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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당신은 나를 기억한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1 08:35:20

『찾았다.』

낮고 기이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수정함 안에서 피어난 새하얀 꽃이 크게 흔들렸다.

사락.

은빛 꽃잎 사이로 금빛이 번졌다.

세이아와 카일은 동시에 굳었다.

방금 들린 목소리는.

에드윈의 것도.

카일의 것도.

물론 세이아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분명.

바로 곁에서 속삭인 것처럼 선명했다.

『찾았다.』

다시.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세이아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버지.”

“나도 들었다.”

에드윈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세이아의 손은 아직 카일의 손 안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던 은빛 날개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쿵.

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

세이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맞잡힌 손.

커다란 카일의 손 안에 자신의 손이 완전히 들어가 있었다.

이제는 놓아도 될 텐데.

이상하게.

둘 다 먼저 손을 떼지 않았다.

“대공 전하.”

“왜.”

“언제까지 잡고 계실 겁니까?”

카일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갔다.

“네가 먼저 놓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먼저 잡으셨잖아요.”

“네가 가까이 대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랬죠.”

“결국 네 손이다.”

세이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으셨습니까?”

“당신 앞에서는 그런 모양이군.”

세이아가 잠시 말을 잃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온 대답이었다.

카일도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에드윈이 낮게 헛기침했다.

“내가.”

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여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면 좋겠군.”

세이아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뺐다.

“잊은 적 없어요.”

“그래 보이지 않았다.”

카일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세이아의 손끝에는 아직도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거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순간부터 먼저 경계했을 것이다.

그런데 카일에게는.

놀라기는 해도.

싫다는 생각이 늦게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싫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 문제였다.

세이아는 슬쩍 손끝을 문질렀다.

그 순간.

에드윈이 피어난 꽃 가까이에 손을 가져갔다.

“건드리지 마세요.”

세이아가 즉시 말했다.

에드윈의 손이 멈췄다.

“왜?”

“아직 무슨 힘인지 몰라요.”

“그래서 확인하려는 거다.”

“제가 할게요.”

“세이아.”

“제 꿈에서 나온 꽃이잖아요.”

“내 집에서 자란 딸이기도 하지.”

“그건 지금 관계없는데.”

“나한테는 있다.”

세이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카일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손이 꽃 가까이 다가갔다.

“전하?”

꽃이 반응했다.

사락.

은빛 꽃잎들이 카일의 손을 향해 기울었다.

마치.

그를 알아본 것처럼.

“…….”

카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세이아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꿈에서도 이랬습니까?”

“아니.”

“전하를 따라 움직이는 꽃은 처음 봐요?”

“그래.”

세이아도 손을 내밀었다.

순간.

꽃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두 사람 사이를 향해.

사락.

한 송이뿐이던 꽃 주변에서 작은 빛들이 피어올랐다.

하나.

둘.

수십 개.

희미한 흰 꽃의 형상.

그리고.

그 뒤로.

한 장면이 나타났다.

끝없이 펼쳐진 꽃밭.

무너진 신전.

검게 갈라진 하늘.

“어젯밤.”

세이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카일의 얼굴도 굳었다.

“내 꿈이다.”

“확실합니까?”

“열다섯 해를 봤다.”

그가 낮게 대답했다.

“틀릴 리 없어.”

빛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은발의 남자.

그리고.

금빛 머리카락의 여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신전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검을 들고 있었고.

여자는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

『이번에도 네가 검을 들어야 해.』

세이아의 몸이 굳었다.

카일의 눈빛도 흔들렸다.

남자가 대답했다.

『싫어.』

낮은 목소리.

카일과 똑같았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찾겠어.』

여자가 웃었다.

『그러다 네가 죽어.』

『그래도.’

남자가 여자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너를 죽이는 것보단 낫다.』

세이아의 숨이 멎었다.

순간.

장면이 사라졌다.

파앗!

흰 꽃이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이아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에드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였어요.”

카일의 시선이 즉시 세이아에게 향했다.

“얼굴은 안 보였어.”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세이아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알겠어요.”

설명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도 아니었다.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었다.

확신했다.

“대공 전하는요?”

세이아가 물었다.

“저 남자가 전하라고 생각하십니까?”

카일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래.”

짧게 말했다.

세이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죠?”

“나도.”

그의 시선이 세이아와 마주쳤다.

“알겠으니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꿈속에서만 존재해야 할 기억.

그런데.

둘 다.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에드윈이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얼굴이었다.

“우선 정리하자.”

세이아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첫째.”

에드윈이 말했다.

