져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해장국 끓일게. 잠깐 누워 있어. 움직이지 말고. 알겠지?” 그녀는 부드럽게 말하며 일어섰다. “미연아, 안아줘.” 박유진은 여전히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며 그 눈빛에서 온기와 애정이 넘쳐흘렀다. 심미연은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살며시 웃으며 그의 품으로 다가가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안아줬으니까 이제 해장국 끓여줄게.” 그녀는 조용히 속삭이며 일어섰다. “뽀뽀...” 박유진은 입술을 내밀며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달콤하게 빛나고 있었다. 심미연은 웃음 섞인 말투로 그의 입술에 손끝을 살짝 올렸다. “아주 장난꾸러기야.” 하지만 결국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박유진의 눈이 반짝이며 기쁨에 젖어들었다. 마치 첫 사탕을 먹은 아이처럼 그 표정은 너무 귀여웠다. 심미연은 천천히 일어나며 그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착하게 누워 있어. 내가 금방 해장국 끓여서 올게.” 그녀는 박유진을 남겨두고 부엌으로 향했다.박유진은 오늘 밤 그녀를 위해서 술을 그렇게 마셨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술 깨는 국을 들고 나가 보니 박유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심미연은 국을 차 테이블에 놓고 그에게 가벼운 담요를 덮어줬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심미연 씨, 그렇게 똑똑하신데 왜 내 정체를 못 찾아내죠?] 그 목소리엔 자만이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아름다운 도화 같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말했다. [서두르지 마.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때 용서해 달라고 구걸하지 마.] [좋아. 나한테 덤벼 봐. 누가 살아남는지 두고 보자고.] 상대방은 자만에 차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못 찾았으니 앞으로도 내 정체는 절대 못 찾을 거야.] 심미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멈췄다. [당신은...] 말이 끝나기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 심미연은 전화를 쥔 채 머릿속에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5년 전에 스승님이 갑자기 사망했다. 3년 전에는 온지유의 모든 죄가 드러나고 나윤미가 나타났다. 지금 그 사람이 또 그녀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이 사람들과 사건들을 연결 지었다. 온지유와 그녀 둘만이 강지한과 관계가 있다는 것 외에는 나머지 두 사람은 강지한과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스승님을 죽였을까?’ ‘나윤미는 그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던 걸까?’ ‘공범? 피해자? 아니면 다른 사람?’ 심미연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 발신자는 심태하. 심미연은 빠르게 감정을 정리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있어요?] 심태하의 목소리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살짝 나른했고 코맹맹한 소리가 섞여 있어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포근한 느낌을 줬다. [너 잠에서 깬 거야?] 심미연은 아이가 낯선 환경에서는 잠을 잘 못 자는 걸 알기에 외출할 때마다 그가 쓰는 침구를 챙겨 다녔다. 오늘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 잊고 있었다. 심태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 사실이 떠올랐다.[네. 방금 깼어요.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요.] 심태하가 부드럽게 애교를 부리자 심미연의 마음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우리
심미연은 천천히 다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오빠, 고마워.” ‘날 사랑해 줘서.’ ‘날 보살펴 줘서.’ ‘그리고 내 곁에 있어 줘서.’ 박유진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손을 뻗어 가스불을 끄고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했다. 그의 따뜻한 손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랑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다고 했잖아. 왜 또 고맙다는 말을 해?” 말을 하며 살짝 찌푸린 미간이 그가 별로 달갑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부드럽게 펴 주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지금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고마워’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녀의 손길에 박유진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어제 술 마시고 살짝 취했는데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그녀는 말을 마치며 그의 손목을 살짝 잡아 맥을 짚었다. 박유진은 그녀의 행동이 귀여워서 피식 웃고 말았다. “맥 짚어 본 결과 어때? 내 몸에 이상한 곳이라도 있어?” “아주 건강한데?” 심미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근데 어제 나 취해서 혹시 실수한 건 없어?” 술을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타입이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심미연은 어젯밤 그가 얌전히 곯아떨어져 있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참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이 술 취하면 사람을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난리를 치잖아?” “근데 오빠는 조용하더라. 잠만 자던데?” 박유진은 살짝 당황한 듯 다시 물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어?” ‘보통 술 취하면 본심이 나온다는데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혹시 미연이가 일부러 말 안 해 주는 건 아닐까?’ ‘아니면 미연이가 부끄러워서 모른 척하고 있는 걸까?’“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심미연은 요염한 도화 같은 눈을 살짝 깜빡였다. 그러다 어젯밤 그가 술에 취해 뽀뽀해달라, 안아달라며 졸라대던 모습이 떠올라 귀끝이
심미연의 입술이 간신히 박유진의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심미연은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바로 세우며 핸드폰을 꺼냈다. 박유진의 얼굴에 잠시 아쉬운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감추듯 평정을 되찾았다. 심미연은 전화를 받았다. [심미연 씨, 빨리 오세요. 어떤 여자가 병실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전화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하린의 간병인이었다. 심미연이 직접 고용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초조한 기색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심미연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바로 갈게요. 일단 호출 버튼을 눌러서 도움을 요청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박유진을 끌어안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나 지금 병원에 가봐야 해서 같이 아침 못 먹어... 미안해.” 박유진이 일부러 일찍 일어나 정성껏 차린 아침이었다. 하지만 한 입도 먹지 못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심미연의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박유진은 신하린이 심미연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며 말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오빠, 나 혼자 갈 수 있어. 오빠는 태하 데리러 가야 하잖아. 유치원도 바래다줘야 하고.” 잠시 생각하던 심미연은 문득 떠올랐는지 덧붙였다. “가는 길에 태하한테 말 좀 해줘. 학교에서 또 말썽 피우면 나 정말 화낼 거라고.” 그러다 문득 심태하의 가방 속 노트북이 떠올랐다. “그리고 태하 노트북이랑 핸드폰은 오빠가 보관해. 대신 가방에 그림책 두 권 넣어 줘.” 어제 같은 일은 절대 다시 일어나게 두어선 안 됐다. 그렇지 않으면 유치원 원장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박유진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갈게. 오빠도 빨리 태하 데리러 가서 학교에 보내줘. 그리고 내일 재판이 있는데 오늘 준비할 자료가 많아
