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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مؤلف: 철이

제1화

مؤلف: 철이
그는 명황색 곤룡포를 걸친 채 전각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곧은 풍채와 냉담한 눈빛은 설송 한 그루를 떠올리게 했다.

고귀하면서도 쉽사리 다가설 수 없는 기운이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희진아.”

이정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짐이 내린 결정에 달리 할 말은 없느냐?”

조희진은 황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

“신첩이 어찌 감히 그러겠사옵니까.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중궁으로 세우신 것은 더없이 지당한 처사이옵니다. 신첩은... 아무런 의견도 없사옵니다.”

이정은 담담하기만 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조희진이 지난 며칠간 잠자코 있었던 것이 자신을 직접 찾아오게 하려는 수작인 줄 알았다.

자신이 찾아와 연유를 물으면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한바탕 소란을 피울 것이라 여겼다.

그러면 적당히 하사품을 내려 달래고, 엄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짐은 너를 맞아들이던 날부터 분명히 말하였다. 짐의 마음에는 오직 영지뿐이라고. 네게 부귀영화는 안겨 줄 수 있으나, 마음까지 내어 줄 수는 없다. 황후의 자리 또한 짐이 진심으로 모하는 여인에게만 줄 것이다.”

그렇게 달랠 것은 달래고 엄히 타이를 것은 타이르면, 이 일도 무사히 넘어갈 터였다.

하지만 조희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물론 저런 태도는 나쁠 것이 없었다. 소란을 피우지도 않을 테고, 자신이 예전에 했던 말을 마음에 새겨 허황된 기대를 품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담담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정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폐하, 분부하신 물건을 가져왔사옵니다.”

때마침 태감총관 이덕춘이 궁인들을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뒤따르던 궁인들은 저마다 비단함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차례로 늘어섰다.

함이 열리자,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은 눈처럼 새하얀 최상급 흰여우 가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며칠 전 이정이 직접 사냥해 얻은 것으로, 조희진을 황후로 세워 주지 못한 미안함에 그녀의 서운한 마음이라도 달래고자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그녀를 마주하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됐다, 그냥 물건이나 주고 돌아가자.’

이정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조희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참으로 귀한 가죽이옵니다.”

그녀는 흰여우 가죽을 바라보며 감탄했으나, 놀라거나 기뻐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폐하께서 얼마 전 사냥해 오신 것이지요? 신첩에게 가져오신 것은 황후마마의 갖옷을 지으라는 뜻이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정의 가슴속에 맺힌 불쾌감이 한층 짙어졌다.

“어찌... 짐이 네게 내리는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느냐?”

조희진은 흠칫 놀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첩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품겠사옵니까. 폐하께서는 일찍이 마음에 둔 여인은 오직 황후마마뿐이라 말씀하셨사옵니다. 얼마 전 그토록 어렵사리 얻으신 이 귀한 흰여우 또한 황후마마를 위해 마련하신 것이었을 터인데, 신첩이... 어찌 감히 분에 넘치는 기대를 품겠사옵니까.”

이때 이덕춘이 다급히 나서서 설명하려 했다.

“마마, 실은 이 가죽은 폐하께서 마마를 위해 특별히...”

“이덕춘.”

이정이 그의 말을 끊었다.

금세 싸늘해진 목소리에 이덕춘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정은 무릎을 꿇고 있는 조희진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른 이름 모를 울화는 점점 더 거세졌다.

“허면...”

그의 목소리는 서리처럼 차가웠다.

“하루 안에 완성하라. 요즘 날씨가 부쩍 차가워졌으니, 황후는 몸이 약해 추위를 타서는 아니 된다.”

“신첩, 명 받들겠사옵니다.”

조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대답했다.

원망도 서운함도 드러내지 않는 그 고분고분한 태도에 이정은 도리어 화가 더욱 치밀었다.

그는 거칠게 소매를 떨치며 돌아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요화궁을 나섰다.

조희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정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의아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시녀인 청하를 불렀다.

“가서 바늘과 실을 가져오너라.”

“예, 마마.”

청하가 바늘과 실을 가져오자, 조희진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갖옷을 짓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스며든 햇살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끝 위에 내려앉았다. 바늘은 쉴 새 없이 오갔고, 손놀림은 더없이 능숙했다.

“마마.”

청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녕... 서운하지 않으십니까?”

조희진의 손길이 문득 멎었다. 잠시 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주 희미한 웃음이었으나, 얼어붙은 설원 위로 처음 봄볕이 내려앉은 듯 눈부셔 보는 이의 넋을 앗아 갈 만큼 아름다웠다.