“대공 전하는 열다섯 해 동안 같은 장소를 꿈꿨다.”

“예.”

“둘째. 세이아가 어젯밤 처음으로 그 꿈에 들어갔고.”

“네.”

“그곳에서 가져온 꽃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세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에드윈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등을 향했다.

“접촉하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절반의 문양이 나타나고.”

“합치면 날개가 됩니다.”

“그래.”

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 날개는.”

잠시.

“고대 신계 기록에서 ‘첫 번째 날개’라 불렸던 존재의 증표와 같다.”

카일이 물었다.

“그 첫 번째 날개는 정확히 무엇입니까?”

“확실하게 남아 있는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향했다.

가장 깊숙한 곳.

손바닥만 한 검은 책을 꺼냈다.

낡아 보이는 표지에는.

날개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

“여신 헤르미아.”

에드윈이 책을 펼쳤다.

“아주 오래된 신화에서는 꿈과 기억의 경계를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신입니다.”

세이아가 눈을 좁혔다.

“꿈을요?”

“정확히는 인간의 꿈이 아니라.”

에드윈이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현실과 신계 사이의 경계.”

그곳에는 희미한 그림이 있었다.

두 개의 날개.

한쪽에는 검.

다른 쪽에는 책처럼 생긴 물건.

“헤르미아에게는 두 날개가 있었다고 하지.”

에드윈이 말했다.

“첫 번째 날개는 검이자 수호자.”

카일의 시선이 그림의 검으로 향했다.

“두 번째 날개는?”

“신계를 관리하고 기록하는 존재.”

“그런데.”

세이아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왜 첫 번째 날개의 문양이 저와 대공 전하에게 나뉘어 나타나죠?”

“모른다.”

“둘 중 하나가 첫 번째 날개라는 뜻은 아닙니까?”

카일이 물었다.

“그렇다면 문양이 갈라져 나타날 이유가 없습니다.”

에드윈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나의 존재를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것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공유.”

세이아가 중얼거렸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었다.

카일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그 말.”

그가 말했다.

“기분이 좋지는 않군.”

세이아가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저랑 무언가를 공유하는 게 그렇게 싫으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럼?”

카일의 푸른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누군가 우리 사이에.”

잠시.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정해 놨다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세이아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 부분은 동의합니다.”

“처음으로 의견이 맞는군.”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요.”

“또 뭐가 있었지?”

“전하가 생각해 보세요.”

“귀찮군.”

“벌써 포기하십니까?”

“당신이 말해 주면 빠르지.”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안 알려드릴 겁니다.”

“왜?”

“궁금해하시라고요.”

카일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성격이 나쁘군.”

“소문이랑 다르죠?”

그 말에.

카일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많이.”

세이아는 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멈췄다.

웃으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꿈속의 남자와 조금 비슷해졌다.

자신을 다정하게 보던.

그 얼굴.

세이아가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

계속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에드윈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끊었다.

“대공 전하께서 가져온 문제도 있다.”

탁자 위.

마흔세 명의 병사 기록.

세이아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병사들의 꿈부터 확인해야 할까요?”

카일은 잠시 생각했다.

“가능하면.”

“하지만.”

세이아가 문서를 내려다봤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지?”

“제가 북부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마도열차로 이틀.”

“그 사이 병사들이 더 쇠약해질 수도 있어요.”

“그렇지.”

세이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카일을 보았다.

“우선 전하의 꿈부터 확인하죠.”

에드윈의 표정이 굳었다.

“세이아.”

“아버지.”

“네가 어젯밤 들어갔다 나온 곳이다.”

“그래서요.”

“꿈의 물건이 현실로 나왔고.”

“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까지 들렸다.”

“전부 알아요.”

“그런데 또 들어가겠다고?”

세이아가 웃었다.

“안 들어가면 어떻게 알아요?”

에드윈이 이마를 짚었다.

“정말 누구를 닮아서.”

“아버지요.”

“나는 아니다.”

“어머니한테 물어볼까요?”

“…그건 됐다.”

카일의 시선이 두 사람을 오갔다.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부녀의 대화.

그런데.

조금 부러워 보이는 시선이었다.

세이아가 알아차리고 그를 바라봤지만.

카일은 바로 표정을 감췄다.

“내 꿈에 들어가면.”

그가 물었다.

“나도 같이 갈 수 있나?”

“가능합니다.”

“확실한가?”

“원래 꿈의 주인은 그 안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의 나는 꿈을 통제하지 못한다.”

“제가 합니다.”

“자신 있나?”

