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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 07.

Author: ALL장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3 03:35:56

07.

2층 방문 넘어 들려오는 찬솔의 목소리에 해솔은 책을 덮고 1층 거실로 내려갔다. 탁자 위에는 마을 과수원에서 막 따온 듯한 신선한 과일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 시대의 강원도에서는 망고나 파인애플 같은 남국 과일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지만, 대신 아삭하고 새콤달콤한 제철 사과만큼은 매일 질리도록 맛볼 수 있었다.

게다가 집안이 대대로 고위 군인 집안인 덕분에, 종종 남쪽 지방이나 멀리서 재배된 희귀한 과일들까지 상자째 배달되어 오곤 했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대접받는 일상을 누리며, 해솔은 문득 씁쓸하면서도 솔직한 생각에 잠겼다.

‘소설 속이든 현실이든, 역시 금수저로 태어나는 게 제일이네.’

간혹 마을 아래로 내려가면, 조그마한 손으로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일하는 어린아이들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런 참담한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해솔은 자신이 누리는 이 안락함이 얼마나 커다란 특권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그 편안함의 그늘에서도 불쑥불쑥 피어오르는 불안감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가문의 그늘에 여유롭게 지낸다 해도,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독립하거나 가정을 꾸릴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나 이 서슬 퍼런 1950년대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모질고 고단한 삶일지, 해솔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숨겨진 이유 중 하나였다.

“해솔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각에 잠겨 있던 해솔은 찬솔의 다정한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며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찬솔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내일 우리 바닷가에 갈까?”

“바닷가?”

해솔은 약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족여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해솔에게는 점차 아득하고 낯선 개념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부모님 손을 잡고 이곳저곳 다녔지만, 찬솔이 머리가 자란 이후부터는 가목 여행에 슬그머니 빠지기 시작했고, 해솔 역시 자연스럽게 집에 남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쪽을 택했었다. 더군다나 이 집안에는 어머니의 빈자리가 컸기에, 셋이 소풍을 떠난다는 상황이 더더욱 생소하게 다가왔다.

“와, 아버지. 얘 표정 좀 보세요. 이제 머리 좀 컸다고 우리랑 같이 놀러 다니기 싫은가 봐요.”

“아, 아니거든?! 내가 언제 그랬어, 형은 왜 말을 항상 이상하게 해!”

찬솔이 장난스럽게 억울한 모함을 씌우자, 해솔은 양손을 바쁘게 저으며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민식은 티격태격하며 우애를 나누는 두 아들의 모습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자, 과일이나 어서 먹어라.”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해 이곳으로 떨어진 이후로, 해솔이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현실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살아온 세월과 추억이 다른 민식, 찬솔이였기에 섣불리 대화의 물꼬를 트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두 사람 역시 해솔을 배려하느라 억지로 방 밖으로 끌어내지 않았던 터였다. 하지만 민식과 찬솔은 근래 해솔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적극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십 대 후반부터 우울증의 늪에 빠져 방 안에서 나오지 않던 막내였기에, 오늘처럼 툴툴거리며 장난스럽게 농담을 받아치는 모습은 과거 해맑았던 시절의 해솔을 떠올리게 했다. 찬솔은 감개무량한 미소를 지으며 해솔의 접시 위에 과일 조각을 살포시 얹어 주었다.

“내일 바다에 가자. 응? ”

해솔은 순간 멈칫하며 망설였지만, 내면에서 차오르는 따스함에 이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해솔의 승낙에 민식과 찬솔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져나갔다.

“도시락 싸갈까?”

“그래야죠. 김밥도 싸고. 아…”

‘김밥’이라는 단어를 뱉어낸 직후, 해솔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 1950년대의 세계에도 김밥이라는 음식이 존재하는지, 만약 있다면 현대에서 즐겨 먹던 그 맛과 같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해솔이 혼자 당황하여 흠칫거릴 때, 찬솔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김밥? 해솔아, 김밥이 뭔지 기억이 나?”

“…어?”

찬솔의 질문에 해솔은 동그란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마 이 시대에도 김밥이라는 명칭이 쓰이고 있던 걸까? 찬솔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니, 마치 원래의 이 몸(해솔)이 과거에 김밥을 먹어본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렸다.

“어, 어렴풋이…? 옛날에 놀러 갔을 때 먹었던 맛있는 거라는 정도만…”

“아… 그렇구나. 사소한 거라도 이렇게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 가니 참 다행이다. 주방 이모님께 맛있게 싸달라고 해야겠네.”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소풍 짐을 바리바리 챙겨 고풍스러운 검은색 자동차에 올라탔다. 당시 강원도 전체를 통틀어도 몇 대 없다는 귀한 차였지만, 시골 도로는 제대로 포장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차가 자갈길을 달릴 때마다 거칠게 덜컹거렸고, 평소 차멀미가 없던 해솔마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해솔아, 얼굴빛이 안 좋은데 괜찮냐?”

“욱… 속이 울렁거려…”

“조금만 참아,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찬솔은 아파하는 해솔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앞자리에 앉은 민식에게 짐짓 가벼운 화제를 건넸다.

“아, 아버지. 소문에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자동차 공장이 들어선다던데, 정말인가요?”

“응. 듣자, 하니 버스를 먼저 만든다고 하더구나.”

“와, 대단하네요. 이제 국산 기술로 만든 자동차를 타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네요.”

창문에 이마를 대고 있던 해솔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멀지 않을 뿐인가. 나중엔 우리나라 자동차가 전 세계로 수출되는데. 자동차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에 반도체, 온갖 가전제품까지… 아, 진짜 인터넷 하고 싶다…’

그리운 현대의 풍경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아득해지던 그 순간, 민식의 나직한 목소리가 창밖을 가리켰다.

“해솔아, 곧 바다가 보일 거야.”

“정말요?”

민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창 너머로 탁 트인 푸른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현대의 강원도 바다와는 전혀 다른 낯설고도 눈부신 풍경이었다. 상업 건물이나 횟집 하나 없이 한적하고 고요한 백사장, 그리고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순수의 바다가 햇살을 받아 부서지고 있었다.

“와… 진짜 예쁘다…”

“자, 다 왔으니 내리자꾸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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