“서운다니?”

그녀가 나직이 되물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서운해해야 하느냐?”

닷새만 지나면 그녀가 복용한 가사약(假死藥)이 효력을 발휘할 터였다.

그리되면 이 궁궐은 물론 이정과도 영영 인연을 끊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강남으로 가, 자신이 진정으로 연모하는 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희진과 조영지는 모두 승상의 여식이었다. 그러나 조희진은 서녀인 데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강남에 사는 할머니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그녀는 신효원을 만났다.

신효원은 강남 순무(江南巡撫) 댁의 도련님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반듯한 데다 학문과 재주까지 뛰어났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다.

나란히 글을 읽고, 꽃이 피면 함께 구경했으며, 강남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처마 밑에 앉아 자욱한 물안개를 바라보았다.

어느 날, 소년이었던 신효원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굳게 맹세했다.

“희진아, 네가 계례를 올리면 내가 너를 처로 맞이하마.”

조희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나 그녀가 계례를 치르던 날, 신씨 가문에서 혼담을 넣으려던 참에 아버지 조영재가 돌연 사람을 보내 그녀를 경성으로 불러들였다.

삼황자 이정에게 시집보내기 위해서였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은 아홉 황자가 황위를 차지하고자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벌이던 때였다. 황제는 각 황자에게 조정 중신의 여식을 한 명씩 정비로 맞아들이게 했고, 이정에게는 승상부의 여식이 혼처로 정해졌다.

하지만 이정이 마음에 품은 여인은 승상부의 적녀이자 조희진의 언니인 조영지였다.

이정은 지금의 형세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조영지를 정비로 맞아들이는 것은 곧 그녀를 사지로 밀어 넣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조영지에게 어려서부터 강남에서 자란 서녀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정은, 그 동생인 조희진을 정비로 맞겠다고 나섰다.

조희진은 혼인을 거부했다.

그러자 조영재는 신효원의 목숨을 빌미로 그녀를 협박했다.

“네가 시집가기를 거부한다면, 신씨 가문을 멸문시키겠다.”

결국 조영재는 그녀에게 한 가지 약조를 내놓았다.

“삼황자가 황위에 오르면 네게 가사약을 주마. 그때 세상에는 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질 테니, 궁궐을 벗어나 신효원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희진은 결국 혼인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이정에게 시집갔다.

혼인한 뒤의 나날은 예상대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자객의 습격과 독살, 모함이 끊이지 않았고, 그녀는 수없이 다치고 여러 차례 독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조희진은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안 살림을 빈틈없이 돌보며 안주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이정이 다쳐 귀한 약재가 필요하면 목숨을 걸고 구해 왔고, 이정이 정적의 계략에 빠졌을 때는 대신 칼을 막아 주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황자부 안에는 삼황자비가 삼황자를 지극히 연모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희진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설령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이정을 황위에 올려야만 했다. 그래야만 모든 의무를 다한 뒤, 신효원에게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

이정은 마침내 황제가 되었고, 조영지는 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 또한 이틀 전, 가사약을 복용했다.

약이 효험을 드러내려면 칠 일이 걸린다.

이제 남은 날은 닷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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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제26화

    전각 밖에서 기척을 들은 이덕춘이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폐하? 혹 사람을 보내어...”“보내주거라.”안에서 흘러나온 이정의 목소리는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 그 안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만이 품을 수 있는 깊은 체념이 서려 있었다. “아무도 막지 마라. 은밀이 사람을 붙여 그녀 일가가 강남을 떠나, 가고자 하는 곳까지 무사히 닿을 수 있도록... 호송하라.”이덕춘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목이 메인 채 대답했다.“...예, 폐하.”그 뒤로 전각 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이덕춘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 불안은 점점 짙어져만 갔다.결국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문틈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순간,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용상 위에 조용히 누워 있는 이정의 얼굴은 기이할 만큼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고, 입가에는 검붉은 피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눈은 굳게 감긴 채였고, 숨결은 너무도 희미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폐하!!”이덕춘의 절박한 외침이 행궁 안을 뒤흔들었다. 이내 혼비백산하여 안으로 뛰어들었다.“태의를 불러라! 어서 태의를 부르거라!”순식간에 행궁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남순 길에 오른 황제가 행궁에서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천자의 변고에 조정 안팎은 발칵 뒤집혔고, 그 소식은 막 재회한 뒤 밤을 틈타 청수진을 떠나려던 심씨 일가에게도 전해졌다.그때 조희진은 연이를 품에 안은 채 신효원과 함께 빌린 마차에 마지막 짐을 옮겨 싣고 있었다.마부는 신효원과 알고 지내던 고향 사람이었다. 그는 짐을 묶어 주면서도 연신 탄식을 흘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혹 들었는가? 우리 마을 행궁에 머무르시던 황제 폐하께서... 큰 변을 당하셨다네! 글쎄... 독을 드셨다지 뭔가! 세상에, 이게 어디 보통 일이겠소. 하늘이 무너질 일이지. 조정도 한동