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구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카일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아주 낮게 웃었다.

이번에는.

세이아도 확실히 들었다.

“왜 웃으세요?”

“아니.”

“방금 웃으셨잖아요.”

“그냥.”

카일이 말했다.

“당신이라면 정말 할 것 같아서.”

세이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상했다.

저 말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는 신뢰처럼 들리지 않았다.

카일도 자신이 그렇게 말한 사실을 깨달은 듯 잠시 굳었다.

“…왜 그렇게 봐.”

“전하께서 절 믿는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그랬나.”

“네.”

카일이 한참 세이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상하군.”

“무엇이요?”

“나도.”

푸른 눈이 조금 깊어졌다.

“그런 것 같다.”

세이아의 심장이.

한 번.

조금 크게 뛰었다.

그날 밤.

세이아의 침실.

두꺼운 암막 커튼이 창문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에드윈이 직접 그린 보호 마법진이 겹겹이 새겨졌다.

향초 네 개.

안정석 여섯 개.

꿈과 현실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한 자수정 원석까지.

세이아는 방 안을 둘러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왜.”

“이 정도면 제가 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비슷하다.”

“너무한데.”

“누가 위험한 꿈에 두 번이나 들어간다고 했지?”

“…저요.”

“그러니까 조용히 있어.”

에드윈은 마지막 마법진을 확인한 뒤 카일을 바라봤다.

“대공 전하.”

“말씀하십시오.”

“꿈 안에서는 세이아의 지시를 따르십시오.”

카일의 눈썹이 움직였다.

세이아가 피식 웃었다.

“들으셨죠?”

“들었다.”

“불만 있습니까?”

“조금.”

“전하.”

“그래도 따르지.”

세이아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왜요?”

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의 시선이 세이아에게 닿았다.

“당신이 더 많이 아니까.”

짧은 대답.

세이아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왜.

평범한 말인데.

기분이 묘하지?

에드윈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내가 나간 뒤.”

잠시.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뭘 하든 꿈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일만 해라.”

세이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버지.”

“왜.”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다.”

카일도 아주 조금 굳었다.

에드윈은 아무렇지도 않게 문으로 향했다.

“세이아.”

“네.”

“무리하지 마.”

이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세이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이 닫혔다.

찰칵.

방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

“….”

“….”

세이아가 먼저 카일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서 계세요?”

“그럼?”

“누우셔야죠.”

카일의 시선이 침대에 향했다.

세이아가 즉시 말했다.

“거긴 제 침대입니다.”

“알고 있다.”

“표정이 아쉬워 보이는데요?”

“착각이다.”

“오늘 착각을 많이 하게 하시네요.”

카일은 말없이 소파로 향했다.

커다란 몸이 긴 소파에 누웠다.

그래도 다리가 조금 길었다.

세이아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불편해 보이는데.”

“괜찮다.”

“침대에 눕고 싶습니까?”

카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세이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혼자요.”

“…알고 있다.”

“왜 대답이 늦으세요?”

“당신.”

카일이 낮게 말했다.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하나?”

“조금.”

“보통은?”

“재미있는 사람만.”

“내가 재미있나?”

세이아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카일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나도.”

“뭐가요?”

“당신이.”

그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생각보다 재미있군.”

세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정말 금방 배우시네요.”

“스승이 좋다며.”

“수업료는 비싼데.”

“얼마지?”

“나중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카일이 눈을 감았다.

세이아는 소파 옆에 앉았다.

“잠드세요.”

“명령인가?”

“네.”

“벌써 시작인가.”

“꿈에서는 더 심할 겁니다.”

“기대되지 않는군.”

“저는 조금 기대되는데.”

카일이 다시 눈을 떴다.

세이아가 웃었다.

“전하가 제 말을 얼마나 잘 듣나 보려고요.”

“…눈 감겠다.”

“도망가시네요.”

“잠들라며.”

“그러네요.”

세이아는 작게 웃고.

귀걸이에 손을 올렸다.

달칵.

자수정이 빠졌다.

순간.

후우우웅——!

보랏빛 마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금빛 머리카락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카일이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명백하게 놀란 표정이었다.

세이아가 그걸 보고 웃었다.

“왜요?”

“아니.”

“또 아니래.”

“생각보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아름답군.”

세이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가요?”

“마력.”

“아.”

마력.

세이아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느낀 바로 그 순간.

카일이 덧붙였다.

“당신도.”

“…….”

이번에는.

세이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일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이번에는.”

낮은 목소리.

“당신이 조용해지는군.”

세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왜.”

