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 시대의 여인은 제약이 별로 없었다.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고 친우들을 불러 나들이도 갈 수 있었다.작금의 황제는 보수적이지만 인자한 사람이었다.황제가 맺어준 인연이라고 해도 설은비가 처음부터 연준에게 고충을 얘기했더라면 그 역시 강제로 그녀를 저택에 가둬두진 않았을 것이다.연씨 가문은 대대로 황실에 충성한 충신이었다.그들은 백성들을 자비롭게 대했고 권세로 약자를 누르지 않았다.부귀영화를 좋아하는 건 잘못이라 할 수 없었다.설은영도 좋아했다.그녀의 비극에 설은비가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했지만 고의로 뭔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그래서 설은영은 설은비를 증오하지 않았다.진정한 원수는 오직 하나, 최진겸이었다.그는 그녀에게 최 부인의 자리를 차지하여 자신과 사랑하는 여인을 함께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그리고 설은비의 죽음도 모두 그녀의 탓으로 돌렸다.그러나 그녀가 그의 본심을 모를 리 없었다.그는 그저 10년을 함께 고생한 부인을 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때의 그녀는 최진겸에게 껄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였다.운나라의 가장 젊은 재상의 부인이 얼굴이 누렇게 뜨고 성격도 갑갑한 사람이라면 체면이 깎일 것을 우려한 것이다.사내가 승진하고 부자가 되면 조강지처부터 버린다는 말이 있듯이, 설은영의 죽음은 정해진 수순이었다.그는 그저 자신의 배반에 적절한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설은비는 그가 생각해낸 억지스러운 핑계에 불과했다.준수하고 성실한 외모 아래, 가장 악독한 심보가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설은비는 어릴 때부터 총애만 받고 자랐기에 두 번째 삶을 얻었어도 전생에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그런 그녀라면 최진겸에게 골수까지 이용당하다가 버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최진겸은 처가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이따금씩 무심한 듯, 설은영에게 시선을 주었다.난초꽃처럼 청순하고 우아하며 싱그러운 인상이었다.주변에서 풍기는 은은하고 싸늘한 분위기는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
“따져보면 그 사람은 어머니가 친히 가르친 사람이야. 잘못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고의는 아니었을 것 같네.”최진겸은 속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얼굴로 듣고만 있었다.그러나 설민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고의가 아니라는 말을 어찌 저렇게 쉽게 할 수 있는가?두 아이를 바꾼 건 순간의 충동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몰래 산파와 저택의 하인들을 매수했을 것이다.절대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추 이랑은 아마 오랜 시간 생각하고 계획했을 것이다.얼마나 독하면 강 부인의 처소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가 안주인과 같은 날에 출산을 강행했다.설민준은 추 이랑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가 선을 넘었다고 느꼈다.반면 최진겸의 관심사는 설은비뿐이었다.솔직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는 오히려 추 이랑의 죽음을 더 바라는 편이었다.이런 장모는 그에게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줄 수 없었다.“그 사람의 죄는 경조부에서 판결하였고 폐하의 귀에도 들어갔지.”설충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살릴 방법이 없어.”예전에는 아무나 희생양을 보내 추 이랑을 대신해 죽게 하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관직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그 역시도 정적이 있었다.출세길에 비하면 추 이랑의 존재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그러나 저택에 여인이라고는 강 부인 한 사람만 있으니 그는 적절한 시기에 첩실을 새로 들이기로 작심했다.최진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이 얘기를 계속하지 않았다.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화만 불러올 수 있는 존재이니 죽는 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아씨.”청연이 설은영에게 예를 행했다.“부인께선 대청에서 같이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하십니다.”오늘은 설은비가 친정으로 문안 오는 날이니 가족끼리 같이 식사를 해야 했다.설은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갈게요.”대청.최진겸은 밖에서 사뿐사뿐 걸어오는 노란 치마의 소녀를 보자 저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되었다.그는 왜 이런 감정이
