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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새로운 세계

Autor: ALL장르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09-03 23:05:57

08.

찬솔과 해솔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살포시 담갔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가 발가락 사이를 어루만지며 모래를 가져갈 때마다 기분 좋은 간지러움이 번졌다. 모래사장 한쪽에 커다란 천을 깔고 도시락을 가지런히 펼치던 민식이 손을 휘두르며 두 아들을 불렀다.

“찬솔아! 해솔아! 도시락 먹자!”

“네!”

“네!”

두 사람이 천 위로 돌아와 앉자, 해솔은 도시락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와… 이모님이 정말 신경을 많이 써주셨네요.”

“그렇지? 오랜만에 삼부자가 나들이를 간다니까 힘 좀 쓰셨대.”

도시락 안에는 알록달록한 김밥부터 노릇하게 구워낸 분홍 소시지, 삶은 달걀과 과일, 그리고 병 사이다까지 해솔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특히 병 사이다는 해솔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952년에 마시는 병 사이다라니, 이 뚜껑을 딸 때 나는 톡 쏘는 청량한 소리가 이토록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해솔아, 밥부터 먹어야지.”

“아버지, 저도 이제 애는 아니에요.”

해솔은 짐짓 투덜거리면서도 민식의 눈치를 살피며 김밥 한 알을 쏙 집어 입에 넣었다. 참기름 향이 감도는 김밥 맛은 놀랍게도 현실에서 먹던 그 친숙한 맛과 닮아 있었다.

그 순간, 현실 속 아버지의 얼굴이 불쑥 스쳐 지나갔다. 해솔이 스무 살을 넘기고 제대를 한 뒤에도 늘 어린아이 취급하며 챙겨주던 그 따뜻한 손길. 코끝이 매캐해지는 서러움이 차오르자, 해솔은 황급히 병 사이다로 벌컥벌컥 목을 축였다.

‘현실의 사이다보다 단맛은 살짝 적은데… 그래도 역시 탄산은 진리다.’

해솔은 가슴을 뻥 뚫어주는 청량함에 속으로 작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도시락으로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배를 두둑이 채운 뒤, 해솔은 혼자 다시 바닷가로 다가가 발을 물에 담갔다.

맑은 물결이 발끝을 자극할 때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물을 첨벙거리며 백사장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던 해솔은 햇살을 받아 따스해진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모아 안은 채 아득한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곳의 바다는 소설 속 풍경처럼 신비로울 정도로 맑았다. 높은 빌딩이나 빽빽한 피서객 하나 없는 한적한 바다, 고요함 속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지친 그의 영혼을 조용히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해솔아, 슬슬 돌아가자.”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보던 해솔은 민식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정리를 다 마쳤는지, 조금 전까지 먹거리들이 가득했던 자리는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해솔은 바다를 아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민식과 찬솔의 뒤를 따라 걸었다. 차에 오르기 바로 직전, 그는 마음을 남겨두듯 뒤를 돌아 한 번 더 광활한 바다를 눈에 담았다.

‘다음에… 또 올 수 있겠지?’

해솔은 가슴 가득 바다의 고요한 여운을 품은 채 집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평온한 산바람과 귓가를 스치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해솔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잔향처럼 남았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눕힌 해솔은 가만히 눈을 감고 오늘 거닐었던 바닷가를 되짚어 보았다. 빌딩 숲과 상업 시설이 빼곡했던 현대의 바다와는 차원이 다르게 텅 비어 있던 고즈넉한 바다. 그 아득한 풍경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감상을 넘어 어딘가 이질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남겼다.

“그래도… 참 좋네. 현실에서는 늘 취업 준비에 공부하느라 정신없이 살았고, 번듯한 회사 들어가겠다고 성인이 되고 나서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못 가봤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해솔의 머릿속에 문득 그 산신의 존재가 스쳐 지나갔다.

‘아, 랑이님께 가볼까.’

언제든 산에 올라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찾아오겠다던 늑대의 다정한 목소리가 가슴을 간질였다. 해솔은 창문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선홍빛 노을의 온기가 창살을 타고 들어와 침대 밑바닥까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해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정한 듯 침대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주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아침에 이모님이 정성스레 싸주셨던 도시락 음식들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해솔은 가지런히 담긴 남은 음식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산신님이니까 음식을 안 드시려나? 과일을 가져가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해솔은 결국 사과와 배를 하나씩 꺼내 작은 가방에 조심스레 넣었다. 마당을 지나 오솔길로 들어서자, 산골짝의 주변 풍경 위로 짙은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이 칠흑 같은 밤길이었지만, 랑을 만났던 곳까지는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났던 그곳에 도착한 해솔은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불렀다.

“산신님…? 랑이님?”

하지만 고요한 숲속에서는 밤벌레 소리만 나직하게 들려올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해솔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숲 안쪽으로 몇 걸음 더 옮기며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랑이님? 저 해솔이에요. 혹시 계신가요!!”

작은 울림이라 닿지 않은 걸까. 해솔은 배에 힘을 주고 조금 더 크게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그러나 산에 적막만 흐르자, 그는 섭섭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돌아서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함께 랑이 우뚝 솟은 바위 위로 유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못 들으신 줄 알고 그냥 내려갈 뻔했어요.”

“네 부름을 듣고 가장 빠르게 달려온 것이란다.”

랑의 다정한 변명에 해솔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웅얼거렸다.

“아, 그렇겠네요. 아무리 신령님이어도 순간이동을 하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랑은 특유의 황금빛 눈동자에 온화한 미소를 담아 해솔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해솔의 머릿속에는 거대한 은빛 늑대가 해솔의 부름을 들은 순간 가파른 산길을 헐떡이며 복슬복슬한 꼬리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광경이 그려졌다. 어쩐지 그 웅장한 신령님이 귀엽게 느껴져 해솔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이것 보세요, 과일 챙겨왔어요. 혹시 드실 수 있나 싶어서요.”

해솔은 가방에서 사과와 배를 차례로 꺼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랑은 자신을 위해 작은 마음을 써준 해솔의 손길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따스함에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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