“잠이나 주무세요.”

“명령을 따르지.”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세이아는 카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웃던 표정이.

천천히 진지해졌다.

가까이서 보니.

카일의 눈 아래에는 옅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열다섯 해.

그중 최근 한 달은 매일.

같은 꿈.

같은 악몽.

‘얼마나 못 잔 거야.’

세이아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카일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그의 몸이 아주 조금 굳었다.

“힘 빼세요.”

“그러고 있다.”

“전혀 아닌데.”

“누군가 내 머리에 손을 대고 있으니까.”

“해칠 생각 없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더 긴장해야 할 것 같은데.”

세이아가 웃었다.

“저 믿으신다면서요.”

카일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래.”

생각보다 빠른 대답.

“믿는다.”

세이아의 손끝이 멈췄다.

“…왜요?”

“모른다.”

“또 그 대답.”

“당신도 아까 그랬잖아.”

세이아는 반박하지 못했다.

카일이 다시 말했다.

“그냥.”

눈을 감은 채.

“당신이 날 해치지 않을 것 같다.”

세이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저도.”

“뭐가?”

“전하가.”

보랏빛 마력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절 해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카일의 미간이.

조금씩 풀렸다.

“좋군.”

“뭐가요?”

“같아서.”

세이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제 자세요.”

부드러운 마력이 카일의 의식을 감쌌다.

호흡이 느려졌다.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곧.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순간.

카일의 손이 갑자기 올라왔다.

세이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전하?”

대답은 없었다.

눈은 감겨 있었다.

그런데.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카일 전하.”

그 순간.

아주 낮은 목소리.

“가지 마.”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평소의 차갑고 단단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약했다.

아주 어린 사람이.

잠결에 붙잡는 것처럼.

“가지 마.”

한 번 더.

세이아의 가슴이 이상하게 욱신거렸다.

“안 갑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같이 들어간다고 했잖아요.”

카일의 손가락에서.

조금 힘이 빠졌다.

세이아가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기다리세요.”

보랏빛 마력이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감쌌다.

“제가 갈게요.”

쿵.

카일의 심장.

쿵.

세이아의 심장.

다시.

같은 박자.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순간.

카일의 팔이 움직였다.

확.

“앗!”

세이아의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균형을 잃은 몸이.

그대로 카일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푹.

단단한 가슴.

뜨거운 체온.

세이아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둘의 얼굴 사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의 거리.

세이아가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자고 있다.

분명.

그런데.

카일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한 번.

그리고.

더 깊게.

세이아의 몸이 완전히 밀착됐다.

“잠깐.”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숨이 얽혔다.

카일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세이아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허리를 감싼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하.”

대답 없음.

“정말 자는 거 맞습니까?”

여전히.

대답 없음.

그런데.

쿵.

가슴 아래.

카일의 심장이.

분명 조금 전보다 빨라졌다.

세이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상한데.”

그 순간.

방 안의 마력이 폭발했다.

파아아앗——!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세이아의 의식이.

카일과 함께.

꿈 아래로 떨어졌다.

사아아아—

꽃향기.

부드러운 바람.

세이아가 눈을 떴다.

끝없는 흰 꽃밭.

무너진 신전.

그리고.

아주 멀리.

푸른 호수.

다시.

그곳이었다.

세이아는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카일?”

대답이 없었다.

“대공 전하?”

그 순간.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부르지 마.”

“…?”

세이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멈췄다.

카일이 서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카일과 달랐다.

검은 제복은 사라져 있었다.

새하얀 셔츠.

은빛 장식.

어깨까지 내려온 긴 은발.

그리고.

등 뒤.

거대한 빛의 날개.

세이아의 숨이 멎었다.

꿈에서 처음 보았던 모습.

아니.

그때보다.

훨씬 선명했다.

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세이아에게 닿았다.

순간.

얼굴 전체가 달라졌다.

현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따뜻한 미소.

“세이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 다정하게.

마치.

수없이 불러 본 사람처럼.

세이아가 천천히 말했다.

“카일?”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한순간에 거리가 사라졌다.

“……!”

카일이 다가왔다.

세이아가 피할 틈도 없이.

커다란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몸이 그의 품에 깊게 끌려갔다.

“잠깐.”

세이아가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손이 닿는 순간.

몸이 굳었다.

익숙했다.

아까 현실에서 안겼을 때보다.

훨씬.

마치.

이 품에 수없이 안겨 본 것처럼.

세이아의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

카일은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드디어.”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왔군.”

세이아의 심장이.

쿵.

“카일.”