다음 날 아침.날이 밝기 전부터 설가의 시종들은 바쁘게 돌아쳤다.한편, 최씨 저택에서는 신혼부부가 막 침상에서 일어났다.“부군.”설은비는 최진겸을 바라보며 말했다.“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요. 요 며칠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요?”준수한 얼굴은 눈에 띄게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최진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최근 공무가 바빠서 그래. 오늘 너와 함께 친정에 갔다가 일찍 쉬면 괜찮을 거야.”그는 최근 악몽을 꾸고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그 꿈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단지에 담긴 인간은 한 여인이었다.혀가 잘리고 눈이 뽑혔으며 귀와 사지가 모두 절단된 여인이었다.꿈을 통해 그 여인이 그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최진겸을 자신을 성인군자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정도로 악마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니 꿈속의 인간돼지는 대체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노부인의 처소.“가문이 변변치 않아서 좋은 게 별로 없지만 너희를 위해 몇 개 준비했단다. 가지고 가렴.”겸손을 떠는 말이 아니라 최 노부인은 정말 가진 게 별로 없었다.애초에 최진겸의 아버지와 혼인할 때 친정에서 혼수도 별로 보태주지 못했다.최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은 모두 친정에 남았다.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예물은 사위 될 사람이 장인과 장모에게 주는 것이었다.여자측 부모는 그 예물에 대해 완전한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체면을 따지는 사람들은 딸의 혼수에 딸려 보내지만, 서민 출신인 노부인의 친정은 최씨 가문에 비해 재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으니, 예물은 전혀 딸려보내지 않았다.최진겸의 아버지는 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설은비는 기분이 상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인사를 했다.“감사해요, 어머니.”그녀는 모든 게 핑계라고 생각했다.아무리 몰락한 가문이라고 해도 한때는 귀족이었던 집안이었다.아무리 가난해도 일반 가문과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 분명 남은 재산이 좀 있을 것이다.그녀는
“돌아왔군.”서혁이 웃으며 말했다.고개를 돌린 설민준은 여동생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한참 기다렸지 않니. 궁에서 식사까지 하고 올 줄은 몰랐는데.”설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예, 마마님들이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참 의미 깊은 시간이었습니다.”자리에서 일어선 설민준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세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요. 저희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서이경이 발을 동동 구르자, 서혁이 다가와 여동생의 입을 틀어막았다.“그럼 살펴 가게.”두 사람은 서혁의 시종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서이경은 서혁의 손을 내치며 부루퉁해서 말했다.“오라버니, 미워요. 언니와 작별 인사도 못하게 하고.”서혁은 자신이 동생을 오해한 것을 알고 다급히 사과했다.“그래, 그건 오라비가 생각이 짧았구나. 내일 설 소저의 동생이 친정에 문안 오는 날인데 일찍 돌아가야지. 아쉬우면 다음에 또 초대하면 되지 않니.”한편.챙그랑!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설은비가 한창 씩씩거리고 있었다.전생에 그녀도 혼례 전에 황후의 부름을 받았지만 남아서 점심 식사를 하지는 않았다.사람이 바뀌었다고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작은 마님.”금주가 다가와 새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설은비는 치미는 분노를 삭히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궁중에서 식사하고 온 게 뭐 대수라고.’그녀는 어차피 설은영은 앞으로 고독감을 이겨내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귀하신 분들의 은총을 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연준이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데 궁에서 억지로 그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지금 최진겸과 매우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으니 조만간 회임하게 될 것이다.십여 년을 독수공방한 설은영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친정에 가져갈 물건들은 다 준비했어?”금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다 준비되었습니다. 나으리께는….”“그건 신경 쓸 거 없어.”설은비가 말했다.“부군께선 치밀하신 분이라 이미 다 준비했