  • 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제25화

    이레째 되는 날 저녁.이정의 고열은 겨우 가라앉았다.의식은 되찾았으나, 며칠간 앓은 탓에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그때 조희진이 흰죽 한 그릇을 들고 안채로 들어왔다.그러나 그는 죽그릇을 받지 않았다. 그저 그녀만 바라볼 뿐이었다.무겁게 가라앉은 눈빛 속에는, 끝내 버리지 못한 마지막 한 줄기 기대가 남아 있었다.“약조했던 시간이 되었습니다.”조희진은 죽그릇을 그의 곁에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그 말과 함께 이정의 눈빛 속 마지막 빛이 서서히 꺼져 가더니, 그 안에는 깊은 적막만이 내려앉았다.“여전히 떠나겠다는 것이냐.”이정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예.”조희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짐이 허락하지 않는다면?”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조희진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소매 속에서 과거 자신의 목에 겨누었던 비수를 꺼내 죽그릇 곁에 내려놓았다. “허면 폐하께서 얻게 되실 것은... 소인의 시신뿐입니다.”이정은 비수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갈라진 목소리로 흘러나온 웃음소리는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래...”그는 웃음을 흘리며 베개 아래에서 작은 자기병 하나를 꺼내 비수 옆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신효원은 이미 놓아주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집에 도착해 딸과 함께 있을 것이다.”조희진의 속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고, 꼭 움켜쥔 손끝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 병 안에는 서역의 기이한 독이다.”이정은 그 도자기 병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차갑게 빛나는 병과 달리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해독제는 없다. 복용하면 여섯 시진 뒤 반드시 죽는다. 짐은 이미 숙부님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고, 조서는 어서방에 두었다. 네가 이 행궁을 나서는 순간...”이정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동자

  • 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제24화

    순간, 이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그가 원했던 것은 이런 대답이 아니었다.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절망 속에서 건네는 순순한 승낙이 아니었다.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린 지금, 그는 대체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짐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이정은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한 번만 더 그녀를 마주하면 마음이 약해져, 끝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그렇게 이레 동안, 이정은 평생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다정함과 인내를 모두 조희진에게 쏟았다.그는 조희진을 행궁 안에서도 가장 정갈하고 편안한 별원에 머물게 했다. 방 안의 가구와 장식은 물론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예전 요화궁에서 그녀가 좋아하던 그대로 갖추었다.강남에서 가장 정교하게 만든 다과를 들이고, 가장 새로 지은 옷과 장신구를 마련해 그녀의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가 좋아했던 것, 익숙했던 것이라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그러나 조희진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궁으로 돌아온 뒤로부터 그는 매일 그녀와 함께 식사를 했다.그녀가 젓가락조차 거의 들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마치 모든 기운을 잃은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 있어도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또한 그녀가 끝내 한 번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음에도, 그는 예전에 그녀가 즐겨 읽던 책을 찾아 직접 읽어주었다.그렇게 해도 그녀의 시선은 끝내 자신에게 닿지 않았다.결국 가랑비가 끊이지 않던 어느 날 밤, 이정은 술기운을 빌려 조희진의 방으로 들어갔다.그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닿자, 그의 목소리는 흐려졌다.평생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약한 모습을 내보인 채, 그는 낮게 속삭였다.“희진아... 가지 마라... 짐을 떠나지 마라...”순간 조희진의 온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마치 혼을 잃은 인형처럼 그의 품 안