그녀만이 자신의 남편을 보물처럼 여기는 거다. “두 사람 대화 기록을 그 사람 핸드폰에서 봤어요.” 소문에 의한 이야기는 믿지 않지만 직접 본 것이라면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왜 그걸 당신한테 보이게 한 걸까요? 아니면 예전부터 계속 당신한테 대화 기록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요?”심미연은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 여자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그런 가능성은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화 기록을 봤을 때 화가 나서 병원으로 달려왔을 뿐 어떻게 된 일인 건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저는 은성의 부총재에요. 확실히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같이 일해요. 도 대표랑 하린이가 둘이서만 있은 적은 없어요.”심미연은 마음속으로 누군가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거라고 추측했다. 도 부인은 심미연의 아름다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은 너무 맑아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심미연은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신하린과 협상할 때 다른 사람을 동반한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도 부인께서 믿지 않으시면 제가 직접 도 대표한테 전화해서 오도록 할게요. 문제를 확실히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심미연은 자신감이 넘쳤다. 도 대표가 오면 절대 거짓말을 하지 못할 거였다. “괜찮아요. 먼저 집에 가서 상황을 확인해볼게요.” 도 부인은 심미연이 이렇게 확신에 찬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동시에 심미연이 한 말을 마음에 새기며 서둘러 돌아가서 진실을 확인하려고 했다. 도 부인이 떠난 뒤 심미연은 신하린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절대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야.” 신하린은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저 침묵했다.그 시각 다른 한 켠.한유나가 아침 식탁에 앉아 우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확실히 기분이 좋
“유나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버린 거야?” 한석훈은 그녀가 머리를 흔들며 찡그린 모습을 보며 분명 누군가를 떠올렸다는 걸 눈치 챘다. 한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진영은 한씨 가문의 사위로서 장례식 전 과정을 주관했다. 그때 모두가 그를 의리 있고 훌륭한 사위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도 그런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와 함께 평생을 보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날 이진영이 결혼을 취소하자고 했을 때부터 그녀는 그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리 무해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녀가 알지 못한 더 어두운 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랑 이진영의 관계는 어때? 결혼은 언제 할 거라고 말한 적 있어?” 한석훈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사실 이진영은 꽤 오래 집에 들르지 않았고 그 사이에 그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는 걸 한석훈은 느꼈다. “그냥 그래요. 결혼은 일이 안정된 후에 생각하려구요.” 한유나는 결혼 얘기를 피하려 했다. 그녀는 한석훈에게 이진영이 파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진영과의 파혼을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기때문이다. 그 체면을 잃을 수 없었다. “이진영과 결혼하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 애가 널 충분히 부양할 수 있잖아.” 한석훈은 이씨 가문의 재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명은 늘 정치에 종사해왔지만 이진영의 어머니 방혜자의 가문이 막강했고 이진영은 일찍이 그쪽 가문 사업을 물려받았다. 이씨 가문은 단순히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다. 한석훈은 결혼이 가져다 줄 물질적인 이점을 알기에 이씨 가문과의 혼인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다. 결혼으로 인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제가 알아서 할게요.” 한유나는 말을 마치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 먹었어요. 아빠 천천히 드세요.”한석훈은 한유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뭔가가 이상했지만 그가 느낀 그 불편한 기운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
부모님의 명과 중매로 이진영은 한유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진영은 아예 대답도 안 하고 그냥 등을 돌려서 나가버렸다. 한유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건명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진영, 당장 멈춰!” ‘이 자식은 진짜 사람을 화 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이진영은 집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을 꺼내어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지한은 빠르게 전화를 받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침 일찍 전화를 거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강지성하고 강혁승, 쌍둥이야?” 그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강지한은 잠시 멈칫했다. “강지성은 알겠는데 강혁승은 몰라.” 그는 밤에 박시훈에게 이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진영이 왜 또 이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강혁승이라고 강지성과 똑같이 생겼어.” “이 일은 내가 사람 시켜서 확인해 볼게.” 이진영이 전화를 안 했더라도 그는 이 사건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너랑 네 전처는 어떻게 지내고 있냐?” 이진영은 갑자기 신하린에게 수술을 해준 심미연이 떠올랐다. 병원에서 알아보니 심미연의 의술이 정말 뛰어나다고 했다. 만약 강지한과 심미연이 잘 지낸다면 그는 심미연에게 강상미의 수술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 것이다. “할 말 더 있어?” 강지한은 심미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껄끄러워 보였다. “알겠다. 나 출근하러 갈게.” 강지한은 더 이상 말을 아끼며 전화를 끊었다. 이진영도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도 인연에 달린 법이다. 인연이 닿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만날 수 없다.지금 강지한은 병상 옆에 앉아 강상미의 작은 손을 잡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와 심미연의 관계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다. “아빠,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강지한은 생각을 정리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작은 아이를 부드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