태자와 작별한 그녀는 마차를 타고 민왕부로 향했다.민왕부는 황궁과 가까운 곳에 화려한 저택을 두고 있었다.황제의 동복동생인 민왕은 민왕비와 아주 좋은 금슬을 자랑했다. 그러나 전생에 민왕비가 사망한 후, 그는 곧바로 왕비를 새로 들이고 새 왕비의 오랜 설득 끝에 결국 오황자의 진영에 서게 되었다.듣기로 예전에 민왕은 영씨 가문의 둘째 아씨를 연모하여 끈질기게 추종했다고 한다.그러나 영 소저는 이미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민왕의 구애를 무시하고 그 사람과 혼례를 올리고 상주로 떠났다고 했다.혼례를 올린 후에 그녀는 딱 한 번 경성으로 돌아온 적 있었는데 영국공 태부인이 돌아가셔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거였다.지금이야 민왕 부부가 사이가 좋다고 하지만, 예전에 갖지 못한 사람에 대한 집념이 아직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런지 민왕은 황후나 태자와 그리 가깝지 않았다.“은영 언니.”앳된 목소리가 사색에 잠긴 설은영을 불렀다.설은영은 가림막을 열고 대문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마차를 내려가자 서이경이 달려와서 그녀의 품에 안겼다.“언니, 우리 집에 놀러온 거예요?”설은영은 가볍게 소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오라버니와 함께 집에 돌아가려고 왔단다. 안에 계시니?”“그럼요.”서이경은 그녀를 끌고 저택으로 들어갔다.“언니, 바로 가지 말고 좀 더 놀다 가요. 제가 왕부 곳곳을 구경시켜 줄게요. 내일 어머니가 저택에서 연회를 여는데 언니는 올 수 없잖아요. 오늘 왔던 김에 놀다가 가요.”설은영은 일단 민왕비에게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왕비의 처소.설은영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 민왕비는 반갑게 맞아주었다.“궁에 다녀왔다고 들었네.”왕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예, 마마.”왕비는 한숨을 내쉬었다.“비록 진국공부가 지금은 좀 힘들어지긴 했어도 자네만 본분을 잘 지킨다면 경성에서 자네가 원하는 건 다 이룰 수 있을 거네.”설은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가르침 감사합니다, 마마.”
어쩌면 거기에는 강영안의 묵인도 작용했을지 모른다.며칠 전, 갑자기 입궁한 강영안은 황후에게 진국공과의 혼사를 물릴 수 없느냐고 여쭌 적이 있었다.아마 그때는 진심으로 후회한 것 같았다.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대역무도한 말을 꺼냈을 리 없었다.교지가 내려졌는데 물릴 수는 없었다.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소녀의 뒤로 궁녀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황후마마, 어마마마….”소녀는 들어오자마자 서종의 품에 폭 안겼다.“태자 오라버니.”서종은 부드럽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가화도 왔구나.”그녀가 앞으로 미모로 경성을 뒤흔든 육공주 가화였다.서형욱은 즉위한 후 삼황자 서기준을 남부로 유배 보내고 절대 영지를 떠날 수 없도록 명을 내렸다.육공주는 압박에 못 이겨 화친을 떠나게 되었다.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설은영도 인간돼지가 된 이후라 알 수 없었다.서형욱과 최진겸의 됨됨이를 생각하면 다른 황자와 공주들은 목숨을 보전했더라도 결말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가화공주는 서종의 옆에서 설은영을 바라보았다.“공주 전하를 뵈옵니다.”낯선 여인이 자신에게 예를 행하자, 공주는 한달음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언니가 연준 오라버니와 혼인한다는 그 설 소저인가요?”설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소녀입니다.”가화공주는 한참이나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마음에 들어요.”영황후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너는 사람 얼굴부터 보는 성격이 어디 가지를 않는구나?”완귀비도 못 말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곧 네 사촌 형님이 되실 분이다. 앞으로는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돼.”가화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하지만 이 언니는 정말 예쁜걸요. 저는 이 언니가 좋아요.”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말했다.“물론 당 대인이 가장 좋지만요.”완귀비는 서둘러 궁녀를 시켜 공주를 내보냈다.“육공주를 모시고 돌아가거라.”그녀는 잔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