  • 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제23화

    행궁 안은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지만, 조희진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조희진은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어섰고, 어느새 물가에 자리한 헌각 앞에 다다랐다.이정은 창가에 서서 두 손을 뒤로 모은 채, 바깥 연못에 남은 시든 연꽃을 바라보고 있었다.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드디어 짐을 만나러 왔구나.”그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희진은 그에게서 약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선 후, 치맛자락을 들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소인, 폐하께 간청드리옵니다. 신효원을 풀어주시옵소서.”이정은 바닥에 엎드린 그녀를 바라보았다.지나치게 공손하고 낮아진 그 모습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찔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가시에 찔린 듯, 눈가가 시려 왔다.이정이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손을 내밀었다.그러자 조희진은 뜨거운 것에라도 데인 듯 순간 몸을 움츠리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럼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허공을 향해 뻗었던 이정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거센 폭풍이 일렁이기 시작했다.“짐이 놓아주지 않는다면... 어찌할 셈이냐?”이정은 그녀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조희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오직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한 결심만이 있었다.“허면 소인은...”그녀는 또렷하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와 함께 죽겠습니다.”이정은 순간 굳어 버렸다.그는 눈앞의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얼굴은 그가 지난 오 년 동안 밤낮으로 그리워했고, 삼 년 동안 찾아 헤맸으며, 또 이 년 동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지켜보았던 얼굴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다른 사내를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차갑고 뼈를 에는 듯한

  • 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제22화

    이정은 눈을 감았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눈동자 깊은 곳에서 거세게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새 잦아들어 있었다.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적막과, 절망 끝에 남겨진 공허함뿐이었다.이정은 천천히 손을 들어 주변의 병사들에게 물러나라는 뜻을 전했다.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망설였지만, 누구도 감히 그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이내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밖으로 물러났다.어지럽게 망가진 마당 안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내려앉았다.“좋다.”이정의 목소리는 몹시 쉬어 있었다. 거칠게 갈라진 음성에는 오랜 시간 억눌러 온 고통이 배어 있었다. “짐은 더 이상 너를 강요하지 않겠다.”조희진은 여전히 비수를 쥔 손을 내리지 않은 채, 경계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정은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자신을 향한 경계와 낯선 거리감이 그녀의 눈빛에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의 아픔은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져 있었다. “허나 짐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맹세처럼 들리기도 했고, 저주처럼 들리기도 했다.“조희진, 너는 짐의 여인이다. 이 생이 다하는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짐이 시간을 주마. 스스로 잘 생각해 보거라.”“언젠가는 짐이 반드시 너를 데리러 오겠다.”말을 마친 이정은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마당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세 사람을 뒤로한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검은 옷을 입은 이정의 모습이 골목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조희진은 팽팽히 조여 있던 긴장을 풀었다.손에 쥐고 있던 비수가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희진아!”신효원은 곧장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신효원은 곧장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목소리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떨림이 남아 있었다. “괜찮소? 혹 다친 곳은 없소? 어디 보시오!”그

  • 달빛 아래 가려진 운명   제21화

    단 한 번도 연모한 적이 없다.너무도 담담하게 흘러나온 말이었다.하지만 그 말은 이정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족쇄가 되어, 그를 그 자리에 꼼짝없이 붙잡아 두었다.이정은 눈앞의 조희진을 바라보았다.달빛 아래 그녀의 얼굴은 지나치리만큼 평온했다.눈동자에는 더 이상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었다. 자신을 향한 감정은 이미 모두 거둔 듯, 차가운 냉정함과 단호함만이 남아 있었다.순간, 이정의 온몸을 흐르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하지만 이내 다시 뜨겁게 끓어올랐다.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했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그가 심하게 동요한 채 간신히 몸을 가누고 있던 순간이었다.안쪽 방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신효원이 등불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겉옷만 걸친 채 나온 것을 보니, 마당의 소란에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그는 마당 한가운데서 마주 선 두 사람을 보자 미간을 좁혔다.이내 조희진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경계 어린 눈빛으로 이정을 바라보았다.“희진아, 밥이 깊었거늘, 어찌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느냐? 헌데 이분은...”신효원의 시선이 이정의 얼굴에 머물렀다.곧 그가 낮에 점포에서 마주쳤던 사람임을 알아본 순간, 신효원의 눈빛에는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조희진은 자연스럽게 그의 품 안으로 기대었다.그 모습에는 신효원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의지가 담겨 있었다.그녀는 오히려 신효원을 향해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었다.“별일 아닙니다. 이분은… 길을 잃으셔서 길을 물으러 오신 것뿐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연이가 또 이불을 걷어찼을지도 모르겠습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서 어린아이의 잠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 아버지... 안아 주세요...”신효원은 곧바로 말했다.“거 봐, 연이가 깨어났잖아. 어서 들어갑시다.”이윽고 그는 이정을 향해 예를 갖추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말투는 공손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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