“응.”

대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놓으세요.”

“싫어.”

세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요?”

“놓기 싫어.”

현실의 카일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

세이아가 황당한 듯 고개를 들었다.

“당신.”

“왜?”

“진짜 카일 맞습니까?”

카일이 웃었다.

“그 질문.”

한 손이 세이아의 뒷머리를 감쌌다.

“예전에도 했어.”

세이아의 몸이 굳었다.

“예전?”

“그래.”

“언제요?”

카일의 미소가.

조금 슬퍼졌다.

“역시.”

그가 세이아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거친 손끝.

그런데.

이상하게.

피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군.”

세이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설명하세요.”

“무엇을?”

“제가 뭘 기억하지 못합니까?”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이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렸다.

쿵.

세이아의 손바닥 아래.

강한 심장 박동.

쿵.

자신의 심장도.

같이 뛰었다.

카일이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세이아가 그를 올려다봤다.

“뭐죠?”

그의 눈이.

아프게 휘어졌다.

“내가 먼저 기억했군.”

세이아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뜻이에요?”

카일의 손이.

세이아의 손등을 덮었다.

“이번에도.”

잠시.

“내가 먼저 잊게 될 줄 알았는데.”

세이아의 가슴이 싸늘해졌다.

“이번에도?”

그 순간.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번쩍였다.

‘가지 마.’

어린 목소리.

작은 손.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제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울고 있는 푸른 눈.

“…!”

세이아가 비틀거렸다.

카일이 즉시 허리를 붙잡았다.

“세이아.”

“방금.”

숨이 가빠졌다.

“아이를.”

카일의 얼굴이 굳었다.

“뭐?”

“은발의 아이가.”

세이아가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절 붙잡고 있었어요.”

카일의 눈이 흔들렸다.

“뭐라고 했지?”

“가지 말라고.”

그 순간.

카일의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갔다.

“카일?”

“그건.”

그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댕——!

거대한 종소리가 울렸다.

둘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댕——!

두 번째.

꽃밭 전체가 흔들렸다.

카일이 신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다정하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모든 온기가 사라졌다.

“안 돼.”

세이아도 신전을 바라봤다.

“무슨 소리죠?”

댕——!

세 번째 종.

하늘에.

검은 선 하나가 나타났다.

쩌적.

그 선이.

조금씩 벌어졌다.

세이아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카일이 즉시 그녀 앞으로 나섰다.

“뒤에 있어.”

“싫습니다.”

“세이아.”

“현실의 카일도 똑같은 말 하던데요.”

“이번에는 들어.”

“왜요?”

카일이 검게 갈라지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저 종은.”

네 번째.

댕——!

무너진 신전의 가장 높은 곳에서.

검은 빛이 솟구쳤다.

“신의 문이 열릴 때 울린다.”

세이아의 얼굴이 굳었다.

“신의 문?”

“그래.”

“왜 지금.”

카일의 손이 세이아를 뒤로 밀었다.

그러나.

세이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옆에 섰다.

“같이 보기로 했잖아요.”

카일이 그녀를 바라봤다.

“언제?”

“방금 정했습니다.”

“…여전하군.”

세이아의 눈썹이 움직였다.

“뭐가요?”

카일의 입가에.

아주 잠깐.

그리운 미소가 스쳤다.

“아무것도.”

그 순간.

검은 균열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눈.

거대한.

황금빛 눈동자.

하나.

둘.

수십 개.

세이아의 몸이 굳었다.

『찾았다.』

2화 마지막에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

『꿈의 경계를 걷는 자.’

세이아의 보랏빛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를 압니까?”

카일의 얼굴이 굳었다.

“대답하지 마.”

그러나.

이미 늦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세이아를 향했다.

『꿈의 주인이.’

잠시.

온 세상이 숨을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왔다.’

세이아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뭐?”

카일이.

세이아의 손을 잡았다.

강하게.

마치.

정말 다시 잃을까 두려운 사람처럼.

세이아가 그를 바라봤다.

“카일.”

그의 푸른 눈이.

검은 균열을 향해 차갑게 빛났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맞잡힌 손 사이.

은빛 날개가 펼쳐졌다.

“절대로.”

빛이 꽃밭 전체를 뒤덮었다.

“너를 먼저 보내지 않아.”

세이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먼 기억 속.

어린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가지 마.’

그리고.

검은 균열 너머.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웃었다.

『그 약속.’

수십 개의 황금빛 눈이 일제히 휘었다.

『이번에도 지킬 수 있을까.’

콰아아아아앙——!

신전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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